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406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문장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곳에서 말해준 후인에게 글레리아는 구원받았다.
‘아아···.’
그녀는 제 삶을 돌아보았다.
빛나던 길은 그늘에 삼켜진 순간부터 뒤틀리고 망가져 있었다. 피와 시체로 물든 길이, 악취가 진동하는 길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서 있는 곳마저 그렇지는 않다. 그녀가 서 있는 길은 밝다. 옳은 길이다.
힘 없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살아왔던 성녀는 재앙이 됐다. 저 자신만의 신념을 믿고 모두를 망가트리려던 배교자는, 다시 성녀가 됐다. 길의 끝에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온 채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는 두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맞이하려고 했다.
“······.”
눈을 감았으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배교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뜨면 보이는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눈에 들어온 것은 야트막한 언덕이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는 언덕. 기억에 있는 풍경이었다.
···종종 그 사람과 놀러 왔던 언덕이다.
바람이 좋은 날에, 햇볕이 따스한 날에, 비가 오는 날에, 낙엽이 바스러지는 날에,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 그저 모든 날에 저마다의 핑계를 대며 그 사람을 끌고 왔던 언덕이다.
「업무가 밀려있다. 안 된다.」
「또 거기냐? 질리지도 않나? 도시락을 준비했으니 같이 가자고? 정말 귀찮게 하는군···.」
툴툴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 사람을 데리고 왔던 곳. 글레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힘이 없어 일어서지는 못했기에, 그녀는 언덕에 놓인 나무에 등을 기댔다.
왜 이곳에?
이곳은 그날 불타 사라졌을 텐데···.
그리 의문을 가지던 순간이다.
탁, 하고 어디선가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글레리아가 천천히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글레리아가 탄식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환각인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은데.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탁.
그리고, 걸음이 멈추었다.
글레리아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멈춘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그토록이나 재회를 바라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글레리아.”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말했다.
“미안하다. 너무 오래 걸렸군.”
엘프의 삶은 길다. 지나치리만치.
원한다면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는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단명종에 불과하다. 인간의 한평생은 엘프들에게 있어 잠시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풍과도 같은 것이리라.
그렇기에 엘프들은 말한다. 인간을 사랑하지 말라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제 곁에 잠시 머물다 흩어질 바람을 쫓는 것은 미련한 일이 아니냐고, 조소하곤 한다.
그러나, 여기 한 명의 엘프가 있다.
인간을 동경하고, 사랑했으며, 신뢰한 엘프.
그는 제 곁에 머물다 사라진 바람을 쫓아 천 년의 시간을 달렸다. 천 년의 밤을 지새웠다. 길고 긴 시간을 악몽 속에서 보냈다. 그렇기에, 이 엘프는 길고 긴 엘프의 역사 중 가장 미련한 엘프일 것이요, 동시에 가장 순수한 엘프일 것이다.
“글레리아.”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웃었다.
“미안하다. 오래 걸렸군.”
천 년의 시간 동안 하나의 꿈을 좇은 미련한 엘프는, 기어코 목적한 곳에 도달했다.
2.
글레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제 망막에 비춘 인물의 모습에 그녀는 당황했다. 자신이 잘못 보고 있는 것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르, 미엘?”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통해 새어나온 목소리는 가늘다. 바람에 흩어져버릴 것처럼. 하지만, 제 곁을 스쳐 지나간 바람만을 쫓아온 카르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의 목소리를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여전히 그렇게 부르는군.”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웃음에, 글레리아의 눈동자가 조금 더 흔들렸다.
“···어떻게?”
여전히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에 그녀가 내뱉은 말은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카르디는 잠시 고민했다.
어떻게, 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를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해줄 말이야 많았다. 자신이 견뎌온 천년의 세월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네가, 너희가 내게 남긴 역할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에 대해 소리치고 싶었다. 원망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시간이 있었다.
있었지만.
“글쎄.”
글레리아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렸다. 카르디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글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와 마주한 순간, 원망할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많은 것을 바쳐가며 이곳에 도착했지.”
카르디가 엷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어렵더군. 네 얼굴을 한 번 다시 보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어.”
그렇게 말하며 카르디가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굽혀서 글레리아와 같은 높이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글레리아의 녹빛 눈동자에, 카르디의 금빛 눈동자가 비췄다.
“오랜만이다, 글레리아.”
글레리아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언어가 되지 못한 신음을 흘리던 그녀가, 간신히 한 마디를 짜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꿈이면 좋겠나?”
글레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르디는 손을 뻗어 글레리아의 머리를 툭, 가볍게 건드렸다. 느껴지는 것은 온기. 정확한 감촉. 그제야 글레리아는 깨달았다.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르미엘, 아르미엘···.”
“좋아하진 않는 세례명이다. 될 수 있으면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지만···.”
아르미엘이 웃었다.
