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ti Demon God RAW novel - Chapter 213
213화. 악송(惡松)
얼굴은 창백했고, 비튼 입가에는 핏자국이 보였다. 위지백은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을 참고서 몸을 일으켰다. 가슴을 활짝 펴고서, 숨을 다잡았다.
목 아래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역하게 일렁였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 스승께서는 딱히 인간관계가 좋으신 분이 아니신데.”
“끅끅끅, 그렇지. 그렇지. 못된 성질머리로는 가히 천하 제일 소리를 들을 만하지. 끅끅.”
노인은 반가워하면서 억눌린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웃음은 잠깐, 노인은 곧 가늘게 뜬 눈으로 위지백의 위아래를 새삼 훑었다.
“몽상순천을 다하고서, 역천도를 넘었구나. 이야, 이야, 네놈 정도면 도중제일이라는 소리는 들을 만하겠다.”
“쩝.”
몽상순천을 아는 것도 용할 지경인데, 역천도까지 안다니.
동문 없는 위지백이었다. 그런 내밀한 사정을 안다는 것은 눈앞의 허렁방탕한 노인네가 분명 스승과 큰 연이 있다는 것이다.
“몽도 선생과는 아주 남도 아니니. 흐흐, 여봐, 귀여운 후배. 네놈과는 이 정도로 해 두지. 자자, 그럼 용문제자라는 놈은 어디에 있나?”
“흠, 그러니까. 결국, 소명 놈에게 볼일이 있으셨던 게로군.”
“소명? 용문제자 이름이 소명이더냐?”
“니미, 왜 엄한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는 게요?”
위지백은 오만상을 쓰면서 칼을 거두었다. 도갑을 들어가는 칼날 소리가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넘기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야! 들었으면 작작 좀 하고 기어 나와라, 쫌!”
“나오기도 전에 먼저 들이댄 게 누군데, 나한테 소리야?”
심드렁한 대꾸가 뒤에서 들렸다. 도경광풍으로 난리가 난 자리를 밟고서 그림자가 나타났다.
“들이대기는 누가!”
“쯧, 최초의 암경 정도는 능히 흘릴 수 있지 않았더냐. 기다렸다는 칼을 뽑아놓고는 무슨.”
면박 주는 소리에, 위지백은 퍼뜩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콧구멍으로 더운 숨이 푹푹 튀어나왔다.
소명은 그리고 불빛 아래로 걸어 나왔다.
그 모습에 노인의 눈매가 슬쩍 올라갔다.
남루하다 싶은 장삼을 늘어뜨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눈 아래까지 가리고 있었다. 언뜻 드러난 담담한 안광은 부동심을 나타낸다.
‘요것 봐라.’
소명은 노인을 잠시 바라보다가, 공손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말학이 노선배를 뵙습니다.”
“나를 알아?”
“언질을 들었지요.”
“흠, 그 거지 놈들인가. 제법 돈독한 모양이야?”
비아냥거리는 어조였다. 그래도 소명은 별반 마음 쓰는 기색이 아니다. 그는 되레 쓴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만천옹께서는 그만 마음을 푸시지요.”
“흠.”
소명은 모은 두 손을 풀지 않고, 다시금 고개 숙이며 말했다.
노인은 뾰족한 턱을 치켜들었다.
만천옹.
내뱉은 한 마디에 아직 감정이 남아 있던 장내가 일순 가라앉았다.
천하의 오대고수.
그중에서도 특히 악명이 자자한 만천옹이라니.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름이 주는 여파는 생각 이상이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입을 한 일 자로 굳게 다물었다.
만천옹을 좌우를 흘겨보고는 조용한 장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쯧 혀를 찼다.
“뭐, 좋다. 일단은 여기까지 하지. 네놈이 용문제자라는 놈이렷다.”
“부족한 몸이나마.”
“그래, 그래, 그런 겸손이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잠시 중원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더니, 당대의 용문제자가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하더란 말이지. 그래서 내 좀 보러 왔다.”
“그러십니까. 여기서 이러실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드시지요.”
만천옹은 잠깐 묘한 표정으로 소명을 보았다. 툭툭 말을 던지면서도 은근한 기파로 사뭇 위협적으로 찔러대는데, 전혀 본 체, 만 체였다.
‘요놈 봐라. 내외의 경지가 나름 단단하다, 이거로구만.’
