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177
〈 177화 〉 서명하시오, 배틀 메이지!(3)
* * *
“레스티 엘레노아.”
그 답을 칼트가 중얼거린 순간이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좀 전까지 켈르할름의 감시를 맡은 하운드다.
“선배님, 오늘 차 업무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특별 사항은 있었나?”
“아, 학생 하나를 호출했다더군요. 특강 수업에 관한 내용인 것 같긴 한데···.”
“수업 하나는 열심히도 하는군.”
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멸망한 학술도시 아르티아가 그리워서, 아플리아에 찾아오기라도 했단 것일까.
“그래서 호출한 학생이 누군데?”
“레스티 엘레노아입니다.”
툭, 하고 칼트의 손에서 팬이 떨어졌다.
“···누구라고?”
“예? 아, 레스티 엘레노아입니다. 잿빛의 차기 마탑주이자 지난번 스케발의 습격 사건 당시 주 표적이 되었다던 그 학생···.”
그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칼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에 얹어둔 단검 주머니를 손에 쥔 채 그가 턱짓했다.
“위치.”
“···예?”
“학생을 호출했다던 위치. 그거 어디냐고. 밀폐된 공간에 학생하고 켈르할름을 같이 두지 말란 원칙은 지켰으리라고 믿는다.”
부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위치를 말한다.
칼트는 남은 하운드들을 전부 소집시키라는 명령과 함께, 걸음을 재촉했다.
불길하다.
무언가, 불길했다.
칼트는 입술을 짓씹으며 뛰듯이 걸었다.
2.
광인(?人).
그런 멸칭으로 불린지도 어언 백 년이다.
주어진 수명의 한계는 진작에 뛰어넘었다. 정령의 피를 뒤집어쓴 그날, 켈르할름은 요정종과 같은 길고 긴 수명을 손에 넣었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삶이다.
바라지 않은 삶에 가치는 없었다.
억지로 연장된 삶을 켈르할름은 다만 흘려보낼 뿐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의미 따윈 없다. 그의 삶은 이미 백 년 전, 아르티아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의미가 없다.’
광기에 기대어 살아간 백 년이다.
‘의미가 없으니, 허무할 뿐이다.’
광기에 휩싸이지 않게 저항한 백 년이다.
‘그립군.’
켈르할름은 추억한다.
백 년 전의 어느 날을.
광인이 아닌 현인(?人)이라 불리던 시대를.
* * *
“별은 참 아름답지 않나요?”
“또 그 소리냐, 셀레스티아.”
아르티아의 상징, 학술탑의 최상층.
그곳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 외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학술탑의 주인이 가꾼 정원은 아니었다.
“아름다워서, 밝아서, 그런데 또 속은 알 수 없어서. 미지이기에 아름다운 거겠지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는 소녀.
셀레스티아 폰 아르타님.
그녀는 제 손으로 가꾸어낸 정원을 바라보며 환히 웃었다. 켈르할름이 그녀를 거둔지 어언 십여 년. 아르티아의 초급반부터 졸업반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가꾼 정원이었다.
“물론, 이 정원도 아름답구요.”
“네 눈에 아름답지 않은 게 있겠냐마는.”
“아하하, 그런가요?”
꺄르르,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벤치에 등을 기댔다. 켈르할름은 제 옆에 앉은 소녀를 흘겨보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긴장되나 보군.”
“아무래도 그렇죠. 열흘 뒤면 저도 이곳을 떠야 하잖아요. 여기서 십 년이 넘어 있었는데.”
“그것이 아르티아의 규칙이니까.”
아르티아에 갇혀 살지 말아라.
넓은 세상을 보아라.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배워라.
그것이 아르티아의 관리자인 켈르할름이 내건 규칙이었다. 자신의 수제자인 이 소녀라 한들, 켈르할름은 규칙에 예외를 둘 생각이 없었다.
“제가 떠나도, 이 정원 관리 해주실 거죠?”
“비서에게 맡길 생각이다만.”
“직접 하세요, 좀. 시간도 많으신 분이.”
켈르할름이 쓰게 웃었다.
“하긴, 네가 떠나고 나면 시간이 많아지긴 하겠군. 너를 가르치는 데만 하루의 절반을 썼으니까.”
“그래도, 성과는 있었죠?”
최상위 정령 다섯 개체를 다루는 소녀.
당대 최강의 정령 술사.
그녀를 가리키는 칭호를 늘어놓아도, 종이 한두 장쯤은 능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녀를 길러낸 켈르할름은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하기에 달려있겠지.”
“하여간, 칭찬 한번을 제대로 안 해주신다니까.”
