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40
〈 340화 〉 카일 토벤(1)
* * *
검은 비가 쏟아졌다.
쏟아지는 비가 무색의 숲을 검게 물들였다. 검게 물들어가는 숲을 두 사람은 걸었다. 찰박, 하고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일의 걸음은 가볍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작은 미련마저 떨쳐낸 지금, 카일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걸음이 가벼움을 느꼈다. 내뱉은 숨결은 쉽게 흩어졌다.
‘···미래, 미래라.’
미래에서 온 라니엘 반 트리아스.
그녀의 말을 엿들으며 카일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겪어야만 했던 시간에서 자신은 분명 실패했으리라. 흔들리고 말았을 테니까.
자신의 실패로 하여금 그녀는 지옥을 겪었다.
13년의 시간 동안 지옥을 걸어온 라니아의 목소리에는 독이 묻어나왔다. 지독한 독이었다. 증오하고, 절망하고, 그 끝에 모든 걸 잃어서 텅 비어버린 이가 내뱉는 독은 지독했다.
모든 걸 잃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용사가 될 수 없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렇기에 돌아왔다고, 그녀는 말했다.
자신을 믿지 말라고 그녀는 애원했지만 카일은 여전히 라니엘을 믿었다. 미래에서 왔던 어디에서 왔든 라니엘은 라니엘이다. 작은 계기만 있다면 그녀는 또다시 일어서리라 카일은 신뢰한다.
그러니.
자신이 기꺼이 그 계기가 되어주리라.
“······.”
카일은 말없이 앞을 보았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저 너머에는 더 거세게 비가 내리고 있으리라. 그곳에는 한때 자신이 도망쳤던 전장이 있다. 실패의 상징이 되어버린 나머지 잊을 수 없게 된 황야가 있다.
외면했던 위업을 이루어라.
그것이 별이 카일에게 내린 시련이다.
카일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내면의 검(?)을 떠올리며 카일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음을 옮겼을까.
찰박, 하고 물웅덩이가 튀었다.
어느새 카일은 숲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카일.”
카일은 뒤를 돌아봤다.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사라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카일은 사라를 보았다. 사라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머리칼이 사라의 얼굴을 가렸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사라가 말했다.
“역시, 죽을 생각이었군요.”
카일은 침묵했다.
2.
역시 죽을 생각이었군요.
그렇게 질문을 던져보았으나 카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부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사라는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계약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미래에서 왔다고 이야기 한 라니엘을 본 순간 사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죽을 작정이잖아요.”
카일 토벤은.
자신에게 있어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 남자는, 오늘 여기에서 죽을 작정이다. 애당초 인간의 몸으로 이룰 수 있는 위업이 아니다. 정말로 카일은 제 모든 것을 걸 작정이었다.
꾸욱.
제 입술을 깨물며 사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꽉 쥔 사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여기서 죽을···.”
“사라.”
카일이 부드럽게 사라의 말을 끊었다.
사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락.
카일이 손을 뻗어 비에 젖은 사라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눈시울이 붉어진 사라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카일이 말했다.
“얼굴이 엉망이다. 사라.”
“···뭐예요.”
“옛날 생각이 나서.”
카일이 웃었다.
“그때도 이러지 않았나. 그 왜, 네가 납치당했던 그때.”
“도대체 언제적 일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날 그렇게 못살게 굴던 네가 울며불며 내게 달라붙었으니까.”
사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지, 지금 그 이야길 왜 하는데요?”
“별 이유는 없다.”
그저, 하고 카일이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단 생각이 들어서. 네 말대로다. 오래된 일이지.”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넌 여전히 내 곁에 있어줬고.”
사라가 입을 다물었다.
카일은 웃으며 말했다.
“질릴 만도 했을 텐데, 꼴사나운 모습도 참 많이 보였을 텐데··· 곁에 있어줘서 고맙다.”
“이 말,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중요한 말이니 여러 번 하는 거다.”
“지금 상황이랑 그게 무슨···.”
“상관이 있지.”
카일이 제 허리춤에 매인 칼자루를 툭, 하고 손등으로 건드렸다. 성검에서 은은한 별빛이 새어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별빛이.
“이번에도 가장 가까운 곳에 지켜봐다오.”
카일이 웃었다.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참 멋지게도 웃는 카일을 바라보며 사라는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허세가 늘었어요?”
