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5
2.
“잘못하고 있는 건 아냐?”
“···알고는 있다.”
“뭔데? 알고 있으면 말이나 해봐.”
옆구리를 계속해서 찔리며 카일은 신음하듯이 말했다.
“멋대로 포기한 것. 널 끌어들여 두고 내가 먼저 포기한 것. 용사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
“그런 거 말고 씨발아.”
“천막에서···.”
“그건 씨발··· 진짜, 진짜 할 말이 많긴 한데 그것도 말고. 그건 언급하지 마.”
“그럼···.”
답을 짜맞추듯 대화가 오갔고, 하도 찔린 나머지 옆구리가 꺾이기 직전이 돼서야 카일은 정답을 말했다.
“멋대로 네게 별빛을 넘긴 거.”
“그래, 그거.”
라니엘이 그제야 발길질을 멈췄다.
“누가 별빛을 달랬냐? 누가 살려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냐고.”
“···나 때문에 목숨 절반을 갈았잖냐. 그 빚이라도 갚으려고 했지.”
“그게 왜 너 때문이냐? 마왕한테서 도망치려 했던 거고, 어차피 수명 안 갈았으면 그때 나도 죽었을 텐데.”
“애초에 내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따지고 들면 끝도 없다.”
라니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말야, 너 내 성격 알잖아. 네가 그렇게까지 해서 날 살려두면 내가 정상적으로 살 것 같았냐?”
“······.”
“너도 만났다며? 미래에서 온 나.”
“···만났지.”
“만났으면 알겠지. 내가 어떻게 될지.”
희생에서 자유롭지 못한 라니엘이다.
강박에 얽애며 살아가는 현자다.
그런 그녀가 ‘오랜 친구의 죽음’으로 살아났다면, 그 삶은 분명 정상적인 것이 아니리라.
“거기에 재앙까지 되고. 넌 옛날부터 뒷생각 하나도 안 하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데, 그 버릇 좀 고치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하냐?”
“···할 말이 없군.”
“그치. 할 말이 없어야지.”
에휴, 하고 라니엘이 한숨을 뱉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생각은 좀 드냐? 잘못했다는 생각은 좀 드냐고.”
“···든다. 드니까 이러고 있는 거고.”
“알면 됐어.”
그녀가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말했다.
“희생하지 마. 목숨 좀 아껴라. 애인도 있는 새끼가 책임감 없게, 씨발.”
할 말이 많지만 더 하지는 않겠다는 듯, 라니엘은 더는 카일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화풀이는 여기까지 하고.”
누그러진 말투로 라니엘이 말을 이었다.
“고맙다. 살려줘서.”
“······.”
“방법이야 어찌 됐든 네 덕에 살아있는 거니까, 이건 고맙다. 솔직히 무서웠거든.”
“···무서워?”
“야, 천천히 죽음이 다가오는데 당연히 무섭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너한테 남은 시간이 계산된다고 생각해봐. 그것도 초 단위로.”
“···끔찍하군.”
“끔찍하지?”
그러니까 고맙다는 거야. 살려줘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어서 말해야 하는데, 그 말을 꺼내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는 듯.
“···그리고.”
그래도, 꼭 해야 하니까.
라니엘은 각오를 다 잡고 입을 열었다.
“나도 미안하다.”
“···네가? 나한테 미안할 게 있나.”
“있지.”
눈을 깜빡이는 카일에게 라니엘이 말했다.
“너 몰아붙인 거. 쉴 시간도 안 주고 몰아붙였던 그거. 미안하다고.”
“그래야 했을 상황이잖냐.”
“그래도.”
“그때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나도 이해한다. 누군간 그랬어야 했겠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겠단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때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냐? 너도 사람인데.”
카일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너도나도 여유가 없었잖냐. 그런 방법밖에 선택하지 못했을 정도로.”
이제는 카일도 안다.
“네가 그래야만 했던 걸 이젠 이해해. 그때 넌 현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엇갈리고 꼬였던 길이 돌고 돌아 다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말할 수 있는 게 있었다.
“난 그런 너를 동경했던거고.”
“······.”
“언제나 높은 것을 보고, 언제나 이상을 부르짖고, 언제나 옳은 너를 동경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네가 마을에서 억지로 나를 끌고 도망칠 때부터 너는 나의 앞에 섰다. 너는 언제나 내 앞에 있었어.”
