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7
그녀의 강의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모였다.
규모가 커진 나머지 전교생은 물론이고, 외부의 이름 높은 마법사들마저 모여든 가운데 라니아 반 트리아스는 천천히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뚜벅.
그녀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잿빛의 머리칼이 불어온 바람에 나부꼈다. 수많은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는 단상 위에 올랐다. 자신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든 이들에게 한차례 시선을 준 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짧은 한마디.
“라니아 반 트리아스 입니다.”
일찍히 첫 강의에선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조교수이니, 마나의 거래학 기초를 담당하게 됐다니, 자잘한 설명을 늘어놓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
그녀의 이름은 이제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게 됐으므로. 라니엘 반 트리아스라는 이름과 비슷할 정도의, 혹은 조금 더 무거운 무게를 가지게 됐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이름만을 입에 담았다.
“지금부터.”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한 번의 박수.
“천칭(Balance).”
첫 수업을 했을 때처럼.
찬란한 별빛이 일대를 가득 메웠다.
2.
수 시간에 걸쳐 이루어질 강의.
그 시작은 그녀가 했던 첫 번째 수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마법의 기초를 이야기했으며, 주문 발현의 삼 단계를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모든 마도(魔道)의 시작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완벽한 기초.
완벽함에서부터 나오는 온전한 주문.
그것만으로도 감탄이 쏟아지고, 그녀의 강의를 처음 들은 신입생들이 넋이 나간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는 거기서 그칠 생각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기초.”
그녀가 미소 지었다.
“기초 다음에는 활용 아니겠습니까.”
그 시점부터 강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것은 라니엘 반 트리아스라는 인간이 걸어왔던 길이요,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한 이야기다.
주문의 기초.
기초에서 이루어지는 활용.
활용과 응용에서 변형으로.
변형에서 단축, 간략화.
간략화에서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
그녀가 걸어왔던 마도(魔道)를 그녀는 이야기했다. 현자라 불리는 이가 걸어온 길.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 모든 마법사가 한 번쯤은 탐내봤을 그것을, 그녀는 그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고 모두의 앞에 공개했다.
기자들의 손이 빨라졌다.
그들이 켜둔 마도구가 바삐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모여든 학생들의 눈동자가 움직였고, 그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정보를 기록하려는 이와 배움을 학습하려는 이들의 차이였다. 그 움직임에 라니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강의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녀는 제 삶을 이야기했다.
그녀가 허공에 그리는 회로에, 그녀가 이야기하는 마법의 원리에 그녀의 삶이 녹아 있었다. 그녀는 그 어느 것도 숨기지 않고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남김없이 공개했다.
마치,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누군가는 혀를 내둘렀고, 누군가는 감탄을 내뱉었으며, 누군가는 광인의 삶이라 중얼거렸으며, 또 누군가는 저 정도는 해야 현자라 불릴 수 있는 것이냐며 허탈해했다.
‘···참 어렵게도 살았다.’
그녀 본인마저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삶이다. 쉬운 길은 내버려두고 어렵고 거친 길만을 걸어온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길의 끝.
끝에서 쌓아올린 탑.
“여러분께 이걸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초인, 벽을 허물어트린 이.
“마법이란 별과 거래를 통해 섭리를 뒤틀 힘을 손에 넣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권리를 ‘구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겠네요.”
초연산(超演算).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그 본질은 생각보다 더 단순해요. 여기 모이신 분 중에 법학을 공부해보신 분이 있나요? 혹은 왕국의 법을 정리해둔 두꺼운 책을 보신 분은?”
그녀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세상이란 그런 법학서에 가까워요. 온갖 규율과 법칙, 섭리, 해선 안 될 금기. 그런 것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법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그녀가 손가락을 휘둘렀다.
“세상에 빼곡하게 새겨진 문장을 고치는 일이겠네요. 섭리를 멋대로 주무르는 일.”
마나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마나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주문은 ‘발현’됐다.
“이렇게요.”
키이이잉, 소리를 내며 공간이 찢어졌다.