“밤이 늦었다. 들어가 보아라. 내일도 학생들을 대표하여 연설이 있지 않나.”
투덜거리며 셀레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깊어 달빛이 비치는 정원의 중심으로 소녀는 걸었다. 켈르할름은 턱을 괴고 앉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십여 년간 길러낸, 딸아이나 다름없는 아이.
이제는 너무나도 커버려서, 자신의 곁을 떠날 시기가 된 소녀를 바라보며 켈르할름은 엷은 미소를 짓는다. 잘 자라주었구나.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속으로 삼킨 채 켈르할름이 입을 열었다.
“셀레스티아.”
“네, 스승님.”
달빛이 비친 꽃들이 반짝인다.
꽃들 사이에서, 셀레스티아가 뒤를 돌아본다.
“왜 부르세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옅은 보랏빛의 머리칼이 은은하게 빛난다. 머리칼과 같은 색을 가진 눈동자가 켈르할름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는 별빛이 서려 있다. 보랏빛 속에서 백금색이 빛난다.
별의 맥락을 읽는 이, 와쳐(Watcher).
별에게 사랑받는 아이, 스텔라(Stella).
별에게 두 개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저 아이가, 아르티아의 밖으로 나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업적을 세우고, 또 얼마나 찬란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그것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상상을 하며.
“언제나처럼.”
켈르할름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별을 믿어라. 별은 네 앞길을 밝혀주는 길잡이다. 네 여정을 함께해줄 듬직한 동반자이겠지.”
거기까지 말한 뒤, 켈르할름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고민 후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셀레스티아. 조금 이르지만 졸업 축하한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를 보고선, 셀레스티아는 고개를 숙인 채 쿡쿡하고 웃음을 흘렸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스승님!”
그 미소가.
달빛 아래 빛나던 그 미소가.
“아아.”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는다.
켈르할름은 눈을 감는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수많은 풍경이 눈앞을 흘러 지나간다. 그것은 악몽이자, 끝없는 추락의 서사다.
불타는 아르티아.
별을 저주하는 백발의 여인.
별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짓밟혀 끝끝내 구정물 아래로 추락해버린 소녀.
그 모든 역사를 기억하며.
자신이 남긴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가증스러운 별을 되새기며.
“······.”
켈르할름은 눈을 뜬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학술도시 아르티아가 아니다. 아르티아의 멸망으로부터 백여 년이 흐른 지금, 최고의 마학 아카데미라 불리는 아플리아의 정경이다.
그리고.
“부르셨나요, 르티아 교수님?”
자신의 눈앞에는 한 소녀가 앉아있다.
연한 보랏빛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소녀.
기억 속의 셀레스티아를 닮은 소녀.
“레스티 엘레노아.”
그녀를 바라보며 켈르할름은 입을 열었다.
“셀레스티아 폰 아르타님을 알고 있나.”
너는 누구인가.
3.
전투 마학과 특별 훈련 주간.
“흥,흐응.”
학생들의 비명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라니아는 흥얼거리며 학사 내를 거닐고 있었다. 학생들은 착실히 단련을 따라오고 있다. 역시, 인재들이 모인 아플리아 아카데미다웠다.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가는구나.’
학생들의 성장은 빠른 편이다.
애당초, 어느 정도 기본이 된 아이들이다. 비록 그 기원을 몰랐다곤 하나, 학생들은 제법 긴 시간 동안 배틀 메이지에 대해 배워왔다.
주문의 스톡(Stock).
타격계 주문 기반의 근접전.
육체 강화 주문의 체득.
그들이 오랜 기간 배워왔던 것들은 무가치하지 않다. 그저, 어째서 그런 형태의 전투법을 배우고 있었는지 몰랐을 뿐이다.
‘난 그걸 알려줬을 뿐이고 말야.’
그 기원을 설명했다.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것만으로 몇몇 학생들은 감을 잡은 듯 했다.
‘어렴풋이 잡힌 감각.’
그것을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건, 결국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남은 건, 실전에서의 체득(??)이지.”
실전에서의 체득.
그렇다고 라크의 경우처럼 전장에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 최대한 전장과 비슷한 환경을 조성해둔 체육관에 집어넣은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잘 만들긴 했어.’
북부에서 배워왔던 함정의 양식이 많은 도움이 됐다. 라니아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
이대로만 간다면 켈르할름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도 그리 먼 시기의 일이 아니었다.
‘···뭔가, 좀 죄책감이 들긴 하는데.’
자존심 싸움 때문에 학생들을 굴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됐다. 물론, 그 의도가 불순하긴 하나 결과적으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긴 할 것이다.
