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07
“너나 나나 해야할 일이 아직 많지 않나.”
그것은 죽어가는 이의 모습도, 무가치해진 삶에 좌절하는 이의 모습도 아니었다.
“죽을 생각은 아닌가 보네.”
“그녀가 내게 살라고 말했으니, 열심히 살아야겠지. 그렇다고 연인을 만들면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으러 찾아올 것 같지만 말야.”
다시금 살아가려는 이의 모습이었다.
카르디의 농담에 나는 쓰게 웃었다.
“농담 맞지, 그거?”
“농담일 리가. 진짜 저승에서 올라올지도 모르겠군.”
“가능성 있어. 야, 생각해보면 영혼의 깊은 곳에 그런 위험한 성격이 내재된 거 아닐까? 요즘 보면 클로에 그 애도 좀 위험해 보여.”
“···애석하게도 부정할 수 없군.”
웃음을 흘리며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무너지고, 바스러지기 시작하는 신전을 뒤로하고 앞으로. 다음으로. 다시 다음을 향해서.
뒤흔들리던 신전이 잠잠해졌다.
굳게 닫혀있던 신전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토벌대원들이 신전의 입구로 돌아왔고, 그들에게 칼트는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배교자 토벌전이 끝이 났다는 것.
사망자는 검귀, 드라카 하나뿐이라는 것.
그들이 신전의 안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칼트로선 알수 없었으나··· 낯빛과 상태를 보아하니 썩 고전했음은 알 수 있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다들.”
그렇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선 칼트는 신전의 문에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을 더 기다리자, 신전의 안에서 두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탁, 하는 가벼운 발걸음.
칼트가 고개만을 들어 올려 신전의 바깥으로 발을 내디딘 라니엘을 흘겨봤다.
“오셨습니까. 선배님.”
“뭐냐. 사지 멀쩡하네?”
“첫마디부터 여전하신 게 선배님도 멀쩡하시나 보군요. 작전은 성공한 모양이구요.”
“멀쩡하진 않지만, 성공하긴 했지.”
라니엘이 비어버린 제 눈동자를, 비어버린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 모습에 칼트는 숨을 삼켰다.
“···그거, 회복되긴 합니까?”
“글쎄. 방법을 찾아봐야지.”
라니엘이 길게 숨을 내뱉고선 털썩, 하고 칼트의 곁에 주저앉았다. 카르디에게 먼저 가보라면서 토벌대 쪽으로 보낸 뒤 라니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쿤텔 아저씨는?”
“잘 보내드렸습니다.”
“마지막에 뭐라 하시든?”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으니까 너한테 맡겼지.”
칼트가 라니엘을 흘겨봤다.
라니엘의 푸른 눈동자는 칼트가 아닌, 신전의 앞에서 흔들리는 초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그중에서도 초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죽기 직전에 몇 마디는 꼭 남기더라. 마치 제 삶을 마무리 짓는 것처럼 말야.”
“···그렇습니까?”
“적어도 내가 봐온 초인들은 그랬어. 그래서, 쿤텔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뭐냐?”
칼트가 칼자루를 툭툭, 건드렸다.
“훌륭했다, 라고 하시더군요.”
“만족하신 얼굴이었어?”
“예, 아마도.”
“그럼 다행이네.”
라니엘이 엷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나기라도 했단 것처럼 아, 하고 그녀가 짧게 숨을 뱉었다.
“야, 칼트.”
“뭡니까?”
“쿤텔 아저씨도 꺾었으면, 너 이젠 진짜 인류 최강의 검사인거 아냐? 얼마나 강해진 거냐?”
인류 최강의 검사, 라.
칼트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그렇게 외치고 다니고 싶긴 합니다만.”
휙 하고, 칼트가 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어쩌면 하늘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했다. 천외천(天外天),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다. 그런 말을 떠올리며 칼트가 중얼거렸다.
“제 위에 딱 한 분이 더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잠들어 계신 분.”
“카일? 글쎄, 그 녀석을 포함한다면 네 위에는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인 것 같은데?”
“다른 한 분은 누구입니까?”
“있어. 검의 마법사.”
“···누구인지 알 것 같군요.”
칼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음에 저희가 상대해야 할 분이군요.”
“잘 아네.”
“산 넘어 산이로군요, 정말.”
뭐, 그거야 어쨌든 간.
그리 중얼거리며 라니엘이 무릎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선 그녀가 칼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웃어 보였다.
“수고했다. 이번에도.”
“수고하셨습니다, 선배님도.”
