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368
“···뭐, ‘위대하신’ 분이긴 하지.”
의외로 전부 다 듣고 있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벨노아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챙, 하고 술잔끼리 맞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3.
최전선, 마경의 중심부.
인류가 잃어버린 역사와 옛 문명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까지 기사들은 진군했다. 주변에 널린 유적과 건물의 잔해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역사적 가치가 담겨 있을 테지만, 그 가치에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이곳은 전장일 뿐이다.
고대 문명의 흔적이든, 유적이든 간에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곳이었으니까. 그런 전장의 한복판을 한 명의 기사가 걷고 있었다. 갑옷을 걸치지 않은 기사의 걸음은 가볍다. 마경의 중심부를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걸음에서 긴장감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기사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 누구든지 ‘이곳’에선 그렇다.
이곳은 다름 아닌 ‘그녀’가 맡고있는 구역이었으니까. 마수가 득실거리는 다른 전선과 달리, 이곳에는 단 한 마리의 마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경의 중심부임에도 쥐죽은듯 고요한 전장에는 잿가루만이 흩날리고 있을 뿐이다.
탁.
한참을 걸어 기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잿가루가 흩날리는 그곳에는 한 여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나부끼는 머리칼은 사방에 가득한 잿가루와 같은 잿빛이었다.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아, 이질적이기까지 하지만 이제는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마저 하나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그녀가 바로 이곳의 총책임자이자 하나의 전선을 단독으로 수호하는 인물이었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님께 보고 드립니다!”
최강의 용사. 인류 최강의 전력.
현자이자, 인도자이며 잿빛 마법사의 계보를 이어 대마법사의 반열에 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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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치 신문입니다!”
수많은 이명으로 불리는 그녀를 향해, 기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기사를 바라봤다. 기사는 품에서 쓱 신문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바로 기사의 임무였다.
‘세간의 소식을 용사님께 알리는 것!’
보다 정확히는 ‘용사님을 칭찬하는 글’을 모아서 올 것.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아무리 봐도 기사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는 나름대로 이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신문을 보자마자 라니아가 환히 미소 지었다.
이미 몇 번이고 본 미소지만 기사는 한순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만큼 매력적인 미소였다. 그가 이 임무를 계속하고 있는 이유에는 저 미소를 보기 위함도 있으리라.
“기다리고 있었어.”
당장 가져와 봐.
그리 중얼거리는 라니아를 향해 기사는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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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문은 좀 두껍네?”
“최근에 왕도의 3대 신문사에서 라니아님에 대한 특집을 다루지 않았습니까. 읽기 좋게 간추리느라 애 좀 먹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리 중얼거리며 바위에 걸터앉은 채 라니아는 다리를 꼬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요란스레 나부꼈으나 그도 잠시다. 딱, 하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불어오던 바람이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그럼 한 번 읽어볼까.”
촥, 하고 절도있는 동작과 함께 그녀가 신문을 펼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용사, 라니아를 칭송하는 글귀’ 만을 모아둔 참으로 별것 없는 신문이나···.
“흐음.”
제 입술을 매만지며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신문을 탐독하는 라니아를 보고 있자면···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신문쪼가리가 아닌 ‘중대한 사안’을 다룬 서류와 같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휙휙, 빠른 속도로 눈동자를 굴리며 라니아는 때로는 엷은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짧게 감탄을 내뱉으며 ‘이 신문 쓴 기자 누구야? 나중에 밥 한 끼 사야겠어.’ 라고 중얼거렸다.
“예, 알아봐 두겠습니다.”
“그래. 꼭 좀 알아봐. 이 사람 문장을 참 예쁘게 써. 특히 이 부분. 이 수식어가 아주···.”
“마음에 드십니까?”
“몹시 마음에 들어.”
기사, 테프란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런 웃지 못할 임무를 수행한 지도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세간의 소식에 관심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이 임무의 적임자로 뽑혔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테프란은 이 임무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용사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신문을 보며 크으, 하고 제 이마를 챱 하고 때리는 라니아를 보며 테프란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세간에선 고결하고 고고하며 완벽한 영웅으로 다뤄지는 라니아 반 트리아스이나, 그녀의 실체는 이렇다.
“야, 테프란. 이 부분 봐봐.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전무후무한···.’ 문장이 참 찰지지 않아? 이런 게 좀 취향이야.”