“는 게 아니라 나는 원래 이런 성격이다. 자리에 맞게 점잔 떨어댔을 뿐이지. 애초에 시골 촌뜨기 출신인데 무얼.”
움찔, 하고 사라가 제 몸을 떨었다.
「시골 촌뜨기랑 여행이라니, 제 신세도 참 기구하네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냄새나요.」
「못 배워 처먹어서 그래요? 행동에 품위가 없어요. 말투가 천박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용사라니, 사람들이 뭘 보고 당신을 믿겠어요?」
여행의 초기.
하루라도 빨리 교단으로 복귀하기 위해 사라는 카일을 참 못살게도 굴었더라. 교회의 늙은이들이 시킨 대로 움직였을 때의 일이다.
“근본이 시골 촌뜨기니, 별수 있나.”
그때 사라가 카일을 긁기 위해 썼던 단어를 카일은 지금 장난기 가득한 웃음과 함께 말하고 있다. 마치 사라를 놀리듯이. 얼굴이 새빨개진 사라는 손을 뻗어 카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그만 해요. 그때는 저도 뭘 몰라서···.”
“틀린 말은 아니지.”
사라의 손목을 잡고 그녀의 팔을 내리며 카일이 말했다.
“여전히 난 그때와 같다. 어렸을 때의 나와 같지. 동화 속 영웅을 동경하고, 영웅이 되기를 꿈꾸고··· 여자 앞에서 멋을 부리고 싶어하는 시골 촌뜨기.”
카일이 쓰게 웃었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해야만 해.”
포기할 수는 없다.
물러설 수도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카일은 위업을 이루어내야만 했다. 이는 양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기에 카일은 이런 자신을 사라가 이해해주리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카일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이다.
“진짜.”
사라가 카일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카일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잠깐의 침묵 후, 파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가 막힌 숨을 토했다.
“이러는데.”
조금 붉어진 얼굴로 사라가 툭 쏘아붙였다.
“이러는데, 제가 어떻게 막아요?”
저도 알아요. 안다구요.
그리 중얼거리며 사라가 말했다.
“말린다고 안 될 거란 것도 알고, 여기서 카일이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아요.”
미래에서 온 라니엘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녀가 겪었던 지옥을 들었다.
그것을 전부 들었을 때, 카일의 앞에서 무너진 채 애원하는 그녀를 보았을 때, 사라는 차마 라니엘을 원망할 수 없었다.
‘지금도···.’
지금도 그렇다.
누군가를 원망할 수가 없어서, 누군가의 핑계를 댈 수가 없어서 사라는 괴롭다.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도망치기를 반복해 온 사라다. 그러나 그 끝에 남은 것은 자신이 외면한 것들의 책임이다.
마왕과의 조우에서 살아남았고.
라니엘에게 수많은 것을 빚지며 살았으며.
자신의 의무에서 눈 돌린 채 살았다.
그렇게 살아남은 끝에 도달한 이 상황에서 사라는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게 됐다. 결국 사라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카일의 멱살을 붙잡은 채 말을 이었다.
“그래도, 카일이 죽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억지인 건 알아요. 그래도 억지 부릴 거에요.”
사라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어딜 쉽게 죽으려구요? 당신 여기서 못 죽어요. 내가 어떻게든 살려 둘 거니까.”
“···꽤 인상적인 고백인데.”
멋 없는 말을중얼거리는 카일의 입을 다시 제 입술로 틀어막은 사라가, 길게 숨을 내뱉으며 카일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카일의 등을 툭 떠밀며 말했다.
“앞장서요.”
“사라, 너는 여기서 축복을···.”
“동화 많이 읽었단 사람이 왜 그러실까?”
사라가 짓궂게 미소 지었다.
“성녀가 서야 할 자리는 신의 옆, 그리고 용사의 옆이에요. 뒤에 빠져서 기도나 읊어대거나, 화살이나 푝푝 쏴대는 건 조연들의 역할이라구요.”
난 레미아와 달라요.
지금 카일 곁에는 내가 있잖아요.
‘내가 이긴거라구요, 걸레 귀쟁이 새끼야.’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사라는 카일의 옆에 섰다. 검은 비가 쏟아지는 황야를 향해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두렵다. 미친 듯이 두렵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고 사라는 생각했다.
