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76
〈 76화 〉 외전, 배교자(4)
* * *
야심한 밤, 검은 초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방울이 풀잎에 튕기며 후두둑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리는 초원은 서늘하다. 음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스산한 공기 속에서 쿤텔은 자신의 검을 보았다. 칼집 바깥으로 꺼낸 칼날은 은색으로 반짝였다.
레어메탈로 만들어진 검.
검의 초인으로 인정받아 검의 성지에서 하사받은 검이다. 지난 수십 년을 함께한 칼은 쿤텔의 육체와도 같다. 그의 삶과도 같다.
“·····.”
쿤텔은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고향이다. 고향이 재앙에게 무너지던 날을 쿤텔은 떠올렸다.
‘검의 협곡, 갈라트릭.’
수많은 소드 마스터를 배출해낸 곳.
그곳을 무너트린 건 한 명의 재앙이었다.
‘죽음의 칼, 가니칼트.’
검의 협곡을 단신으로 무너트렸던 재앙의 모습을 쿤텔은 기억한다. 그 재앙과 마주했을 때, 쿤텔은 검을 쥐지도 못했다. 칼을 떨어트린 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검을 쥐지 않는가.
그때, 죽음의 칼은 검을 놓친 쿤텔에게 물었다.
네 고향이 불타고 있다. 네 스승이 죽었다. 검의 협곡은 무너진다. 그걸 행하는 것은 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네 앞에 서 있다.
질문은 담백했다.
당연한 것을 묻는듯한 말투였다.
너는 검을 들지 않는가?
쿤텔은 그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넌 검사가 아니로군.
가니칼트가 대검을 바닥에 끌며 쿤텔의 곁을 지나쳤다. 그가 걷는 길마다 핏방울이 튀었다.
죽일 가치가 없다.
그 말을 남긴 채 재앙은 쿤텔의 곁을 떴다.
죽음의 칼은 그날 수많은 소드 마스터를 학살했다. 그들의 시체를 협곡과 함께 묻어버렸다.
그리고, 쿤텔은 도망쳤다.
그 수치스러운 과거로부터 30년이다.
30년간, 쿤텔은 검을 갈고 닦았다.
소드 마스터의 반열에 든 지는 오래다. 그러나, 쿤텔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그것이 검의 협곡에 파묻힌 검사들에 대한 추모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갈고닦은 검을 쿤텔은 마왕군에게 겨누었다. 자신의 검이 인류를 위해 휘둘러질 때, 쿤텔은 보람을 느꼈다.
‘소드 마스터, 쿤텔.’
그는 검의 초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수많은 전장에서 용사와 버금가는 실적을 올렸다.
그렇기에, 쿤텔은 내심 기대했다.
자신의 검이 이번엔 그 재앙에게 닿으리라고. 죽음의 칼을 비롯한 넷의 재앙에게 먹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지?’
닿지 않았다.
글레투스는 커녕, 그녀가 뿌려두었을 안개조차 뚫지 못했다. 안개의 한 자락을 베어냈을 뿐이다.
쿤텔은 무뎌진 칼날을 본다.
이가 빠진 칼날이 마치 자신의 삶을 보는 듯 하다.
노력했으나, 닿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몸은 점점 노쇠해간다. 육체는 전성기를 찍고 추락하고 있다. 그 사실에 쿤텔은 쓴웃음을 흘렸다.
“허무하군.”
그런 중얼거림이 빗방울 사이로 흩어진다.
칼집에 칼날을 밀어 넣으며, 쿤텔이 숨을 내뱉으려는 순간이었다.
찰박.
“·····.”
빗소리 사이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어지던 발걸음 소리는 천막의 앞에서 멈췄다. 쿤텔은 칼자루를 쥔 채 천막을 걷었다.
“···라니엘?”
그곳에는 잿빛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신궁, 레미아와 함께 비를 맞으며 천막의 바깥에 서 있었다. 그 표정이 어두웠다.
“쿤텔 아저씨.”
라니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장, 하인켈 아저씨랑 카일을 불러줘.”
2.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라니엘이 처음으로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늦은 밤, 쿤텔의 막사로 모인 사령관들과 용사의 앞에서 라니엘은 입을 열었다.
