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64
〈 64화 〉 고대 리치, 스케발(4)
* * *
수백 년을 살아왔다.
많은 것을 버려가며 살아온 삶이었다.
진리를 탐구하는데 인간의 육체는 허약했다. 그래서 버렸다. 육(?)을 버리고 나니, 남은 것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뼈뿐이었다.
만족스러웠다.
필요 없는 것들을 조금 더 버려 보았다. 버리면 버릴수록 진리가 손에 닿을 듯 했다. 인간에서 벗어날수록 별빛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끝끝내 닿지는 않는다.
많은것들을 버려도 진리란 요원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보인다.
이번에는 치워보기로 했다.
수백 년간 진리를 탐하기 위해 쌓아 올렸던 마학을, 이번에는 무언가를 무너트리는데 써보았다.
왕국이 멸망했다.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가 된 왕국에서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나고 자란 왕국을 무너트리는 건,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쉬웠다.
이다지도 간단할 수가 없었다.
백 년을 채 살지 않은 마법사는 애초에 적수가 아니다. 그의 상대는 언제나 전사들이었다. 검의 주인이라 불리는 초인들은 위협적이었다.
위협적이긴 하나.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몇 번 상대하다 보니 요령이 텄다. 전사를 상대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 시점에서, 그는 생각한다.
‘나를 막을 자는 없다.’
사실이었다.
고룡의 마법사는 계약으로 묶여 그늘과 관련된 자들을 건들지 못한다. 적수라고 해보아야, 흑룡과 배교자, 죽음의 칼 정도가 있을 테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과 같은 그늘의 영지에 속해있다.
남은 일은 간단했다.
진리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전부 치워버리면 그만일 이야기였다.
분명, 그럴 텐데.
쩌억!
두개골이 뒤흔들린다.
스케발의 안광이 흔들린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번번이 나타나는 것인가.
진리에 닿을듯싶으면, 별이 눈앞까지 다가오나 싶으면 꼭 나타난다.
마치, 천칭이 균형을 이루듯이.
수평을 이루기 위한 무언가가 앞을 가로막는다.
네가 걷는 길은 옳지 않다, 스케발.
당신이, 당신이 제 뭐를 안단 말입니까.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는 높게 산다. 그러나, 마학자에겐 금기가 있지. 금기를 범하지 마라, 스케발.
귓가에 목소리가 울린다.
누런 짐승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잿빛 머리칼의 마법사가 떠오른다.
경고하마, 스케발.
네가 그 선을 넘는다면.
잿빛의 엘프가 말한다.
네 모든 것은 재로 사윌 것이다.
스케발의 검은 안광이 정면을 향한다.
그 시선의 끝에는 마법사가 하나 있다. 스케발은 마법사의 몸 위로 피어오르는 마력을 본다.
잿빛이다.
잿가루를 끌며 마법사가 다가온다.
‘잿빛.’
가증스러운 잿빛이 다시 한번 앞을 가로막는다.
2.
고대 리치 스케발.
이 전설적인 고대의 마학자는, 전사를 상대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가 전장에서 파묻은 이름 높은 전사만 해도 능히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룰 테니.
‘전사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접근하면 위험한 적인 건 맞다. 그러나, 스케발은 애초에 전사들이 접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땅을 뒤엎는다.
주문을 일렬로 세워 함정을 깐다.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 한들, 스케발이 깔아둔 수십 개의 주문을 맨몸으로 돌파할 수는 없다.
‘애초에, 전사의 저항력은 높지 않다.’
주문에 대한 저항력은 육체를 단련한다 하여 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사 같은 ‘특수한’ 육체를 가진 게 아니라면, 스케발의 앞에 전사들의 저항력은 종잇장과도 같다.
‘외부에서 오는 주문은 베어내고, 또 대응하지.’
하지만, 내부를 움켜쥐는 주문은?
육신을 포기한 자신과 다르게, 인간의 몸은 여러 요인에 의해 제한받는다.
심장 없이는 살 수 없다.
눈을 터뜨리면 볼 수 없다.
스케발은 전사를 상대하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를 제외하곤, 스케발을 1:1로 이길 수 있는 전사는 없었다.
‘···분명, 그럴 터다.’
스케발은 손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주문이 완성된다.
뼈 무덤(BoneGrave).
파바바바박! 육지에서 뼛조각이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른 뼈 창이 길을 가로막는다.
재구축(Rebuild).
땅이 푹 꺼진다. 나무가 뿌리채 뽑혀나간다. 지면 자체가 접근할 수 없도록 재구축된다.
