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6
결과적으로 적은 쓰러트렸지만 카일과의 통신은 끊겼다. 그리고, 그런 카일을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고···.
“바로 너, 일단은 잿빛 마법사의 후예로 알려진 너가 카일을 구출해 왔다는 거지.”
“각본 잘 썼네.”
“어디까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야. 그래서, 카일 그 자식은 대체 뭐랑 싸웠길래 재앙이 됐던 거냐? 애초에 용사를 어떻게 재앙으로···.”
라니엘이 웃으며 답했다.
“마왕.”
“···뭐?’
“마왕이랑 싸웠다고. 그리고 마왕의 불사성을 제거했고. 미친새끼 아니냐?”
···그런 미친놈이랑 치고받고 싸워서, 기어코 이기고 돌아온 너도 충분히 미친놈 같은데.
그 뒤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라니엘은 막사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이야기를 나눠야 할 사람이 잔뜩 남아있었으니까. 기사단장과도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며···.
“야, 라니엘.”
그렇게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다.
데스텔의 부름에 라니엘이 뒤를 돌아봤다.
“뭐··· 설명 못 할 일이 많은 거 같으니 그건 제쳐놓고,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냐?”
“뭔데?”
“너,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
여러 의미를 품은 문장이다.
살아있다곤 하나 카일은 의식불명의 상태다. 깊은 잠에 빠진 카일이 전장에 설 수는 없으리라. 즉, 인류는 최강의 검을 잃게 된 것이다.
용사가 또 하나 빠졌다.
종말론자들은 또다시 종말을 노래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 것이다. 상징은 사라졌고, 상징이 되지 못하는 데스텔은 라니엘에게 이렇게 물은 것이다.
네가 그 빈자리를 채울 거냐고.
그 물음에 라니엘은 쓰게 웃었다.
이곳까지 찾아왔을 기사단장과 나눠야 할 이야기도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 이야기는 길어질 테지만 결국 그 답은 하나였다.
“용사가 돼야겠지.”
라니엘이 덧붙였다.
“승리를 상징하는 용사가.”
* * *
기사단장과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을 늘어놓던 하인켈 아저씨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아저씨, 무조건 눈치챘다.
내가 라니엘이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뭐라 말은 안 하지만 중간마다 나를 라니아가 아닌 ‘라니엘’이라고 불렀으니까. 말실수를 안 하는 아저씨니 분명 실수한 척하며 ‘다 알고 있다’라는 눈치를 보낸 것일 거다.
“하여간 능글맞은 아저씨 같으니라고.”
그래도 배려해 준 거겠지.
세간에 공표할 시기는 자유롭게 정하라고 하인켈 아저씨는 말했다. 그 시기에 맞춰 카일과 관련된 소식 또한 발표하겠다고 말했고.
길게 늘이 뺄 생각은 없었다.
용사로서의 정복이 완성되면 곧장 공개하고 용사로서의 일을 시작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내 생각보다 정복의 제작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듯싶었다.
「그러니까, 이걸?」
「예.」
「이 디자인과 닮게 만들어 달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디자인은 둘째치고 여기에 담긴 기능을 어떻게 재현···.」
「부탁할게요.」
「아니, 그. 다른 건.」
「잘 부탁드릴게요.」
「······.」
생각해둔 디자인이 있다면 제출해달란 부탁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초대 잿빛 마탑주의 로브’를 제출했더니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할 것 같단 대답이 돌아온 까닭이다.
그래도 이건 양보 못한다.
나도 정복에 대한 로망은 있었으니까.
자고로 마법사란 로브가 멋져야 폼이 좀 사는 법이다. 용사쯤 됐으니 나도 슬슬 멋이란 걸 좀 챙겨볼 생각이었고.
“인간.”
완성 될 정복을 기대하며 막사 사이를 걷고 있을 무렵이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인간’이라고 부르는 종족차별주의자는 한 명 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옛날처럼 쏘아붙이듯이 말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있어 내 호칭은 인간으로 굳어진 듯 싶었다. 그 호칭에 답하듯 나도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냐? 귀쟁아.”