“다음부터 적극 반영해 신문을 수집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너랑은 말이 잘 통해서 좋단 말야.”
인간미가 넘치며, 털털하고 거리감이 없다.
생각보다 가벼운 사람이며.
사소한 부분에서 이상한 욕심을 부려 속물적이게 보일 수도 있으나, 실은 속물적이라기보단 차라리 소박하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물이다. 어찌 됐든 간 세간에서 다뤄지는 ‘고결하고 신비하며 완전무결한 영웅’과는 제법 거리감이 있는 모습이란 뜻이다.
‘···물론 이뤄낸 업적은 진짜지만.’
이런 모습을 자주 보아서 그런 것일까.
그녀에 대한 기사를 모으다 보면 테프란은 때론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장난기 많은 사람이 바로 그 라니아 반 트리아스라니.
‘인류의 유일한 희망, 전무후무한 영웅.’
테프란이 모아온 기사에는 과장이 없었다.
라니아 반 트리아스는 정말로 그렇게 불릴 위업을 세웠다. 수백 년간 큰 변화가 없었던 전선을 이 한 명의 용사는 머나먼 곳까지 확장시켰다. 그 누구도 닿지 못한 마경의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류가 잃어버렸던 땅.
인류가 잃어버렸던 역사.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인류의 영토는 확장됐고, 잃어버렸던 역사의 흔적을 되찾았다. 그녀가 걷는 길이 곧 인류의 역사였다.
“이번 것도 만족스럽네. 고마워, 테프란.”
살아있는 역사적 인물이 엷은 웃음을 흘리며 테프란에게 신문을 넘겼다. 신문이 썩 만족스러웠다는 듯 라니아는 기지개를 켜며 길게 숨을 토했다.
“후우, 아 맞다. 테프란, 저번에 부탁했던 건?”
“제자분들의 소식을 모은 기사 말씀이십니까?”
“응, 그거.”
기지개를 켜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프란은 로브에서 또 다른 신문을 꺼내 들었다.
“그것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 드릴까요?”
“응. 읽으면서 가야겠다.”
건네받은 신문의 첫 장을 라니아가 넘겼다.
첫 장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북부의 수호자 라크 반 그레이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라니아에 대한 신문이 아닌 그녀가 키운 제자들에 관한 신문. 신문을 쓱쓱 읽어내리던 라니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테프란?”
“예, 용사님.”
“신문 잘 골라왔네.”
라니아가 신문의 첫 장을 툭툭 건드렸다.
『북부의 수호자, 라크 반 그레이스.』
큼지막하게 쓰인 라크의 이름의 바로 아래에 이어지는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위대한 영웅, 라니아 반 트리아스의 수제자.』
그 문장을 두들기며 라니아가 씨익 미소 지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테프란은 뿌듯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뭐래도 제법 오랜 시간 라니아를 위해 신문을 모아온 테프란이다. 대놓고 자신을 칭송하는 글귀도 좋아하지만, 이 음습한 용사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글귀는 ‘은근하고 간접적인 칭송’ 이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2.
『그림자 기사와 성류의 용사, 서부 전선에서 또다시 공을 세워. 견습 용사임에도 독보적인 성장세.』
『고대 용의 마법사께서 그림자 기사, 벨노아에게 ‘드라고닉’의 성을 하사. 그림자 기사에게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여.』
『성류의 용사, 서부 전선에서 ‘단 한 번’의 마법으로 사령술사의 언데드 부대를 괴멸시켜.』
지난 삼 년 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는 제자들의 소식을 흘겨보며, 라니아의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키운 제자들의 활약상을 듣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스승님이 이런 기분이셨구나.’
왜 스승님께서 신문을 모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제자들의 활약상을 하나씩 확인하던 라니아의 눈동자가 한순간 멈춰 섰다. 잠깐의 침묵 후 라니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졸업 시험은 통과했네?”
『그림자 기사, 벨노아 반 드라고닉.』
『성류의 용사, 클로에.』
『동부 전선에서 용사, 데스텔의 지원하에 고대의 리치 ‘스케발’ 토벌에 성공.』
일찍히 말했던 졸업과제.
자신이 짜둔 커리큘럼을 잘 따라온다면 졸업할 때쯤 ‘고대 리치’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던 라니아다. 그것이 현실이 된 지금 라니아는 솔직히 말해 놀람을 느끼고 있었다.