늪(Swamp).
재구축된 지면은 늪으로 변한다. 제대로 된 도약도 할 수 없다. 이렇게까지 해놓으면, 전사는 더이상 접근하지 못한다.
상대가 순수한 전사라면, 말이다.
그러나, 상대는 전사가 아니다.
자신과 같은 마법사다.
“·····.”
탁, 잿빛이 땅을 박찬다. 늪이 된 지면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그녀가 스톡해둔 주문이 차례로 해방된다.
재구축(Rebuild).
땅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늪은 애초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타들어 가 딱딱하게 굳어있다.
뼈 창은?
잿빛이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다. 단 1초도 붙잡아 둘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접근을 허용한다.
눈앞까지 다가오는 잿빛을 보며 스케발은 손을 뻗는다. 수많은 전사를 묻어버린 주문을 발한다.
손아귀(Grasp).
마나로된 주문이 심장을 움켜쥐려 한다.
그 주문을 간파한 잿빛이 손을 뻗는다. 스케발의 손아귀를 붙잡은 채 꺾어버린다.
주문이 흐트러진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른다.
다시 주문을 짜 올린다, 처음부터.
그런 와중에도 쏟아지는 타격에 스케발이 두른 보호막이 삐걱거린다.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전사를 상대하는 법이 통하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마법사인 까닭이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은?
스케발에게 그것을 묻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다. 당연히 알고 있다.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회로를 강탈한다.
상성의 주문으로, 주문을 상쇄한다.
알고 있는 것들을 실천했다.
스케발의 검은 안광이 번뜩인다. 눈앞에서 날뛰는 잿빛이 발동하는 주문의 회로를 읽는다.
그 마나의 흐름을 움켜쥔다.
강탈하려 한다.
후웅.
그러나, 손아귀가 움켜쥔 것은 허공이다.
잡힌 것은 없다.
콰직!
다시 한번, 충격이 스케발의 두개골을 울린다.
‘강탈할 수가 없다.’
강탈하기도 전에 주문이 발현된다. 그 과정에 강탈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저 주문의 발현 과정은 몹시 독특하다.
회로를 그리지 않는다.
회로에 마나를 불어넣지도 않는다.
그저 완성된 것을 꺼낼 뿐이다.
검사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듯이, 무투가가 주먹을 휘두르듯이 육체의 일부인 양 주문을 발동시킨다.
···그렇다면, 상성의 주문으로 상쇄는?
스케발은 눈앞을 바라본다.
주먹이 휘둘러진다. 주변을 일그러트리며 다가오는 주먹에 담긴 주문은 담백하다.
분쇄(Smash).
강타(Smite).
기본적이고, 담백한 주문이어서.
쩌억!
마땅히 상성이라 할만한 주문도 없다.
충격에 몸이 공중에 뜬다. 뒤이은 충격이 다시 몸을 땅에 처박는다. 대뜸 손아귀가 시야에 잡힌다.
콰직!
두개골을 붙잡힌다. 잿빛은 스케발의 두개골을 바닥에 처박은 채 달리기 시작한다. 흙이 튀어 오른다. 스케발이 팔을 뻗는다.
강타(Smite).
그보다 먼저, 주문이 작렬한다.
끝끝내 으스러진 팔이 공중에 맴돈다. 잿빛은 여전히 달리며 연달아 주문을 박아댔다.
강타, 강타, 강타.
충격이 계속하여 몸을 뒤흔든다. 덩달아 시야도 흔들린다. 팔이 삐걱거리고, 갈비뼈 몇 개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군다.
‘끝나지 않는다.’
그 흐름을 붙잡지 못한다.
스케발은 두개골 안에 든 라이프 베슬을 최대한 보호했다. 이것만 있다면, 뼈는 재생할 수 있다.
쩍.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함을 짐작한다.
분쇄(Smash).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스케발의 몸이 바닥을 찍고 튀어 오른다. 잿빛은 그것을 다시 낚아채 바닥에 처박는다.
쩍, 쩌저저적!
두개골을 보호하는 결계에 계속해서 금이 간다.
스케발은 결계가 버티는 동안 주문을 짜 올린다. 주문을 쏘았다. 그러나, 상대도 자신과 같은 마법사다.
상성의 주문으로 상쇄한다.
주문을 포착하여 격추한다.
속도가 느린 것들은 그저 고개를 돌리고, 몸을 비틀며 피할 뿐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 손아귀는 스케발의 두개골을 움켜쥔 채다. 그 손가락이 결계틈으로 파고든다.
