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180
TKTS.
사진으로만 보던 런던의 정취를 만끽하며, 사이사이 보이는 작은 뮤지컬 간판들을 눈에 넣으며 좁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드디어 레이스터 스퀘어에 다다르자, 당일 표들을 할인 판매하는 티켓츠 부스가 눈에 보인다.
오픈 시간 10시, 현재시간 9시 10분.
벌써 부스에는 세 명이 줄을 서 있다.
좋은 티켓을 제 값 주고 사는 것이 전혀 무리하지 않은 일이 되었지만, 유명은 첫 관람만은 이렇게 하고 싶었다.
정성을 들여 가성비 티켓을 사고, 조금 아쉬운 듯한 자리에서 가장 보고싶은 공연을 마음에 담는, 가난한 연극배우의 마음으로.
[운이 좋으시네요. 팬텀은 성수기엔 당일표가 거의 없는데.] [감사합니다.]가격을 치른 표를 손에 꼭 쥔다.
맥도날드에서 모닝맥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마신다.
내셔널 갤러리를 둘러보고, 템즈강을 산책한다.
그리고…
조금 햇살이 잦아든 오후 5시의 트라팔가 스퀘어.
다양한 거리예술가들이 광장의 한 켠씩을 점령한 그 곳에서, 유명은 심호흡을 했다.
‘시작하자.’
미호의 첫 거리공연이었다.
137 신이 인간을 연기할 때
순간이었다. 몸의 주객이 전도되는 것.
‘윽…’
옴짝달싹 못하게 온 몸을 꽁꽁 묶인 채, 유명은 바깥으로 난 창문을 내다보았다. 똑같은 풍경인데도 질감이 달랐다. 아주 실감나는 VR을 보는 듯한 느낌.
아-
미호가 감각을 또 개방해주었나 보다.
계약 조건에는 없었는데, 역시 친절한 녀석.
팔뚝에 바람이 살랑살랑 스치고 햇살이 따갑게 내리번졌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며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의 웃음과는 입꼬리의 각도도 근육에 들어가는 힘의 정도도 다른 도도한 미소. 미호의 표정인가 보다.
{괜찮냥?}
{응. 다시 겪어도 신기한 기분이네. 재밌어.}
{재밌긴.}
미호가 퉁명스럽게 유명을 걱정해준다.
{뭘로 할 거야?}
{…글쎄, 뭘로 할깡…}
{처음은, 네가 썼던 작품 중에 하는 게 어떨까?}
{…좋앙. 정했당!}
{모자는?}
거리 공연에서 앞에 두는 모자. 재미있는 공연을 본 감사의 마음으로 관객들이 동전을 던진다. 그 돈을 벌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거리공연의 낭만이랄까.
{필요없당. 동전을 던질 정신이 있을 것 같냥?}
엄청난 거만함.
미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무엇을 시작하나 싶어 고개를 기웃대는 몇몇 사람들에게 귀족적인 절을 한다.
17세기의 배우가 돌아온 듯 고전적이고 우아한 인사.
그리고 유창한 영어.
[이 자리에 모이신, 최고의 행운을 얻은 관객 여러분. 지금부터 저는 짧은 연극을 보여드리려 합니다.]공기 중에 음악같이 녹아드는 목소리.
17세기의 귀족을 이 자리에 불러온 듯이 현실감 없는 품위에, 지켜보던 10여 명의 관객은 시작도 하지 않은 극에 이미 압도된 듯 박수를 짝짝- 친다.
유명이 숨을 머금었다.
*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 목가적인 분위기의 낭만 희극이다.
하지만 극중에 등장하는 우울한 사색가, 제이퀴즈는 진실을 관통하는 풍자적인 대사로 극의 맛을 살린다.
특히, 의 최고 명대사로 꼽히는 부분.
인간의 생을 연극에 비유하는 제이퀴즈의 대사에, 미호가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온 세계가 무대이며, 온 남녀가 한낱 배우에 불과하죠. 각자가 퇴장도 하고 등장도 하며, 주어진 시간에 많은 역을 맡는데, 연극은 총 칠 막입니다.]연극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셰익스피어는, 천국이자 지옥이다.
대본을 읽으며 기지 넘치는 대사들과 인간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에 천국을 보다가, 그 대사를 입에 담는 순간,
Oh, my god.
지옥을 보게 된다.