노인의 심술궂은 눈초리가 한층 가늘어졌다.
“아이고, 젠장. 하마터면 벌집을 건드릴 뻔했잖아.”
누군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벌도 보통 벌이 아니라, 아주 독한 말벌이다. 절로 소름이 일어서, 천룡의 가인들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천외천의 천룡세가라고 하지만, 오대고수라는 이름은 참으로 묵직하고, 또 묵직했다.
괜한 일로 척 지을 만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천룡세가라는 이름에 아랑곳할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없는 사건도 일으킨다는 만천옹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들 안도하면서 만천옹이 사라진 방향만 한참이고 바라보았다.
과연 용문제자가 저 노괴를 어찌 상대하려는지.
* * *
저택의 소란이 크게 가라앉았다.
아무리 천룡세가라고 하나, 만천옹의 막무가내를 계속 탓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가 찾아온 것은 용문제자였다. 딱히 저택의 주인이라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용정당, 그곳에서 만천옹은 일단 소명과 마주했다.
만천옹은 앙상한 손으로 온기 머금은 찻잔을 감싸 쥐었다.
“쯧, 주려거든 곡차나 내어올 것이지.”
“저도 객인 입장이라.”
소명은 대충 얼버무렸다. 만천옹의 허연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그는 곧 묘한 소리를 내면서 소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살피는 눈매가 영 고약하다.
그래도 소명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한 자리 뒤에 물러나 있는 아함은 눈을 하얗게 뜨고서 노인을 노려보았다. 소명만 아니었다면 당장 불에 그슬려 버릴 기색이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연신 꼼지락거렸다.
“커흠!”
만천옹은 곧 눈썹을 찌푸리며 괜히 헛기침을 흘렸다.
“이번 용문제자는 소림에서도 크게 인정한 놈이라지. 어떤 놈이기에 우리 다섯 늙은이와 비견될 정도라고 하는지, 고것이 하도 궁금해서 말이다.”
“제가 어찌 감히.”
소명은 촌각의 여유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물러섰다. 그러나 괜한 사양이 아니다.
아무리 서천에서 날고 기었다고 하지만, 천하오대고수라고 하는 다섯은 정말 하늘 밖의 존재.
불과 수년 전, 산서에서 마주했던 월부대도의 무지막지함을 아직도 기억했다.
하늘에 닿은 ‘무(武)’.
그것은 감히 범접할 것도 아니고, 감히 견주어 볼 것도 아니다. 하기야 천하오대고수에 비견될 사람이 서녘 땅이라고 없겠는가.
소명은 쓴웃음을 잠시 그렸다.
그러나 월부대도의 강함은 분명 하늘 밖에 있었다. 그가 이를 갈아대던 검백은 또 어떠할지.
소명은 소림사에서 겨울을 나면서, 스스로 무공을 재정비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더 나아갈 길을 보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눈앞에서 가는 눈초리로 흘겨보는 만천옹도 괴팍한 외견이야 어떻든, 대단한 기력을 품고 있었다.
전력은 아니라지만, 위지백이 작정하고 펼친 몽상순천도를 단 일장으로 파훼하였다.
대천장(對天掌)이라는 이름은 명불허전이다.
소명은 공손했다.
만천옹은 볼품없는 수염 끝을 연신 배배 꼬았다. 참으로 노골적인 눈길로 소명을 탐색했다. 그런데 손가락 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요거, 요놈 봐라.
딱 그런 눈초리였다.
처음 소림사의 용문제자라고 하였을 적에, 만천옹은 딱 깎아 만든 옥나한을 생각했다. 그런데 마주하고 보니, 나한은 무슨, 수라가 저리 가라 할 정도가 아닌가.
고요한 모습과는 또 달랐다.
저 어깨 뒤에 드리우는 것은 불문의 보광이냐, 수라의 찬풍살기이더냐.
고개 숙인 소명을 보는 노인의 눈초리는 영 곱지 못하다.
‘여간한 놈이 아닌데. 요놈을 어찌 꾀어낸다?’
소림사라는 사문내력에 주저할 만천옹은 아니었지만, 나름 조심스럽기는 하였다. 이를테면 체신의 문제이니.
“크흠, 뭐 좋다. 네놈 이름이 오대고수 반열에 오르내리니, 내 호기심이 동하여서 말이다.”
