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157
157화. 친구의 해후는 주먹을 부른다
사내의 이름은 장관풍, 여기 바닷가에서 멀고 먼 천산파의 사대제자로, 당대에 신진 고수라 손꼽는 비응십삽검(飛鷹十三劍)의 하나였다. 서장무림에서는 실로 전도유망한 검객인 그가 지금 일생일대의 고난에 처해 있었다.
수일 전부터 급격히 달아오르는 하늘 아래에서 털옷이 가당키나 하겠느냐만, 장관풍에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은 추호도 없었다. 땀을 줄줄 흘리다가 말라비틀어지더라도,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칫 일을 벌이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것은 당장은 눈앞의 자신이었고, 또한 서장무림이었다. 눈앞의 여인은 그야말로 천재(天災)나 다름없는 존재이니. 사소한 일에 손을 쓰면, 장관풍은 희대의 마녀를 따르는 마졸 꼴이 되어서, 근자에 들어서 이름 높은 천산파의 영명에 그만 먹칠을 할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리되고도 남는다. 다른 이름이 아니라 서천 일대의 양대전설 중 하나, 화염산의 주인, 산주가 아니던가. 그런즉 지금 장관풍이 할 수 있는 방편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애당초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산주가 그렇게까지 호기심이 철철 넘치지는 않다는 것이다. 중원의 낯선 풍경에 잠시 눈을 반짝거리는 정도였다. 지금의 시장통도 새삼 두리번거리지만, 이내 흥미를 잃을 터였다. 그때까지 장관풍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는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산주의 뒤를 따르며 더욱 사방을 노려보았다.
“장!”
“예, 산주!”
불현듯 산주의 뾰족한 외침에 장관풍은 즉각 그녀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녀는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법이 없었다. 다 자르고서 그저 장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서쪽에서는 기대받는 신진이건만, 그따위 것 화염산주의 이름에서는 티끌만도 못한 것이다. 산주는 고운 아미를 잔뜩 찌푸리고서 심통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어디야?”
“예, 이곳은.”
장관풍은 답하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아닌 게 아니라 예가 어디쯤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말이 좋아서 비응십삼검이지, 굳이 따지면 그 또한 서장의 촌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중원의 어디가 어디인지 그가 어찌 알 수 있을까. 이제껏 산주가 앞장서는 대로 줄줄 쫓아왔을 뿐이었다. 이런 물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꿀 먹은 벙어리 꼴로 멀뚱히 눈만 끔뻑거렸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듯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벌린 입으로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뭐야! 여기가 어디냐고 묻잖아!”
산주는 맨발을 쾅쾅 구르면서 채근했다. 일천 근의 바위가 뚝 떨어지는 것처럼 울리는 큰 소리도 소리였지만, 그 서슬에 온 시장통이 들썩거렸다. 가득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설마 작은 여인의 발끝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예, 산주. 그, 그것이. 그러니까.”
산주의 앞에서 장관풍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서둘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다고 붙잡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기 사람들과는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이곳은 양오촌이라는 마을이오만. 어디를 찾으시는 길이시오?”
불현듯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누군가 말을 건넸다. 뜻밖의 일이었다. 산주도, 장관풍도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한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군 되는 이는 장년에 접어들어서 사뭇 중후한 모습이었고, 부인은 한층 젊어서 단아한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부부였다. 산주가 고개를 갸웃거릴 새, 장관풍은 서둘러 앞을 막아섰다. 그는 대뜸 경계의 눈빛을 드러냈다.
“무슨 용무이시오!”
“어허, 이런.”
어색한 발음이었으나, 뜻은 분명하다. 쏘아보는 눈빛에 장년인은 그만 헛웃음을 흘리며 난처함을 표했다. 먼저 말을 건넨 것도 있으나, 이렇게까지 경계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선 젊은 부인이 낮은 목소리로 부군을 탓했다.
“상공께서 그렇게 앞뒤 없이 말을 꺼내시니 그렇지요.”
“허허, 그러한가?”
장년의 사내는 머쓱한 웃음을 흘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대신하여서 기품 있는 부인이 나섰다. 그녀는 슬쩍 고개 숙이며 말했다.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니, 너무 경계하지 마세요. 우리 두 사람도 두 분처럼 이곳에 초행이라 마음이 쓰였답니다. 혹시라도 도움을.”