“네게서 듣는 것만큼은, 그리 싫지가 않군.”
* * *
들판에 바람이 불어왔다.
봄날의 미풍이다. 귓가를 간질이는 따스한 바람과 나른하게 쏟아지는 햇살이 야트막한 언덕을 감쌌다. 언덕에 놓인 나무에 기대어 앉은 카르디와, 카르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글레리아는 언덕의 아래를 보았다.
저 너머에 보여야 할 아르카디아는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거라곤 드넓게 펼쳐진 들판뿐이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글레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재현해낸 풍경이구나. 그리 글레리아는 확신했다.
“왜, 하필이면 여기예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여기더군.”
카르디가 사용한 것은 성배(星盃)와 비슷한 구조로 만들어진 아티팩트다. 대상이 가장 소중히 여긴 풍경을 투영하는 아티팩트. 펼쳐진 들판의 풍경을 바라보며 카르디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만나게 되면 들려줄 이야기가 많았는데, 정작 상황이 다가오니 좀처럼 입이 열리지 않았다.
“아르미엘.”
그런 카르디의 모습을 눈치챈 듯, 엷은 웃음을 흘리며 글레리아가 입을 열었다. 카르디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은 채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가 보낸 편지는 받았어요?”
“···받았다.”
원망하지 않아요, 당신을.
그 문장을 떠올린 카르디가 작게 신음했다.
“날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마지막까지.”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자신은 지난 세월을 떠올렸다. 꿈을 놓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쫓아가지도 못했던 지난 세월을.
「그녀를 구할 방법은 없다.」
「그늘에 바쳐진 인간을, 되돌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으로도 구할 수 없다.」
그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꿈을 놓아버리려 했던 자신이 있었다. 그럼에도 완전히 놓아버리진 못해서, 끝까지 계약을 붙잡고 보수하던 자신이 있었다. 무력함과 허무함 속에서 카르디는 길고 긴 시간을 보냈다.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놓을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언젠가 나타날 영웅을 기다리는 일뿐. 그 영웅이 나타날지조차 의심이 들었던 시점에, 카르디는 왕도의 깊은 곳으로 잠적했다. 구석진 골목길에 스스로를 유폐했다.
“글레리아, 나는 말이다···.”
카르디가 신음했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너를 구할 방법만을 생각하며 보낸 것은 아니야. 포기했고, 좌절했고, 망가졌었다.”
“그런가요?”
“그래. 눈을 감으면 보이는 너희와의 추억이 그리워서, 눈을 떠보면 보이는 현실이, 네가 없는 현실이 고통스러워서 꿈에 빠져 살았던 적도 있었다.”
성녀의 앞에서 죄인은 고해(告解)했다.
자신이 천 년 동안 저지른 죄를 고백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기억을 지워보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행할 용기마저 없어서 결국 포기했었지. 그렇게 난 죽어가듯이 살았다. 살아있는지도 모르게 시간을 허비했다. 오랜 시간을.”
카르디가 제 눈가를 쓸어내렸다.
“그러니,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잖아요.”
글레리아가 카르디의 말을 끊었다.
“끝까지 계약을 놓지는 않았잖아요.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를 후인을, 당신은 계속해서 기다렸잖아요. 자그마치 천 년의 시간 동안.”
“······.”
“그거면 충분해요. 그 이상을 어떻게 바래요?”
카르디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몸에서 힘을 뺀 채 그녀가 미소 지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잖아요.”
“···나를 원망하지 않나?”
“몇 번이나 말해요? 원망 안 한다니까요. 그날 아르카디아에서 당신이 내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하는데, 어떻게 원망해요.”
그리 자애롭게 미소 짓던 글레리아가 아, 하고 짧게 외치며 눈을 부릅떴다. 마치 뭔가 생각났다는 것처럼.
“아르미엘.”
“뭐냐.”
“혹시 그동안 애인을 만든 적 있어요?”
“뭐?”
“다른 여자랑 사귄 적이 있으면, 그건 조금 원망스러울 것 같은데. 솔직하게 말해봐요. 한 번 정도는 제가 눈 감아줄게요. 그래도 일천 년의 시간인데, 한 명 정도는 너그러이 봐줄 수 있어요.”
“···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에 카르디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생각해보면 글레리아는 이런 성격이었지. 오랜 추억을 더듬는 느낌이 들어 카르디는 그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웃지 말고 말해봐요, 네?”
진지하게 캐묻는 글레리아의 목소리에 카르디는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없다. 단 한 번도.”
“···정말요?”
“눈을 감았다 하면 떠오르는 게 네 모습이라, 천 년 동안 단 한숨도 못 잤는데··· 새 여자를 사귈 여유가 있었을 리가.”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글레리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카르디는 쓰게 웃었다. 온갖 고민을 하며, 할 말을 고르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어차피,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을 텐데.