땅에서 하늘로 이어진 한줄기의 섬광. 난데없이 나타난 섬광에 관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눈앞에 나타난 저것은 본질적으로 주문이 아니다. 평소에 그들이 쓰던 마법이 아니다. 찰나의 간극조차 없이 발현된 저것은 기적이 아닌 단순한 현상으로서 저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
그래서 마치 섭리의 일부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그것을 가리키며 라니아는 말했다.
“이게 여러분이 추구하는 진리입니다.”
마법사가 닿고자 하는 곳.
“세상의 본질, 섭리, 진리를 연구하는 게 마법사의 최종 목표이니··· 여러분이 추구하는 목표도 이곳이겠죠.”
그 곳에 닿은 마법사가 말했다.
“저는 방금까지 여러분께 보여 드렸던 길, 그런 길을 걸어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께서 진리라 부르는 영역에 조금이나마 발을 디뎠어요.”
하지만, 하고 라니아가 쓰게 웃었다.
“이건 저의 길입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다.
나에게 맞았던 나의 길.
“무작정 따라 하라는 소리가 아니며, 제가 걸어온 길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런 길이 있다고 보여 드리는 거에요.”
강요해선 안 된다는 걸 이젠 알았으니까.
“정답까지 가는 길은 하나뿐이 아닙니다. 수많고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걷고 있는 모든 마도(魔道)는 틀린 길이 아닙니다.”
수많고 수많은 길.
“진리로 향하기를 추구한다면.”
수많고 수많은 삶.
“같은 곳을 바라보고 걷는다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테니까요.”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웃었다.
“스스로를 믿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짝, 하고 그녀가 박수를 쳤다.
“이상입니다.”
잠깐의 간극을 두고 환호성이 쏟아졌다.
3.
아플리아에서 마지막 강의를 끝마쳤다.
강의가 끝난 다음, 눈여겨봤던 학생들을 불러 각자 이야기를 나누고··· 정복의 완성을 기다리며 며칠간 특강을 해주긴 했지만, 그에 대해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할 일이 있으리라.
『아니.』
그래도 자꾸만 떠오르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내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이걸 배우라고요?』
『아니. 교수님, 아니. 잠깐만.』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벨노아는 비명을 질렀고.
『배틀 메이지의 극의?』
『극의라는 단어는 뭔가 확 와 닿습니다.』
『이걸 이렇게? 어? 어억! 끄윽!』
잘못 사용한 나머지 팔이 부러진 라크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아직 제대로 다루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을 필요로 할듯싶지만, 똑똑한 아이들이니 금방 터득하겠지.
『최초의 광인···이요?』
『제가 잡아야 할 적.』
『아, 그때 보았던.』
아일라에겐 그녀의 재능이 향할 방향을.
그리고, 그녀가 파악해야 할 흑막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으며.
『한 꺼풀 벗기면 보이는 진리.』
『섭리로 이루어진 세상. 그때 단상에서 보여주셨던 그 풍경을··· 저도 볼 수 있을까요?』
레스티의 질문에 긍정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풍경에 대해 더 자세히 들려주었다. 먼 곳으로 떠나는 거냐고 묻는 그녀에게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멀리 향해야 할 것 같았으니까.
반드시 쫓아갈게요, 라고 말하는 레스티의 결연한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모습을 곱씹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터벅.
“용사님.”
나를 마지막으로 배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와 같은 용사 클로에였다. 지난 열흘간 내게 하도 특훈을 받은 나머지 눈동자가 퀭했지만 클로에는 웃으며 내게 곱게 접힌 옷 한벌을 건넸다.
일전에 전달받았던 용사의 정복.
그 중에서도 맨 마지막에야 완성된 로브였다. 쫙 펼쳐본 로브의 디자인은 과연, 썩 만족스러웠다. 초대 마탑주의 로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뭐.
“간신히 합격점을 줄 만하네.”
내가 그리 중얼거린 순간 기사들과 함께 서 있던 왕도의 연금술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나는 쿡쿡 웃으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장난이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말.”
펄럭, 하고.
나는 로브를 걸쳐 입었다. 그제서야 완성된 정복을 가볍게 툭툭 털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정복을 건네준 클로에의 머리를 내가 툭툭 건드렸다.
“배운 건 도움이 됐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라니아 교수님.”
“그럼 다행이네.”