언젠가는 배워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선 알아둬야 할 것들이다.
전투 마학과 학생의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들 중 태반은 훗날 전장에 서게 될 것이다. 클래스의 창시자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애당초 배틀 메이지는 병사를 위한 클래스였으니까.
‘그럴 생각으로 들어온 애들도 많은 것 같고.’
명문가 자제들이 많은 아플리아지만, 전투 마학과의 학생들은 유난히도 첩의 자식이거나 가문 내에서 지위가 애매한 경우가 많았다.
전장, 혹은 현장에 서게 될 아이들.
현장에서 공을 쌓아야만 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있다. 아주 많았다. 유난히도 라니아가 전투 마학과를 심하게 굴리는 것도, 그런 이유가 한몫하긴 했다.
‘···그래도 이번엔 사심이 좀 컸는데.’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긴 하겠지만, 그 발단은 자신의 자존심 싸움에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학생들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상황이다.
‘원래 학기 말, 방학쯤에나 가르치려 한 거긴 해.’
너무 앞당겼나.
라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으음···.”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체육관의 앞,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몇 있다. 넋이 나가 있는듯한 그 모습에 라니아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으으음···.”
잠깐의 고민.
“아.”
이윽고 그녀는 답을 내놓는다.
‘클로에는 케이크 주니까 좋아했었는데.’
먹을 거라도 사다 줄까.
그녀의 다시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카페로 향하는 길이었다. 들렸다 오는 김에 간식거리라도 사다 줄 생각으로 라니아는 걸음을 마저 옮겼다.
턱.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때다.
라니아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아플리아의 정원. 그곳에 앉아있는 인물이 둘 있다.
“···뭐야.”
라니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 둘이 왜 저깄어.”
그녀가 방향을 틀었다.
그리곤,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전보다 조금 더 빠르게.
* * *
“셀레스티아 폰 아르타님을 알고 있나.”
레스티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아플리아에 새로 방문했다는, 르티아 교수의 호출을 받고 정원에 와보니··· 대뜸 던지는 질문이 저것이다. 레스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질문이 뜬금없긴 하지만···.’
셀레스티아 폰 아르타님.
그 이름은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다. 레스티는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 더듬을 필요는 없었다. 레스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령사, 셀레스티아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분이라면 알고 있어요.”
역사상 최초로 최상위 정령 다섯을 동시에 부리던 소환사. 서머너(Summoner)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었다.
“정령학의 기본 개요를 집필하시고, 어린 나이에 최상위 정령과 계약한···.”
“아니,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다.”
켈르할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셀레스티아와 너의 관계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이었으나, 잿빛의 눈동자 너머에 일렁이는 무언가 있었다.
“혹, 아르타님 가문의 자제인가. 방계인가? 혈연상의 관계가 있는가. 누군가에게 눈동자를 받은 적은 없나? 인공적인 실험을 거쳤나?”
질문이 쏟아졌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일정한 속도로 이어지는 말이었으나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레스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고아원 출신이에요. 제 혈연관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아르타님 가문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셀레스티아란 인물은 서적을 통해 접해봤을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답을 들려주었으나, 눈앞의 교수는 납득한듯한 기색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해.’
레스티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교수의 눈동자가 불길하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잿빛의 눈동자이나, 그 내부서 무언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다.
레스티가 눈을 감았다 떴다.
보랏빛 눈동자에 별빛이 강하게 깃든다.
시야가 한층 넓어지고, 교수의 모습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레스티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다.
‘···사슬?’
눈앞의 교수의 온몸이 사슬에 휘감겨있다.
사슬은 무언가를 묶어두고 있다. 사슬이 묶어둔 것으로 레스티는 시선을 옮겼다.
‘아.’
불길이다.
거센 불길을 사슬이 묶어두고 있었다. 잿빛 눈동자 너머에서 일렁이는 건 불길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순간이다. 불길이 조금이지만 움직였다.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눈동자.”
사슬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별의 축복을 받았군.”
삐걱거리는 사슬과 함께 불길이 요동친다.
“하나, 경고하지.”
공기가 무겁다. 숨통을 옥죄여 오는 공기에 레스티는 미동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교수를 바라봤다. 그가 손을 뻗는다. 손가락으로 레스티의 눈동자를 가리켰다.
“가증스러운 별을···.”
“야.”
그 순간이다.
“너 뭐하냐?”
콱, 하고 누군가 교수의 손목을 낚아챈다.
주변을 옥죄여오던 마나가 한순간에 흩어진다. 레스티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미쳤냐?”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가 눈을 부릅뜬 채, 르티아 교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