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88
하나가 깔깔대며 웃다가 보형과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얼굴은 이미 다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하나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고, 남은 그가 혼잣말을 뇌까린다.
“개 같은 것들에겐 개 같이 굴어줘야···”
그 말투의 위압감.
벌레를 툭툭 털어내는 듯한 감정없는 말투.
오늘에서야 백승효는 자신의 착각을 깨달았다.
육미영 작가가 칭찬하긴 했지만, 독특하고 약간은 뮤지컬스럽기도 한 연기에 ‘개성있는 연기자’라고 여기고 있었던 저 사람은,
캐릭터와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연기가 가능한 배우라는 것을.
“커-트. 신유명씨 갑자기 연기 톤이 왜그래?”
그리고 세상엔 보는 눈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
주피디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다된 밥에 끼어든 건방진 신인.
그만 아니었다면 문유석에게 그렇게 빌빌대는 꼴을 보여주지 않아도 됐고, 육미영이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연기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육작가가 리딩에서 그를 칭찬할 때도, 왜 저렇게 특이한 연기를 과찬하나 싶었다.
그에게 있어 보형 역은 어디까지나 조연이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 해도 드라마의 핵심은 멋있는 남자 주인공이다. 멋지고 능력있는 남자가 시련있는 여주를 감싸고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그것이 드라마의 왕도가 아닌가.
그래도 여태까지는 대놓고 지적하진 못했다.
작가가 그렇게 ‘딱이다’라고 극찬한 연기인데, 자신이 바꾸라고 하기도 우습다. 뒤에 문유석이 있는 것도 신경쓰이고.
그런데, 이건 확실히 아니지 않나?
그렇게 몽실몽실하던 캐릭터가 갑자기 진흙탕에 발을 딛었다. 캐릭터 붕괴라고도 할 법 하다.
그래서 주피디는 당당하게 NG를 외쳤다.
“이제까지 보형이 캐릭터가 있는데 표정이 그렇게 확 바뀌면 어떡해! 다시 찍읍시다!”
“저…감독님. 제 생각엔, 보형이는 하나를 대할 때와 다른 세상을 대할 때를 확실히 구분짓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은데요.”
유명이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아 신인이라서 모르나 본데, 그렇게 질감이 확 바뀌면 그림 튀어요. 아직은 자기주장할 때가 아니지 않아?”
“하지만 감독님···”
“거 참 말귀 못알아듣네. 조연출! 5분만 쉬었다 가자! 잘 생각해봐요, 신인의 태도.”
주피디가 휙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피러 나갔고, 하린이 유명에게 속삭였다.
“오빠, 저도 해봤어요. 피디님 한 번 꽂힌 건 얘기 안 들으세요.”
“그래도 얘기해봐야지. 내가 납득이 안 되는데 연기가 될 리가···”
“그래서 제가 내잖아요. 무한NG.”
“…?”
“피디님 지칠 때까지 꿋꿋이 찍는 거죠. 건방지다는 평판을 얻는 것 보단 멍청해서 똑같이 연기한다고 여겨지는 게 나으니까요. ‘여자’보다 ‘인간’인 하나 캐릭터, 포기할 순 없잖아요.”
말투만 보고 곰인 줄 알았더니…
역시 12년차는 다르구나.
유명은 한 가지를 배웠다.
*
그 후로 피디와 유명의 무한 배틀이 시작되었다.
누가 먼저 포기하고 나가떨어질 때까지, 같은 장면을 같은 연기로 무한히 다시 찍는 배틀.
다행히 유명에게는 15년의 인내력이 있었으니, 피디보다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평소 하던 것처럼 하라는 걸 왜 못해?”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됐어요. 다시 해도 바뀔 것 같지도 않네. 오케이! 이건 사실 노케이다 노케이!”
유명의 저자세에 우쭐해진 피디가 마음껏 핀잔을 날렸지만, 유명은 묵묵히 그가 준비해온 캐릭터대로 분량을 이수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장면.
처음으로 백승효와 붙는 씬이다.
“리허설 가겠습니다!”
하나를 매일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풀던 도준은 어느 날 사장의 호출을 받는다.
-혁성그룹 회장님 큰손주되시는 분이 네 팬이라고 한 번 보자고 하신다. 예쁘게 보이고 와. 잘보이면 거기 계열사 광고들까지 줄줄이 들어올 수도 있어.
