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
유명이 퍼플 나염 티셔츠를 가리키며 묻자 민희가 다시 한 번 놀랐다. 보통은 티셔츠가 자켓이나 바지보다 비싸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얘 뭐하는 애야?’
그리고 그 다음 이어지는 말에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 꺼내보세요. 저한테 어울릴 것 같은 거 전부.”
*
70만원을 한 번에 써버렸다.
금쪽같은 군대 월급 통장과, 제대 후 친척들이 준 용돈을 탈탈 털었다.
옷을 사는데 대부분을 썼고, 민희가 소개해 준 헤어샵에 가서 머리도 다듬었다.
‘후아…쇼핑에 이만한 돈을 써보는 건 처음이네. 그래도 잘한 거 같다.’
배우를 하려는 이상, 세련된 이미지도 중요하다.
패션은 초기 투자 비용이 없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든든한 코치가 있으니 헛쓴 돈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전민희와 누나 동생하는 사이가 됐지.’
아직 매달 월세를 걱정하는 처지의 전민희다.
한 번에 몇십을 쓰고 간, 배짱있고 옷태나는 이 고객에게 민희는 껌뻑 넘어갔다.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티셔츠와 소품을 몇 개 서비스로 주는 것과 더불어,
-너 참 코디하는 보람이 있다. 앞으로 네 스타일은 누나가 책임지마! 옷 말고도 살 때 고민되는 아이템 있으면 물어봐.
017.XXX.XXXX
유명은 새로 저장된 번호를 뿌듯하게 내려다보았다.
*
대형 강의실에 상당한 수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 작품 이라며?”
“원영이가 주연 엄청 벼르고 있다더라.”
시끌벅적한 가운데, 뒷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고, 시선이 쫘악 집중되었다.
못 보던 얼굴이었다.
‘누구야? 신입인가?’
‘와 우리 학교에 저런 애가 있었나? 옷 입은 간지봐라.’
‘저 오빠 누구지? 내 타입인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던 학생들의 침묵을 깨고 낯선 이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것은, 이번 연극의 기획장 서문식이었다.
“공대분인가요? 여기 6시에서 10시까지 저희 동아리에서 리저브했는데요.”
“안녕하세요. 신유명입니다. 1학년때 창천 활동하다 군대가서 이번에 복학했습니다.”
“신유명? 신유명…어?”
문식이 깜짝 놀랐다.
기억을 뒤져보니 3년 전에 그런 1학년이 하나 있었긴 했다.
늘 조용하고 시키는 일만 했던, 끼 많은 연극팀원들 사이에서 있는지 없는지 눈에 띄지도 않았던 녀석이.
‘아니, 2년간 사람이 이렇게 변한다고?’
유명을 기억하는 몇몇 선배들도 혀를 내둘렀다. 군대 갔다오면 분위기가 바뀌는 애들이 있긴 하지만,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유명을 도저히 기억해내지 못한 3학년 박한상이 고개를 길게 빼고 끼어들었다.
“복돌이야? 왜 모르겠지. 그런데 이번에 뭐 지망이야? 의상팀?”
“아뇨. 배우 지망입니다.”
“그래? 이번에 배우 지망이 워낙 많아서 초짜가 역 받긴 힘들텐데.”
너무 일차원적인 한상의 경계에 유명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늘 이 말 여러 번 한다는 생각을 하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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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리딩인데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죠, 선배님.”
차분한 말투지만 내용은 만만치 않은 유명의 대꾸에 한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라 대거리를 하려는 찰나, 강의실의 앞문이 열리고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이번 공연팀의 연출부였다.
“안녕하세요. 창천 29기 철학과 98학번 최철주입니다. 이번 공연 연출을 맡게 되었습니다.”
남자다운 외모. 짙은 눈썹.
깐깐하고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이 선배를 유명은 기억하고 있다.
회귀 전 생에서 유명에게 첫 배역을 준, 그의 첫 연출이다.
“조연출 경제학과 98, 사준한입니다.”
고개를 옆으로 까딱하며 웃는 조연출. 완전히 접히는 반달눈이 인상적이다.