“요새를 정찰했습니다. 그리고, 요새의 안에서 글레투스를 발견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외견과 일치합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백발과 녹빛의 눈동자.”
라니엘은 급조한 지지대에 걸어둔 로디멜 요새의 설계도를 가리켰다.
“이곳, 로디멜 요새의 홀에 배교자 글레투스가 있습니다. 홀을 지키고 있는 마수는 하나뿐입니다. 흑룡을 베이스로 만든 갑각룡.”
흑룡을 베이스로 만든 마수.
그 말에 서부 전선의 사령관들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흑룡의 주 무대는 동부와 북부 전선이다. 서부 전선에 흑룡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드물다 하여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검은 폭풍, 흑룡 벨리알.’
뇌리에 각인 된 재앙은 두려움의 상징이다. 몇몇 사령관들이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차라리 로디멜 요새를 포기 하는 게 좋지 않나?”
그 의견은 타당하다. 로디멜 요새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러나, 저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내어주는 쪽이 손실이 적을지도 모른다.
“아니요.”
그러나, 라니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디멜 요새를 무너트리는 일이 있어도, 글레투스를 이곳에서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글레투스는 로디멜 요새에서 마수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베이스는 세 가지죠.”
라니엘이 세 손가락을 쫙 펼쳤다.
“인간의 뼈로 이루어진 용의 골격.”
“벨리알이 마지막까지 지키던, 헤츨링의 사체.”
“마지막으로···.”
마지막 손가락을 접으며, 라니엘은 말했다.
“산채로 융해된 성기사들의 육체와 혼.”
“···뭐라고?”
“헤츨링의 사체와 드래곤 하트를 메인 삼아, 인골(人?)을 조립합니다. 뼈대에 융해된 성기사들의 육체로 살을 덧붙입니다.”
라니엘이 표정을 구기며 답했다.
“그렇게 완성되는 건 본 드래곤이 아닙니다.”
뼈대에 살을 붙였다.
그 살의 재료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살아있으나, 죽음을 원하는 것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주술의 제물이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제물로 이루어진 용을 무어라 부르는가.
그건 라니엘도 알 수 없었다.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니까.’
다만, 그렇게 완성된 용이 전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온몸이 공양(Offering) 가능한 주술적 제물로 이루어진 마수입니다.”
라니엘은 생각한 바를 말했다.
“살아있는 주술이 전장을 헤집고 다닐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 못 막으면 흑룡 급의 성가신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사령관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간다. 그들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들 또한 현자의 말에 동의한다.
‘이곳에서 막아야 한다.’
새로운 재앙을 탄생하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하나다.
‘누가 막을 것인가?’
배교자, 글레투스.
그 재앙이 점거한 요새를 누가 탈환할 것이며, 그 속에서 태동하는 마수를 누가 토벌할 것인가?
기사들로는 불가능하다.
소드 마스터의 검조차 닿지 않았다.
상대는 인류가 상대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재앙이다. 그리고, 그런 재앙을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였다.
‘용사.’
모두의 시선이 성검을 찬 용사에게 향한다.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라니엘의 앞으로 다가간다.
“상황 설명은 됐다.”
그가 라니엘에게 물었다.
“언제 할거지?”
그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묻지 않는다.
작전은 언제나 그렇듯, 현자인 그가 세울 것이다. 자신은 지시에 따라 검을 휘두르면 될 뿐이다.
“난 준비가 됐다.”
툭, 하고 카일이 성검의 칼자루를 건드린다.
라니엘은 고개를 돌려 어둠에 잠긴 초원을 보았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쏟아지는 빗방울 너머로, 라니엘은 절벽에 놓인 로디멜 요새를 노려본다.
그리곤, 짧게 답했다.
“일출.”
밤이 가고 새벽이 올 때.
여명이 초원에 자리 잡을 때.
“그때가 적기야.”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흘려듣던 기사단장, 하인켈이 물었다.
“지원이 필요하나?”
그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와 같다.
“대기해주십시오.”
라니엘이 말했다.
“저희 넷이 가겠습니다.”
