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09
*
갓네임드 골드회원 상영회.
이 거창한 이름을 단 행사가 열린 곳은 소박하게도, 어느 오피스텔이었다.
딩동-
박진희가 달려나가 문을 열자, 3명의 여성이 부산스레 현관으로 들어온다.
‘보형이만보형’과 ‘계같은인생’, 그리고 ‘팬텀팬’.
갓네임드가 어느 팬덤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동안 우여곡절을 함께 겪어내고, 이제는 역전의 전우들처럼 높은 결속력을 자랑하는 골드회원들이었다.
“양제 언니! 밖에 엄청 추워요!”
“그러게, 이제 3월인데 왜 이렇게 춥냐. 결국 브갓이는 안 왔네?”
“네. 걔가 좀 애늙은이같은 부분이 있잖아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가 가는 거 아니라고…”
“이제 스물 한 살짜리가 웃겨 진짜.”
마지막 골드회원, ‘네임오브갓’은 남자였다.
오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상영회 참석을 고사했다. 박진희가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태럽이(*태종러버)가 파일 컨버트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준다고 했는데, 그래도 몇 시간은 걸리겠죠? 저녁 쯤에나 볼 수 있을 듯요.”
“캬…그 때까지 절대 인터넷도 켜지 말고 문자도 보지 말자. 누구든 스포하는 즉시 우리 집에서 퇴출이야.”
“당연하죠, 언니. 배신은 죽음으로 응징합니다.”
오늘 그들은 캐스팅보트 9회를 함께 보기로 했다.
미국에서 금요일 저녁 방영이면, 한국은 토요일 낮이 된다. 파일이 아무리 빨리 넘어와도 토요일 오후일 것인데, 그 때까지 팬까페도 안 들어가고 뉴스도 보지 않으려면 초조함이 극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동지들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 같다.
“언니들, 우정일보에 실린 스턴트 화보, 진짜 쩔지 않아요?”
“저 그거 오려서 머리맡에 붙여 놨어요. 그 때 연기 오늘 나오면 좋겠다!”
“유명이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지금이 떡밥은 더 많이 나오는 거 같은데도 왜 이렇게 허전하고 멀리 있는 거 같죠…”
“그게 자식 시집장가 보낼 때 부모 마음이야…”
함께 공유하는 대상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대화가 끊기는 일이 없다.
더구나 지난 화요일 이후, 인생의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고 행복한 한 주를 보내온 그들이었다.
“미국 팬사이트가 자꾸 렉이 생겨. 갑자기 접속자가 급증해서 그런가봐.”
“인프라 개선을 좀 해야겠어요. 하는 김에 한국 사이트도 같이 할게요. 캐스팅보트로 가입자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서…등업할 때 보니 요즘은 성별과 나이도 엄청 분산됐더라구요.”
“이제 말 그대로 국민 배우니까.”
“아참, 유명이 소속사랑 얘기하고 있는 부분인데, 인프라 업그레이드하면서 기존 회원들은 차별화 포인트를 주려구요.”
“차별화 포인트?”
회장, 소진이 뿌듯하게 미소짓는다.
“네. 앞으로 유명이 팬은 전세계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텐데, 기존에 활동하던 회원들에게는 원조 팬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면 좋을 것 같아요.”
“오오, 그거 마케팅적인 발상이네.”
보형양제, 박팀장이 전문가로서 그녀의 말을 지지하더니 의견을 더한다.
“딱 떠오르는 아이디어 있는데, BC회원과 AU회원으로 구분하면 어떨까?”
“BC와 AU요?”
“응.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서양사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와 Anno Domini(주님의 해)로 나뉘잖아. 그것처럼, 유명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이전인 Before CastingVote(캐스팅보트 이전)와 Anno Umyoung(유명의 해)로 구분하는 거지.”
“와아…역시, 전문가는 달라요. 언니 최고!”
소진이 그녀의 의견을 다이어리에 베껴적는 중에, ‘팬텀팬’이 메일을 확인한다.
“으악, 왔어요! 왔어!”
“다운받아!!”
“어디 들어가다가 잘못 눌러서 캐스팅보트 뉴스 보면 안 되니까, 실눈 뜨고 다운받아!!”
비명 속에, 다운되는 파일이 천천히 부피를 불렸다.
*
9회의 초반부는 본선진입과제의 뒤쪽 조들의 연기가 이어졌다.
35조~40조까지의 하이라이트 편집이 끝나고, 유명의 조가 1위로 한 명의 탈락자도 없이 본선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둥켜 안았다.
“으아…역시 다 같이 통과할 줄 알았어!”