호기심은 무슨, 그 괴팍함은 천하가 아는 판국이다. 같은 반열에 오르내리면 기어코 찾아가서 짓밟아대는 것으로 강호에 유명하지 않았던가.
노인은 새초롬하니 눈빛이 날카롭다.
그러나 소명은 큰 흔들림 없이 눈빛을 받아냈다. 그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세인의 말입니다. 어린 후배가 어찌 감히 지고한 경지의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오호, 그러니까. 그런 주제가 아니다.”
만천옹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흘겨보는 눈초리에는 감정이 역력하였다. 소명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제 부족함은 익히 알고 있으니.”
“아아, 길게 말할 것 없다. 어차피 여기까지 걸음한 마당인데.”
“그래도, 진정하시지요.”
만천옹이 손을 내저어 말을 끊으려 하지만, 소명은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정중히 마다하는 모습이다. 노인은 고개를 뒤로 빼고서 진지한 소명의 위아래를 보았다.
“홀홀, 좋아. 좋아. 아무래도 내가 막무가내로 솜씨를 보겠다고 달려들 처지는 아닌 모양이군.”
만천옹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하는 말에 기겁할 터였다. 저 노괴가 순순히 뒤로 물러나다니. 무슨 꿍꿍이를 품지 않고서는 저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천하오대고수 중에서 누구나 첫째로 손꼽는 검백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만천옹이다.
물러섬이 더욱 두려운 존재이려나, 소명이 그런 것까지야 알 바가 있을까. 그저 얌전히 고개 숙일 뿐이다.
만천옹은 묘한 웃음을 흘리면서 내어온 찻잔을 들었다.
그러면서 눈빛이 번뜩였다.
‘이런…….’
소명은 가볍게 혀를 찼다. 말로는 막무가내로 달려들지 않겠다고 했지만, 만천옹의 심술은 이미 시작됐다.
그리 있을 새, 용정당 밖에서는 위지백과 담 가주, 그리고 일행이 한데 모여 있었다.
“저거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지요?”
위지백이 한껏 찌푸린 얼굴로 넌지시 물었다. 담일산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서 좌우를 흘깃 보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천옹의 괴팍함에 대해서라면 적어도 이 자리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지금에야 나이 들어 만천옹이라고 좋게 부르지만.
불과 십수 년 전만 하여도 그의 행보를 두고서, 유인재앙(有人災殃)이라고 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재앙이 내린다니. 말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천재지변에 버금갈 정도로 사고를 쳐대니 하는 소리였다.
보다 못하여서, 같은 오대고수의 반열에 있는 두 사람이 찾아가 박 터지게 싸우고서야 정도껏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다.
소문의 진위야 어떻든.
만천옹이 이곳 천룡세가의 안가에 나타났다는 것만도 크게 신경 써야 할 일이었다.
“하이고, 언제까지 이리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자꾸 일이 꼬이는 느낌입니다.”
내내 조용하던 장관풍이 슬쩍 속을 드러내면서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야 속없이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에 담일산은 흠칫하며 영 어색한 얼굴을 했다. 위지백이야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죄송하게 되었군요.”
문가에서 씁쓸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관풍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소천룡 회가 있었다. 그는 고졸한 미소를 머금고서, 슬쩍 고개를 숙였다.
“소천룡…….”
“본가의 어르신 일로, 이리 붙잡고 있는 모양새이니.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만…… 아무래도 소명 공의 도움이 간절한 지라.”
“뭐, 소명 놈이 있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굳이 불만은 없소. 되레 우리 때문에 수고로운 것은 당신네 아니겠소. 보아하니 벌써 못해도 백금은 날린 것 같은 데 말이오.”
위지백은 민망함에 굳어버린 장관풍을 대신해서 대꾸했다. 딱히 신경 쓸 것 없다는 투였다.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백금을 운운하니.
“백금이 아니라, 만금이라고 아깝겠습니까.”
참으로 통 큰 말씀이라. 위지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치가 사뭇 짓궂은데, 회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고, 본가의 재정이 한도 끝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 흐르듯이 고요한 태도여서, 위지백의 번뜩임 때문에 덧붙인 말은 아닌 듯하지만, 위지백은 나직이 혀를 찼다.
‘쯧…….’
안타깝다는 뜻이 분명했다.
소천룡 회는 가만히 미소만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