신궁, 레미아.
마차에 기대어 있는 레미아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차를 툭툭 건드리며 그녀가 말했다.
“돌아가기 전에 인사나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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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간다, 라고 레미아는 말했다.
엘프인 그녀가 돌아갈 곳은 한 군데뿐이었다. 모든 엘프들의 고향,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인 세계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대수림.
“세계수로 돌아가게?”
“그럴 생각이야. 이것도 고쳐야 하니까.”
레미아가 제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반으로 뚝 뿌러진 활이 대롱대롱 달려있었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 레미아가 아끼던 활이었다.
“뭐야, 언제 부러졌냐?”
“쉬지도 않고 달빛 화살을 그렇게나 쏴대면 당연히 부러지지.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활이 내구성이 좋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부러지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럼 그거 고치려고 세계수로 가는 거냐?”
“음, 아니. 그건 아니고.”
레미아가 내게 손짓했다.
그녀를 따라 마차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니, 마차의 안에는 카일이 타고 있었다. 잠에든 녀석의 맞은편은 아직 빈자리였는데, 그 자리를 가리키며 레미아가 말을 이었다.
“저 자리는 사라가 앉을 자리야. 가는 길 중간에 로얄 가드랑 접선해서 사라의 신원을 양도받을 거거든. 로얄 가드가 호위도 해준다 하고.”
“···얘네 데리고 세계수는 왜?”
“거기에서 보호하는 게 가장 안전할 테고···.”
잠깐의 뜸을 들이고 레미아가 말했다.
“세계수의 뿌리에는 성지라 불리는 곳이 있거든. 엘프왕 오르벨님만이 드나들 수 있는 세계수의 근원인데, 그곳에서 두 사람의 회복을 도울 생각이야.”
들어본 적은 있었다.
세계수의 뿌리에는 숲의 모든 생명이 모여드는 곳이 있다고. 그 성지에 관해선 아마도 카르디에게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만들어 둔 걸 성지라고 멋대로 부르고 있는 모양이더군. 사실 별거 없다. 숲에 거미줄처럼 뻗친 지맥과 대지의 생명력을···.」
별거 아니라고 말한 것치곤 굉장히 별거 였던 걸로 기억했다. 그거야 어찌 됐든 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엘프의 왕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서, 외부인에게 어떻게 접근을 허락받았나 보네?”
“오르벨 님보다 더 높은 분께서 ‘서신’을 보내셨으니까.”
엘프의 왕보다 더 높은 분.
그리 부를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설마 했던 예측이 맞아 내가 쓰게 웃었다.
“카르디가 부탁했나 봐?”
“응, 위대한 은사님께서 서신을 보냈다나 봐. 오르벨 님께서 기겁하시며 소리를 지르시더라. 자그마치 몇백 년 만에 온 서신이라던가···.”
그 뒤로도 레미아는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았다. 수백 년만에 제 은사께 편지를 받은 엘프의 왕은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움직였다고 한다.
성녀, 사라.
용사, 카일 토벤.
두 사람을 귀빈으로 모실 것을, 몸 상태가 완벽히 회복될 때까지 얼마든지 성지를 이용할 것을 허가해줬다고 하는데··· 이는 엘프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라고 레미아는 설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그래서 들리는 김에 활도 고쳐올 생각이고.”
아무튼 잘된 일이었다.
카일과 사라의 향후 처우에 대해서는 나 또한 고민이 많았는데, 엘프들의 고향인 대수림 정도라면 믿고 맡길만했다. 카르디의 서신까지 있다면 더욱 안심이었고.
“잘 됐네.”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레미아를 흘겨봤다.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르게 숨을 쉬었고, 가벼운 말투를 썼다. 어찌 보면 그것은 평범했지만··· 그 평범이야말로 저 귀쟁이에게 있어선 특별한 것이리라.
“그러면.”
