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Degree RAW novel - Chapter 67
67화. 백약원(百藥園)
무미건조한 음성이 한립의 귓가에 울리자 금제가 눈 녹듯 사라졌다. 이 모습에 한립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자 백약원이라 적힌 편액 앞에 도착했다. 뜰은 상당히 넓어 아직 원 내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짙은 약초의 향기가 벌써부터 코끝까지 전해졌다.
“멍청이 서서 뭐하는 게냐. 어서 들어오너라.”
잠시 얼어있던 한립이 목소리를 듣고 바삐 움직였다. 안에 들어가니 원 내의 풍경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약초가 심어져 있는 밭에는 한립이 모르는 낯선 약초가 무성했는데 식물들이 영기를 뿜고 있어 원내가 영기로 충만했다. 한립 같은 초급 수도자는 크게 숨만 들이쉬어도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방으로 들라.”
다시 한 번 한립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체구가 작고 마른 노인이 서있었는데, 한립이 들어서자 불만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네가 백기당에서 파견한 제자라고? 쯧쯧, 나이도 너무 어린데다 공력도 떨어지는군. 엽가 녀석, 어찌 사람을 보낼 때마다 전보다 못해! 내게 너무 성의가 없는 것이 아니냐.”
노인은 한립이 마음에 차지 않는 지, 보자마자 화를 냈다.
“제자 한립 마 사백을 뵙습니다!”
한립은 이미 노인의 성질머리에 대해 들었던 터라, 놀라지 않고 예를 갖춰 인사했다.
“흥!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중벌을 받는 것은 알고 있느냐? 지금이라도 엽 사제에게 다른 이를 파견해 달라 청해도 괜찮다.”
“백약원의 규모를 유지한다. 약초를 죽이지 않는다. 매월 일정 수량의 약초를 올린다. 이것이 다라면 제자 한립 자신 있습니다.”
노인이 쌀쌀맞은 태도로 돌아가라 했음에도 한립이 침착하게 말했다. 한립의 말에 노인은 약간 의외라는 듯이 한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제자는 처음에 파견되었던 놈을 빼고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노인의 의심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따라 오거라.”
노인은 한립의 말에도 냉담한 태도로 방을 나섰다.
“여기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
“십분의 일 정도 됩니다.”
노인이 뜰에 가득한 약초를 가리켜 묻자, 한립이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번에도 약간 놀랐지만 곧바로 냉소를 띠었다.
“네 녀석이 정말 약초를 구별해 낸다면 이곳의 관리는 네게 맡기마.”
노인의 말에 한립이 바로 약초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야화, 황구초, 백학지, 망월초…….”
그는 원내를 여유롭게 걸으며, 기억이 나는 대로 약초의 이름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가소롭다는 듯 보고 있던 노인도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워했다. 한립이 정말 보기 드문 약초의 이름을 알아맞힐 뿐 아니라, 자신도 겨우 알아낸 약초의 이름도 몇 가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됐다.”
아직 절반 정도 밖에는 살펴보지 않았는데, 노인이 한립을 멈춰 세웠다.
“잘했다. 보아하니 완전히 허풍은 아니었구나! 이곳의 관리는 잠시 동안 네게 맡기마. 이것은 이곳을 들어오는 데 필요한 금제 영패이니, 잘 갖고 있거라.”
만족스런 기색으로 품에서 흑녹색 목패를 꺼내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방 안에 내가 정리해 놓은 약초에 관한 서책이 있으니 잘 읽어두도록 해라. 어쨌든 아직 모르는 약초가 많으니, 잘못해서 요절을 내서야 되겠느냐.”
노인이 수염을 만지며 당부했다.
“사백의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허! 네 능력이 그 입만큼 쓸 만했으면 좋겠구나. 그래야 나도 이 약원에서 벗어나 수행에 집중할 수 있겠지. 이곳은 노부의 개인적인 약초 재배지이니, 정말 일을 잘 해낸다면 섭섭지 않게 해줄 것이야. 허나 안 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썩 꺼져서 다른 놈을 불러오도록 해라. 알아들었느냐?”
노인의 거침없는 언사에도 한립은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엽 사숙이란 자보다는 나아 보여, 호감이 생길 정도였다.
엽 사숙은 기껏해야 군자 흉내를 내는 위선자에 불과했지 않은가? 한립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한립에게 약초 관리에 관한 주의사항 몇 가지를 더 설명해 주고서야 급히 방안을 정리하고 나가버렸다.
한립은 마 사백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 가는 대로 초가집 하나를 골라 청소를 시작했다. 그곳을 자신의 방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 * *
황풍곡 신입제자로서의 첫 날이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이튿날 한립은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 진정한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노인이 남긴 체득과 필기를 연구하고, 밤에는 몰래 나가 약초 밭 구석에 신비한 병을 묻어두고 법보 조각으로 덮어 영기를 흡수시켰다.
이렇게 하니 병을 묻어둔 곳이 다른 곳보다 영기가 약간 더 짙어진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눈길을 끌만한 현상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엽 사숙이 한립을 찾아왔다.
그는 원래 말한 바의 오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는 영석과 법기를 갖고 왔는데, 심지어 단약에 관한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루 밤 사이에 재물이 엄청나게 불어났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그가 받은 것은 중계 영석 두 개와 저계 영석 수십 개, 그리고 여러 가지 종류의 부적이었다. 그리고 좋은 법기도 세 가지나 얻었다.
엽 사숙에게 받은 중계 영석 중 하나는 홍광이 번뜩이는 화속성 영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진한 황색의 토속성 영석이었다.
