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1
〈 361화 〉 재앙, 그리고 용사(4)
* * *
다가오는 죽음, 희미해지는 정신.
삶의 끝에서 라니엘은 처음으로 제 소망을 이야기했다.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별만큼은 그녀의 소망에 귀 기울였다. 그것이 곧 별이 존재하는 이유였으므로.
별이란 기원에 답하는 존재.
별의 근간에 놓인 개념이 움직였다.
별자리가 흔들렸다. 밤하늘에 수 놓인 별이 요란스레 움직였다. 그리하여 정렬된 별자리는 그 누구도 보지 못한 별자리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처음인 별자리.
하지만, 머나먼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에게는 처음이 아닌 별자리다. 고대보다 더 이전의 시대를 살아갔던 어느 마법사는 하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자네와 같이 있지 않았나, 별 이 빌어먹을 친구야.”
2.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도, 희미해지는 감각 속에서도 그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입니까?】
바라는 것?
【예, 바라는 것.】
【수많고 수많은 이들이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중한 것을 잃더라도, 세상이 멸망에 가까워지더라도, 눈을 감을 곳조차 없더라도, 잠을 잘 여유조차 없더라도 사람은 꿈을 꾸지요.】
꿈.
【꿈, 바라는 것, 소망.】
【꿈을 이정표 삼아 사람은 살아갑니다. 삶이 바스러지기 직전 그들은 비명을 내지르듯 꿈을 이야기하지요. 그것이 미련이라는 것처럼.】
그게 어쨌다는 건가, 지금.
【나는 그 꿈에 답하는 존재니까요.】
【내버려두면 바스러질 소망, 흩어져버릴 비명, 나는 그것에 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신(?)입니다. 그것에 답하고자 세상에 규율을 새겼으니까요.】
그러니까, 하고 목소리가 속삭였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십시오.】
【당신의 꿈을.】
【내게도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당신의 비명에 귀 기울여 줄 시간 정도는 있습니다.】
꿈, 바라는 것, 되고 싶은 자신.
내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살아온 길을 돌아봤다. 의무로 살아온 삶 속에서 내가 진심으로 바라던 것이 있었는가. 조금 전 나는 뭐라고 중얼거렸던가?
목소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기다려줬다. 멈춰버린 듯한 시간 속에서 나는 흐릿한 눈동자로 내 손을 바라봤다. 돌기둥에 깔렸었지만 나는 손을 앞으로 쭉 뻗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것처럼.
피투성이가 됐음에도,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무언가를 붙잡고자 손을 뻗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겠다, 나도.”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살아가다 보면 답을 얻게 될 거라고. 시간은 넘치도록 있으니 부디 천천히 생각해보라고.
“아무리 살아봐도 모르겠어. 그냥, 그냥 이끌리는 대로 살았을 뿐이야. 그러다 보니 의무가 생겼고. 의무로 살아가다 보니 꿈을 꿀 시간이 없었어.”
정말로 없었다.
내게는 되고 싶은 자신은 없었다. 되어야만 하는 자신이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외면할 수 없기에 이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있을지도 모르겠네.”
앞으로 뻗은 손을 보았다.
마지막의 순간 내가 떠올렸던 소망을 나는 다시금 되새겼다. 떠올리는 것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어대던 카일의 모습이다.
「승리의 상징이지, 영웅이란.」
「그 어떤 역경이 와도, 말도 안 되는 적이 와도 반드시 물리치고 승리를 가져다주는 사람. 동화에 나오는 영웅들이 그렇잖냐. 나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승리의 상징, 그렇게 불리는 지금이 어찌 보면 그 꿈을 이룬 걸지도 모르지. 그렇게 카일은 제 성검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카일은 더는 상징이 되지 못한다.
카일은 망가졌다. 녀석의 길은 끝났다. 길의 끝에서 녀석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넘겼다. 그렇게 내게 두 번째 삶을 선물한 것이다. 내 삶에 멋대로 제 목숨을 얹혀버렸다. 빌어먹을 새끼.
그러니 내 삶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건.”
입을 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또한 의무일지도 모른다.
부채감에 떠밀려서, 의무에 얽매여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녀석은 나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다.
녀석은 내게서 자신이 바라던 영웅의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 녀석은 선택했다. 자신이 동경했던 내게 제 삶과 함께 꿈을 맡겨버리는 선택을 내리고 말았다.
녀석이 맡긴 꿈.
녀석이 내게서 보았던 꿈.
그것이 설령 착각에 불과했을지언정, 나는 녀석이 꿈을 이루기를 바라고 있다. 이 지경에 와서까지 여전히 그렇다. 꿈을 잃은 나와 달리 꿈을 가진 채 나아가는 녀석에게, 나는 나를 겹쳐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다면, 결국에.
“영웅이야. 녀석이 꿈꿨던 영웅.”
나는 그 바람에 답할 뿐이다.
의무, 희생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진짜 영웅.”
결여된 채 연기를 하는 현자가 아닌 진정한 영웅이 되어보자. 녀석이 바라던 영웅이 한 번쯤은 되어보자. 그게 나의 소망이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선택도.
녀석이 내게 맡긴 삶도.
그 모든 게 무의미하지 않을 테니까. 의미를 가지게 될 테니까. 나는 진심으로 그리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건 당신의 꿈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내가 바라는 거야.”
【이건 바라는 게 아닌, 되어야만 하는 자신이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의무와 꿈이 언제나 다르리란 법은 없잖아.”
내가 웃었다.
“되고 싶어.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렇습니까?】
그리고 나는 들었다.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것을.