마지막만큼은 즐겁게 보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조금 가벼워진 표정을 짓는 카르디의 얼굴에, 글레리아는 미소 지었다. 마치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는 듯이.
“그래요, 마지막만큼은 즐겁게 보내야죠. 복잡하고, 서로에게 상처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알고 있었나?”
“모를 리가요.”
망가진 몸. 옛적에 죽었어야 할 몸을 붙잡고 있던 것은 그늘과 계약의 의무다. 후인(後人)은 계약을 박살 냈고, 그늘을 모조리 불태웠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글레리아는 온전한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환생도, 혼의 순환도 아닌, 온전한 죽음.
서서히 바스러지는 제 영혼과 육신을 감각하며 글레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서, 카르디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제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에, 당신을 다시 만나게 돼서 기뻐요. 기적 같은 일인 걸요.”
다시는 없으리라 생각했던 기회다.
하물며 이렇게 성녀로 돌아와 카르디와 재회할 수 있을 거라곤 꿈도 꾸지 못했다. 그것이 현실이 된 지금, 글레리아는 어느 때보다 환히 미소 지었다.
“저는 구원받았어요. 후인에게, 당신에게.”
“······.”
“파멸밖에 없으리라 생각한 길의 끝에서, 당신과 재회하게 됐잖아요. 이보다 더한 결말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고 글레리아가 말했다.
“마지막만큼은 즐겁게 이야기하다가요. 옛날 일을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저나 당신이나 지난 수천 년간 혼자서 과거만을 그렸을 텐데···.”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녹빛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울면서, 웃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볼까요?”
“···그래.”
카르디가 말했다.
“엘프는, 기억력이 좋으니 말이지.”
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로의 곁에 머물다 지나간 찰나를, 조금도 색이 바래지 않은 찬란했던 과거를. 즐거웠던 추억을 공유하며 웃었다. 미소 지었다.
“그놈의 연초 좀 그만 태우라고 구박했는데, 정말 끊어버릴 줄은 몰랐는걸요.”
“연초를 싹 다 신성술로 불태우고 캑캑거리던 네 모습을 보고나니 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더군. 왜 하필이면 불태운 거냐? 연기가 지독할 텐데.”
“아, 사실 연초를 좀 피워보고 싶었거든요, 그때. 당신이 죽어라 피워대는데 무슨 맛일까 싶어서.”
“하여간···.”
사소한 이야기.
“그 로브. 아끼던 로브는 어떻게 했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거랑 조금 다른 거 같은데.”
“징징대는 후배 놈에게 던져줬다. 돌려줬긴 한데, 아주 작살을 내서 돌려줬는지라 써먹을 게 못 되더군.”
“···아끼던 로브 아니었어요?”
“좋은데 쓰인 셈 쳤지.”
사소하고, 사소한 이야기.
“생각해보면 고백했던 거 당신이었잖아요? 그 고백, 진짜 너무 답답해서 내가 다시 했었는데. 그거 기억할지 모르겠네.”
“무슨 고백을 그렇게 하느냐면서 내 멱살을 붙잡았던 네 모습은 기억하고 있다. 사람 각오도 몰라주고, 참 너무한 녀석이란 생각을 했었지.”
“아니, 무슨 고백을 회로 이론을 비유로 들어서 해요? 이해하지도 못하겠는 소리를 한 시간 동안 늘어놓더니, 뜬금없이 이 회로와 같이 너를···.”
“그만해라. 지우고 싶은 기억이니.”
“와, 부끄러워하는 거 봐.”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서로를 놀리며 웃었다.
“가니칼트랑 처음 만났을 때도 기억나네요. 무슨 철제 롱소드 하나 들고 용 수십 마리를 토벌한 검사가 있다길래···.”
“아, 기억나는군. 아르카디아의 성벽을 보고 세상에서 가장 굳건한 성벽이니, 이걸 베어보고 싶다고 난리를 치는 미친놈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나갔었지.”
“그거, 나중에 진짜 했잖아요?”
“그래. 정말로 성벽을 한 번 반으로 쪼개서, 보다 못한 여왕께서 미친 짓 하지 말고 수호단장이나 하라고 직위를 하사했었지 않나.”
“재앙이 돼서도 한 번 베어버렸고요.”
“두 눈으로 보고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동료의 이야기.
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
시련을 몇 번이고 뛰어넘었던 일과, 시련과 시련 사이에서 마주했던 크고 작은 이야기들.
“당신은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요?”
“아, 그러고 보니 하나 있군.”
반쯤 흐릿해진 글레리아를 바라보며,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꼭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알려 줄게요.」
「···그러니까, 나중 언제?」
「글쎄요.」
떠오르는 것은 언젠가 나누었던 문답.
“왜 나를 아르미엘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슬슬 들려줘도 괜찮지 않나?”