‘칼트가 말한 게 헛바람이 아니었네.’
「직접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제가 봐도 그러니까요.」
「상상 이상입니다, 정말로.」
왕도가 안정되자 최근 가더(Guarder)의 일을 정리하고 전장으로 나서게 된 칼트다. 종종 벨노아와 클로에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칼트는 그런 식의 서신을 보내곤 했다. 만나면 놀라게 될 거라고.
과연, 그 말대로였다.
삼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은 것은 라니아뿐만이 아니리라. 벨노아와 클로에가 이겨낸 시련들을 흘겨보며 라니아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나, 평탄한 길은커녕 가장 어려운 길을 골라서 걷고 있었으니까.
‘···생각보다 빠르네.’
아이들의 빠른 성장을 보며 조만간 여기까지 오겠다는 생각을 하며, 라니아는 신문을 차례로 넘겼다.
‘레스티야 최근에도 만났으니 넘기고.’
팔랑.
‘왕녀님이야 계승 절차를 밟고 있을 테고···.’
그렇게 넘긴 끝에 도착한 것은 최근에 가장 신경 쓰이는 제자에 대한 소식이었다. 가니칼트의 검(劍)을 이어받은 소년, 라크 반 그레이스.
“······.”
라크에 대한 소식은 신문만이 아니었다.
기사단 내에서 통제 중인 정보가 담긴 기밀 서류가 함께 동봉되어 있었다. 기사단장이 보낸 편지 또한. 그 편지를 확인한 순간 라니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걸음을 옮기던 라니아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편지와 함께 도착한 사진.
사진을 라니아는 한동안 들여다봤다. 직후 라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벨노아가 탁, 하고 술잔을 내려뒀다.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털어낸 벨노아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기사단장의 인장이 새겨진 편지였다.
“미리 말할게, 라크.”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깨닫고 라크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취기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열흘 전에 너는 페텔 설원에서 몰려드는 마왕군을 격퇴했어. 그것도 단신으로. 단 한 마리의 마수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했지. 세간에선 ‘그런 식’으로 알려졌어. 맞지?”
라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세간에는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 말은 곧 벨노아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단 이야기였다. 라크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다 알고 있었나?”
“이래 봬도 용사의 동료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것도 표면적으론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진짜 이유는 네가 이곳에서 겪은 이현상을 조사하러 온 거니까.”
벨노아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마왕군이 몰려든 것도 맞고, 네가 그놈들을 격퇴한 것도 맞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면서? 너는 잔당들을 추적했고···.”
“도망치는 놈들을 따라 티트나 설산으로 들어갔다. 이참에 아예 뿌리를 뽑을 작정이었고.”
벨노아의 뒷말을 라크가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곳에 주둔지는 없었다.”
라크가 테이블에 올려진 술잔을 바라봤다.
텅 비어버린 술잔을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정확하게는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의해 난도질당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지. 혹시 그 사진도 전달받았나?”
“···받았어.”
벨노아가 테이블에 올려둔 편지지를 뜯었다.
툭, 하고 편지지 안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사진 속에는 난도질당한 숲의 풍경이 찍혀 있었다. 뿌리째 뽑혀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 무언가에 의해 참살당한 마왕군. 사방에 찍힌 핏자국과 널브러진 거목의 위에 아무렇게나 걸려있는 시체들. 마치 거대한 맹수가 할퀴고 지나간 듯한 풍경이었다.
그 사진을 가리키며 라크가 말했다.
“북부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늙은 전사들조차 이런 짓이 가능한 맹수는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마수는 북부에 존재하지 않다고 학자들 또한 단언했지.”
“기사단에서도 똑같은 판단을 내렸어. 이런 기이한 흔적을 남길 마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것만으로도 큰 문제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
특수한 마수의 등장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기사단에서 긴급하게 벨노아와 클로에를 보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네가 현장을 확인하러 온 기사들에게 했던 말, 그리고 기사단장님께 보낸 서신.”
벨노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보기에 이건 마수가 한 일이 아니라며?”
“그래.”
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새겨져 있던 흔적, 그건 단순히 할퀸 흔적이 아니었다. 그건···.”
전사이자 동시에 검사인 그가 말했다.
“검흔(劍痕)이었다.”