할 말이 많다는 듯 클로에가 입술을 붙였다 떼기를 반복했다. 고민 끝에 클로에가 입에 담은 것은 간결한 한 문장이었다.
“저도 곧 쫓아갈게요.”
쫓아온다, 라.
나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먼저 가 있을게.”
클로에를 지나쳐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주변을 둘러보면 좌우로 기사들이 쭉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나아갈 길을 지키고 있었다. 왕도의 한복판에서, 왕도의 바깥까지 이어진 길.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뒤편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광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이들이, 과일가게의 장수가, 길가를 거닐던 행인들이, 나를 보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 그런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용사의 정복이 펄럭였다.
한줄기로 묶어내린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길었던 겨울은 끝났고 봄이 왔다. 용사 파티를 때려치우고 마주하게 된 세 번째 봄. 정확하게 2년째 되는 이날 나는 출정 길에 올랐다.
“···하여간.”
내가 웃음을 흘렸다.
잿빛의 차기 마탑주를 때려치우고, 용사 파티의 현자가 됐다. 용사 파티의 현자를 때려치우고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교수가 됐다. 그리곤 돌고 돌아서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교수를 때려치우고, 용사가 됐다.
카일 이 빌어먹을 자식 덕분에 직장을 몇 개나 때려치우는 건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면 어느덧 길의 끝에 놓여있는 마차가 보였다. 전장으로 향할 마차였다.
턱, 하고.
나는 마차에 올랐다.
“갑시다.”
길었던 휴가는 끝났다.
이제는 전장으로 복귀할 차례였다.
현자가 아닌 용사로서.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로서.
-1부 완(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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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영토가 또다시 확장되어.』
『잃어버렸던 땅과 역사를 되찾아.』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는 전선.』
사락.
『120년 전, 배교자 글레투스에 의해 빼앗겼던 ‘마학도시 아르티아’의 탈환 성공.』
『고대 리치 스케발, 이듬해에 벌써 열 세 번째 격퇴 성공. 용사, 라니아의 ‘스케발의 두개골로 탑을 쌓을 수도 있을걸요?’ 발언이 화제···.』
신문을 훑어보던 로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커피잔을 기울이며 로셀은 신문을 탐독했다. 요란스러운 단어와 문장의 나열. 이런 꾸밈 가득한 문체를 썩 좋아하지 않는 로셀이나, 신문을 읽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제 하나뿐인 제자를 칭송하는 문장을 볼 때만큼은, 이겠지만.
“여전하구나, 녀석.”
제 자식을 칭송하는 글에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으랴. 어느 신문을 펼쳐보아도 보이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라는 이름에 로셀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잘하고 있는 모양이지.
탁, 하고 신문을 내려놓은 로셀은 창가를 바라봤다.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나른하게 내리쬐는 봄날의 햇살을 흘겨보며 로셀은 생각했다.
제자 녀석 없이 맞이하는 세 번째 봄이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의 출정으로부터 삼 년의 시간이 흘렀다. 달리 말하면 용사 갈라할의 죽음으로부터 4년일 것이요, 용사 카일의 은퇴로부터 3년일 것이다. 혹은······.
“그 아이들의 졸업으로부터 1년이지.”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황금 세대’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아플리아의 악몽이라 불리던 어느 용사가 담당했던 아이들. 그 누구보다 거친 학창 생활을 보낸 그 아이들이 아플리아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간 지 어느덧 1년의 세월이 흘렀다.
로셀은 덮어놨던 신문을 살짝 들어 올려보았다.
그 아이들에 관한 기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라니아의 활약상의 바로 다음에 소개되어 있었으니까. 굵은 글씨로 쓰인 이름들을 바라보며 로셀은 무심코 허어,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그림자 기사, 벨노아 반 드라고닉.』
『성류의 용사, 클로에.』
『개척자, 레스티 엘레노아.』
『북방의 수호자, 라크 반 그레이스.』
그들이 저마다의 무대에서 이룬 위업을 흘겨보며 로셀은 웃음을 흘렸다. 아이들의 성장은 빠른 법이다. 어른의 생각보다 훨씬 더.
2.