“좋아!”
젊은 부인이 다소곳한 모습으로 말문을 열었다. 자초지종을 기분 상하지 않게 꺼냈다. 그런데 산주는 신경 쓰는 말을 대뜸 끊으며 답했다. 그녀는 반색하여서 부부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산주의 얼굴이 마냥 밝았다. 장관풍은 화들짝 놀라서 산주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쉽게 외인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이다니.
“헤헤헤.”
그러나 아이처럼 헤헤 웃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관풍은 머뭇머뭇하다가 이내 물러섰다. 어차피 모든 일이야 산주의 뜻대로 돌아갈 뿐이다.
“목적한 곳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응!”
산주는 격의 없는 모습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부부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디를 가고자 하시는지?”
“소림사!”
산주는 바짝 고개를 치켜들고 외쳤다. 뜻밖의 이름이라, 두 내외는 서로 돌아보았고, 일행인 장관풍도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처음 들었다는 듯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들 앞에서 산주는 배시시 웃기만 웃었다. 세 사람의 놀란 눈초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 소림사라니.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장관풍은 숨이 턱 막혀 왔다. 더듬거리며 내뱉는 목소리가 마치 쥐어짜는 듯했다.
천산에서 이곳까지. 이미 사람의 경지가 아닌 산주에게야 기껏 한달음에 불과하려나, 장관풍은 뒤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생사가 오락가락했다. 목적한 곳이 소림사였다면, 진즉 말했어야 할 일이다. 몇 번을 물어도 무작정 따라오라 하더니만, 여기 바닷가에 가까워서야 소림사라니. 천산파의 제자로 중원의 문물이나, 지리에 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소림사는 알았고, 숭산은 알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어찌할까. 장관풍은 이제 심화(心火)가 일지도 않았다. 그는 넋을 다 놓아 버리고 산주와 어색한 표정의 부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부부는 서로 속삭이더니, 곧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잘되었구려. 우리 부부는 천하 유람 중인바, 소림사 또한 언제고 찾아보려 하였으니. 같이 가도록 합시다. 내 그래도 소싯적부터 강호를 안방 삼은 사람으로 길에 밝다오.”
“그것은.”
장관풍은 흠칫 고개를 치켜들었다. 잠깐의 도움이 아니라 길을 같이 하자니. 섣부르게 응할 일이 아니었다. 도움이라 하여도, 무정한 강호 바닥에서 누가, 누구를 순순히 믿을 수 있겠는가. 머뭇거리는데, 그 속내를 짐작하였던지. 장년의 사내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음, 그래. 그리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아니, 그것이 아니라.”
너무 선뜻 속내를 들킨 터라, 장관풍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사내는 손을 가로저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오. 이 사람이 너무 무람없이 굴었구려.”
“좋아!”
그러나 산주는 역시 산주였다. 그녀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답했다. 죄 없는 장관풍은 더욱 당황하며 말했다.
“산주, 아무리 그래도.”
“왜? 길에 밝다고 하잖아.”
“그, 그래도. 초면인 분들에게.”
산주는 말리는 장관풍에게 버럭 짜증을 부렸다. 말문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두 내외는 영 어려운 표정으로 산주와 장관풍을 번갈아 보았다.
산주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부부를 바라보았다.
“그럼, 어디 사는 누구야?”
참으로 격의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부부는 탓하기보다는 선뜻 웃으며 답했다.
“하하, 하북 정주의 담일산이라 하오, 이 사람은 나의 내자 성씨라오.”
담일산, 그는 자신을 선뜻 밝혔다. 강호도상에서 풍산소요(風散逍遙)라는 무명을 널리 떨친 고수이며, 정주 땅의 오랜 명문가인 담가의 가주였다. 하북 무림에서 고수를 논할 때에 어김없이 손꼽히는 고수였다. 장관풍은 다른 기색 없이 담담한 낯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담 노사이시군요.”
달리 알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산주는 굳이 말할 것도 없고, 장관풍도 따지고 보면 강호초출이라고 할 처지이니. 어디 박한 견문을 탓할까. 담일산은 가만히 미소를 머금었다. 곁에서 성 부인도 흐린 미소를 머금었다.
담일산은 이내 둘에게 물었다.
“그럼, 두 분께서는?”