대사가 고어에 가까운데다, 한 대사의 호흡이 무척 길다. 안 그래도 호흡이 긴 대사가 연달아 이어져 만들어 내는 독백은 더 지옥이다. 대사를 수천 번 입에 붙이고 색깔을 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배우가 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닌, 대본을 암송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조크가 있다.
맥주를 한 잔 마시면, 영어를 (원래보다) 잘 하고,
맥주를 두 잔 마시면, 영어로 유창하게 토론을 하고,
맥주를 세 잔 마시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되고(그런데 남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맥주를 네 잔 마시면, 아예 말을 못하고(가축이 되고),
맥주를 다섯 잔 마시면, 어메리칸 잉글리시를 하고(영국인은 미국식 영어를 비하하여 우스갯소리를 만드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맥주를 여섯 잔 마시면, 셰익스피어 랭귀지를 시작한다고.
그 정도로 난해한 고어를, 그 각본의 원저자는 완벽히 소화하여 매혹적인 발음으로 내뱉기 시작했다.
[첫째는 아기 장면. 유모의 팔에 안겨 울며 침을 흘리죠.]아이다. 어린아이의 칭얼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으앙- 세상 근심을 찌푸린 이마에 모두 담아 울어대는 아이다.
정말로 아이가 되기라도 한 듯한 막막한 기분이 감각을 공유하는 유명에게 오롯이 전해져 온다. 아니, 연기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감각이 공유되는 것처럼 선명할 것이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갈 막막함을 예지라도 하듯이, 울먹이고 싶은 기분.
[다음은 킹킹대며 우는 학동. 가방을 메고 아침에 세수해서 반짝이는 얼굴로 달팽이처럼 싫어하며 학교로 기어들어 갑니다.]아이는 조금 자랐다.
순진무구하지만 불퉁한 표정의 아이의 마임이 시작된다.
짐승으로 태어난 존재에서 사람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하기 싫은 것도 참고 해내는 법을 배운다. 싫은 것도 해내게 함으로써,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을 구분짓는 것이 교육.
[다음이 애인. 용광로처럼 한숨지으며 연인의 눈썹을 찬미하여 바치는 슬픈노래나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 이상한 맹세만 잔뜩 늘어놓고 표범같은 수염을 기르고 체면만을 걱정하고 걸핏하면 후닥닥 싸움이나 하고, 거품같은 명예를 위해 대포 아가리 속에도 뛰어들죠.]애인을 연기할 때는 둘도 없는 달콤한 표정을 지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군인을 연기할 때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발끈하며 명예를 부르짖는다.
사랑에 미쳐있는 청년 시절엔 가슴을 터질 듯이 내밀다가, 명예에 집착하는 중년이 되자 허리가 살짝 굽는다.
이미 관객들은 말도 안 되는 연기에 빠져서 홀린 듯이 붙박혀 있다.
[이어 재판관. 뇌물로 툭 튀어나온 배에 매서운 눈초리, 격식에 맞게 붙인 수염. 격언이나 재판사례를 잔뜩 알아 그 역을 해내죠.] [막이 육막으로 바뀌면 메마르고 슬리퍼를 끌고 다니는 늙은 광대. 콧날에 안경을 올려놓고 옆구리에 돈지갑을 차고, 젊었을 때 끔찍히도 잘 간직한 바지를 입는데, 이제는 말라 붙는 정강이엔 바지통이 너무나 크죠. 그 사내다웠던 큰 목소리는 어린애 소리로 되돌아가 떨리고 빽빽 휘파람 소리처럼 들립니다.]장년.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본인이 아는 세계가 정의인 양 타인을 재단하는 시기. ‘나도 겪어봤는데’ ‘내 생각에는 이게 맞아’ 거만한 장년의 남자가 관객들을 하나하나 재단한다.
내가 옳아- 변하지 않을 듯이 고집스런 눈매에, 쳐다보는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린다.
그리고 노년. 손아귀에 겨우 남은 돈만을 거머쥐고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빽빽거린다.
인간의 삶에 대한 통렬한 관조.
이 대사가 사실 인간이 인간을 평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을 평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싹해진다.
인간에 대한 정밀한 이해, 그것을 풍자와 해학을 담은 대사로 완성시키는 능력.
그리고 문장 하나마다 일생의 시기를 건너뛰어 보여주는 엄청난 연기력.
원래 미호는 제이퀴즈의 대사를, 이런 연기를 상상하고 써냈던가.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는, 어떤 연기를 상상하고 써냈던가.
마지막 대사가 흘러나온다.