칼트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이번 토벌전으로, 제가 선배님께 기대하는 건물의 층수가 하나 더 올랐으니 참고하십쇼.”
“···그거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냐?”
2.
“마나를 못 쓰게 됐다고?”
“그렇게 됐다.”
켈르할름의 말에 라니엘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왜?”
“왜긴. 거래의 대가로 바쳤기 때문이지.”
켈르할름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 답에 라니엘은 적잖게 당황했다. 마나를 못 쓰게 됐다는 건, 마법사에게 있어 죽음과도 같은 뜻이었으니까. 라니엘 또한, 이번 토벌전에서 켈르할름이 무언갈 잃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 생각치는 못했다.
“아니··· 괜찮냐?”
“안 괜찮을 건 또 뭐지? 오히려 홀가분하군.”
걱정스레 묻는 라니엘과 달리, 켈르할름의 대답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한평생을 바쳐 쌓아온 마도가, 마탑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허어···.”
라니엘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이 괜찮다니 뭐 상관은 없다지만···.
‘너무 평온한 거 아닌가···.’
켈르할름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자신의 선택에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켈르할름을 흘겨보다 문득, 라니엘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켈르할름 너, 제약이···?”
“말했잖나.”
광인(狂人)이라 불리던 마법사가 피식, 웃었다.
“홀가분해졌다고.”
미간의 움직임이,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그 모든 감정의 표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감정을 속박한 채 인형처럼 살아가던 광인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나만을 바친 게 아니다. 그간 나를··· 광인(狂人), 켈르할름을 이루던 모든 걸 바쳤다. 거기에는 아마도 광기 또한 포함되어 있던 거겠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놓지 못했던 것들. 그것을 켈르할름은 이번 싸움을 통해 모두 놓아주었다.
“광기도, 내가 지녔던 영원의 삶도, 그 아이들이 내게 주었던 힘도,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마나도, 그 모두를 놓아주었지.”
아마도, 하고 켈르할름이 중얼거렸다.
“본래 내가 감내해야 할 대가인 광기마저 별이 가져간 것은, 그것 또한 내가 바치는 삶의 일부라고 여긴 거겠지. 금기를 범한 죄인에게 내려진 벌이 아닌, 가치 있는 무언가로 여긴 모양이야.”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
그리 말한 켈르할름이 가벼이 웃었다. 목적을 이루고, 그간 짊어졌던 모든 짐을 내려놓은 어느 인간의 웃음은 가벼웠다. 가볍기에 아름다웠다.
“해방된 걸 축하해, 켈르할름.”
“글쎄, 전장의 총지휘관인 네 입장에서 축하할 일은 아니지 않나? 중요한 전력이 빠진 셈인데.”
“100년 넘게 전장에서 구른 군인이 사지 멀쩡히 은퇴한다는데, 그걸 축하 안 해주면 미친놈이지.”
“그것도 그렇군.”
“그리고, 이 싸움이 끝나면 네가 은퇴할 거란 것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고.”
배교자 토벌전.
그게 네 삶의 목적이었으니까.
라니엘이 피식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은퇴한 뒤에는 뭘 할지 생각은 해봤어?”
“글쎄, 아직은 없군.”
광기에 지배당하지 않게 됐다. 지배당하지 않기에 감정을 속박할 필요가 없게 됐다. 하물며 영원까지 제 몸을 떠났으니 이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늙어갈 수 있으리라. 다른 평범한 인간처럼.
많은 것이 바뀐 삶이다.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켈르할름으로선 아직 알 수 없었다.
“별생각이 없으면 말야.”
그런 켈르할름에게 라니엘은 조언했다.
“내가 일자리 하나 추천해줄까? 좋은 일자리로.”
“일자리?”
“응, 아마도 너도 잘 아는 일자리일걸?”
라니엘이 로브 속을 뒤적였다.
한참을 뒤적인 끝에 그녀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꺼내 든 종이는 백지. 그러나 그 종이에 라니엘이 마나로 글자를 새긴 순간, 그것은 추천장이 된다.
용사, 라니아 반 트리아스가 보증하는 추천장.
그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녔는지 모르는 이는 없으리라. 어디가 됐던 이 추천장만 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할 수 있을 테니. 그런 추천장에 라니엘은 어느 아카데미의 이름을 새겼다.
배움의 요람.
최고의 마학 아카데미.
“아플리아 아카데미의 교수.”
라니엘이 켈르할름에게 추천장을 건넸다.
“전장에서 은퇴한 유능한 마법사가 취직하기에 딱 좋은 자리지. 어떻게 생각해?”
3.