“진짜 인간승리다. 유명아아아. 너는 전생에 블랙홀을 구하고 현생엔 직접 블랙홀이 되었니!!”
“언니, 저 울어요, 허엉…”
보형양제가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영상의 주요 포인트들을 바로 통역해 주었기에, 아직 자막이 붙지 않은 파일인데도 큰 불편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어머, 무슨 방송용 임시 숙소를 저렇게 삐까번쩍하게 차려놨데요.”
“양키들 스케일이야 뭐…”
참가자들의 숙소인 액터스 하우스가 등장했을 때는, 그 화려한 시설과 거대한 규모에 함께 탄성을 터뜨렸고,
“으악, 왜 또 쟤랑 같은 방이야!!”
“불편해! 보는 내가 불편해!”
유명과 효준이 같은 방에 배정받은 장면에서는 함께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클래스 배정 장면.
유명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이 담긴 메이킹 필름은 8화에서 미리 맛보긴 했지만, 이번엔 그걸 보는 심사위원들의 반응에 짜릿함이 배가되었다.
“하하하, 방금 제리가 뭐라그랬게? 어떤 고문실이 나올지 다들 마음의 준비 하라고 그랬다?”
“고문실은 무슨요. 유명이 리더십에 입 찢어질 준비나 해라.”
메이킹필름이 돌아가자, 정말로 입을 떠억 벌린 심사위원들.
“으앗, 에바가 테스트는 무슨 테스트냐고 했어. 그냥 제발 와 달라고 빌어도 시원찮다고.”
“큭큭, 우리 에바 분위기 파악 잘하네. 한국 오면 사회생활 잘 하겠다.”
그렇게 행복해하던 그들은,
[신유명씨, 누굴 고를지는 결심하고 오셨나요?]한 순간에 울부짖게 된다.
[으음…제가 골라야 하는 상황이네요?]“보형아!!!!”
“저거 보형이야, 보형이!”
“보형아아아아…!”
모두의 비명이 한꺼번에 터졌다.
176 무표정 연습
“보형이죠, 보형이 맞죠?”
“진짜 들어줬어…내가 한 말…”
소진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보형이를 다시 보고 싶은 사심 절반, 오랜 팬클럽 생활로 얻은 노하우 절반으로 건넨 조언이었다. 막힐 땐 보형이라고.
그런데 정말로 자신의 조언을 참고할 줄이야.
물론 소진과 갓네임드가 좋아하는 것은, 보형이라는 가상의 캐릭터가 아닌 신유명이라는 배우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의 모습을 다시 보고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리고 화면을 보아하니, 원래 보형이를 알던 사람 뿐 아니라 모르던 사람들까지도 보형이에게 꺼뻑 넘어간 것 같다.
[어떤 분이 제일 좋은 미끼를 주실 건가요?]저 상큼한 웃음.
평소의 차분한 웃음이 아닌, 보는 누나들을 쥐락펴락 애타게 만드는 웃음에 또 한 명의 누나가 조련되었다.
[대본! 대본 써드립니다!]“지금 에바가 유명이를 위한 대본을 써주겠다고 한 거 맞지? 와 진짜…”
“휴지! 휴지! 저 얼른 눈물 닦고 저 모습 제대로 영접해야 한단 말이에요!!”
흥분한 것은 에바 뿐만이 아니었다.
신유명 쟁탈전에 조지와 나탈리까지 참여하자, 분위기가 더욱 후끈 달아오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회원들의 의견은 분분히 갈렸다.
“나탈리 클래스도 괜찮은 것 같아. 처음부터 유명이 알아보고 쭉 지지해 준 심사위원이잖아. 워낙 멋진 여배우이기도 하고.”
“아니 에바다, 에바 클래스로 가자! 낯선 외국인에게서 갓네임드의 냄새가 난다. 저 분 지금 유명이한테 치인 듯.”
하지만 그들의 의견은 데렉의 제안을 들은 후,
[앞으로, 데렉 맥커디의 연관 검색어로 신유명이란 이름이 붙게 될 겁니다.]“미친….”
“또라이…또라이지만 최고야…세상 섹시해…”
“데렉!! 데렉 클래스 가자앗!!”
단번에 천하통일 되었다.
그렇게 유명이 데렉의 클래스를 선택한 후, 골드회원들은 다시 한 번 서로를 마주보았다.
“이거 뭐야…”
“신유명 팬클럽에 가입한 2년 전의 나에게 엎드려 절하고 싶다.”
“심사위원들도 다 우리 팬클럽 가입하는 거 아닐까요?”
“설마…”
그것이 오늘의 클라이맥스인 줄 알았지만,
9화의 말미에서 그들은 한 번 더 화들짝 놀라게 된다.