짤랑, 하고 주점의 문에 달린 작은 종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열린 문의 틈새로 눈바람이 주점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다지만, 북부의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이다.
“후우···.”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푹 눌러썼던 로브를 젖혔다. 머리칼과 어깨에 묻은 눈을 적당히 털어내며 그가 툭 내뱉었다.
“왜 이런 곳에서 보자고 그래? 눈 뚫고 오느라고 고생했잖아.”
“그야 네가 말했잖나. 북부에서 가장 맛있는 술이나 대접하라고.”
목소리는 주점의 안쪽에서 들려왔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춥지도 않다는 듯, 가벼운 옷차림으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청년이 이제 막 주점으로 들어온 남자를 향해 술잔을 흔들어 보였다.
“북부에선 이곳의 술이 가장 맛있다. 일단 술이 달다! 독하고 쓰기만 한 술과는 비교도 안 되지. 북부의 전사들은 내게 자꾸 지독한 술을 권하는데, 나는 그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 그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향해 청년이 피식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벨노아.”
“그래. 오랜만이네. 라크.”
북방의 수호자, 라크 반 그레이스.
그림자 기사, 벨노아 반 드라고닉.
“그리고 클로에도 오랜만이군.”
“잘 지냈어? 라크.”
벨노아의 뒤를 따라 들어온 클로에가 피식 웃으며 눌러쓰고 있던 로브를 젖혔다. 새하얀 머리칼이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1년 만에 보는 거 같네!”
졸업식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듯,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주점의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러나 그 걸음이 오래가진 못했는데, 벨노아에게 턱 하고 목덜미를 붙잡힌 까닭이었다.
“로브 이리 내. 눈은 털고 가라.”
“아, 맞다.”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클로에가 로브를 벗어 벨노아에게 넘겼다.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벨노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로브를 털고, 다시 클로에의 어깨에 둘러 줬다. 멀리서 보고 있자면 어린아이를 챙기는 부모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플리아의 졸업식으로부터 1년.
1년만에 재회한 세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술잔을 맞부딪쳤다. 먼저 말꼬를 튼 것은 벨노아였다.
“그래서 이야기는 들었지? 북부에서 수행할 작전이 있어서 우리가 여기로 왔다는 거···.”
“그래, 아버지께 들었다. 마왕군의 동향이 이상하다면서? 이곳에서 무언갈 노리려 한다고.”
“뭐, 꼭 그것만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옆에서 클로에가 술잔을 툭툭 건드렸다.
“그동안 바빠서 얼굴도 못 본 지 한참 됐잖아. 그래서 이번 기회에 보려고 찾아왔지! 듣자하니 엄청 대단한 일을 했다던데? 라크.”
클로에가 주섬주섬 로브 속에서 뭔갈 꺼내 들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취미는 바뀌지 않았는지, 그녀가 꺼낸 것은 오려낸 신문을 붙여 만든 공책이었다.
“이것 봐봐. 북부로 몰려든 마수의 행렬을 단신으로 격퇴, 마왕군의 백인대장 ‘케페트’의 목을 한 번의 도끼질로 잘라내···.”
팔랑, 하고 공책을 넘기며 클로에가 말을 이었다.
“북부를 뚫기 위해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왕군, 하지만 단 한 번도 왕도에 조력을 구하지 않고 단신으로 마왕군을 틀어막아··· 이거 라크 이야기잖아.”
북방의 수호자란 이름을 괜히 얻은 것이 아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마왕군을 라크는 지난 1년간 몇 차례고 격퇴했고, 조금의 피해도 만들지 않았다.
라크가 지키고 있는 설원은 넓게 펼쳐진 평야에 불과했으나, 그곳을 가리켜 북부의 전사들은 벽이라 불렀다. 강인한 전사가 지키고 있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벽.
“나도 너희의 소식은 들었다.”
라크가 멋쩍은 듯 머리칼을 긁적이며 말했다.
“견습임에도 온갖 작전에 참여하는 용사와, 그런 용사를 보좌하는 그림자 기사··· 이거 너희의 이야기잖냐. 전사들이 종종 내게 물어본다. 그림자 기사라는 벨노아, 이 사람 얼마나 강하냐고.”