처음부터 줄곧 그랬다.
“그래서, 나는 너를 선망했다. 네 곁에 서고 싶었다. 너와 동등한 하나의 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였을까.
“별에게 선택받고 네 곁에 서게 되었을 때, 나는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다. 너와 함께 모험을 나설 때 나는 모든 걸 이룬 것 같았어.”
그래서, 그날 그렇게까지 기뻐했던 것일까.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더군.”
카일이 쓰게 웃었다.
“책임은 있었지. 의무도 있었어. 용사로서 자격을 얻었는데, 내 정신은 그러지 못했던 거야. 너무 가볍게 시작했으니까. 널 쫓아가겠단 생각 하나로 이 여정에 올랐으니까···.”
그래서.
“너를 쫓아가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그 순간, 나는 의무마저 외면하고 만 거겠지.”
그래서 꼬이고 말았다.
“너를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어. 너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지. 마왕을 마주하고 나서부터 줄곧 그랬어. 그래야만 내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래야만 견딜 수 있었으니까.”
애당초 따라잡지 못하는 존재다.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합리화해가며 의무에서 눈을 돌렸지. 제발 네가 내게 환멸을 느껴줬으면 해서, 나를 놓아줬으면 해서, 내게서 떠나줬으면 해서 참 못 할 짓들을 많이 했다.”
그런데도.
“너는 날 놓아주지 않더라. 계속해서 일어나라고 말했지. 도대체···.”
“너한테서 날 겹쳐봤으니까.”
라니엘이 카일의 말을 끊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넌 모를 텐데, 난 애초에 꿈이 없었어. 그래서 꿈을 꾸는 네게서 날 겹쳐봤던 거고. 겹쳐봤으니 네가 포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거지.”
참 우스운 이야기 아니냐?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말했다.
“네가 동경했다던 내 실체는 이거야. 꿈이 없어서, 그냥 무조건 앞장서 걷기만 했던 인간. 텅 비어버린 인간. 그냥 그랬던 거야.”
“···그러냐?”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라니엘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벽에 기대어 앉아있는 카일과 달리, 라니엘은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일어서선 카일의 앞에 라니엘이 바로 섰다.
“너 꿈이 뭐였는지 기억하냐?”
“···영웅이 되는 거였지.”
“그래, 영웅.”
라니엘이 씨익 웃었다.
“완전무결한 영웅. 상징이 되는 존재. 그리고, 네가 바랐던 상징은 승리였지.”
승리의 상징.
“나도 그거나 해보려고.”
“···뭐?”
“네가 날 멋대로 살렸잖냐.”
그러니까,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도 멋대로 네 꿈이나 훔쳐보련다.”
“···뭐냐, 그게.”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카일을 뒤로하고 라니엘이 무릎을 굽혔다. 카일의 어깨에 제 부러진 팔을 얹어 툭툭 두들겼다.
“그러니까 쉬어라.”
현자로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던 때와는 다른, 친구에게 말하는듯한 편안한 억양. 가벼운 목소리로 라니엘이 말을 이었다.
“쉬어도 되니까, 이참에 푹 쉬어. 사람이 어떻게 쉬지 않고 달리기만 하냐? 그렇게 달려댔으면 이제 좀 쉬어라.”
넌 충분히 노력했고.
할 만큼 했으니까 쉬어도 된다.
그렇게 말하는 라니엘을 보며 카일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카일이 듣고 싶었던 말이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여유가 없어서, 수많고 수많은 이유로 하여금 라니엘은 이 말을 입에 담지 못했고, 카일은 듣지 못했다.
‘···그걸, 지금에서야.’
카일이 웃었다.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곳은 마경이어서 해가 뜨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그늘과 함께 먹구름이 걷힌 것일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살이 무너진 천장의 틈새로 새어 들어왔다. 기어코 지하실까지 와 닿았다.
햇살에 라니엘의 잿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만신창이에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카일의 눈에 라니엘은 그 무엇보다도 빛나 보였다. 자신이 꿈꿨던 영웅이 그곳에 있었다.
“쉬고 있어.”
영웅이 말했다.
“네가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그때 술이나 한잔하자.”
영웅이 아닌.
라니엘 반 트리아스가 아닌.
현자도 아닌, 그냥 라니엘이 말했다.
“그때가 되면 술값은 네가 쏴라. 맨날 나만 쐈잖아.”