도준은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룸으로 안내받고,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보형.
“안녕하십니까! 배우 권도준입니다!”
허리를 꾸벅 접는 그에게, 어려보이는 얼굴이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킨다.
“아아,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도준은 평소 받지 못하던 대우에 조금 마음이 상하지만 표현할 수는 없다. 자신이 아무리 요즘 잘 나가는 배우라고 해도, 재벌가 후계자에게 밉보이면 훅- 날아가는 것도 한순간이니까.
“연기 잘하더라구요.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우의 본분은 연기이니까 늘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흐음…배우의 본분은 연기이고, 사람의 본분은요?”
“네?”
보형이 쇼파에 뒤로 기대어 앉아 다리를 꼰다.
눈을 내리깔고 지그시 눈빛으로 내려밟는다.
백승효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찍어누르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갑’ 그 자체였던 사람의 ‘하대하는 시선’.
불쾌하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당연하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살짝 아래로 떨어진다.
“사람이란 관점에서 보면, 배우라는 것도 부자라는 것도 다 껍질 아닐까요?”
“네? 아…그…그렇죠.”
“그런데 그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서, 껍질과 본인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무슨.”
“껍질이 너무 두꺼워지면 괴물이 되어서, 알맹이가 껍질에 잡아먹히게 됩니다.”
“…”
“그냥 권도준씨가 혹시 그럴까봐, 팬으로서 드리는 조언입니다.”
“아 네…명심하겠습니다.”
보형이 씨익 웃는다.
“봐요. 껍질만 보자면 나는 ‘너’한테 반말해도 되는 사람인데, 존대말 쓰고 있잖아요?”
그건, 그가 하나에게 했던 갑질에 대한 복수.
육미영의 대본은 특이하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여주를 남주가 구원하지 않는다.
여주와 남주는 애초에 갑을 관계며, 이후 라이벌 관계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사랑에 빠진다.
한없이 작고 초라하지만, 알맹이만은 튼실했던 여주.
그런 그녀가 성장해서 남주와 비등하게 겨루고 사랑하기까지, 그녀의 조력자이자 스승으로 수평을 맞추어주는 ‘치트키’.
A+B=C 에서
A=C 가 되기까지의 B.
그것이 육작가가 그려내고, 유명이 구현하려고 하는 캐릭터,
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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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동료
“컷! 다시!”
감독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촬영장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 연기가…NG라고? 왜?
“조연이 주연을 그렇게 깔아뭉개면 어떡해요! 연기를 죽여서 해야지!”
“피디님, 애초에 대사가 그런데···”
슬쩍 유명의 편을 들던 조연출이 피디가 째려보자 깨갱하고 물러났다.
“대본이 좀 그렇긴 하지만…흠흠. 그래도 적당히 부드럽게 조언하는 수준에서 대사칠 수 있잖아. 기세로 이겨먹으려고 하면 어떡해.”
“피디님, 제 생각에도 이게 맞는 것 같습니다만···”
피디를 말린 것은 백승효였다.
이 장면은 도준이 보형에게 밀려야 하는 장면이 맞다. 진짜 기세로 밀려버린 건 조금 분하지만.
그의 만류에 피디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도 백승효의 눈치는 본다. 이미 상당한 스타이고, 문유석을 빽으로 두고 있기도 하니까.
“글쎄. 이거 잘못하면 주인공이 찌질하게 그려지게 생겼어. 이래서 드라마에 감정 이입이 되겠어요?”
“찌질한 거 맞죠 뭐. 도준이가 초반엔 연기실력 빼면 인간성은 좀 별로잖아요. 대신 하나 만나고 성장하는 캐릭터니까요.”
“흠…난 모르겠네. 승효씨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뭐. 중반에 다 씹어먹어서 시선 가져올 수 있죠?”
“물론입니다 피디님.”
백승효의 지원사격으로 그 날 촬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이 상황은 반복되었다.
하나와 보형이 연기할 때마다 시간이 자꾸 딜레이되었다. 지적을 해도 바뀌는 것이 없으니 피디의 말은 점점 더 심해져 갔고, 그들은 폭언을 견디며 묵묵히 제 고집대로 연기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물론,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하나가 몇 배 더 고생이었다.
“NG!”
“컷-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