자신을 순순히 밝히고 나서 물어오니, 장관풍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
“예, 이 사람은 천산파 사대제자 장관풍이라 합니다.”
“천산파, 수천 리 길이지만, 당대에 천산파의 위명은 심심치 않게 들었소. 이 멀고 먼 땅에서 천산의 검객을 마주하게 될 줄은 진정 몰랐구려.”
담일산은 잠시 놀란 눈을 하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복색이나, 어투가 남다르다 싶었더니 짐작한 대로 새외의 인물이다. 하늘에 가까운 산이라 천산이 아니던가. 워낙에 먼 곳이라 귀동냥하기에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담일산은 지난 수삼 년 사이에 천산파의 일문이 무섭게 이름을 떨치고 있음을 기억했다. 그런데 천산에서 이곳까지 와서 다시 소림사라니.
부부는 웃는 산주를 잠시 보았다가 다시 장관풍을 바라보았다. 내외의 눈길에는 분명히 동정이 가득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불어오는 바다의 짠 바람이 머리 위를 스쳤고, 멀리서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었다. 이곳은 광동의 바닷가였다. 소림사가 있는 하남 땅과는 무려 사천 리에 달하는 거리였다. 그런데 찾아온 걸음이 무려 천산에서부터라고 하니. 두 부부는 눈앞의 남녀가 걸어온 길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설사 파발을 달린다고 하여도 못해 석 달 보름은 족히 걸릴 거리이련만, 길을 잘못 들어도, 실로 단단히 잘못 들었다.
끌려오다시피 한 장관풍의 속내는 또 어떠할까. 죽을 둥, 살 둥 뒤쫓은 것이 벌써 수십 일이었다. 그러고 있을 새, 산주가 멀뚱거리는 눈으로 있다가 툭 던지듯이 물었다.
“정주의 담가면 유명한 데야?”
“어이쿠, 산주! 어찌 그런 말씀을!”
“왜? 뭐?”
장관풍은 민망하여서 급히 그녀를 만류했지만, 산주는 뭐가 어떠냐는 듯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자 담일산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괜찮소. 정주의 담가는 하북에서는 나름 이름을 알린 무가라오. 그래도 어디 서방의 양대 전설인 화염산주께 비하겠소.”
“어? 나를 알아?”
담일산의 입에서 정확하게 화염산주의 이름이 나왔지만, 여인은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멀뚱거리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담일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여인을 향해 두 손을 맞잡았다.
“천산파의 젊은 고수에게 산주라 불릴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가만히 계셔도 열기가 뜨끈하니.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담일산이 말하자, 장관풍은 흠칫하여서 입가를 틀어쥐었다. 결국, 자신의 입방정 때문이 아닌가. 그러나 여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럼 더 좋네. 얼른 길 안내해 줘.”
아무런 사심이 없어, 해맑은 모습이었다. 담일산 내외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담일산은 그것이 단순히 순진무구하기 때문이 아님을 잘 알았다. 압도적인 무력이 밑받침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어, 서장 땅에서는 신격화되기까지 하는 무위였다.
‘화염산주.’
서장의 신비를 마주하여, 담일산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남해를 유람할 생각이었으나, 중도에서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으니, 그것을 어떻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유람을 나선 걸음이니, 돌아간들 어떠하며, 다른 곳을 향한들 어떠하겠는가.
허허, 담일산에게서 고요한 웃음이 흘렀다.
소림사, 천하오악 중 중악(中嶽)인 숭산 소실봉에 자리를 잡은 천 년의 고찰. 수많은 별칭이 있으나, 강호에 몸담은 무부에게 소림사가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무학성지(武學聖地)로서 천하공부가 비롯한 곳이다. 청년 고수 시절에 잠시 발을 들였던 곳을 무려 수십 년 세월 만에 가고자 하니, 굳이 화염산주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시든 가슴 아래에서 새삼 젊은 날의 웅지가 싹트는 듯했다.
* * *
태원부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고, 또한 가장 거대한 사당인 이랑신궁(二狼神宮), 그곳에는 산서 무림을 암중에 좌지우지하는 흑선당의 본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랑신궁의 깊숙한 심처(深處), 밤늦은 때이건만, 그곳은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몇이나 되는 그림자가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오갔다. 소리는 없었지만, 그림자가 오고 갈 때마다 자리에는 권자(卷子)와 서신(書信)이 부지기수로 쌓여갔다. 그간 밀리고 밀린 흑선당의 일이 이제 신임 당주에게 전해지는 참이었다. 때를 모르고 쌓여가는 업무 속에서, 흑선당 신임 당주 백운당은 점점 질식해 가고 있었다.