큭큭 웃음을 흘리며 라크가 벨노아를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벨노아는 헛웃음을 흘리며 챙, 하고 제 술잔을 라크의 술잔에 맞부딪쳤다.
“그래서 말했지. 내가 벨노아 너보다 세다고.”
“뭐라는 거야?”
“맞지 않나. 아플리아에서 수석을 두고 했던 결투에서도 내가 이겼고.”
“넌 언제적 일을···.”
지금은 다를 걸, 이란 말을 벨노아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 때와 달라진 것은 자신 뿐만이 아닐테니까. 힐끔 흘겨본 라크의 팔뚝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마수를 틀어막고 마왕군과의 격전을 거듭하며 생긴 상처이리라.
라크에게 부족했던 것은 전투경험.
하지만, 지난 1년간의 실전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완전하게 메웠으리라. 전장에서 소문을 통해 접한 라크의 일화를 벨노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라크가 수호하는 설원에서 벌어진 일 중에선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더욱 많았으니까.
물론,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즘 들어 동창과 자주 만나는 것 같군. 얼마 전에 레스티도 북부를 찾아왔었는데.”
술잔을 기울이며 라크가 중얼거렸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 클로에가 고개를 기울였다.
“레스티? 레스티가 왔었어?”
“그래. 북부에도 잿빛 마탑 지부를 설립한다고 했던가···? 한동안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걸로 기억한다.”
뭐, 아무튼 간.
그리 중얼거리며 라크가 술잔을 내려뒀다. 마치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라는 것처럼.
“벨노아, 너는 ‘그거’ 성공했나?”
목적어를 뭉개트린 물음.
하지만 라크가 무엇을 물어보는지 벨노아는 알고 있었다. 그 물음에 벨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직. 감도 못 잡았어.”
“그런가···.”
“너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직 감도 못 잡았지.”
라크와 벨노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문을 모른 채 클로에만이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벨노아가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교수님은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알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반응을 안 한다.”
“아직 갈 길이 먼 거겠지. 나도 심장에 씨앗처럼 박혀만 있다는 느낌이다. 싹 틔울 기미는 보이지 않더군.”
삼 년 전, 출정을 앞둔 라니아가 라크와 벨노아에게 넘겨주었던 것. 그것을 떠올리며 두 사람은 쓰게 웃었다. 교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겨준 과제는 아플리아의 악몽이란 악명답게 지독하리만치 어려웠으니까.
“교수님이 생각나는군.”
“우연인걸, 나도 교수님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니아 반 트리아스.
정말이지 많은 것을 가르쳐주신 스승이자, 지금은 선배가 된 인물이다. 드디어 그녀와 같은 길의 초입에 서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갈 길이 까마득히 멀다는 것을 그들은 체감하고 있었다.
“오늘 자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실렸더군.”
“하루가 멀다 하고 공을 세우는 분이시니까.”
“아, 나 그것도 오려둔 거 있어!”
주섬주섬 공책을 넘기는 클로에를 뒤로하고, 벨노아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교수님 못 본 지도 한참 됐네.”
“아예 왕도로 돌아오시지 않으니까.”
그녀의 무대는 머나먼 곳에 있다.
수백 년간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곳. 마경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그녀는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벨노아와 클로에는 아직 그곳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교수님 보고 싶다. 자랑하고 싶은 게 한가득인데.”
클로에가 엷은 웃음을 흘리며 공책의 한 페이지를 매만졌다. 누군가의 사인이 새겨진 페이지였는데, 자세히 바라보면 ‘갈라할’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잘 나아가고 있다고.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워낙 바쁘셔서 얼굴 보기가 힘드네.”
“그래도 소식은 듣고 있지 않으시겠냐?”
벨노아가 술잔을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클로에, 네가 교수님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교수님 은근 세간의 반응에 관심이 많은 분이셔.”
“···응? 무슨 소리야?”
“너처럼 신문을 모으고 있을지도 모른단 이야기지.”
“에이, 교수님은 그런 분 아니셔.”
클로에가 절대 그럴 일 없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은 고결하신 분이잖아. 남들 반응에는 관심도 안 가지실걸? 고고하게 앞만 보고 가는 분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