데렉 클래스의 첫 수업, ‘두 번 걷기’에서 유명의 모습을 보고.
“저거…이방원?”
“아니, 아닌 거 같은데…”
“설마…유명이 버전 정몽주…?”
“끄아아악–!!”
의 보형과 의 정몽주.
유명의 과거 작품 중 두 가지의 캐릭터가 캐스팅보트 9화에 동시에 등장했다.
그들은 방송 관람이 끝나자마자 황급히 인터넷을 켰다. 모든 포털의 1면을 메우고 있는 뉴스들. 이미 난리가 난 팬클럽 게시판.
[캐스팅보트에 연예학개론이 묻었다? 미국 전파를 탄 윤보형 화제만발.] [캐스팅보트 데렉 클래스 첫 과제 , 정몽주 연기. 그의 도전은 어디까지?]다시 한 번 한국이 뒤집어졌다.
*
[보우형아아…]에바가 핏발을 세운 눈으로 신음했다.
앞에 놓인 노트에는 알아볼 수 없는 낙서가 죽죽 휘갈겨져 있었다.
[아아, 신유명과 데렉에게 써줄만한 대본…뭘 쓰지? 뭘 써야 하지?”]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무수한 영감이 머리 속에 휘몰아쳤지만, 끄집어내 보면 그 둘에게는 역시 부족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들의 연기로 더 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다시 쓰는 것을 무한 반복 중.
그것은 어제 캐스팅보트 9화 방송 이후로 더 심해졌다.
[한 번만 더 볼까?]에바는 방송 녹화분을 재생했다. 어제 밤부터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으음…제가 골라야 하는 상황이네요?
‘아아…앓다 죽을 우리 유명이…!’
9화가 방영된 어제 저녁 이후로, ‘윤보형 바이러스’는 미국 전역을 감염시켰다.
에바는 그것이 유명이 맡았던 배역의 편린임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신유명이란 사람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뭐야, 티비 보다가 갑자기 심장이 쿵…
-저 배우 전직이 뭔가요? 마성의 매력…
-와…진짜 사람 홀리는 표정이네. 미국 영화계 최고 인물들을 앞에 놓고 자신에게 애걸해 보라는 건방진 소리를 하는데도…건방지단 마음이 안 생겨. 나도 애걸하고 싶어!
남자의 애교란 미국의 문화권에선 메이저한 매력이 아니었는데도,
이상하게도 자꾸 빨려드는 그 말투와 표정에 네임드갓닷컴의 접속자 수는 다시 한 번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에바는…
‘그걸 보면 당연히 넋이 나가지. 후…이런 배우에게 어떤 대본을 써 줘야 두고두고 후회가 안 남을까.’
아리자데 왕국 살인사건, 졸업미션으로 더욱 깊어진 그의 연기를 보았다.
자신이 쓴 세계를 꿰어 맞추고, 상상 이상으로 훌륭히 연기해 내는 유명의 모습을 보면서 에바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두방망이질쳤다.
창작자에게 자신의 세계가 현실에 구현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주는 행위. 그걸 가장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구현해낸 배우를 보았을 때, 다음 작품을 쓰기 망설여지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번 기회가 혹시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초조함.
그러니 후회 없을만큼 최고의 대본을 써내고 싶다는 압박감.
그런 감정들에 짓눌려 에바는 아직 대본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네임드갓닷컴에 접속한다.
오늘도 접속자가 과포화상태인지 매우 느리게 구동되는 팬사이트에는, ‘신유명’의 지난 작품을 우리도 보고 싶다는 절규가 몇 초에 한 번 꼴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나는 다 봤지롱, 후후.’
에바는 ‘언니’를 통해 , , 를 모두 보았다. 을 못 본 건 참 아쉽지만.
그렇게 현실 도피를 하는 중에, ‘언니’에게서 메신저가 온다.
six: 에바. 오늘은 최고의 선물을 하나 줄게.
evar: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는 말인가요!
six: 후훗. 이건 정말 금단의 비약이야. 삶이 어렵고 힘들 때 이걸 보면 모든 것이 녹아내리지.
evar: 딱 지금 제 상태에요! T^T
‘15초? 작품이 아닌가?’
다운로드가 완료된 파일을 보며 갸웃한 에바는, 그 파일의 재생버튼을 눌렀고,
온 몸에서 힘이 풀렸다.
“누나!”
‘Oh, my…!!’
“힘들지- 오늘도 정말 고생했어!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한 누나가 자랑스러워.”
‘gooooooood!!!!’