상식을 벗어난 재앙의 앞에서 그 수는 의미가 없다. 라니엘은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번의 경우에는 더욱더.
3.
마계와 인접한 검은 들판.
널따랗게 펼쳐진 초원의 지평선 위로 해가 떠오른다. 여명이 자리 잡은 초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 위의 고성.
그 고성의 망루에 넷의 인물이 걸터앉아있다.
지하수로에서 망루까지 잠입에 성공한 그들은, 로디멜 요새의 중심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분 더럽네요.”
그 곳에 태동하는 생명을 느낀 사라가 눈살을 찌푸린다. 꿈틀거리는 생명은 인조적이다. 그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괜찮겠어요?”
“괜찮아야지.”
성녀의 물음에 현자가 답한다.
사라의 축복을 받은 라니엘은 고개를 두어 번 꺾는다. 손가락을 풀고, 바닥에 발을 몇 번 디뎌본다.
그에게 걸린 축복은 육체의 강화다.
주문과는 다른 종류의 강화에,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육체에 적응했다.
“작전, 다 기억하지?”
“몇 번을 말했는데? 다 들었어. 다 기억해. 인간.”
“네가 또 까먹을까 봐 하는 말이잖아, 귀쟁아.”
투덜거리며 라니엘이 손목을 턴다.
그가 자세를 잡으며, 옆에 망루에 한 발을 걸친 용사를 바라봤다.
“준비됐냐?”
“나는 준비됐다.”
그 대답에 라니엘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마지막으로 숨을 한번 내뱉고선, 라니엘은 위로 손짓했다.
“쏴, 레미아.”
신궁이 화살을 날린다. 강선이 연결된 화살은 일직선으로 날아가 맞은편 성벽에 단단히 박힌다.
탁.
망루에서 뛰어내린 카일이 강선을 밟고 도약한다.
그뒤를 따라 라니엘이 달린다. 몇몇 마수가 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푹!
뒤이어 쏘아진 레미아의 화살이 마수들의 눈을 꿰뚫는다.
키에에에에엑!
마수들의 비명 사이로 카일이 빙글 돌며, 성벽 위에 착지한다. 착지와 동시에 성벽을 박차며 달린다. 그 끝에는 돔 형태로 덮인 지붕이 있다.
그 움직임에는 지체가 없다.
지붕의 밑에 있는 것은 홀, 그리고 홀에 있는 것은 배교자, 글레투스다.
‘5초.’
카일의 뒤를 따라 달리며, 라니엘은 속으로 수를 센다. 연결된 마수에 이상이 생김을 소환사가 알아차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그 전에 돌입한다.’
땅을 거듭 박차며 달리는 카일의 옆으로, 라니엘이 따라붙는다. 그가 땅을 박차며 카일을 앞선다. 카일은 한 걸음 한 걸음 강하게 내디디며 힘을 비축한다.
라니엘은 가볍게 뛰며 공중에 뜬다.
“야.”
공중에 뜬 라니엘이 주먹을 든다.
“간다.”
팔뚝에 스톡(Stock)된 주문이 차례로 빛을 뿜는다. 섬광 같은 번뜩임과 함께 라니엘이 추락한다.
분쇄(Smash).
떨어지며 내지른 주먹이 지붕에 닿는다. 그 순간 토해져 나온 주문이 고성을 뒤흔든다.
콰아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지붕에 균열이 인다.
지붕이 쪼개지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돌조각이 홀 아래로 추락한다.
홀은 갑각룡이 지키고 있어.
그 모습을 보며.
정면으로 돌입하는 건 무리야. 작은 돌조각에도 반응하니까, 잠입도 무리지. 그렇다고 그걸 상대하면서 글레투스를 상대한다? 그건 불가능해.
카일은 라니엘에게 들은 작전을 떠올린다.
소환사에겐 시간을 주면 안 돼. 한 번에 해치워야 한단 뜻이야. 그러니까, 우린 그 예민하기 짝이 없는 갑각룡을 역으로 이용할 거야.
“가라, 카일.”
카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굽힌 무릎을 쫙 뻗는다. 크게 도약하며, 카일은 무너지는 지붕을 향해 뛰어들었다.