그렇기에, 나는 가벼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떻게 할 거냐?”
가볍지만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질문.
그러나, 그 질문에 레미아는 곧장 대답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 답을 정해놨다는 것처럼.
“사라와 카일을 세계수에 데려다 주고 오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지.”
돌아온다고 레미아는 말했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너도 이참에 은퇴해도 될 텐데?”
“이대로 은퇴하면 면이 안 살잖아.”
레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아직 곁에 설 수 없으니까.”
그녀가 마차의 안을 보았다.
이어서 나를 보았다. 마치 눈부신 것을 보듯이,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쓰게 웃었다.
“저 애들이 눈을 뜰 때까지 노력해봐야지. 평소와 달리···.”
“달리?”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피식, 하고 내가 웃음을 흘렸다.
“너무 늦은 거 아니냐?”
“뭐,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레미아가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나중에 다시 보자.”
그때는 전장에서,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는 마차에 올랐다. 그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나는 웃었다. 웃으며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래, 다음에 보자. 레미아.”
귀쟁이가 아니라 레미아.
내가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손에 꼽았고, 그 사실은 그 누구보다 레미아가 가장 잘 알고 있으리라. 레미아는 피식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응, 라니···.”
“거기까지.”
엘, 하고 뒷말을 이으려는 레미아의 입을 내가 틀어막았다. 기사들이 죄다 지켜보고 있는데, 이 빡대가리 귀쟁이는 하여간···.
마지막까지 일을 칠 뻔한 그녀를 배웅하며 나도 걸음을 옮겼다. 저마다가 저마다의 길을 찾아 저마다의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듯, 내게도 나아가야 할 길이 있었으므로.
우선은, 왕도로 향할 생각이었다.
2.
특이 전선의 형성과 소멸.
대규모 마수의 행렬과 산맥의 너머에서 기사들이 목격한 거대한 검기. 그곳으로 향한 나와, 하룻밤 내내 땅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충격.
그외에도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이상 현상에 대한 공식적인 보도가 떴다. 데스텔과 기사단장 아저씨가 머리를 맞대고 쓴 ‘각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기자가 수많은 기사를 써내렸다.
『과거 마왕이 출몰했던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서 다시 한 번 마왕이 나타나.』
『만마의 주인, 마수의 왕,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인류의 오랜 악몽의 현현.』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 마왕이 나타났고.
『제 주인을 따라 몰려든 마수.』
『대규모 마수의 발생, 왕도를 휩쓸 재앙의 발발. 전선 붕괴의 위험.』
『범람하는 마수.』
마왕을 따라 마수들이 모여들었고.
파도를 이룬 마수들이 범람하려는 순간.
『용사, 카일 토벤.』
『단독으로 마왕의 격퇴에 나서.』
『인류 최강의 검사.』
카일이 단독으로 마왕을 저지했다.
그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땅을 뒤흔들고 하늘을 찢어놓은 검격을 본 기사들이 참 많았다. 하물며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는 카일이 새긴 검격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수많고 수많은 증거.
잇따르는 목격담.
기사단장 하인켈의 발언.
그 수많은 요소로 하여금 카일이 마왕을 상대했으며, 격퇴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마왕, 만마의 주인.
수백 년간 인류사에 악몽으로서 군림했던 존재. 결코 대항할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그 재앙을, 카일이 단독으로 격퇴했다. 그 사실에 인류는 열광했으며 기자들의 손가락은 바빠졌다.
『인류가 지닌 최강의 검은 재앙에게 닿아.』
『하늘의 한 자락을 베어낸 검.』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영웅이라 부르기에 걸맞은 위업.』
기자들은 제 어휘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수식어로 범벅된 문장으로 카일의 업적을 칭송했다. 마왕을 격퇴했다는 사실, 인류 최강의 검사가 또다시 위업을 이뤄냈다는 사실, 그 사실들로 하여금 왕도는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오래가진 못했다.