그 누구도 검흔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하지만, 라크만큼은 그 검흔을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손톱으로 사납게 할퀸듯한 흔적은 조잡하지만, 라크의 기술과 근본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가니칼트 반 갈라트릭.
머나먼 과거, 위대한 검사가 만들어냈던 검의 갈래. 그 갈래에서 파생되어 나온 검술을 배운 라크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설산에서 보았던 흔적에는 가니칼트의 검이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다면?”
“분명히 근본은 같다. 하지만, 인간이 휘두르는 검 같지가 않았다. 조잡하고 난잡했으며··· 또 사나웠지. 마치 본능에 따라 휘두르는 것처럼.”
“···그게 무슨 소리야?”
라크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인간이 아닌 마수가, 인간의 검을 흉내 내 휘두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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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의 사진과, 사진을 분석한 보고서.
사진에는 난도질당한 북부의 숲이 찍혀 있었다. 작은 육편으로 쪼개진 마왕군의 모습 또한 함께. 다양한 각도에서 찍힌 사진을 테이블에 늘어놓은 채 라니아는 제 턱을 매만졌다.
“···흐음.”
길다란 손톱으로 파헤친듯한 흔적.
짐승이 날뛴듯한 참상.
지면에 난잡하게 새겨진 양상을 보아 하면 마수가 날뛴 것 같기는 하지만,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라크는 이 흔적을 가리켜 ‘검술의 흔적’이라고 단언했다.
‘그것도 자신이 쓰는 검술과 유사하다고 말한 걸 보면···.’
분명 가니칼트의 검술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최초의 초인이 만들어낸 검(劍)의 길.
지금이야 수많은 검사들의 손을 거치며 개량된 검술이지만··· 라크와 카일, 그리고 검의 성지와 연관된 초인들이 쓰는 검술의 뿌리에는 분명히 가니칼트의 검술이 존재했다.
‘갈라트릭 류.’
그 검술의 무서움이야 라니아 또한 잘 알고 있다. 잘 알 수밖에 없다.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지면에 새겨진 이 난잡한 흔적이 그 끔찍하리만치 정교한 검술과 뿌리를 같이 한다고?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한데.”
라니아가 턱을 괸 채 사진을 들여다봤다.
시선을 둔 것은 난도질당한 설산의 풍경을 한 장에 담은 사진이다. 그 사진을 바라보며 라니아는 툭, 하고 내뱉었다.
“···이 정도로 안 끝날 텐데?”
강력한 마수가 날뛴듯한 흔적이긴 하나, 딱 거기까지다. 한 장의 사진에 전부 담길만큼의 참상.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긴 하나 문제 삼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도 작았다.
그래, 작은 것이다.
죽음의 칼이, 혹은 그와 관련된 무언가가 날뛰었다면 고작 저 정도에서 그칠 리가 없다. 설산의 한자락이 통째로 베여나가거나 설산이 무너졌겠지.
‘애초에 죽음의 칼은 저곳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음의 칼은 계약에 묶인 존재이니까.
툭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며 라니아가 미간을 좁혔다. 문제 삼기에는 크지 않은 흔적. 현재 북부에 주둔 중이거나 파견 나간 기사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무언가 찝찝하다.
인간의 검을 흉내 낸듯한 마수의 흔적.
현재까지 발견된 마수와는 전혀 다른 발자국과 흔적. 그 외에도 수많은 요소가 라니아를 신경 쓰이게 했다.
“······.”
잠깐의 고민.
직후 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2.
3년의 시간.
걸음을 옮기며 라니아는 지난 3년을 돌아봤다.
용사로서 출정한 아래 흘러간 삼 년의 시간. 그 삼 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지만, 라니엘로서 살아갔을 때처럼 격렬한 시간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잠잠했다.
죽음의 칼은 잠적했다.
배교자 글레투스는 생사마저 불확실한 채로 마경의 깊은 곳에 칩거했다. 광인은 여전히 행방불명이며, 불사성을 잃은 마왕이 전장에 출몰하는 일도 없었다. 딱히 강적이라 부를만한 존재가 전장에 나타나는 일이 없단 뜻이다.
‘굳이 강적을 꼽아보자면···.’
해골바가지?
아니, 그놈을 강적이라 부르는 것도 이제는 좀 그렇다. 라니아의 막사에는 스케발의 두개골을 쌓아올려 만든 탑이 하나 있었는데, 가장 위에 얹어진 두개골에는 ‘4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43번째 두개골이란 뜻이다.