한번쯤은.
한평생 이런 역할을 하기엔 피곤하지만.
한번쯤이라면, 동화 속 성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사라가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카일의 빈손을 꽉 붙잡았다.
“가요, 용사님.”
동화 한 편 쓰러 가자구요.
3.
쏟아지는 비가 거세졌다.
검게 물들던 비는 이제는 아예 구정물이 되어 질척하게 쏟아졌다. 황야에 바로 선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검게 물들어있다.
구정물로 뒤덮인 하늘이다.
이걸로 두 번째로 마주하게 된 하늘. 거대한 재앙이 덮쳐올 전조 현상의 앞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바라봤다.
끄덕.
고개를 끄덕인 사라가 카일의 손을 놓아 주었다. 카일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딛고, 사라는 제 양 손바닥을 붙인 채 기도를 외웠다.
“신께서 바라시니···.”
그때는 외우지 못했던 기도다.
겁에 질려 도망치기에 바빠서, 신께서 답해주시지 않아서, 그때의 사라는 성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기적을.”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라는 기도를 외우고 있다. 별이 자신의 기도에 답해주지 않아도 좋다. 아무런 별빛을 내려주지 않아도 좋다. 사라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다.
더는 신을 위해 노래하지 않는다.
더는 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자신은 오직 카일만을 위해 노래할 것이며, 그만을 자신의 신으로 여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사라가 품은 신성(??)은 그녀의 기도에 반응했다.
피어오른 것은 백금색의 별빛이 아니다.
피어오르는 건, 순백색의 빛 무리.
오직 사라 자신의 힘으로 그녀는 카일에게 축복을 내렸다. 제 몸에 깃드는 순백의 입자를 바라본 카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맙다, 사라.”
카일이 제 손을 쫙 펼쳤다.
쫙 펼친 손을 카일이 앞으로 뻗었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며 카일이 눈을 감았다. 떠올리는 것은 내면의 검(?).
그것은 성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지난 수년간 쥐어왔던 검이다.
그 검을 카일은 강하게 움켜쥐었다. 분명 손은 허공을 움켜쥐었지만, 손아귀에는 익숙한 칼자루의 감각이 남아있다. 카일은 감았던 눈을 떴다.
제 손에는 성검이 쥐어져 있다.
허리춤에는 비어버린 칼집이 매달려 있다.
카일은 칼집을 풀어 바닥에 내던졌다. 오늘 뽑은 이 검이 칼집에 도로 들어갈 일은 없을 테니까. 최후를 각오한 카일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졌다.
고랑을 따라 빗물이 흘렀다.
구정물이 흐르고 흘러 강이 되었다. 오래전 멸망해버린 왕국의 잔해를 따라 흐르던 구정물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투확.
구정물에서 무언가 솟구쳤다.
검은 하늘이 뒤흔들리며 무언가 추락했다. 솟구치고 추락한 것들이 이어졌다. 땅으로, 하늘으로, 그리하여 지천(??)으로 이어진 구정물이 무언가의 형태를 이루었다.
왕의 자격을 잃은 마(?).
수천, 수만의 손아귀로 이루어진 저주의 집합체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끽, 끼긱■■■■■■. ■■■■■■■■기긱.
삐걱거리다 못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똑바로 땅을 디디고 선 카일은 제 입꼬리를 비틀었다. 과거에는 칼을 놓치고 꼴사납게 도망쳤지만···.
‘지금은 아니지.’
자신이 버린 것은 칼집이요, 제 손에 들린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이다.
꾸욱.
칼을 강하게 쥔 채 카일이 자세를 잡았다.
한번은 외면했던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 그때와는 달라졌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보고 있을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용사란 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다.」
「누군가 그를 보고 위안을 얻는다면, 그가 걷는 길이 올바르다면, 그리하여 그가 모두에게 빛을 되찾아주고자 한다면.」
최초의 용사가 정의한 용사가 되기 위해서.
「그자가 곧 용사다.」
카일 토벤은 검을 쥐었다.
“나는.”
카일은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카일 토벤.”
그 칼끝은 세상에 내려온 그릇된 신을 겨눴다.
“기억해라. 너를 벨 인간의 이름이다.”
그늘이 범람했다.
범람하는 그늘 속 작은 별이 빛났다.
작지만 결코 가려지지 않을 별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