【최후에 와서 내지르는 비명마저, 자신이 바라는 게 아닌 타인의 바람이라니. 당신도 정말 어지간히 망가진 모양이로군요.】
“내가 바라는 게 맞다니까.”
【그래요, 뭐 그런 걸로 합시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목소리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잡으십시오.】
쭉 뻗은 손 앞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것은 백금색으로 빛나는 광채였다. 별빛과도 같은 그것을 붙잡은 순간 목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부디 바라는 것을 이루기를.】
【힘껏 발버둥쳐 보세요, 후배님.】
그 목소리를 끝으로 멈춰있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꿈을 꾼 것 같기도 하지만, 움켜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것이 꿈이 아님을 증거했다.
움켜쥔 것은 별의 입자.
직후, 별빛이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3.
별의 무구의 형태는 정해진 게 없다.
기본적으로는 무기의 형태를 띠나, 모든 별의 무구가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데스텔의 무구가 그렇다.
데스텔이 지닌 무구는 성의(??)다.
배우를 꿈꾸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누군가를 모방하고 흉내 내는, 연기를 위한 무구였다. 이처럼 별은 ‘바라는 자신의 모습’과 관련된 무구를 내려주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라니엘 반 트리아스는.
카일이 동경하던 자신이 되고자 했던 그녀에게 내려진 별의 무구는 무엇인가. 그 무구를 바라본 순간 그녀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떠오른 것은 천칭(Balance)이다.
하지만 그 저울의 형태는 라니엘이 알던 것과 다르다. 그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천칭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거래만을 취급하는, 라니엘만을 위한 천칭이었다. 그 하나의 거래가 무엇인지 라니엘은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다.
일시적인 강화.
막대한 힘을 일시적으로 손에 넣는 것.
그 강화의 정도를 가늠한 라니엘은 쓰게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 때 이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절반의 수명을 갈아야 했으니까.
‘이게 네가 생각하는 승리의 상징이냐?’
네가 동경했던 나의 모습이 이거였냐.
그래, 어찌 보면 가장 강렬하게 뇌리에 새겨지긴 했으리라. 떠오른 천칭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속으로 읊조렸다. 대가를 지불한다고.
망가진 몸에서 별빛이 모조리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별빛이 기울어져 있던 저울을 수평으로 맞췄다. 대가는 지불됐다. 수평을 이룬 천칭을 바라보며 라니엘은 소리 내 말했다.
“거래한다.”
몇 번이고 외쳤던 말.
승리를 위해 몇 번이고 외쳤던 말.
반드시 이기기 위해 외쳐댔던 그 말을 다시 한 번 라니엘은 입에 담았다.
번쩍.
천칭이 박살나며 별빛으로 변했다.
터져 나오는 별빛이 모조리 라니엘의 몸에 스며들었다. 꿰뚫린 심장을 가득 채웠다. 쿵, 쿠웅하고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 *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목적을 잃은 카일이 등을 돌린 채 몇 걸음 내디딘 순간이다.
번쩍.
등 뒤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카일이 뒤를 돌아봤다. 돌무더기 속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잃어버렸을 찬란한 별빛. 백금색으로 범람하는 별빛에 카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튀어 올랐다. 쿵, 쿠웅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떨어지는 돌무더기 사이로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후두둑.
핏물이 떨어졌다.
꿰뚫린 심장, 난도질당한 장기. 곧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이거늘 그녀는 기어코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일어섰다. 마치 이런 모습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다는 것처럼.
“커흑.”
토하듯이 검붉은 피를 뱉어내며 그녀가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들거렸다. 푸른 눈동자에는 백금색의 고리가 맺혀있었다.
틱, 티디디디딕!
그녀의 주변에 점멸하듯 피어오르는 별빛의 양을 카일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막대한 양의 별빛이다.
“야, 카일.”
라니엘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일을 향해 웃었다.
“옛날에 싸웠을 때는 내가 졌는데 말야.”
몇 번이고 카일과 싸웠다.
몇 번이고 패배했다.
애초에 이기려고 덤볐던 싸움이 아니었다. 이렇게 강한 놈이 왜 포기하냐고 설득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못 지겠다.”
나는 용사로서 이곳에 있다.
네가 바라던 모습으로 이곳에 서고자 한다.
그리고 네가 되고 싶었던 용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패배하지 않는 존재다.
“용사는 승리의 상징이어야 하니까.”
그게 네게 꿈꾸던 용사니까.
네가 내게 맡긴 꿈이니까.
“그렇지 않냐, 카일?”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라니엘이 발을 내려찍었다. 자세를 잡았다. 터져 나오는 별빛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사방을 환하게 밝힐 만큼의 별빛이 그녀의 몸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물론이고 용사의 한계조차 뛰어넘은 회복력이다.
움찔.
막대한 양의 별빛을 두른 라니엘의 모습을 본 순간 카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늘에 잠겨있을 카일의 무의식이 이 상황에 반응했다.
저건 언젠가 보았던 라니엘의 모습이다.
마왕의 발을 묶기 위해 수명을 바쳤을 때, 막대한 양의 별빛을 몸에 담았을 때의 라니엘이 딱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다. 무의식중에 그 모습을 떠올린 카일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도망쳤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 또한 바뀌었음을 라니엘에게 보여주듯이, 카일이 검을 쥔 채 자세를 고쳐잡았다. 뚫려버린 심장에서 그늘이 하염없이 새어나왔다. 흘러나온 그늘은 바닥에 깔렸다.
한순간의 정적.
직후 별빛과 그늘이 충돌했다.
용사와 재앙이 맞부딪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