쏟아지는 돌조각 사이로, 카일은 홀을 내려다본다.
느려진 체감시간 속에서, 갑각룡이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홀에 똬리를 튼 갑각룡이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카일을 향하지 않는다.
지붕을 박살 내며 들어간다.
그럼, 갑각룡은 먼저 떨어지는 돌조각에 반응할 거야. 그때가 기회란 거지.
갑각룡은 쏟아지는 돌무더기에 먼저 반응한다.
그 몸을 비틀고, 회전하며 돌조각을 갈아버린다. 가루가 되는 돌조각의 너머로, 카일은 추락한다.
구속(Restriction).
사슬(Chain).
어디선가 날라온 사슬이 쏟아지던 돌조각을 붙들어 놓는다. 붙들린 돌조각에 카일이 착지한다.
콰직.
밟은 돌조각에 금이 간다.
카일은 무릎을 웅크린 채, 아래를 보았다. 돌조각을 갈아바리며 갑각룡이 올라온다.
야, 카일.
검을 쥔다.
발끝에 힘을 모은다.
밟고 있는 돌조각이 삐걱거린다.
흑룡의 날개를 베었을 때, 기억하지?
기억하고 있다.
라니엘이 온갖 주문으로 그 고도를 낮추었을 때, 카일은 흑룡의 날개를 베었다.
그때, 날개를 어떻게 베었던가.
힘겹게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제 알아서 날아오는 것을 향해 성검을 가져다 대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망설일 필요가 없다.
탁.
돌조각을 박찬다. 지붕의 파편을 밟을 때마다 사슬이 출렁인다. 그마저 반동 삼아 카일은 도약에 도약을 거듭했다. 제 몸을 가속해한 발의 화살로 만든다.
화살대는 카일의 육체다.
화살촉은 카일이 쥔 성검이다.
스릉.
성검을 세운다. 빛무리가 성검을 따라 흘렀다. 빛의 꼬리를 끌며 카일이 가속한다.
탁.
마지막 돌조각을 박찬다.
눈앞에는 갑각룡의 아가리가 있다. 언젠가 베었던 흑룡의 두개골로 이루어진 아가리. 쩍 벌린 아가리 사이로 돌조각이 씹혀 들어간다.
갈라버려.
한발의 화살이 갑각룡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돌무더기가 튀어 오른다. 갑각룡의 표피가 갈린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만 같던 갑각룡이 피를 내뿜는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핏물이 쏟아진다.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전진하는 빛줄기가 있다. 백금색의 빛무리를 끄는 칼날이 갑각룡의 표피를 가르고 튀어나온다.
촤아아아아악!
쏟아지는 핏물 사이로 카일이 눈을 부릅뜬다.
갑각룡의 몸을 가르고 나온 그가, 공중에서 빙글 돌며 칼을 휘두른다.
촤악!
참격이 핏물을 튀기며 글레투스에게 쏘아진다. 글레투스를 노리는 건 카일 뿐만이 아니다.
분쇄(Smash).
홀의 측면에서 충격이 엄습한다. 터져나가는 벽돌 사이로, 햇빛을 등진 잿빛 마법사가 손짓한다. 신궁이 활시위를 놓는다.
쐬에에에엑.
달빛 화살이 빛무리를 끌며 쇄도한다.
신궁이 쏜 화살이 일직선으로 글레투스를 노린다.
카일의 참격.
라니엘의 분쇄.
레미아의 달빛 화살.
‘충분하다.’
승기를 붙잡았다.
그런 확신을 가지며 카일은 글레투스를 본다. 그녀 또한 고개를 들어 카일을 본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갑각룡을 베었다면, 그걸로 끝이야.
소환사에겐 어찌 됐든 딜레이가 존재해. 이건 절대적이야. 그들은 이계에서 사역마를 불러오니까.
흔들리는 백발 사이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 표정은 한없이 무표정하다.
홀을 지키고 있던 갑각룡만 빠르게 치워버린다면, 준비된 사역마가 오기 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어.
너무나도 여유롭다.
죽이진 못하더라도 전투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단 뜻이야.