신전의 입구에 서서 나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정리해야할 것은 정리했다.
휴식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주변을 쓱 둘러보면, 출발 준비를 마친 토벌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피곤해 죽겠다며 레스티가 소환한 사역마의 위에 늘어져 있는 데스텔의 모습도.
이제는 귀환해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의 땅으로, 우리의 거점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하늘을 올려다보면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신앙하지 않는 이를 위한 땅 알케이아는 배교자가 축적해둔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이계(異界)였다.
오직 그녀만을 위한 성지이자, 성역.
이 땅의 주인이 떠난 지금 알케이아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장 깊은 곳, 별빛이 닿지 않은 곳에 마련된 그녀의 도피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파삭, 파스슥.
하늘에 떠있던 해가 허물어졌다. 푸른 하늘이 쪼개졌다. 불어오던 바람이 사라졌다. 사라지고 사라진 것들 사이로 스며드는 것은 어둠이었다. 푸른 하늘과 어둠이 뒤섞이는 모습은 물감이 뒤섞이는 것과도 같았다.
쿠궁, 쿠구구궁.
뒤이어 신전이 무너졌다.
배교자가 저질렀던 죄도, 그녀에 의해 고통받았던 이들도, 그녀가 만들어냈던 사역마의 잔재도, 모두 이 땅에 묻혀 사라져가리라. 나는 무너지는 신전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더는 주문을 짜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몸이지만, 그래도 마무리는 지어야만 했으므로.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카르디와 신전을 빠져나오며 흩뿌려둔 잿가루에 내가 불을 붙였다. 재는 요란스레 폭발하지 않았다. 그저 불길이 되어 신전의 잔해를 집어삼켰다. 고요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가자.”
타들어 가는 신전을 뒤로하고 우리는 지상을 향해 올라갔다. 귀환길에 올랐다. 우리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을 이들에게 승리를 알려야 했으므로.
“아.”
그렇게 수직굴을 거슬러 올라, 불에 타들어 가 잿더미가 된 숲을 걷던 참이다. 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단상에 서서 연설해야 할 텐데···.”
“그럴 몰골이 아니긴 하지.”
옆에서 걷던 카르디가 내 중얼거림에 답했다.
카르디의 말대로였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거였고. 적어도 기사들에게 있어서 나는 흔들리지도, 부상입지도 않는 승리의 상징이어야 했으니까.
“위장 아티팩트 가진 거 있냐? 카르디?”
“있겠나?”
“쩝. 쓰읍··· 티 안 나는 부상이라면 몰라도, 이건 티가 너무 확 나는데. 손가락이야 가린다 쳐도 눈이 문제야, 눈이.”
의안 같은 거라도 끼고 있어야 하나.
그렇게 내가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이다.
“네게 도움을 줄 아티팩트는 없지만.”
카르디가 품에서 무언갈 꺼냈다.
“도움이 될 만한 성유물이 있긴 하지.”
“···성유물?”
카르디가 손에 쥔 잔(盞)을 흔들었다.
잔에 담긴 것은 새하얀 신성력이었다.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신성력은···.
“당돌한 후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그녀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카르디가 내게 잔을 휙 던졌다.
잔을 받아든 내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이걸 짜낼 힘은 남아 있었대?”
“자기가 입힌 상처이니 자기가 회복시켜주는 게 도리라고 하더군. 그거 덕분에 그녀와 대화할 시간이 1분 정도 줄었다. 부디 그럴 가치가 있기를 바라지.”
“말에 가시가 돋쳐있는걸.”
“기분 탓이다.”
하여간, 하고 내가 웃었다.
“마지막까지 성녀답네.”
“작금의 성녀들과는 다른, 진짜 성녀이긴 하지.”
은근히 뿌듯해 보이는 카르디를 흘겨보며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과거와 달리 글레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카르디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짐에서 해방된 것이겠지.
“고맙다.”
“감사는 내가 아니라 글레리아한테 해라.”
“하늘 보고 건배라도 하면 되냐?”
“그렇게 하던지.”
그래서 진짜로 그렇게 했다.
하늘을 향해 짠, 하고 건배를 하는 시늉을 하고선 내가 잔을 기울였다.
“순교자,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를 기리며.”
거점에 귀환하기 직전.
데스텔은 라니아를 따로 불러냈다.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니엘과 마주하게 된 지금, 데스텔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말야.”
데스텔이 손을 뻗어 라니아의 얼굴을 가리켰다.
정확하겐 멀쩡히 복구된 그녀의 눈동자를.
“···너 눈에 구멍 뚫려있지 않았냐?”