「당신이 고작이라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몇백 년 뒤에 알려주기라도 하겠단 거냐?」
“정말로 천 년이 흘렀으니까 말이다.”
재회를 바라며 일천 년의 시간을 견뎠거늘, 일천 년의 기다림 끝에 주어진 것은 정말이지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다. 엘프는커녕 인간에게 있어서도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 순간.
그 순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서로의 온기를 느낄 시간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추억을 더듬을 시간도,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목이 메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웃으며 배웅하자고 약속한 마당이다. 꼴사납게 눈물 흘릴 수는 없는 법이다. 카르디는 숨을 삼키고 눈에 힘을 준 채 글레리아를 바라봤다.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왜 나를 아르미엘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슬슬 들려줘도 괜찮지 않나?”
「당신이 고작이리라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몇백 년 뒤에 알려주기라도 하겠단 거냐?」
“정말로 천 년이 흘렀으니까 말이다.”
2.
“그거, 아직 잊지 않았네요?”
카르디의 질문에 글레리아는 미소 지었다.
하여간, 저 좋은 기억력을 쓸데없는 일에 사용하는 건 여전하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레리아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눈을 감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어째서, 아르미엘이란 이름을 고집했던가.
참으로 별것 아니었던 이유로 기억한다.
중간부터는 카르디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어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간 썩 거창한 이유가 있어선 아니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이유였어요.”
“그 별거 아닌 이유를 듣기 위해 천 년을 기다린 내 마음도 좀 헤아려주면 좋겠군.”
글레리아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길게 숨을 내뱉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입을 열며 그녀가 떠올리는 것은 과거다. 아주 오랜 과거.
“그냥, 그냥 말이에요···.”
카르디 반 아르미엘.
왕국 제일의 마탑의 수장이자, 모두가 존경하는 아르카디아 유일의 대마법사. 모두가 존경하고, 또 두려워하는 인물.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어서, 감히 도전할 수 없는 존재여서··· 모두가 당신을 카르디라 불렀잖아요? 당신이 세례명을 싫어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잿빛 마탑주님.
대마법사님.
카르디 님. 카르디 경.
카르디, 카르디, 카르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죠. 당신의 눈 밖에 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당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서 좋을게 뭐가 있다구요?”
“···내가 그렇게 권위적이었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간에요.”
글레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부끄럽다는 듯,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모두가 당신을 카르디라 부르는 마당에, 내가 당신을 아르미엘이라 부르면··· 카르디가 아닌 ‘아르미엘’은 내가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닌가···하고···.”
“······.”
“···왜 그렇게 봐요?”
“글레리아, 너 말이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르미엘이라 부르지 않았나?”
“···그랬었죠?”
“······.”
“···뭐예요? 왜요. 첫눈에 반했다고, 첫 만남부터 당신에게 특별하게 여겨지고 싶었다고 제 입으로 말해주길 원해요? 와, 이걸 꼭 말로 해야 알아듣나?”
조금 토라진 듯한 글레리아의 모습에 카르디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대답을 듣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렸다니. 허탈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대답이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했더니···.”
“뭐, 나중에 가서 다른 이유가 생기긴 했죠.”
“다른 이유?”
“당신과 사귀게 된 다음에 말이에요, 가끔 그런 말을 했잖아요? 당신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 언젠가 나는 당신의 곁을 떠날 거다. 그런 말들.”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봤거든요. 내가 떠나고 나서 당신은 나를 어떤 식으로 기억할까?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어떻게 추억할까··· 그리 고민하다 보니 답이 나오더군요.”
아르미엘, 하고 글레리아가 속삭였다.
“이름이 좋겠구나, 하고요.”
글레리아가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오직 나만이 독점했던 이 세례명을 떠올릴 때마다 당신은 나를 추억할 수 있겠구나. 내가 당신을 떠나더라도, 당신은 나를 떠올릴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부끄럽네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배시시, 웃음을 흘린 글레리아가 카르디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게 끝이에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런가.”
“그래서, 의미는 있었나요?”
“있었지. 지독할 만큼.”
카르디가 쓰게 웃었다.
아르미엘. 자신에게 붙은 세례명.
과거의 카르디는 글레리아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리라 확신했었다. 그렇기에, 아르카디아가 멸망한 이후 인류가 새로운 터전을 잡았을 때··· 그곳에 마탑을 세우며 자신의 이름을 카르디가 아닌 ‘아르미엘’이라 밝혔던 것이다.
잿빛의 초대 마탑주, 아르미엘.
모두가 자신을 아르미엘이라 불렀다.
정작 글레리아는 소녀의 연심에서 비롯된 별 볼 일 없는 장난이었단 식으로 설명했지만, 그녀의 의도와 달리 ‘아르미엘’이란 이름은 카르디에게 족쇄가 됐다.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모두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서, 이 기억을 지니고 있는 건 자신뿐이어서, 재앙으로 변한 동료들의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와서.