“네가 산다고 아득바득 돈을 낼 때는 언제고?”
“아무튼, 이번엔 네가 사라고.”
카일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때가 되면···.”
밀려오는 잠에 서서히 저항하기가 힘들어졌다.
씨앗이 싹트며 카일의 의식이 멀어졌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카일이 중얼거렸다.
“술이나 한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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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날이 오면 술이나 한잔하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일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녀석은 무척이나 편안한 표정이었다. 깊은 잠에 든 녀석을 흘겨보다가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으, 죽겠다.”
온 몸이 쓰라렸다.
두 발로 서있는 것은 고사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어지간히 칼침을 쑤셔놨어야지. 성한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진짜 어떻게 이겼냐···.”
그리 중얼거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벽에 기댄 채 위를 올려다보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햇살이 쏟아진다는 것은 곧 이곳이 더는 마경이 아니게 됐음을 의미했다.
···확실히 몰아내긴 한 모양이네.
카일의 심장에서 그늘을 몰아내던 순간 나는 보았다. 파도와 같은 구정물이 사방으로 범람하는 광경을. 범람하던 구정물은 다시 카일의 몸을 삼키지 못한 채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막(幕).’
끝 없이 펼쳐진 막과 함께 그늘은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것이 정확하게 어디로 향했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었다.
그늘의 신전.
이곳보다 더 깊은 곳.
마경의 최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신전. 과거 가니칼트를 필두로 한 최초의 용사 일행이 마왕을 상대했던 그곳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그리고···.’
그곳에는 죽음의 칼도 있으리라.
신전을 지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칼, 가니칼트 였으니까. 그 괴물을 떠올리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교자, 글레투스.
죽음의 칼, 가니칼트.
대마법사, 최초의 광인.
그릇된 신, 그늘.
큼지막하게 따지자면 이 넷이 내게 남은 적이었다. 머릿속 한구석에서 아주 조그맣게 어느 해골바가지의 모습이 떠오르긴 했는데, 그놈은 딱히 문제 될 것 같진 않았다.
결국 남은 것은 넷이다.
그 수로 따지자면 처음과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상태였다. 지난 몇 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가장 용사다운 용사, 갈라할.
최강의 용사, 카일 토벤.
두 사람에 의해 재앙들은 모두 결점을 가지게 됐다. 배교자는 모아둔 마수를 모두 잃고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죽음의 칼은 약점이 드러났다. 그늘은 신격을 넘어 불사성 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상대할 수 없는 재앙에서···.’
이제는 죽일 수 있는 존재로 격하됐다는 뜻이다. 그들은 더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는, 죽일 수 있는 존재가 됐으며··· 그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수백 년에 걸친 투쟁.
인류가 벌여온 길고 긴 투쟁에 종점을 찍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종점을 찍게 될 이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될 것이라고 나는 직감했다.
‘최강의 용사.’
카일이 지녔던 이명.
그리고, 이제는 내 것이 되어야만 할 이명.
그것을 곱씹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가다듬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래, 이런 곳에 멈춰서 있어선 안되지.
“끄으으윽!”
허리를 튕기며 반동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두 발로 땅을 디디고 섰지만 그것도 잠시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바닥에 얼굴부터 추락한 나는 바닥에 볼을 맞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하고 좋긴 하네···.”
적당히 서늘한 바닥의 온도를 얼굴로 느끼며 내가 품을 뒤적였다. 일단은 작전의 성공을 알려야 했으므로 신호탄을 쏠 생각이었다.
“······.”
나는 품에서 꺼낸 신호탄을 흘겨봤다.
정확하겐, 신호탄이었던 것을.
잘게 바스라진 신호탄은 제 기능을 다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하긴, 그 난리 속에서 무사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에 든 저 녀석을 데리고 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도저히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마지막에 가불해서 쓴 주문에 마나를 바닥까지 털리는 바람에 마나 탈진 증세까지 오고 있었고.
···좀 위험한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 것을 넘어 손끝이 차게 식고 있었다. 감각이 희미해졌다. 악화되어 가는 몸 상태에 내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을 무렵이다.
-이쪽, 이쪽에!
머리 위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설 수는 없어서 몸을 빙글, 돌려 천장을 바라본 채로 드러누웠다. 지하실에 있는 내게는 천장이지만, 교회에선 바닥이 되는 곳.
“이쪽이야!”