“뚫렸었지?”
“이쪽 손가락은 다 날아갔었고.”
“날아갔었지.”
“근데 왜 지금은 멀쩡하냐?”
데스텔이 눈을 깜빡였다.
피곤해서 쓰러지기 직전, 분명 저 몸이 만신창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만신창이긴커녕···.
“어째 싸우기 전보다 더 팔팔한 거 같은데. 뭐랄까, 젊어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진짜? 그래 보여?”
“뭐냐? 왜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고 난리야. 부담스러워. 저리 치워라.”
“그래 보이냐고 묻잖아.”
기어코 데스텔의 입에서 ‘그래 보인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라니아는 몸을 뒤로 뺐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데스텔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한 건데?”
데스텔이 라니아를 가리켰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쉽게 나을만한 부상이 아니었는데. 너도 알 거 아니야? 용사의 재생력이 만능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용사의 재생능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나, 그것도 명백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결손된 부위의 재생의 경우 더더욱 그런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별빛이 많은 카일 조차, 육체의 결손을 회복하는 건 힘들어했는데.”
데스텔이 말을 이었다.
“네가 가진 별빛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잖아?”
“그거 일단은 군사기밀이거든?”
라니아가 쓰게 웃었다.
대외적으로는 카일의 별빛을 라니아가 완전히 계승했다고 알려졌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한 줌의 별빛뿐이었으니까.
‘용사라 불릴 수 있을, 최소한의 별빛.’
그 한 줌의 별빛을 극한까지 활용하고, 마나와 섞어 극대화시켜 사용하고 있기에 티가 나지는 않지만··· 그녀가 지닌 별빛의 절대적인 총량은 데스텔에 비해서도 밀리는 편이었다.
“그 한 줌의 별빛을 그렇게까지 활용하는 게 놀랍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상하잖아. 무슨 꼼수라도 쓴 거냐?”
“꼼수는 무슨.”
라니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선배가 준 선물 덕분이지.”
“···선배? 전대 용사한테 뭐라도 받아왔냐?”
그리 말하며 데스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라니엘을 기준으로 삼자면, 그녀 이전 세대 용사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용사는 아니고. 까마득한 선배.”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세히 이야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데스텔은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숨기는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으니. 그렇게 데스텔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무렵이다.
그래서, 하고 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신변잡기 말고, 따로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부른 거잖아. 이런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녀가 주변을 가리켰다.
우거진 숲. 휴식하고 있는 토벌대원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장소였다. 이렇게까지 해서 해야 할 말이 무엇이냐고 라니아는 질문을 던졌다.
“······.”
잠깐의 침묵.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다가, 데스텔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까닭이었다.
“야, 라니엘.”
고민 끝에 데스텔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다···.”
그곳에서 보았던 풍경을 떠올리며 그가 말했다.
“회귀(回歸)라는 거, 이론적으로 가능한 거냐?”
2.
회귀(回歸).
그 단어를 들은 순간, 라니엘의 눈동자가 조금 더 가늘어졌다. 라니엘이 짧게 숨을 뱉으며 말했다.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
“···회귀, 혹은 평행세계. 두 이론 중 하나는 성립되어야 가능한 일을 겪었거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고 중얼거리며 데스텔은 라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짐작가는 게 있긴 한 모양이네.’
데스텔이 길게 숨을 뱉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갈라할의 힘을 빌려서 투창했을 때, 그때 몸에서 별빛이 한순간에 빠져나가면서 이상한 풍경을 봤어.”
기억을 더듬으며 데스텔이 말을 이었다.
“황폐해진 세상. 갈라진 땅. 길게 이어진 핏물.”
그 핏물에 고여있는 풍경들을 데스텔은 이야기했다.
벨노아의 죽음. 클로에의 타락. 끝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모습.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보았던···.
“그 핏물의 끝에 내가 서 있었어. 지금보다 한 10년은 더 늙은듯한 내가. 그놈이 묻더라.”
“···뭐라고 물었는데?”
“후회 안 하냐고.”
“······.”
라니엘은 침묵했다.
데스텔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는 문득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상하더라고. 내 망상에서 비롯된 풍경이라기엔··· 그건 너무 현실적이었으니까.”
망상따위가 아니었다.
이미 일어났던 풍경을 보여주는 듯한, 차라리 회상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데스텔이 라니엘을 흘겨봤다.
“반응을 보아하니 짚이는 게 있긴 하나 봐?”
“···있기야 하지.”
길게 숨을 내뱉은 라니엘이 말했다.