그것이, 카르디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카르디를 병들게 하였다. 그렇게 망가진 자신은 몇 번이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고 했으며, 계약을 무(無)로 되돌리려 하였으나···.
「아르미엘 님.」
마탑의 마법사들이.
왕가의 인물들이.
자신을 찾아와 가르침을 구하는 마법사들이.
수많고 수많은 이들이.
「아르미엘 님?」
아르미엘 님, 하고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카르디는 글레리아를 떠올려야만 했다. 자신을 아르미엘이라 부르며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을 추억해야만 했다. 그늘에 삼켜지면서 ‘믿을게요’ 하고 속삭였던 글레리아를 되새겨야만 했다.
그렇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결코 놓아버리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아르미엘. 이제는 너만의 것이 된 그 이름이 포기하려는 나를 잡아 일으켜 세웠으니까. 내게 멈춰 서지 말라고 소리쳤으니까.
“지독한, 저주였지.”
“그랬나요.”
“그래. 동시에 응원이었고.”
내가 이 꿈을 놓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이자, 동시에 응원이었다.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의미가 있었네요.”
글레리아가 웃었다.
카르디도 웃음을 흘렸다. 한참을 웃다가 글레리아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르미엘.”
카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글레리아의 몸은 흐릿해지다 못해 바스러지고 있었다. 다가오던 끝이 기어코 글레리아를 붙잡았음을 깨달은 카르디가 급히 일어섰다.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글레리아가 아프게 웃었다.
어쩔 수 없네요, 하고 중얼거리며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햇빛에 반짝이지 않는다. 빛은 그녀의 머리칼을 투과했다.
흐릿해진다. 투명해진다. 사라진다.
각오했다고 생각했으나, 이런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이해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다가온 끝 앞에 카르디의 시선은 흔들렸다. 카르디의 입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니 좋네요. 오랜만에,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니 좋았어요. 이런 기회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카르디와 달리, 글레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목소리도 조금씩 흔들렸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목소리에 물기가 섞였다.
글레리아가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행복했어요.”
그러나, 결국 글레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럼에도 미소를 지으며 카르디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은 웃으면서 배웅하고 싶다는 듯이.
“당신도 그랬나요?”
“당연한, 걸.”
카르디가 답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제 눈꼬리를 꾸욱 누르며 카르디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당연한 걸 왜 묻나.”
“당연하더라도 때로는 말로 하는 게 중요한 법인걸요. 마지막이잖아요.”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무엇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카르디가 입을 열었다.
“글레리아.”
“네, 아르미엘.”
“사랑한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직설적인 말을 뱉은 적이 없던 카르디다.
까탈스럽고 냉철한 주제에, 제대로 된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연애에 있어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던 카르디다. 그런 카르디가 내뱉은 한마디에 글레리아는 웃었다. 더없이 기쁘다는 듯이.
“저도요.”
마지막의 순간 그녀는 미소 지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채,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잘 있어요, 카르디.”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온 바람과 함께 글레리아의 몸이 흩어졌다. 그녀의 몸과 영혼이 흩어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빛가루를 향해 카르디는 손을 뻗었다. 당연하게도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흘러가는 바람을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찰나의 순간 제 곁을 머물다 간 바람은, 이제 쫓을 수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반짝이는 빛가루를 바라보는 카르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기어코 카르디는 고개를 숙였다.
들판에 바람이 불어왔다.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카르디가 무너졌다.
무릎을 꿇은 채 카르디는 신음했다.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그녀를 보내주고자 마음먹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그려봤지만···.
툭, 투둑.
결국 눈물이 흐르고 만다.
지난 수백 년간 쌓이고 쌓여서, 침전되어버린 감정들이 모조리 토해져 나왔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감정이 거세된 것처럼 살아가던 엘프가 감정을 토해냈다.
「고마워요, 아르미엘.」
「이름으로 불러라. 썩 좋아하는 세례명은 아니니.」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걸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은 지난 수백 년의 세월. 글레리아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제 곁에 머물렀던 시간들이, 빠르게 흘러갔다.
「오늘부터 너를 가르치게 된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다. 세례명은 좋아하지 않으니 카르디라 부르도록.」
「알겠어요, 아르미엘 선생님.」
「내 말을 듣기는 한 거냐?」
그녀의 스승이 되었던 순간.