그녀를 지켜줄 사역마가 하나도 없음에도, 태연한 모습이다. 그 모습에 카일은 오한을 느낀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런 직감이 든다.
“아.”
글레투스가 눈을 깜빡인다.
그녀의 녹빛 눈동자가 휜다.
“너희구나?”
그녀가 웃었다.
“흑룡을 죽인 게.”
그녀가 손을 휘둘렀다.
옷자락에 가려 있던 그녀의 왼팔이 드러난다. 카일은 그 팔을 보며 눈을 크게 뜬다.
‘검다.’
마치, 그늘에 잠긴 것처럼 검은 팔이다.
새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팔이 허공을 파고든다. 카일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허공을 찢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변이 시작된다.
찢어진 공간 사이로 무언가 튀어나온다. 튀어나온 것은, 조금 전 베었던 갑각룡을 닮아있다. 새로운 갑각룡이 튀어나온다.
그것이 카일의 참격을 물어뜯는다.
카가가가각가가각!
그리고.
카가가가가가각!
그것은 한 마리가 아니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다섯 마리의 갑각룡이 허공에서 튀어나온다. 그것이 레미아의 달빛 화살을 삼킨다. 라니엘의 분쇄를 튕겨낸다.
“이런 씨발.”
홀의 바깥에서 추락하던 라니엘이 손을 뻗는다. 손가락에 스톡된 주문이 빛을 뿜는다.
사슬(Chain).
추락하는 카일의 몸을 휘감은 사슬을 잡은 채, 라니엘이 크게 휘둘렀다. 공중에 붕 뜬 카일은 보았다.
‘···이게, 무슨.’
갑각룡이 요새를 무너트린다.
회전하는 갑각룡은 글레투스를 지키고 있다.
카일이 당황하는 사이에도, 라니엘은 사슬을 계속해서 내던졌다. 하나는 요새의 바깥으로, 다른 하나는 망루를 향해 집어 던진다.
“레미아!”
레미아가 사라를 품에 안은 채 사슬을 붙잡는다.
촤르르르륵!
사슬이 라니엘의 마나를 따라 이리저리 요동친다. 요동치던 사슬에 붙잡힌 레미아와 사라는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그것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분쇄(Smash).
라니엘은 사슬을 놓고 곧장 주먹을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갑각룡의 두개골에 충격파를 쏘아낸다. 그러나, 밀려나는 것은 라니엘이다.
우득, 우드드드득!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라니엘의 팔이 꺾인다. 손가락이 부러진다. 한쪽 팔을 포기한 대가로, 라니엘은 갑각룡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쾅!
날라간 라니엘이 성벽에 처박혔다.
“퉷, 씨발···.”
그가 돌무더기를 털어내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선다. 라니엘이 뱉은 침에는 피가 섞여 있다.
“···이게, 이게 뭐예요?”
흙투성이가 된 사라가 고개를 든다
“·····.”
레미아는 말없이 뒷걸음질 친다.
그리고, 카일은.
카일은 입술을 깨문 채 글레투스를 보았다.
다섯의 갑각룡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은 마치 왕을 모시듯,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선다. 물러서는 갑각룡 사이로 새하얀 머리칼이 나부낀다.
배교자, 글레투스.
잔해 속에서 걸어 나온 그녀가 오른손을 휘두른다.
검게 물들지 않은 오른손을 휘두르자, 요새를 뒤덮었던 안개가 요새의 안으로 몰려든다.
안개 사이로 푸르고 붉은 안광이 번뜩인다.
촤악.
그녀가 검게 물든 왼팔을 휘둘렀다.
공간이 찢어진다. 찢어진 공간에서 안개가 흘러나온다. 안개 속에서 마수들의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망가졌네.”
글레투스가 툭, 내뱉었다.
“완성을 앞두고 있었는데, 망가져 버렸네.”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뭐, 더 좋은 재료가 있으니 괜찮으려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뜬다.
탁한 녹빛의 눈동자가 용사를 바라본다.
“용사의 육체.”
······재앙에겐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이 그들의 앞에선 당연함을 잃는다. 마주한 광기의 앞에서, 카일은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