『용사, 카일 토벤 의식불명.』
『구출작전의 속행, 잿빛의 계보를 잇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참여.』
『구출은 성공했으나, 의식을 잃어.』
『회복되기까진 오랜 시간을 필요.』
『카일 토벤의 은퇴.』
좋은 소식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비보 또한 함께 쏟아졌으니까.
카일 토벤이 쓰러졌다. 인류 최강의 용사가 최전선에서 떠나게 됐다. 그 사실에 이곳저곳에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던 세 명의 용사.
그 중 하나는 목숨을 잃었으며, 또 하나는 의식불명 상태로 은퇴하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데스텔 뿐이나 그는 상징이 될 수 없다.
가장 용사다운 용사.
승리의 상징.
저마다 상징을 가졌던 용사들이 은퇴한 이 순간, 종말론자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하인켈 아저씨가 그리 둘리가 없었다. 기사단장은 곧장 이어서 발표했다.
『새로운 용사의 탄생.』
나는 왕도의 한복판을 걸으며, 가판대에 걸려있는 신문을 한 부 집어들었다.
『카일 토벤의 별빛을 그대로 이어받은, 가장 강력한 용사의 탄생. 이미 완성된 용사.』
『용사의 이름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사진을 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길가를 거닐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춘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왕도를 거닐다 보면 제법 시선이 날라와 꽂혔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손에 들린 신문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박, 하고 새하얀 눈이 밟혀 발자국이 찍혔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사나운 눈은 아니었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용사 파티를 때려치운 지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흘렀다. 2번의 겨울을 맞이했으며, 이 겨울도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이 눈이 그치고, 쌓인 눈이 다 녹을 때쯤이면 봄이 와 있으리라.
세 번째 봄이 온다.
지난 2년을 되돌아보며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걷다 보면 어느덧 익숙한 가로수 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봄에는 분홍빛의 벚꽃이 수북이 쌓인 길이지만, 지금은 새하얀 눈발이 그 길을 대신해서 꾸미고 있었다.
사박, 사박.
가로수 길을 지나 아플리아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지난 2년 동안 참으로 많이 신세를 졌던 카페에 들려 커피 한 잔을 샀다. 커피를 내리며 알렌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이시죠?”
“와, 알렌 어떻게 알았어요?”
“이제 교수가 아니시잖아요. 원래 외부인한테는 커피 팔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이거 커피 값은 안 받을게요.”
“오. 근데 저 쿠폰에 스탬프 열개 찍었는데 이것도 이제 못 쓰는 거에요? 쓸 수 있을 줄 알고 가져왔는데.”
“······.”
“이거 모으느라 고생했는데.”
“···이리 주세요.”
결국 한정판 디저트인 타르트까지 받아왔다.
커피를 홀짝이고 타르트를 오물거리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걸음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은 총학장실이었다.
“오셨습니까, 라니아 님.”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론 학장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셔서 그런지 정수리가 훤히 보였는데, 어느덧 휑해진 정수리를 보며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탈모는 사라도 못 고치는데.
“에이, 편하게 부르세요.”
“아니 그래도···.”
“제가 불편해요. 제가.”
내가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방문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구.”
내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2년 전에도 한 번은 작성한 적이 있었던 종이였다. 그 종이를 슬쩍 내밀며 내가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좀 생겨서 교수직을 내려놔야 할 것 같거든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이 있겠···.”
“편하게 말씀하시라니까요.”
“죄송할 일이 있겠습니까. 신문은 다 보았습니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으신데,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내 말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아론 학장님은 끝까지 나를 존대했다.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어쩔 텐가. 용사라는 자리가 그런 건데 뭐.
“그간 감사했습니다.”
내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에는 ‘좆같아서 때려침’같은 걸쭉한 문구가 들어가 있진 않았다. 용사 파티야 좆같아서 때려치웠다지만, 여긴 아니었으니까.
아플리아 아카데미.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 또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교수로 있으면서 느낀 바가 많다. 깨달은 것도, 배운 것도, 느낀 것도 많았으므로 이곳에는 많은 신세를 졌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론 학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훈훈한 마무리가 되겠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 맞다. 학장님.”