「모두에게 있어 저는 성녀이자 신의 사도에 불과해요. 그럼, 저는 대체 뭐예요? 글레리아 벨 아르미아스가 아닌··· 글레리아인 저를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에요. 저는···.」
「없긴 왜 없나.」
「···네?」
「마법사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별을 그리 신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아. 내 눈에 너는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을 뿐이지, 평범한 인간이다.」
「···거짓말.」
「허. 내가 한 번이라도 널 성녀 취급을 해 준 적이 있었나? 내 눈에 너는 그냥 건방진 꼬맹이다.」
「뭐, 라구요?」
「왜. 어른 취급을 받고 싶나? 그럼 우선 이 신성술이나 제대로 짜내봐라.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무슨 쓸데없는 고민을.」
「저, 내년이면 성인이거든요? 이미 어엿한 어른이라구요. 겉만 보면 당신하고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애송이 취급받을 나이는 아니지 않···.」
「지랄이 짜다.」
그녀를 가르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들.
「설마, 지금 그거 고백이에요? 아니죠?」
「······.」
「와, 이 사람을 어쩌면 좋아. 진짜 미치겠네? 누가 고백을 그렇게 해요···!」
「그래서, 좋다는 거냐 싫다는 거냐?」
「싫어요. 진짜 싫어요. 이런 고백 안 받아. 아니, 어딜 가요?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싫다고 했지 않나.」
「사람이 왜 이렇게 성가신··· 에휴, 됐다. 이런 사람인 걸 몰랐던 것도 아니고.」
「···멱살은 왜 잡나?」
「잘 봐요. 고백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녀와 연인이 됐던 순간.
「나는 이 덜렁이를 챙겨야 하거든.」
「아야! 왜 때려요, 아르미엘!」
「내가 세례명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 번 말한 줄 아나? 벌써 3752번째다. 하루에 한 번, 이 말만 벌써 10년 가까이하는 것 같군.」
「그만 포기 좀 해요, 그럼!」
「네가 포기해라. 엘프는 포기를 모른다.」
여정을 시작했던 날.
「두려워요. 제가 바라는 구원이,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저들을 제가 구할 수 없단 사실이 너무나도 분해요. 제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걸까요?」
「틀려도 좋다. 내가 바로잡을 테니.」
「당신이요?」
「그래. 그렇기 위해 널 따라온 거니.」
「그럼, 믿고 있을게요.」
약속을 맺었던 날.
「미안해요, 아르미엘.」
그녀를 잃어버렸던 날.
천 년의 여정이 시작되었던 그날.
「여전히 당신다워요.」
「······.」
「아르미엘이 말했죠? 올바름을 잃지 말라고. 네 길을 망각하지 말라고. 망각한다면···.」
「내가,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그래요.」
「계약이 아닌 약속이라 안 되는 걸까요?」
「···아니다.」
망가져버린 그녀를 마주했던 날.
「내가, 답을 찾겠다. 네가 약속을 기억하는 한, 나 또한 약속을 잊지 않겠다. 내가···.」
「그럼 기다릴게요.」
결국에 그녀를 끝내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서 다시 한번 약속을 맺었던 날. 그리 수많고 수많은 기억이 흘러 마지막에 자리를 잡은 것은 하나의 기억이다.
「당신과 다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잘 있어요, 카르디.」
아르미엘이 아닌, 카르디.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목소리를 곱씹으며, 더는 들을 수 없게 된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카르디는 오열했다.
—————.
비명이, 신음이, 울음소리가.
참아왔던 것들을 모조리 토해내며 카르디는 고개를 들었다. 감정이 뒤섞여 엉망이 된 모습으로 그는 허공에서 사라져가는 빛가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라진다, 모든 것이.
풍경도, 빛가루도, 제 곁에 머물던 바람도, 모든 것이 바스러졌다. 무너지는 언덕의 풍경을 바라보며 카르디는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미소 지었다. 마지막만큼은 웃으면서 그녀를 배웅하고자.
“잘 가라, 글레리아.”
잘 가라, 나의 영원.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응.”
“준비 되셨어요?”
“준비하고 말고가 어딨어? 베이고, 찢기고, 하다 하다 배에 구멍 뚫려가면서 싸웠는데, 어지간한 고통 정도는 참을 수 있···.”
우득.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먹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쬐는 알케이아의 중심. 재앙이 쓰러지고, 어둠이 몰려간 그곳에선 여전히 인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울부짖는 인간의 새된 비명소리가.
“뼈! 뼈! 뼈! 흐, 흐아아아아아아악!”
“가만히 있어보세요. 이걸 이쪽으로···.”
“나티다, 잠, 잠깐만. 잠깐만 놔봐. 숨 좀 쉬···.”
“가만히 있어보세요. 레스티 씨? 이쪽 좀 잡아주세요. 클로에 씨도 다리 잡아주시구요.”
“이렇게요?”
“네. 꽉 잡고 있어주세요.”
“아니, 잠깐만. 생각보다 이거 너무 아프···.”
우득, 드드드드득.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려는 라니아의 팔을 레스티가 붙잡았다. 다리를 클로에가 움켜쥐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라니아는 제 팔을 붙잡은 레스티를 바라봤다.