“우선 평행세계는 없어. 분기점에 따라 세상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건 불가능해. 별도, 섭리도, 진리도 모두 유일한 존재여야 하니까.”
“그럼···.”
“회귀(回歸)는 존재해.”
라니엘이 툭, 내뱉었다.
역시, 그리 중얼거리며 데스텔은 제 콧잔등을 꾸욱 눌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데스텔이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너, 역시 회귀자였냐?”
“그래, 미래에서 온··· 뭐?”
고개를 끄덕이려던 라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했던 답변하곤 방향이 많이 달랐기에. 다만 고개를 숙인 채 콧잔등을 누르고 있던 데스텔은 그런 라니엘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어.”
그것도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마학의 역사를 뒤집고 다니고, 성인이 되자마자 전장에서 공을 세우고, 수십 수백 년을 살아온 마법사들을 가지고 놀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잖아?”
“어, 으음···.”
“거기에 때로는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해. 특히나 카일이 타락했던 그때 말야,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알고 전장으로 왔는데?”
데스텔이 한숨을 내쉬었다.
라니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모든 게 회귀자라면 다 말이 되긴 하네. 그 비정상적인 마법 실력도, 가끔 미래를 내다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말야.”
“아니, 야···.”
데스텔이 휙, 고개를 돌려 라니엘을 바라봤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질문했다.
“너, 도대체 몇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거냐?”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고 라니엘이 말하는 것보다 데스텔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일단 최소 2회차는 넘을 거 같은데, 그러면 지금 동갑으로 보이는 너도 나보다 최소 두 배는 더 살았단 거잖아. 그럼 나이 상으로는··· 음···.”
신음을 흘리던 데스텔이 슬쩍, 라니엘을 흘겨봤다.
“···누님이라고 불러야 됩니까? 아니면 형님?”
데스텔 딴에는 굉장히 진지한 고민 끝에 내놓은 질문이었다. 다만, 나이 문제에 예민한 어느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것은 최악의 질문이었다.
빠악!
라니엘이 데스텔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왜 때리는데! 아니, 왜 때리십···.”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라. 응?”
데스텔의 머리를 한대 더 후린 라니엘이 곧장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은 한동안 이어졌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뒤 데스텔은 굉장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네가 회귀자가 아니고?”
“그래. 난 네 두 배만큼 살지도 않았고, 누님이나 형님으로 불릴 나이도 아닌···.”
“회귀한 건 10년 뒤의 너라는 소리인 거지? 그것도 멸망한 세상에서 회귀해 온 여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보았던 풍경이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그럼···.”
데스텔이 신음했다.
“거기서 보았던 풍경은, 본래대로라면 일어났어야 할 일들이란 거냐.”
“그렇게 되겠지.”
“···미래에서 온 네게 감사해야겠네. 정말로.”
흐르고 흐르는 핏물에서 보았던 것은, 한 명의 인간이 파멸로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때 보았던··· 비굴은 커녕 용사라는 말조차 아까운 인간이 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데스텔이 몸서리쳤다.
“그 미래에서 난 제법 오래 살아남은 모양이야.”
“오래 살아남은 수준이 아니긴 하지.”
라니엘이 턱을 괸 채 말했다.
“너,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더라.”
“···내가?”
“그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세상이 멸망하는 꼴을 보고 자살했다고 그녀는 말했어.”
“···끝까지 살아남았단 건 놀랍지만, 자살한 이유는 알만하네.”
뭔데? 하고 묻는 라니엘의 질문에 데스텔이 답했다.
“죽는 게 두려워서 끝까지 살아남았을 텐데, 그 지경까지 갔다면 이미 살아있어도 지옥일 테니까. 죽는 거나 다름없었던 거겠지.”
그래서 그런 질문을 했던 건가.
후회하지 않냐고.
후회만 했던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냐고.
“다행이네.”
그곳에서 보았던 미래의 자신을 떠올리며 데스텔은 쓰게 웃었다.
“그런 미래에서 멀어져서 말야.”
“그 미래에서 멀어지려고, 몸 비틀면서 여기까지 오긴 했어. 그러다 상상도 못한 풍경도 봤고.”
라니엘이 데스텔의 옆구리를 찔렀다.
“갈라할의 힘을 빌릴 거라곤, 거기서 그렇게 빠져나올 거라곤 진짜 상상도 못했다. 사람을 보는 눈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미소 지었다.
“너에 한해서는 내가 틀렸다고 인정하려고.”
“···갑자기 뭐냐? 부끄럽게.”
“미안하다고, 새끼야.”
그래서, 하고 라니엘이 말했다.