연출을 하기 전 29기의 대표 주연급 배우이던 최철주에 비해, 사준한은 능글능글한 성격처럼 톡톡 튀는 캐릭터 연기를 하던 배우로 기억한다.
“예전 공연들에서 악랄한 연출부에 이를 갈면서 제가 다짐했던 게 있습니다.
내가 연출이 된다면 정말 이해심넓고 착한 연출이 될 거라고.”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런데 조연출이잖아요?
그래서 역사에 길이남을 악랄한 조연출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각오가 안 되신 분은 지금 나가셔도 좋습니다~”
눈웃음을 치며 생글생글 얘기하는 준한의 말에 좌중이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학번이 빡세기로 유명한 연극팀이지만, 공연준비모드에 들어가면 4학년 선배들도 연출부엔 설설 기어야 한다.
-연출의 말이 법이다-
그것이 의 전통이었다. 그 전통을 굳게 지키겠노라, 조연출이 첫 모임부터 군기를 잡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스탭장들 앞으로 나와 주세요.”
철주의 말에 여기저기서 몇 명의 사람들이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기획장, 무대장, 조명장, 음향장, 의상장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스탭 지망들은 각 팀장 찾아가 면담하고, 배우 지망들은 지금부터 리딩 시작합니다.
봄 공연은 준비기간이 촉박해서 다음주에 바로 캐스팅 들어갈 겁니다.
캐스팅 떨어진 후 스탭 지망도 가능하지만, 스탭장 입장에선 처음부터 스탭 지망한 사람들이 예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잘 생각해서 지망하세요.”
우르르 사람들이 나누어지고,
유명도 리딩을 위해 둥글게 붙여둔 책상 하나에 앉았다.
*
“어디 한 번 얼마나 긴~~가 보여줘라, 응?”
한상이 일부러 유명의 옆자리에 와서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을렀다.
연기초보가 제 옆에서 비교되어 깨갱하기를 바라는 치기어린 행동이었다.
탁- 탁- 탁- 탁-
대본이 한 권씩 나누어졌다.
“1막 1장 스타트.
아파트에 매달려 유리를 청소하는 김철수와 남편 몰래 가사도우미를 하는 부인 이영숙이 베란다 창문으로 조우한다. 김철수에 박한상, 이영숙에 신나현. 고!”
연출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학생이 리딩을 시작했다.
“당신 여기서 뭐해?”
“헉! 여..여보!”
“이놈의 여편네가. 누가 돈벌어오래?”
“여..여보. 위험해요. 흥분하지 마요!”
둘다 해본 가락이 있는 애들이라 무난한 리딩이란 생각을 하며 듣던 연출은, 박한상 옆에 앉은 뉴페이스에 눈이 쏠렸다. 그는 조연출에게 속삭였다.
“쟤 누구야?”
“아까 문식이가 그러는데 00학번이라네? 우린 군대 가있을 때라 몰랐나봐.”
“스타일 좋은데?”
그는 적절한 시점에 박한상과 신나현의 리딩을 끊고 배역을 옮겼다.
대본 리딩은 이렇게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읽게 해서, 배우와 배역의 이미지를 맞춰보면서 진행되었다.
“김철수에 신유명, 이영숙에 배수현. 고!”
그리고 그가 듣게 된 것은,
울림이 풍부하고 전달력이 좋은 목소리였다.
“내가 지난 달에 백만원 갖다준 건 어쩌고!”
“그건 적금했죠.”
“그 돈으로 생활비 쓰면 되잖아!”
“진아가 피아노학원 가고 싶대서…아이고오 여보오 위험해요!!”
“으헉! 아이고 깜짝이야. 진아 고건 집안 사정 알면서 아이고···”
80년대 돈없는 서민의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이 도입부는,
화나고 속상한 감정과 매달린 줄에서 떨어질까 달달 떠는 감정을 왔다갔다하며, 김철수의 삶을 코믹하면서도 애처롭게 보여줘야 하는 난이도 있는 파트였다.
그런데!
‘…쟤 뭐야?’
‘아역연기자 출신인가?’
‘목소리가 귀에 꽂히네. 누구지?’
유명은 동작없이 목소리만으로도, 음색과 음차를 두며 완전히 다른 감정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