내가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 웃음에서 무언가 꺼림칙함을 느낀 듯, 움찔하고 학장님이 어깨를 떠셨다. 그 모습이 마치 내가 이렇게 환히 웃을 때마다 사건이 터졌음을 떠올리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죄송하지만, 그게 맞았다.
“저 가기 전에 강의 하나만 하고 가도 될까요?”
“강···의 말인가?”
당황한 나머지 존대마저 풀린 학장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봤다. 그 얼굴에는 신뢰 반, 불신 반이 뒤섞여 있었다.
현자, 현인, 그리고 인도자.
잿빛의 계보를 이었으며.
최강의 용사의 별빛마저 이은 용사.
그런 수많은 칭호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가 강의를 한다면, 총학장 입장에선 두 손 두 발 다 들고 기뻐해야 할 일일 테지만··· 그간의 내 전적이 있다 보니 다소 고민이 되는 듯싶었다.
“에이, 별거 안 해요.”
“······.”
“진짜라니까요.”
결국 나는 특강 일정을 받아냈다.
대상은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그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 줄 게 있었으니까. 그중에서 점 찍어둔 아이들은 따로 불러내서 보강할 생각이었고.
‘···조금 더 바빠지기 전에.’
뿌려둔 씨앗에 물은 주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본격적으로 앞으로 달려나가기 전에, 잠시 뒤를 돌아보며 한숨을 돌릴 생각이었다. 카일 그 자식이 내게 멋대로 줘버린 삶은 너무 기니까.
‘게다가, 아직 정복도 완성이 안 됐고.’
정복이 완성되기까지 남은 시간.
내가 본격적으로 용사로서 모두의 앞에 서기까지 남은 그 짧은 시간을, 나는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과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하여간.”
나는 피식 웃으며 품에 넣어뒀던 신문을 펼쳐보았다. 읽다 만 신문. 대문짝만 하게 실린 사진의 밑에 실린 문구를 바라봤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곳에 적힌 것은 내 이름.
그리고, 내 이름에 붙으리라곤 생각도 해보지 못한 단어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차세대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용사 파티를 때려치웠다.
그랬더니 용사가 됐다.
물론 때려치웠다와 용사가 됐다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지만, 그 간극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거야 어쨌든 결과만 놓고 보면 이 두 문장으로 요약이 되는 상황이다.
용사 파티를 때려치웠더니 용사가 됐습니다.
참으로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
아마도, 앞으로 조금 더 바빠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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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의 이름이 지니는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그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받을 수 있는 특혜가 한가득 이며, 어지간한 귀족들조차 그녀의 이름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지경이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애초부터가 명문가였으며, 잿빛 마법사를 배출해내며 더욱 이름이 높아진 트리아스 가(家)의 소속. 거기에 재앙을 막아내며 세운 숱한 업적. 현자와 현인, 그리고 인도자라는 칭호.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
거기에 이젠 용사라는 칭호마저 붙게 된 마당이다. 한 명의 인간에게 이만큼의 칭호가 붙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며, 한 명의 인간이 이만한 위업을 세운 것 또한 이례적인 일이다.
요컨데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뜻이다.
말이 안되는 일을 말이 되게끔 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하는 일은 언제나 그런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아플리아에서 마지막으로 강의를 진행한다고 했을 때, 학생들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용사, 현인, 인도자, 현자. 수많은 칭호를 지닌 위대한 마법사께 가르침을 얻을 생각에 흥분하여 밤잠을 설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플리아의 악몽이 마지막으로 무엇을 남기고 갈지 두려워하며 밤잠을 설친 이들 또한 있다.
그 반응은 극과 극이지만 둘 모두 밤잠을 설쳤다는 공통점이 있으리라. 전자는 대체로 신입생이었고, 후자는 아플리아의 악몽에게 직접 배운 학년이라는 차이가 있긴 했지만··· 그거야 어쨌든 간.
뚜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