[마지막 장면은 제 2의 소년기지요. 다만 망각이 있을 뿐, 이빨도 시력도 맛도 그 아무것도 없는 마지막 장입니다.]그 모든 풍파를 겪고, 결국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인간의 삶.
그것은 생기를 모으고 모아, 우화등선하여 선계로 승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귀鬼의 삶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인간 사이에 섞여, 기승전결이 있는 각본같은 인간의 삶에 매료되어 살아온 미호의 인간에 대한 통찰이 대사 안에 진득히 똬리를 틀고 있다.
타자로서 바라보기에, 때로는 더 정확할 수 있는 진실.
연극과도 같은 인간의 삶.
삶같은 연기가 끝났다.
그 자리에서 인간의 평생을 돌려본 듯이 붙박혀 있는 관객들 사이로, 미호는 유유자적하게 빠져나온다.
{괜찮았냥?}
다시 몸의 제어권이 유명에게 돌아왔고,
유명은 그제서야 두 손을 들어 박수를 보냈다.
또 한 번, 연기의 극의(*極意:지극한 뜻)를 목격하고 말았다.
*
닉 그롤은 그 날도 트라팔가 광장에서 동냥을 하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은 장소는 언제나 수입이 쏠쏠하다. 더구나 런던에 드물게 햇살이 내려쬐는 이런 날이면, 기분좋은 젊은이들이 쉽게 동전을 던진다.
자신이 엎드려 있는 구석 자리. 사선 반대편으로 한 동양인 청년이 다가와 선다.
거지 일을 하다보면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된다.
내려다보는 강자에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 아래에서 쳐다보면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지폐를 기울여 인쇄된 인물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각도를 바꾸어 보면 방향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듯이.
그리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인간의 얼굴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얼굴보다 훨씬 진실하다.
[이 자리에 모이신, 최고의 행운을 얻은 관객 여러분.]무언가 공연을 시작하려는 남자를 올려다 본다.
평범해 보이지만 잠시 하늘을 바라볼 때의 시선, 어깨를 쭈욱 편 자세의 반듯함, 단숨에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잡아채는 몸짓을 볼 때,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타인을 홀리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이다.
[첫째는 아기 장면. 유모의 팔에 안겨 울며 침을 흘리죠.]영국인이라면 거지라도 셰익스피어는 안다.
유명한 명대사가 그의 입에 담긴 순간 연기가 아닌 진실이 된다.
그는 한 없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심기에 거스른 것이 있는 듯, 악마같이 얼굴을 찌푸리며 으앙- 울음을 토해낸다.
갑자기 자신도 어려진 것처럼, 엄마품에 안겨 축축하니 품을 적시며 울고 싶은 기분이 된다.
[다음은 킹킹대며 우는 학동. 가방을 메고 아침에 세수해서 반짝이는 얼굴로 달팽이처럼 싫어하며 학교로 기어들어 갑니다.]한 문장에 10살을 자랐다.
닉도 학교에 가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만 가면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기가 일쑤였다.
유난히 참을성이 없었던 그는결국 학교를 뛰쳐나왔다.
짐승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교육을 거부하고, 이렇게 네 발로 기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짐승이기에 본능적으로 안다.
저것은 인간이 아닌, 신의 연기.
10여 분 정도 연기하는 동안, 그는 특정한 인생의 단계를 읊으며, 단계마다 그 단계의 생을 마임으로 보여주었다.
지식, 사랑, 명예, 권위, 돈.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그의 연기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땡그랑-
제 앞을 지나가던 사람이 동전을 하나 던진다.
닉의 시선은 저 너머의 배우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동전을 던진 사람은 적선에 감사할 줄 모르고 고개를 빳빳이 든 거지를 혐오하듯 바라본다.
[가…감사합니다….]닉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고, 적선했던 사람은 ‘뭘 또 그렇게까지’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닉은 관객들이 모든 숨을 멈춘 틈을 타 사라지는 청년을 보며, 끝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그는, 신을 보았다.
*
연귀는 계약을 했다.
연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가르치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와의 계약, 그 이후로 연귀는 인간에게 정을 주지 않았다.
가끔 못 견디게 연기 욕심이 날 때 소소한 대가와 빙의를 교환한 적은 있었지만,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신유명과 처음 만났을 때의 목적도 공생보다는 점령이었고.
‘작품에 국한된 언어 능력’과 ‘수 개월간의 제한 횟수 없는 빙의’의 교환.
그 정도면 공정계약이냐고 물었었지.