“레스티, 이거 놓아주면···.”
“조금만 참으세요.”
레스티가 쓰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녀가 라니아의 입을 턱, 하고 손바닥으로 덮었다. 직후, 나티다의 신성력이 라니아의 몸을 뒤덮었다.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된 것이다.
“배려해서 치료해 드리고 싶긴 한데, 제 신성술이 아시다시피 반동이 좀 큽니다. 그리고 한시가 급한 상황이기도 하니··· 조금만 참아주세요.”
나티다가 쓴웃음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빛 입자가 새하얗게 점멸했다. 라니아의 몸에 스며든 신성력은 용사가 지닌 재생력을 촉진, 보조하여 상처를 빠르게 회복시키기 시작하나···.
“허, 컥, 허억···.”
기적에 가까운 회복의 반동으로 오는 통증이 가벼울 리가 없다. 라니아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짧게 경련하던 라니아의 몸이 축 처졌다. 뚜욱, 하고 기어코 의식이 끊겨버리고 만 것이다.
* * *
“허어어어억!”
벌떡, 하고 내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끔찍한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뭔가 주마등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등줄기를 타고 흐른 식은땀이 옷과 달라붙어 몹시도 찝찝했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하고 내가 어깨를 떨었다.
“급한 상처는 틀어막아 놓았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몹시도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나티다.
그녀를 바라보며 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티다.”
“네, 부르셨습니까?”
“혹시 평소에 나한테 쌓인 거 있니?”
“아뇨, 없는데요?”
미심쩍은 눈길로 나티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나티다가 들려준 것은 내 몸 상태에 대한 설명이었다.
“당장 급한 불은 껐는데, 눈동자하고 잃어버린 손가락 부분은 회복할 수 없더군요. 뭔가 막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건 회복 안 되는 게 맞아. 회복되려면 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할 거고.”
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고맙다. 나티다. 신세를 졌어.”
“이게 제 역할인 걸요. 다른 분들 상태 좀 보고 올 테니 쉬고 계세요.”
멀어지는 나티다를 뒤로하고, 나는 내 몸 상태를 점검했다. 마나의 흐름은 잔뜩 꼬여있는 데다가, 이곳저곳이 엉망진창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건 손가락과 눈동자였는데, 이건 대가로 징수된 것이니 아마 바로는 회복할 수 없으리라.
‘그건 그렇고···.’
주변을 쓱 둘러봤다.
벨노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클로에, 바닥에 대자로 뻗어있는 라크, 돌기둥의 파편에 기대어 쉬고 있는 레스티. 저 멀리서는 화살을 정리하는 레미아의 모습도 보였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열렸던 구멍 역시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끝났구나.”
끝이 났다. 알케이아 섬멸전도, 배교자 토벌전도 끝이 난 것이다. 나는 품에서 아티팩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토벌대원의 생존신호를 감지하는 아티팩트였다.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 칼트도, 카리옷도, 켈르할름도, 데스텔도 모두 무사하다.
점이 깜빡이지 않는 것은 오직 한 명.
검귀(劍鬼), 드라카의 생존신호만큼은 잡히지 않았다. 예상했던 결과이긴 했다.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드라카는 이곳을 제 삶을 버릴 무대로 여기고 있었으니.
···최후의 순간, 그는 그가 목적했던 것을 이루었을까. 최후의 순간에 무엇을 느꼈을까. 그런 생각 따위를 하다가, 내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변수도 많았고, 예상외의 출혈도 심했지만···.’
어찌 됐던 간 토벌전은 끝이 났다.
당초 계획했던 결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전의 중심에 일그러져있는 공간을 보았다.
···아직, 카르디는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여선 안 된다고, 조금 더 쉬라는 나티다의 조언을 웃어넘기며 내가 입을 열었다. 아직은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더 남아있었으니까.
“먼저 바깥으로 나가서 칼트쪽과 합류해.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모두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치로 바라봤다.
아마도 이곳에 나를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뜨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거겠지. 그렇기에 나는 구태여 다시 말했다.
“저기 저 공간에서 그 꼰대 엘프가 돌아왔을 때, 너희가 곁에 있으면 괜히 또 무게를 잡으려 할 것 같거든. 그러니까 자리 좀 비워줘.”
대선배이자, 고대의 영웅인 카르디 반 아르미엘이 아닌 ‘카르디’로서 잠시나마 있을 수 있도록 말야.
그렇게까지 말하자 그제야 토벌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전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내가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넌 안 가냐?”
“···나한테 할 말 없어?”
귀쟁이··· 아니, 레미아가 도끼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는 또 왜 이래.
“세 번이야. 내가 세 번 너 구했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레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이번에는 자기가 도움이 됐음을 강하게 주장하려는 듯이.