“어땠냐? 기분은.”
“무슨 기분.”
“영웅이 됐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처음이잖아. 그렇게 앞으로 달려나갔던 거.”
두려움에 떨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공포를 짊어진 채 다시 앞으로.
그때의 자신을 떠올리며 데스텔은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데스텔에게 하나의 경험이 됐다. 처음으로 공포를 극복한 경험.
그러니까, 영웅이 되어 본 경험.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야.”
아니지만, 하고 데스텔이 웃었다.
“가끔은 영웅이 되는 것도 나쁘진 않네.”
3.
따로 들어야 할 이야기는 다 들었기에,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두 사람은 거점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갈라할의 성창은···.”
“그건 다시는 못 빌려 올 것 같더라고. 빌려 오면서도 딱 감이 오더라. 이건 한 번만 빌릴 수 있는 거라고.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럴 것 같긴 했지.”
바스락, 나뭇잎을 밟으며 앞으로 향하다 보면 어느덧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마경을 넘어 인간의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바닥에 쌓인 눈에 발자국을 찍으며 걷던 무렵이다.
“아, 그러고 보니.”
데스텔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풍경을 보았을 때, 딱 지금처럼 잿가루가 흩날리더라. 네가 흩뿌리는 거 하곤 조금 다른 잿가루가.”
움찔, 하고 라니엘이 멈춰 섰다.
앞장서 걷던 데스텔은 계속해서 말했다.
“근데 그 풍경을 내가 왜 볼 수 있었던 거냐? 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 미래와 지금 세상의 연결점은 재의 여신의 소멸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진···.”
뒤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오지 않기에 데스텔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멈춰 서있는 라니엘을 흘겨봤다.
“···뭐냐?”
“잿가루가 보였다고?”
“어. 흩날리는 잿가루가 풍경을···.”
“야, 데스텔.”
라니엘이 말했다.
“너, 별빛 끌어 올려봐.”
“지금? 여기서? 야, 이미 바닥까지 긁어 써서 당분간은 끌어올리기 힘들···.”
“잔말 말고. 빨리.”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데스텔이 별빛을 끌어 올렸다. 틱, 티딕하고 백금색의 별빛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튀어 오르는 별빛 사이로···.
“어?”
잿가루가 흩날렸다.
타고 남은 잿가루가.
더는 타오르지 못하게 된 잿가루가.
“다 끝났군.”
“······.”
“이젠 뭘 할 생각이냐?”
“몰라.”
“모르면 안되지, 너는.”
“너···.”
“책임을 져라,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뭐든 해봐라. 너는 뭐든 할 수 있는 놈이니까, 라고도 말 안 할 거다.”
“···뭐하자는 건데?”
“그냥 부탁 좀 하자.”
그가 쓰게 웃었다.
“신이 되던, 마왕이 되던, 별이 되던, 그 무엇이 되든 간에······.”
그가 부러진 성창(星槍)을 들어 올렸다.
부러지고 녹이 슬은 성창. 검붉은 피가 눌어붙어 더는 빛나지 않게 된 성창으로 그는 제 관자놀이를 겨누었다. 빛은 잃었지만 그 날카로움만큼은 잃지 않은 듯, 창날이 맞닿은 관자놀이에서 핏물이 흘렀다.
“제발 뭐라도 돼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겁쟁이가 말했다.
“뭐라도 돼서 증명해라. 죽어간 녀석들의 삶이, 그놈들 덕에 살아남은 나의 삶이, 너와 내가 발버둥쳤던 십여 년의 시간이, 지옥에서 견뎌왔던 그 길고 긴 시간들이 의미가 있었음을 증명해.”
그가 떠올리는 것은 수많은 죽음이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이 필요했다. 그렇게 수많고 수많은 죽음을 쌓아 도착한 종착지. 그 종착지를 바라보며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이딴 풍경을 그 녀석들한테 어떻게 보여줘.”
멸망해버린 세상이 눈앞에 있다.
하늘에선 검은 눈이 내렸다.
땅에선 마기(魔氣)가 진동했다.
마왕은 마지막까지 이 땅을 저주하고, 증오했다. 그것이 남긴 저주는 세상을 파멸로 인도하고 있다.
“···지난번에 네게 물었었지.”
평행세계, 혹은 회귀의 존재에 대해.
“그리고 너는 이렇게 답했다. 평행세계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건 회귀 쪽일 거라고, 너는 말했다.”
그 대화를 나누며 둘은 직감했었다.