끼긱, 끼기기긱.
결계가 찢어지려 한다.
“하.”
스케발이 웃음을 터뜨렸다.
‘없다.’
상대할만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전사를 상대하는 법은 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도 안다.
그러나.
그 둘을 합쳐놓은 저 배틀 메이지란 것을, 스케발은 도저히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스케발은 상황을 파악한다.
‘어차피,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순 없다.’
그를 확신한다.
‘죽어도 상관은 없다.’
라이프 베슬을 잃는 것은 큰 손해다. 그러나, 어차피 잃을 것이라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소모해야 한다.
“천칭(Balance).”
스케발 또한 마법사다.
마법사란 언제나 효율을 추구한다. 스케발의 뼈마디에 금이 간다. 검은 구정물이 흘러내린다.
“···!”
그 구정물에, 잿빛이 손아귀를 놓는다.
발로 그 몸을 걷어찬다.
공중에 뜬 채 스케발은 말을 잇는다.
“거래한다.”
대가는.
“나의 수명.”
바라는 바를 말해라, 마법사.
스케발의 안광이 번뜩인다.
“파도를.”
“이곳에 넘치는 포화 상태의 마나로 주문을 발현한다. 이 숲을 집어삼킬 파도를 원한다.”
대가를 측정한다.
천칭에 스케발의 수명이 올라온다.
그 양을 가늠한다. 9할의 수명이 천칭에 올랐다.
“거래한다.”
마법사는 별과 거래하는 존재다.
필요에 따라, 마법사는 그 무엇이든 천칭에 올린다.
자신의 수명마저도.
3.
“허···.”
나는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스케발의 몸을 중심으로 퍼지는 무언가를 본 까닭이다. 잠깐이지만 별빛이 보였다.
‘···천칭.’
스케발의 몸 주변으로 마나가 응축한다. 대량의 마나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마나의 샘.’
이 근방에 포화상태로 존재하는 마나.
나는 이 마나를 다룰 줄 모른다. 나만이 아니다. 스케발이라 한들 모를 것이다.
그러나, 모른다고 하여 다룰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천칭을 사용한 거래.’
그 대가가 얼마나 들지는 모른다. 나는 머릿속으로 대가를 가늠해보았다.
‘수명, 내가 쓴다면··· 대충 1년 정도.’
1년만 쓴다면, 스케발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수명을 저울에 놓았을 때의 부작용을 나는 알고 있다.
‘그걸 다시 하긴 좀 그래.’
그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
나는 말 없이 눈앞을 바라본다.
스케발을 중심으로 검은 결계가 응축되고 있다. 그것은 검은 반구의 모양을 띤다.
저것이 터진다면.
‘···일단 아플리아는 싹 날아가겠지.’
왕도의 방어 결계를 감안해도, 지근거리인 아플리아 까지는 무조건 날라간다.
막아야 한단 뜻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스케발을 집어삼킨 검은 구체를 바라보았다.
마나의 흐름을 읽는다.
그 강도를, 주문의 방향성을 계산한다.
별과의 거래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러나, 거래의 부산물이 언제나 완벽하리란 법은 없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틈은 존재한다.
주문의 틈새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스케발에게로 걸어갔다.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잿빛 마나가 흩날린다.
턱.
손을 뻗어 결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결계에 맞닿은 손바닥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나는 조금더 손바닥을 밀어붙였다.
“하여간, 존나게 불리하다니까.”
마왕군과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꼭 뭔갈 하나씩 숨겨두는 이놈들과의 싸움은 피곤하기 짝이 없다.
“누군 씨팔, 수명 한번 바쳤다가 몇 년을 골골거리며 살고 있는데···.”
이놈의 마족 새끼들은 자폭기로 수명을 바친단다. 그래놓고 뒤지지도 않는다. 꼭 생명이든 육체든 꽁쳐둔 놈들이 육체를 헌신하고, 수명을 천칭에 올리곤 한다.
“생각해보니까 존나 억울하네.”
그래도 뭐 어쩌겠냐.
내가 리치가 될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해야겠지. 나는 쓰게 웃으며 손가락을 세웠다.
치이이익.
결계의 틈새를 해치고, 손가락이 검은 덩어리 안으로 파고든다. 팔의 절반쯤을 결계안에 밀어 넣자 그제야 손끝에 잡혔다.
“야.”
스케발의 두개골.
그것을 붙잡은 채,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결계에 밀어 넣지 않은 왼손으론 오른팔을 붙잡는다. 발을 들어 올려 결계에 턱, 얹었다.