안쓰럽게도 얼굴은 흙빛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침식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의 일은 끊임이 없고, 믿고 맡길 손은 드물었으니 도리가 없었다. 백운당은 밀린 일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더구나 쌓이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산서 강호를 암중에서 손을 쓰고, 또한 천하 강호에도 눈과 귀를 열어 두고 있는 흑선당인지라, 하루에도 쏟아지는 소식과 말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당주 앞에는 그중에서도 거르고 거른 것들이 올라오지만, 그간 밀려 있는 것을 다시 헤아리더라도 수레 몇 대 분량이 될 정도였다.
백운당은 과연 능력이 부족하지 않아서, 어느 하나 소홀함도 없이 처리하고, 파악했다.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불빛마저도 그에게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뜬눈으로 벌써 몇 날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흐으, 흐으.”
백운당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확인한 서신을 옆으로 치웠다. 종이 한 장이 힘겹다. 산서와는 한참 멀리 떨어진 광동에서 온 소식으로 몇몇 곳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당장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니, 따로 분류하고서, 백운당은 쿵! 소리와 함께 책상머리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 소리가 묵직하여서, 자리 아래에서 줄지어 같이 밤샘하는 요원들 대여섯이 퀭한 눈을 들었다. 그들도 백운당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이니. 몇몇은 시름 짙은 한숨을 푹 내뱉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불현듯 문이 고요하게 열렸다. 또다시 일이 쌓일 참이구나 싶어서, 요원들은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문가에서 검은 비단신이 사뿐사뿐 밟고 들어섰다. 발소리는 없었지만, 사르륵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검은 신은 곧 백운당 앞에서 멈췄다. 그는 산처럼 쌓인 종이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찌 말문을 열어야 할까.
주저주저할 새, 백운당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퀭한 두 눈에 초점은 없었다.
“아니지, 이러면 안 되지. 일을, 일을 어떻게 줄여놓아야. 그 녀석을 찾든지 할 거 아니야. 아무렴, 아무렴.”
백운당은 혼잣말을 연신 중얼중얼하면서 굳은 손을 다시 뻗어 갔다. 앞에 누가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림자가 드리웠건만 제 눈이 어두운 탓이라 여기는지, 휘휘 손을 내저으며 또 한 장의 서신을 집어 들었다.
“어이구, 왜 이리 눈이 침침한가. 심지를 더 돋워라. 어둡다. 어두워.”
“예이, 예이.”
지친 명에 지친 답이 들려왔다. 끄트머리에 앉은 이가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불을 더욱 밝히고자 했다. 그런데 퍼뜩 고개를 드니, 낯선 여인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닌가.
“으헥! 누구냐!”
검은 비단천으로 머리를 덮고서, 마찬가지로 검은 치마에 검은 비단신이라니. 딱 보아도 수상쩍은 행색인데, 흑선당의 심장이랄 수 있는 이곳에 홀로 들어서 있다니. 놀란 외침에 좌우의 요원들은 바로 반응했다. 자리를 박차며 두 손을 치켜드는데, 어디에들 그리 감추고 있었는지 수 자루의 비수가 흉광을 번뜩였다. 졸리고 지친 기색을 일제히 떨쳐 버리고 치뜬 눈초리에 예기가 흐를 새, 그들의 집중을 받은 여인은 다만 고요할 뿐이었다. 백운당은 멍한 눈을 들었다. 퀭한 눈이 여인의 고요한 모습을 담자, 그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끼이익, 소리를 냈다.
“내가 지금 죽었나? 이 창창한 나이에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과로사한 건가? 그런 건가?”
“다, 당주!”
이 판국에 무슨 시답잖은 소리인가. 요원들은 살수를 준비하고서도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여인의 거리가 백운당과 너무 가까운 탓이다. 그가 물러나야 어찌 손을 쓰련만, 백운당은 멍청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여인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얼굴을 덮은 검은 천을 머리 위로 걷어 올렸다.
“그게 무슨 잠꼬대이십니까. 그만 정신 차리세요.”