그것들은 가장 흔한 종류였지만 옅은 속성의 색채를 띠는 저계 영석과는 확연히 달라서 저계의 영석과 헷갈릴 일은 없었다.
세 게의 법기도 축기기의 고수가 제련한 것으로 꽤 쓸 만했다. 태남소회에서 흔히 보던 수준보다 훨씬 강했다. 그 중 첫 번째 정강으로 만든 듯 보이는 반지는 법술을 펼치면 스스로 날아가 적을 묶어 버렸다.
게다가 크기도 자유롭게 변할 수 있어 전신의 법력을 모두 불어넣으면, 그가 머무는 초가집을 덮어버릴 만큼 커지기도 했다.
또 삼각형의 흑색 깃발은 영기를 불어넣고 휘두르면 주변을 둥근 모양의 검은 안개로 감싸 적의 영기를 잃게 하고, 자신의 종적을 감춰 방어성 법기로서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법기보다 한립을 기쁘게 만든 것은, 마지막 보조성 법기였다. 안에 넣은 물품의 영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만드는 황동색의 병이었다. 이 병모양의 법기를 보자마자, 한립은 오랫동안 녹색액체의 저장 방법에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기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 그는 그 작은 병이 매일 밤 흡수하는 것이 천지에 퍼져있는 자연적인 영기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다만 이전에는 이를 증명할 방법이 없어 마음속으로만 계속 의문을 품어왔었다.
그는 해가 저물어 밤이 되자 응결된 녹색 액체를 황동색 병에 담아, 이 법기가 액체의 영기를 보존할 수 있을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립은 곧 실망하고 말았다.
황동색 병도 녹색 액체의 보존기한을 조금 연장시켰을 뿐,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로 그는 액체는 그저 천지의 영기를 응집한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작용하는 듯했다.
그는 이 수수께끼는 현재의 그로선 풀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머릿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그저 자연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문이 해결되기를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다.
그는 다시 액체의 힘을 빌려 대량의 황룡단과 금수환을 만들어냈다. 효과가 떨어지는 단약들이라도 복용하면서, 법력을 증진시켜줄 영약의 비방을 찾아낼 심산이었다. 이것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막 입문한 신입제자가 멋대로 황풍곡을 휘젓고 다니며 단약의 비방을 찾아 헤맨다면,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 뻔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착실히 백약원에서 수련을 하며 몇 년을 숨죽이고 지내다가, 문 내의 사정을 완전히 파악해 자신도 황풍곡의 사람이 된 이후에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계획이었다.
매 분기마다 뜰의 약재를 수확해 올리는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액체를 희석한 물만 있다면, 하룻밤에도 수많은 약초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오래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마 사백이 이를 허락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모든 계획을 세우자 한립은 바삐 돌아다니며 할 일을 시작했다.
낮에 마 사백의 체득이 담긴 수기를 다 살피면 전공 사형인 오풍이 있는 곳으로 부지런히 달려가 초급 법술의 실용구결을 익혔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뜰에 앉아 그것들을 연구하는데 소비했고, 황룡단과 금수환도 매일 다량 복용했다.
* * *
한립은 시간가는 것도 잊은 채 매일매일 바쁘게 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나 흘렀고 수련에 임하는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립은 온종일 백약원에 머물며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알고 지내는 이 또한 거의 없었다. 아마 전공사형인 오풍이나 백기당의 어 집사가 가끔 그를 떠올릴 뿐이었다. 어쨌든 이 둘은 매월 영석을 지급할 때나 공법을 가르칠 때만 한립을 한 번씩 보곤 했다.
한립은 이런 반 은거 생활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마 사백도 처음과는 달리 매달 제 시기에 규정된 약물을 바치는 한립을 꽤 만족스러워했다.
마 사백은 한립을 자신 곁에 묶어두기 위해, 보상으로 내리는 영석의 수량을 늘려주었다. 원래대로라면 두 개 정도의 저계 영석이 지금은 다섯 개까지 늘어났다.
한립은 수많은 단약의 도움으로 장춘공이 2성이나 올라 11성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제 황풍곡 저계 제자 중 중간 정도의 위치에 이르른 것이다. 그리고 11성에 들자 황룡단이나 금수환은 효과를 잃어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앞당겨 다른 단약을 찾는 방법 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황풍곡에서 자신 같은 자를 신경 쓰는 이가 없어 스스로 조심만 하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 * *
무균산(巫鈞山) 중턱에 있는 암석 위에 한립이 올라서 있었다. 거대한 암석이 동굴 하나를 가리고 있었는데 그 동굴의 이름은 악록전이었다.
악록전은 황풍곡의 법기나 단약 등을 제련하는 비방과 서적 및 관련 술법을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곳이다.
또한 각종 연단과 연기에 필요한 보조 도구와 일상적인 재료까지 있어, 문파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금제가 많았고 진법도 층층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항시 백여 명의 제자들이 그 부근을 수시로 순찰했다.
어떤 이는 결단기 사숙조 한 분이 이 악록전 내에서 폐관수련을 하며 이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고수가 이곳을 침입하더라도 막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였다. 한립은 이 같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곳에 내려서자마자 수많은 경계의 눈빛이 은밀하게 그를 주시했다. 그의 법력이 평범한 수준이라 곧 경계는 약해졌지만, 그들은 좋은 법기로 몸을 숨기고 있거나, 그보다 훨씬 법력이 높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한립이 몇 걸음 더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구결을 염해 공중에 홍광을 내뿜자 붉은 빛의 벽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어서 홍의를 걸친 제자 둘이 그 빛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네가 금법을 부수려 한 게냐?”
홍의 제자 중 하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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