그 영상을 20번쯤 재생한 후에, 에바는 다시 워드 파일을 켰다.
그 어떤 슬럼프도 이겨내고, 그에게 좋은 대본을 써 주겠다는 의지가 눈에 활활 불타올랐다.
*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선물로 불을 얻게 된 복만큼의 재앙을 인류에게 보내려고 했다. 제우스의 뜻으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흙으로 최초의 여성, 판도라를 빚어낸다.
신들은 그녀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프로디테는 사랑스러움을, 아테나는 재능과 옷을…선물 행렬이 이어진 끝에 마지막으로 헤르메스가 그녀에게 거짓, 아첨, 교활함, 호기심을 준다. 그리고 그녀는 에피메티우스에게 보내져 그의 아내가 된다.
에피메테우스의 저택에는 항아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절대 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다. 하지만 헤르메스에게서 호기심을 받은 판도라는 결국 항아리를 살짝 열어보고 말았다. 그 안에서 죽음과 병, 질투, 증오 등 수많은 해악이 튀어나왔고, 다급히 판도라가 뚜껑을 닫았을 때, 항아리 안에는 희망만 남게 되었다.
[이게 판도라의 전설이에요. 다들 대강은 아시겠지만.] [네. 이걸 공연으로 만드는 건가요?] [내용은 꽤 변형될 겁니다. 원래의 판도라는 신이 의도적으로 창조하여 인간에게 보낸 첩자같은 느낌이지만, 우리의 판도라는 태초의 인간, 그 자체가 될테니까요.] [태초의 인간…]위고가 자신들을 보았을 때, ‘천사, 악마, 인간’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마르타가 천사, 프리야가 악마라는 말도 했지. 그렇다면 인간은…
[그게 저인가요?] [딩동댕. 정답입니다.]위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야와 마르타의 상반된 분위기도 한 몫하긴 했지만, 그가 이번 모티브를 꺼내기로 한 핵심 유인은 유명에게 있었다.
그가 이걸 연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아니 거의 유일한 배우일 수 있어서.
[구상은 마쳤지만 완성본은 아직 안 나왔어요. 제가 완성본을 만들 동안 여러분이 연습할 것은, ‘무표정’입니다.] [무표정요?]마르타가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네. 신과 태초의 인간. 오염되지 않은 존재들이죠. 그들의 무표정을 연습해 주세요.]프리야도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거린다.
[음…완전히 얼굴에서 힘을 풀라는 주문이세요?] [으음…프리야, 무표정을 한 번 지어봐요.]프리야가 얼굴에서 모든 힘을 떨군다.
[노노, 이게 아니야. 마르타도 한 번 해보죠.]위고가 마르타 쪽으로 한 발 다가선다. 마르타도 근육에서 힘을 주욱 빼고 눈빛을 풀었다. 하지만,
[마르타가 좀 낫네. 그래도 이게 아니에요.]그리고 그는 유명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말하는 완전한 무표정이라는 건, 근육에서 힘을 빼라는 의미가 아니고-]그리고 유명의 표정을 보더니, 움찔 뒤로 한 발 밀여 입을 멍하니 벌린다.
‘어어…저거. 그래 저건데…뭐야 어떻게 한 거야?!’
거기에는 감정을 부여받기 이전의,
완전한 무無의 얼굴로 돌아간 한 존재가 서 있었다.
*
[……]위고의 침묵이 길어지자, 유명이 먼저 말을 걸었다.
[감독님?] […응? 아아…미안해요. 잠시 넋을 놓았네.]당황한 것도 잠시, 이내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무엇을 요구하려 했는지 정확히 이해한 것도 감탄스러웠지만, 그보다 대단한 것은 ‘저걸’ 실제로 해냈다는 점이다.
프리야와 마르타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 홀린듯이 유명을 보던 시선을 떼고 설명을 요구했다.
[감독님, 저거 뭐에요?]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뭘 한 건 알겠어요. 도대체 뭘 한 거죠?] [유명씨가 설명해봐요.]그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유명에게 요구한다. 부담스럽다.
[음…일반적인 사람한테 정자세로 서라고 해도 완전한 정자세로 서지 못하잖아요.]가장 반듯한 자세로 서보라고 요구하면, 사람들은 보통 틀어진 자세를 취한다.
평소 많이 꼬는 다리, 많이 쓰는 손, 일할 때의 자세, 잘 때의 자세, 사소한 습관들이 몸의 균형을 비튼다. 그래서 ‘기본 자세’부터가 틀어진 자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회원님은 목이 항상 왼쪽으로 기울이고 계시네요-
허리 펴시고 무게 중심을 조금 앞쪽으로 이동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