이제는 해골바가지를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저 두개골을 깔끔하게 뽑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다. 스케발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라니아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빠르게 자폭 주문을 읊고는 했다.
···잡설이 길었지만, 요점은 이것이다.
지나치리만치 잠잠하다.
2년 전에 발생한 변수를 제외한다면, 지난 3년은 무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라니아는 오롯이 전선의 확장에 집중했다.
「이게 계약의 전부다.」
「네게 숨기고 있던 첫 번째 계약이 바로 이것이지. 이제 이 계약을 네게 맡길 수 있겠군.」
카르디에게서 들은 진실과 계약의 전말.
그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은 옳다. 전선을 계속해서 확장하며 마경의 최심부에 도달하는 것. 그리고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
아직까진 모든 게 순조롭다.
순조롭기에 고요하다.
허나, 지금의 정적은 몰아칠 폭풍 전의 고요함이라는 사실 또한 라니아는 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두가 인류의 희망을 노래하지만, 오직 그녀만큼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통제해야만 해.’
최악을 막기 위해.
그리고, 최선으로 향하기 위해 모든 변수를 통제해야만 한다. 지난 삼 년간 수많은 변수를 제거해온 라니아다. 그런 라니아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북부에서 무언가 일어나고자 한다.
그것이 커져 변수가 되기 전에 통제해야 할 필요를 라니아는 느끼고 있었다. 혹은, 대비해야 할 필요를.
“······.”
라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곳은 자그마한 막사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라니아는 짧게 숨을 가다듬었다.
“나티다.”
이름을 부르자 흐익, 하는 숨소리가 막사의 안에서 들려왔다. 라니아가 팔짱을 낀 채 기다리기를 잠시, 막사의 바깥으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어으, 어우. 누구십···.”
퀭한 눈동자, 부스스한 머리칼.
흐트러진 복장으로 라니아의 앞에 바로 선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자신의 앞에 누가 서 있는지를 확인하는데 1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기를 3초.
“······.”
도합 4초의 시간이 흐른 뒤 퀭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더 퀭해졌다. 마치 라니아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단숨에 깨달았다는 것처럼.
“···그, 라니아 님?”
“응.”
“혹시 말입니다.”
“어.”
“일입니까?”
“일이지 그럼.”
나티다라 불린 여인이 입을 다물었다.
직후, 그녀가 대충 걸쳐입은 로브의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갈 꺼내 들었다. 가루를 안에 넣고 돌돌 말은, 작은 막대 크기의 스크롤. 요컨대 연초였다.
“···태우면서 들어도 돼요?”
덜덜덜 떨리는 나티다의 손가락을 흘겨본 라니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3.
“점화, 점화석이···.”
연초를 입에 문 채 품을 뒤적이던 나티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라니아를 바라봤다. 그 은근한 시선에 라니아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탁, 치익.
“블, 가사함미다.”
“입에서 빼고 말해라, 빼고.”
연초를 문 채 히히 웃으며 나티다는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퀭했던 눈동자가 잠깐이지만 총기가 돌아왔다. 흐으으, 하고 연기를 내뱉으며 나티다가 연초를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금 전보다 선명해진 목소리.
라니아는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걸으면서 이야기하게. 따라와.”
고대 문명의 잔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초원을 걸으며, 라니아는 제 뒤를 따라오는 나티다를 흘겨봤다. 어깨자락까지 흘러내리는 부스스한 연갈색의 머리칼. 흐트러진 복장 위에 대충 걸쳐입은 로브.
그리고, 탁한 ‘녹빛’의 눈동자.
“나티다.”
“예, 말하세요.”
“요즘은 좀 괜찮냐?”
대답대신 나티다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짙은 잿빛의 연기를 숨과 함께 뱉어내며 나티다가 연초를 손등에 비벼 껐다. 치이익,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연초가 그녀의 새하얀 손등에 흉터를 남기나··· 그 또한 오래가진 않았다.
순식간에 흉터 하나 없이 회복된 손등에 묻은 잿더미를 탁탁, 털며 나티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좋은데요?”
그녀가 웃으며 방금까지 태우던 연초를 가리켰다.
“용사님께서 직접 붙여주시는 불로 연초도 태울 수 있는 직장이잖습니까. 옛날에 비하면 너무 좋은 직장인 셈이죠. 불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