“지금 가고 있으니까 재촉 좀 하지 말아봐. 나도, 헉, 별빛을, 허억··· 바닥까지···.”
완전히 박살 나 발 디딜 곳도 제대로 안 남아 있는 그곳에 누군가 손짓하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쓰잘데없이 경박한 금발이 반짝였다. 저 저렴해보이는 금발의 주인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귀쟁이?”
“···!”
예민한 청각을 가진 엘프답게, 내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지 레미아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눈을 크게 뜬 채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어?!”
그럼 시체가 말을 하겠냐.
그리 쏘아붙이려다가, 나는 쓰게 웃으며 레미아의 질문에 답했다.
“간신히 살아는 있다.”
그러니까 빨리 좀 구해줘 봐.
진짜 죽을 것 같아.
그리 덧붙이자 레미아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뒤이어 도착한 데스텔과 함께 레미아가 지하실로 내려왔다.
“이게 다 무슨···.”
전투의 흔적을 흘겨본 데스텔은 허탈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레미아는···.
“······.”
잠 들어있는 카일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레미아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고마워.”
“오냐. 나중에 비싸게 갚아라.”
“응, 반드시···.”
“농담으로 던진 거 진담으로 받지 마라.”
농담도 못하겠네.
그리 중얼거리며 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주변을 서성이며 여기저기 새겨진 검흔을 관찰하던 데스텔을 불러세웠다.
“야, 데스텔.”
“어. 불렀냐.”
“나 좀 업어줘 봐. 도저히 못 일어나겠다. 보시다시피 발목이 아주 작살나서···.”
“그래 뭐···.”
데스텔이 나를 향해 걸어오다 말고 움찔, 하고 멈춰 섰다. 내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 데스텔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생각해보니까 그건 좀.”
“···뭐? 부축도 못 해줘? 너 아직도 그때 멱살 잡고 뺨 갈긴 거 때문에 그래? 이 상황에서까지?”
이새끼 뒤끝 봐라.
“야, 그땐 너도 맞을 만 했···.”
“그런 게 아니라 너 옷이··· 아니다. 됐다.”
한숨을 푹 내쉬며 데스텔이 카일 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축 늘어진 카일을 들쳐메며 데스텔이 레미아에게 눈짓했다.
“신궁. 네가 잿빛 마법사 챙겨. 내가 카일 이 녀석 챙길 테니까.”
레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 내 안색이 새파래졌다. 레미아를 두고 내가 굳이 데스텔을 부른 이유가 있었다.
“야, 잠깐만 레미아.”
“가만히 있어.”
“아니, 야. 잠깐···.”
이 귀쟁이, 환자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다. 사라보다도 없다는 뜻이다. 일전에 레미아에게 부축을 받았을 때 나는 ‘이 귀쟁이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읏챠.”
“끄아아아아아아악! 야! 팔! 팔 잡지 마!”
“가만히 좀 있어!”
“파아아아아아알! 끼아아아악!”
“귀에 대고 소리 지르지 마. 귀가 울린단 말야!”
“팔! 팔! 파아아아아알!”
수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바가 없었다.
비명을 내지르다가 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내 의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범인은··· 귀쟁이···.”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안 돼?”
너 같으면 다물겠냐고.
2.
사흘 밤낮으로 치료를 받은 라니엘이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대부분의 상황이 정리된 이후였다.
밀집됐던 마수는 모조리 흩어졌다.
라니엘이 그늘을 몰아낸 시점부터 마수들이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고, 목표를 잃은 마수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결과적으로 특이 전선은 해체되어 각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
복귀를 준비하는 특이 전선.
라니엘은 설명을 듣기 위해 데스텔의 막사에 찾아갔다. 그는 상황을 요약해 설명했다.
“기사단장 아저씨하고 적당히 말을 맞춰놨어.”
이야기를 맞췄다.
“정확히 너와 카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카일이 재앙이 됐다는 사실은 은폐했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했나.
카일이 라니엘과 함께 돌아온 모습을 수많은 기사가 보았다.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라니엘은 물었고, 데스텔은 이렇게 답했다.
“마수의 대규모 발생. 그때 기사들과 함께 보았던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검기. 그거랑 엮어서 대충 말을 맞춰놨어. 마수 대규모 발생의 원인이 셀레프 왕국의 옛터에 있었고··· 용사, 카일 토벤이 단독으로 작전을 수행하려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