이 세상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더는 회생할 수 없음을. 그들이 도착할 종착역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음을. 그것을 알고도 이곳까지 왔다. 무엇을 위해서?
“회귀해라. 그렇다면 최소한 이 모든 게 가치가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무책임한 말이야.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인간에겐 불가능해도.”
겁쟁이가 웃었다.
웃으며 마녀를 바라봤다.
“너라면 가능 할 거 같은데.”
그곳에는 이미 인간과 멀어진 존재가 있다.
절반은 신이 되어버린 인간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신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쐐기를 박아넣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저 반신의 마음을 굳힐 수 있을까.
잔인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저 반신의 역린과도 같은 존재의 이름을 겁쟁이는 입에 담았다.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존재의 이름을.
“카일이 말했다.”
“······.”
“너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더군.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는 신과 같은 너를 신앙했다고 녀석은 말했다. 그러니 이참에···.”
겁쟁이는 웃었다.
“신이라도 돼 보는 건 어떠냐?”
마녀는 침묵했다.
겁쟁이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네 말대로 세상이 하나뿐이고, 네가 신이 되어서 회귀할 수 만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말야.
“이 모든 일은 ‘없던 일’이 된다. 과거가 되어버린단 뜻이지. 그 누구도 기억할 수 없는 과거가.”
그래, 하고 겁쟁이가 말했다.
“그거면 된 거야.”
“···뭐가.”
“사라진다 한들, 잊힌다 한들,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은 저 땅 아래 쌓인다. 새로운 세상을 쌓아올릴 초석이 된다. 그거면 된 거야.”
하다못해 의미는 있을 테니까.
“그게 유일한 구원이다.”
“······.”
“이 말을 전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니, 웃지 못할 농담이지.”
비굴의 데스텔이 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부러진 창날이 데스텔의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살고자 발버둥칠 때는 그리도 무거웠던 성창이, 삶을 내려놓은 지금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데스텔.”
“말릴 생각이냐?”
“안 말려.”
“그럼 뭔데?”
“만약에 말야.”
라니엘이 말했다.
“내가 신이 된다면, 그래서 네 말대로 정말로 과거로 회귀한다면···.”
그녀가 쓰게 웃었다.
“한 번만 더, 나를 도와줄 수 있어?”
데스텔의 앞에 천칭(Balance)이 떠올랐다.
별빛도, 그늘도 아닌 재로 이루어진 천칭.
머릿속에 각인되는 계약의 내용을 읽은 순간 데스텔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정신이냐고 되물으려다가, 데스텔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제정신일 리가 없지.
···죽고 나서도 안식은 주지 않을 생각인가.
아무렴, 그런 편안한 죽음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죽음으로 도망치려 했거늘 마지막만큼은 도망치지 말라고 저 마녀는 말하고 있었다. 헛웃음을 머금은 채 데스텔은 쏘아붙였다.
“제정신은 아니군.”
“언제는 제정신이었다고.”
“그래. 너나 나나 미쳐있는 건 분명하지. 분명한데 말이다, 여기서 몇 줄만 추가하지.”
“뭘 추가해주면 되는데?”
“계약에 앞서 ‘내게’ 내가 질문할 것.”
“뭐라 질문하려고.”
요구사항이 추가된 계약서.
그 계약서에 데스텔은 서약했다.
“그냥, 궁금하거든.”
한 평생 후회만을 하며 살아온 겁쟁이가 중얼거렸다.
“바뀐 미래에서 나는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비굴이 신음했다.
“나도, 영웅이 될 수 있는지 말야.”
1.
“···잿가루가 흩날렸다고?”
카르디가 눈을 깜빡였다.
“별빛을 끌어 올렸는데, 잿가루가 나왔다고 말하는 거냐? 네 것이 아닌 재의 여신의 것이?”
“그렇다니까.”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재의 여신은 그날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나. 애초에 현세에 개입할 수도 없을 테고.”
내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물론 잿가루가 흩날린 건 한순간이고, 의식하고 끌어올리려 했을 때 나오진 않았어. 데스텔도 어떻게 했는지 이해 못 하는 눈치였고.”
데스텔이 잿가루를 끌어올린 건 한순간뿐.
그 뒤로 데스텔의 별빛에 재가 뒤섞여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찰나의 순간 피어올랐던 잿가루를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건 분명 재의 여신의 것이었다.
“달리 들은 건 없어?”
“나도 그녀와 그리 길게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카르디가 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잿가루가 흩날리는 건, 본적이 있군.”
“···본 적이 있다고?”