“참으로 매향, 매향이냐?”
백운당은 굳은 혀를 겨우 움직여 말했다. 마치 울음을 쥐어짜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는 탁했다. 아닌 게 아니라 들썩거리는 눈초리가 마르지만 않았다면, 줄줄 울어댈 참이었다. 여인, 매향은 한숨을 흘렸다. 그녀는 곧 서늘한 눈으로 아직도 비수를 뽑아든 요원들을 둘러보았다.
“계속 그러고들 있을 건가?”
“아니, 저어.”
매향의 눈초리가 확 올라가며, 쏘아보는 눈초리에서 파란 광망이 일었다. 요원들은 그만 기가 확 죽어버려서, 부랴부랴 비수를 거두었다. 그들 또한 매향의 얼굴을 알았다. 흑선당에 몇 안 되는 특급요원이며, 또한 백운당의 심복으로 누구보다 유능하여서 흑선당 전반의 일이 그녀를 거쳐 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주가 바뀌는 이 중요한 시기에 오래도록 모습을 감춘 것도 의혹 살 일이련만, 이토록 느닷없이 등장한 것을 어찌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그런데 백운당이 손을 내저었다. 자리를 비키라는 뜻. 요원들은 당혹감에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백운당과 매향의 눈치를 보는데, 퍼뜩 백운당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크게 쇠락하였건만,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남았는지. 흑선당 일급 요원들은 더 입을 열지 못하고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불을 환히 밝힌 심처에 두 남녀가 마주했다.
“매향아.”
“소당주, 아니. 이제 당주시군요.”
“하, 그래.”
매향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서, 어떤 기색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만 면목이 없을 뿐이었다. 이렇게 백운당을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흑선당에 등 돌린 적은 없으나, 또한 다른 신분이 있는 까닭이다. 백운당이라면 이미 파악하였을 일. 다른 변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매향은 붉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역시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
백운당의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격하게 요동치는데, 정작 말 한마디가 없다.
그 침묵이 못내 숨 막혀서, 매향은 내심 후회했다.
이렇게 흑선당으로 돌아온 데에는 무엇보다 소명의 한마디가 컸다. 소명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녀를 달래면서 말했다.
흑선당의 누구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터, 괜한 사람 애태우지 말고 그만 돌아가라 했다. 그 말에 힘입어서 용기를 내 돌아왔지만, 백운당의 이글거리는 붉은 눈에 어떤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층 험악하여,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매향, 너.”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이야!”
백운당은 버럭 노성을 터뜨리며, 상 위를 냅다 후려쳤다. 쾅!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고는 당장 울상을 지으며, 매향의 두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왜 이제 왔느냐. 지금 쉴 틈이 없다. 쉴 틈이!”
백운당은 당장 울어버릴 듯했다. 그는 허겁지겁 매향을 옆자리에 끌어 앉히고는 무수하게 쌓인 권자, 서신을 마구잡이로 떠안겼다.
“다, 당주. 제게 이런 일을.”
“너 아니면 누굴 믿고 일을 해!”
매향도 이런 반응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터였다. 그녀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멍청히 있었다. 백운당은 부랴부랴 자리로 돌아가서,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쌓여가는 온갖 것을 다시 살피고, 분류하며, 또 당주의 날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매향이 두 손으로 턱 아래까지 쌓인 온갖 권자며, 서신 등을 안고서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니, 뭘 하고 서 있어. 급하단 말이다.”
백운당은 이제 흙빛으로 돌아온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채근하며 우는소리를 하니. 매향은 쓴웃음을 머금고는, 잠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자리를 찾는 것인데, 백운당이 다른 말없이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자리에 따로 마련한 자리가 있었다. 고아한 붉은빛을 띤 책상이었다. 달리 거창한 문양이나, 잡다한 것이 없어 깔끔했다. 매향의 취향을 생각해서 진즉부터 갖춰 놓은 자리였다.
매향은 그 모습에 흠칫 눈을 크게 떴다. 가슴이 다시금 울렸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백운당을 돌아보았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묵묵히 서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서신과 비교하고, 정신이 없었다. 매향은 숨을 삼키고 자리에 앉았다. 자리는 조용하니, 종잇장 스치는 소리만 고요하게 울렸다. 그렇게 태원부 흑선당은 밤이 깊어갔다. 그러나 고요는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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