유명은 전자가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사실 후자가 훨씬 큰 이득이다. 선계의 법칙인 공정거래가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계약이 성립한 이유는, 빙의를 당함으로써 유명이 득을 보는 부분도 있기 때문.
아니, 자신이 빙의를 원하면서, ‘유명을 위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
이미 인간 배우 중엔 최상급의 연기력을 가진 그에게, 그 이상의 목표를 보여주고 이끌기 위해서.
스스로 몸을 양보해 줄 생각을 한 유명에 대한 적절한 대가였다.
그것이야말로 ‘공정 거래’.
‘다시 봐도 어마어마하네. 제이퀴즈를 그렇게 연기할 수 있는지 몰랐어.’
{많이 배웠냥.}
‘하하, 초인간급의 연기를 어떻게 배우겠어. 그냥 감탄하는 거지.’
{배울 수 있당.}
유명의 얼굴이 조금 굳는다.
{배우라고 보여준 거공.}
‘……’
{너도 윌리엄처럼 간섭하지 마, 이 괴물아! 라고 할 테냥.}
농담같이 드러내는 상처에, 유명의 마음 아픈 표정을 짓는다.
{연기를 하면서 귀鬼로서의 능력을 쓰지는 않는당. 그러니 배울 수 있당.
물론 배운다고 나만큼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당. 하지만, 윌리엄이 템페스트를 쓰면서 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좀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냥? 그 다음 작은 더 좋아질 거고, 언젠가는 혼자서도 연극사에 남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었지 않겠냥.}
인간은 흥미롭지만, 나약한 존재다.
유한한 존재이기도 하다. 정을 주어봐야 금세 나이들어 시들고 말 존재.
그것을 셰익스피어와의 관계에서 깨닫고, 즐거움을 취하되 마음은 쓰지 않으려고 했던 연귀였지만,
-개미가 뭐라고 하는지 아니? 연기를 좋아해서요, 라고 대답했단다.
어머니, 화호의 말을 떠올린다.
누구보다 나약하지만, 누구보다 강철같은 의지를 가졌으며, 그럼에도 그보다 수백수천배는 강한 자신을 연민할 줄 아는 이상한 인간.
재미있어서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정이 들었고,
정이 들어서 망설이다보니 어느새 쑤욱 자랐다.
그런 그를 가르친다.
{첫 번째 레슨, 장악.}
‘……’
{관객 한 명 한 명을, 풀로 나무로, 내가 보여주고 있는 세계의 정물로 끌어들인당. 그 세계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면, 내가 보여주는 세계에만 빠져들게 된당.}
유명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연귀의 첫 레슨이었다.
138 신이 신을 연기할 때
Her Majesty Theatre
뮤지컬 가 상연되는 극장.
영국 아니랄까봐 극장 이름이 여왕폐하-이다.
{왜 제일 좋은 좌석이 아닌거냥!}
‘그런 건 TKTS에서 안 팔지.’
{왜 할인티켓을 사냥. 돈도 많이 벌어놓고성.}
‘하하, 이번만 참아줘. 어차피 당일표는 좋은 자리 없대.’
궁시렁대면서도 미호는 앞쪽으로 가지는 않고, 유명의 오른쪽 어깨에 내려앉았다.
유명은 신기한 눈으로 극장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 극장은 관객석의 경사도가 상당히 가파르다. 경사를 타고 쭈욱 내려오는 좌석이 무대로 집약된다.
뮤지컬 전용극장이 없는 국내와는 달리, 웨스트엔드의 극장들은 수 개월에서 수 년간 한 공연을 상연한다. 따라서 무대 제작에 어마어마한 공을 들인다고 한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후하…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은 처음이야.’
{촌스럽겡.}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키잉키잉- 음을 맞추는 오케스트라의 소리가 들려온다.
서서히 불이 꺼지고,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시작된다.
생음악은 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다. 진동으로 듣는다. 피부가 공명하여 떨리는 느낌에, 유명은 이미 반쯤은 뮤지컬 속 세계로 넘어간 기분이었다.
땅-땅-땅-
처음 드러난 공간은, 폐허가 된 극장.
운영이 중지된 오페라 극장의 내부에서, 처분 가능한 물건을 대상으로 경매가 진행되고 있다. 낙찰을 확정짓는 망치 소리로 극이 시작된다.
유명은 첫 대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들린다. 대사.
분명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도, 의미가 들린다. 귀에서 해석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원어민인 양 그 행간과 함의까지 분명하게.
-영어로 된 모든 작품을 자막 없이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