“그녀가 소멸하고, 네가 카일을 막으러 마차에 올랐던 그날의 이야기다. 내 가게가 있는 골목길에 눈이 아닌 잿가루가 흩날리더군.”
한참을 고민하던 카르디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잔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잔재?”
“그래. 수만 년 전 고룡에 의해 떨어졌던 신들의 유해도 알케이아에 멀쩡히 남아있지 않았나. 재의 여신 역시 소멸했지만, 그녀의 잔재가 이 세상에 잔류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카르디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잔재로 치부하기에 재의 여신의 잔재는 데스텔에게 과할 정도로 개입하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나는 이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뭐, 어찌 됐든 좋은 일이겠지.”
“퍽 확신하는군.”
“그녀가 어떤 식으로 개입을 하던, 그게 최소한 내 발목을 붙잡지는 않을 거 아냐.”
또 무슨 수를 준비해놨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것이 내게 해를 끼치는 일은 없으리라.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나는 결론지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저것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거든.”
내가 막사를 살짝 걷고선 주변을 둘러봤다.
준비된 단상과, 단상 앞에 바글바글하게 모여든 기사들이 보였다. 저들 모두가 나의 연설을 기다리는 이들이다. 승전(勝戰)의 소식은 이미 전해졌으나, 나의 입으로 직접 그 소식을 듣기를 저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후우···.”
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로브를 고차입고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한 갈래로 머리칼을 묶어내라곤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번거로워 보이는군. 그렇게까지 차림새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나?”
“그래야 할 필요가 있지.”
내가 말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니까. 내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숨결 한 번, 사소한 행동까지 모두 기록되는 자리이니까. 그러니 완벽해야지.”
내가 카르디를 돌아보았다.
“재앙을 쓰러트리고도 나는 건재하다는 걸 보여야 하지. 위업을 이루고도 자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야 해. 대단한 일이 아닌, 그저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듯이 말해야 하지.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해야지. 완벽하게 있어야만 하니까.”
내가 가벼이 웃었다.
“그게 나의 역할이고.”
저들의 기대에 답하는 것.
완벽한 영웅으로 있는 것.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니까.”
그게 카일이 내게 맡긴 꿈이니까.
표정을 관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마지막으로 숨을 내뱉은 뒤 내가 막사의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기사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단상의 위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탁, 하고 단상의 위에 내 걸음 소리가 울렸다.
단상 위에 오른 채 나는 앞에 모인 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수많고 수많은 기사들이 있었다. 나와 같은 전장에 섰던 기사들이, 혹은 나의 뒤를 지켜주었던 기사들을 바라보며 나는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단상에는 내 목소리를 키우기 위한 마도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나는 마나로 목소리를 감았다.
확성 마도구를 써도 거리에 따라 내 목소리의 크기는 달라진다. 닿는 속도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나로 둘러친 목소리는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속도로 저들의 귀에 전달된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동시에 감수할만한 일이었다.
“아아.”
내가 입을 열었다.
입을 열며 나는 생각했다. 재앙을 토벌했다는 소식을 알리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라고. 흑룡의 토벌 소식을 알렸을 때 인류는 환희했다. 그렇다면 배교자의 토벌을 알렸을 때 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조금이지만 그것을 기대하며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아래, 배교자(背敎者)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인류는 배교자는커녕, 그것이 부리는 사역마의 등장에도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수백 년의 세월.
“하지만, 오늘 이날부로.”
내가 웃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배교자는 더는 공포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으리라.”
웃으면서 외쳤다.
“배교자는 토벌됐다. 배교자가 부리던 사역마는 단 한 마리도 남김없이 섬멸당했다. 오늘 이날만큼은 환희해도 좋다. 무기를 내려두어도 좋다.”
나의 목소리와 나의 웃음은 기사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에 파묻혔다. 배교자에 동료를 잃었던 이들이, 무력함을 체감해야만 했던 이들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메아리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외쳤다.
“검은 폭풍, 흑룡 벨리알은 용사 카일의 검에 의해 목이 떨어져 토벌당했다.”
검은 폭풍, 흑룡의 토벌.
“배교자, 글레투스는 용사와 초인들의 손에 의해 토벌당했다. 재앙은 모든 것을 부정당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배교자, 글레투스의 토벌.
“남은 재앙은 무엇인가? 고대 리치 스케발?”
내가 비웃음을 흘렸다.
“나의 막사에 그 두려운 재앙의 두개골이 사십하고도 일곱 개나 있음을 모르는 이들은 없으리라. 여전히 스케발이 재앙인가? 글쎄, 나는 그렇게 여기고 싶지는 않군.”
기사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내가 말했다.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