“내가 근본 없는 클래스라는걸 깨달아서, 요즘 좀 우울한 참이거든?”
무근본 클래스.
툭 까놓고 말해서 배틀 메이지란게, 근본이 없는 건 맞다. 애초에 클래스로 만들 생각이 있었다면 좀 더 깔끔하게 정립했을 텐데.
‘하여튼, 씨팔 말도 없이 클래스로 올려놓고 지랄이야.’
창시자 허락은 맡아야 할 거 아니냐고.
아무튼 간 내가 배틀 메이지의 창시자이긴 해도···.
“씨팔, 난 위자드(Wizard)란 말야.”
나는 위자드다.
속성 마법을 메인으로 삼는, 마법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근본 있는 클래스.
“사람이 좀 근본이 있어야지.”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스케발의 눈구멍에 밀어 넣었다. 그 두개골을 보호하는 결계는 누적된 데미지로 이미 금이 가 있었다.
파삭.
결계를 박살 내고 두개골 속으로 엄지와 중지가 파고든다. 나는 두개골에 손가락을 건 채,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마지막은 근본 있게 끝내려고.”
재(Ash).
새로운 재가 만들어지진 않는다. 여태까지 내가 달려다니며 흩뿌렸던 재가 모여든다. 팔을 휘감고, 손가락을 따라 재가 스케발의 눈구멍 사이로 들어간다.
‘많이들 착각하는데.’
나는 근본부터 위자드였다.
잿빛 마탑에도 내가 만든 화염 계열 시그니쳐 마법이 실려있을 정도로, 근본 충만한 위자드.
굳이 마나의 잔재를 흩뿌리며 달린 이유.
그것이 바로 이 하나의 주문을 위해서였다.
점화(Ignite).
틱.
작은 불똥이 스케발의 두개골 내부에서 튄다.
틱,티디디디딕.
불똥은 두개골 안에 발라진 내 마나의 잔재를 먹고 타오른다. 재에 불똥이 옮겨붙는다. 타오른다.
화륵.
이윽고, 불똥은 불길이 된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린다. 두개골은 더이상 불길을 가둬두지 못한다. 스케발의 눈구멍 사이로 불길이 흘러 넘친다.
타닥, 타다다다다닥!
흘러넘친 불길이 스케발이 응축해둔 마나를 집어삼킨다. 더욱더 그 크기를 키운다. 작은 불똥에서 시작된 불길은 화마로 변해 검은 결계를 집어삼킨다.
타다다다다닥!
불길은 내 피부를 태우지 않는다.
불이 삼키는 것은 마나다. 마나를 장작 삼아 불길은 타오른다. 나는 결계에 집어넣었던 손을 잡아 뺐다.
투확!
내 손끝을 따라, 불길이 빠져나온다.
그 불길은 중지와 엄지에 따라붙어 있다. 마치 도화선과도 같은 불길을 바라보며, 나는 손을 들어 올린다.
엄지와 중지를 맞붙인다.
재(Ash)와 점화(Ignite)가 스톡된 손가락.
그 두 손가락을 마찰시킨다.
그렇게 완성된 주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따악, 손가락을 튕긴다.
완성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섬광이 번뜩였다.
4.
혹자는 말한다.
고대 리치 스케발의 앞에서는 순간, 마법사는 자신의 생애를 부정당한다고.
실로 그러하다.
수백 년을 살아온 마학자 앞에서, 숱한 마학자들이 일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것은 한낱 모래탑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 한 마법사가 있다.
그 마법사는 남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 그 근간 부터가 다르다. 그녀는 누군가의 수백 년을 한순간으로 일축한다.
그런 이를 세간은 천재라 부르지 않는다.
‘괴물.’
스케발은 눈앞의 괴물을 본다.
머리를 태우는 열기에 안광이 흔들린다. 열기로 흔들리는 풍경 너머로, 스케발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긴다.
불길을 도화선 삼아 주문이 전달된다.
전달되는 주문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 결과만이 뚜렷하다.
재는 재로(Ashes to Ashes).
섬광이 번쩍인다.
천천히 타들어 가던 불길이 한순간에 폭발한다. 폭발적인 열기를 방출하며 스케발의 두개골을 익힌다.
불길이 라이프 베슬에 닿는다.
열기에 뇌가 익어가며, 고대 리치는 생각한다.
잿빛.
그 두 글자만이 뇌리에 가득하다.
“하.”
고대리치는 느낀다.
자신의 수백 년이 부정당함을.
“···빌어먹을 잿빛.”
화염이 스케발을 집어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