“검은 빛 기둥이 떨어질 때 한 번, 네가 배교자에게 돌진할 때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네가 놓친 배교자를 떠밀어서 또 한 번. 세 번이야. 기억해.”
저 자신만만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떫은 기분이 들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뭐···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응. 알면 됐어.”
레미아가 미소 지었다.
“남은 빚도 천천히 갚아갈 테니, 기다려.”
그 말을 남긴 채 레미아가 등을 돌린 채 내게 멀어졌다. 앞장선 토벌대를 따라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쓰게 웃었다.
“많이 변했네.”
시련을 거치며, 상실을 겪으며 레미아는 변했다. 변한 건 레미아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길러낸 제자들도, 카일 그 녀석도, 그리고 나조차도 변했으니까.
변하지 않는 인간은 없는 법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공간을 바라봤다. 모두가 변했다. 어쩌면, 천 년을 견뎌온 저 엘프조차 변할지도 모르는 법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걱정이 됐다.
미래에서 온 잿빛 여신은 말했었다.
배교자가 토벌됐을 때, 카르디는 삼 일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그런 결말을 만들지 말라고 그녀는 조언했었다. 그 조언을 나는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그녀가 겪었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내겐 그녀와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노력했다. 그렇기에 답을 찾았다.
그 결과 그녀가 살아갔던 시간과, 내가 살아가는 시간은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달라진 세상에서 카르디가 같은 결말을 맞이하지 않으리라 나는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불안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
나는 말없이 카르디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변화가 없던 공간이 파삭,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공간이 무너져내리며 구멍이 나타났다.
파스슥.
가루가 되어 무너지는 공간의 너머에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탁, 하고 울리는 가벼운 걸음 소리. 이윽고 카르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쓱 둘러본 카르디가 나밖에 없는 걸 확인하곤 쓰게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라니엘.”
“뭐, 그렇지.”
하여간, 하고 숨을 내뱉은 카르디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소의 카르디와 달리 가벼운 걸음걸이였다. 몸에 힘을 빼고 느긋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그렇게 몇 걸음을 내디딘 카르디가 이곳저곳에 쌓인 돌무더기 하나에 자리를 잡고 걸터앉았다.
“썩 나쁘지 않은 풍경이군.”
그는 열렸던 하늘이 닫혀가는 풍경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르디의 곁에 앉아 나는 카르디와 같은 풍경을 바라봤다.
“개천(開天)이잖아. 마법사들이 추구하는 진리.”
“그래. 나도 저것과 같은 걸 추구한 적이 있었지.”
이젠 아무래도 좋지만.
그렇게 말하며 카르디는 웃었다.
“걱정했나 보군. 내가 죽기라도 할까 봐.”
“솔직히 말하자면, 좀 걱정했지. 미래의 내가 말했잖아. 배교자가 토벌됐을 때 너는 자살했다고.”
“살 의미가 없어져서 그랬을 테지.”
카르디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내가 천 년의 삶을 붙잡고 있던 것도, 꾸역꾸역 살아가던 것도 결국 그녀를 위해서였으니까. 그녀가 죽어버렸을 때 삶을 살아갈 의미를 잃은 거겠지. 삶이 지니는 가치가 한없이 무가치해졌을 테고.”
“그럼 지금은?”
“글쎄, 지금은···.”
잠깐의 침묵.
이윽고 피식, 하고 카르디가 웃었다.
홀가분한 웃음이었다.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가 나를 족쇄에서 풀어줬거든.”
“족쇄?”
“드디어 나를 카르디, 라고 부르더군.”
아르미엘이 아닌 카르디.
“아르미엘이란 세례명은 내게 저주였다. 저주인 동시에 나를 대현자로 있게끔 하는 족쇄였지. 다름 아닌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됐어. 그녀가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간에 말야.”
하지만, 하고 카르디가 말했다.
“이젠 이 세례명을 버려도 되겠어. 미련 없이.”
“그러냐.”
“그런 거지. 홀가분한 것 같기도, 허탈하기도 하군. 자그마치 일천 년 동안 바라왔던 꿈을 이루게 됐으니 말야.”
“상상도 안 가는 세월이긴 하네.”
“그래. 아무리 엘프인 나라 하더라도, 일천 년의 세월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더군.”
카르디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카르디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저 멀리 무너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카르디는 입을 열었다.
“라니엘.”
“어.”
“고맙다.”
“별말씀을.”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까지 치솟았던 검은 십자가의 잔해가, 그늘들의 잔해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다 바스러졌다. 바스러지는 것들 사이로 내리쬐는 것은 따스한 햇살이다.
끝난 것들은 끝이 나고.
시작될 것들은 시작된다.
일천 년의 시간 동안 멈춰있던 어느 마법사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일천 년의 시간 동안 배교자에게 시달렸던 인류의 역사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가지, 라니엘.”
카르디가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