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 the Hero Party RAW novel - Chapter 85
〈 85화 〉 사상 최강의 시녀(3)
* * *
제 1 왕녀, 르뤼엘.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르뤼엘은 순간이지만 당황했다. 그녀가 당황하는 일은 드물다. 매우 드문 일이었다.
르뤼엘은 자신의 행동에 확신을 가진다.
그 확신이 흔들릴 때, 르뤼엘은 당혹함을 느낀다. 지금, 르뤼엘은 자신의 확신이 흔들림을 느꼈다.
‘···이건, 예상외로군.’
르뤼엘은 앞을 보았다.
눈앞에는 메이드 복을 차려입은 소녀가 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가볍게 턴다.
후두둑.
그녀의 손끝을 따라 핏물이 흩뿌려진다. 흩뿌려진 핏물에는 무언가의 살점이 섞여 있다.
촤악.
왕녀가 거하는 별궁의 바닥에 오물을 흩뿌림은 불경이다. 정작 르뤼엘 본인이 그것을 신경 쓰지 않더라도 불경임은 변함이 없다.
“···음.”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의 살점을 보며, 소녀가 눈살을 찌푸린다. 버릇처럼 한 행동이었으나, 뒤늦게 잘못됨을 이해한듯한 모습이다.
따악.
그녀가 귀찮다는 양 손가락을 튕긴다.
화륵.
그리곤, 핏물과 살점이 한데 엮여 불타 사라진다. 그 동작이 무척이나 매끄럽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
별궁의 바닥에는 그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슬림조차 남지 않은 바닥을 바라보던 르뤼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
“예.”
“방금 그건 무엇이지.”
물음에 소녀가 답한다.
아주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감시용 사역마 입니다. 회로가 그려진 범위 내에서, 지정된 인물의 머리 위를 떠다니죠.”
“···내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은.”
“대상이 왕녀님이라는 뜻이겠죠.”
그녀가 핏물로 물든 장갑을 벗는다. 그리곤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새 장갑을 꺼내 낀다. 그 장면에서, 르뤼엘은 무언가를 떠올린다.
움직임의 모양새가 다르다.
들고 있는 것 또한 다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르뤼엘이 언젠가 보았던 기사들을 연상케 한다.
‘···마치 전장의 기사와 같군.’
전장의 기사가 칼에 끼인 육편을 털어내고, 칼집에 칼을 도로 집어 넣는듯한 모습이다. 눈앞의 교수에게서 르뤼엘은 전장의 향기를 느낀다.
그 향기에 이끌리듯 르뤼엘은 질문했다.
“방금과 같은 것이 많은가?”
“이런 건 보통 하나만 숨겨두진 않죠.”
“···궁중의 마법사들은 내게 이런 것이 있다고,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거늘.”
“둘 중 하나겠죠.”
소녀가 장갑을 갈아 낀 팔을 내리며 말했다.
“보안 회로 사이에 교묘하게 섞여 있어서, 정말 눈치를 못 챈 마법사들이 있거나···.”
그 말의 뒤를 르뤼엘이 이어받는다.
“아니면, 전부 내 오라비의 파벌에 든 한통속이란 이야기겠군.”
“어느 쪽이나 왕실의 미래가 참 어둡네요.”
“불경죄다, 교수. 왕녀인 본녀의 앞에서, 잘도 그런 말을 입에 담는군.”
“새삼스레.”
교수가 어깨를 으쓱인다.
“···흐응.”
그 모습을 바라보는 르뤼엘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당혹함은 곧 웃음으로 흘러내린다. 르뤼엘은 눈앞의 소녀에게서 흥미를 느낀다.
그런가.
‘이런’ 인물이었는가.
“아하.”
르뤼엘은 결국 소리를 내 웃었다.
“이거, 물건이로군.”
입 밖으로 뱉어진 웃음을 흐르게 내버려 둔 채, 르뤼엘은 눈앞의 소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마학자이자, 교수라 하여 얌전하고 지루한 인물일 거라 생각했다만···.’
이건 전혀 다르지 않은가.
과연, 마음에 든다. 기대 이상이다. 모처럼 만족스러운 인선이 아닐 수가 없다.
“좋다, 교수.”
르뤼엘은 몸을 돌려 앞을 향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라. 매우 마음에 드는군.”
2.
제 1 왕녀가 머무르는 별궁은,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상상하던 왕실 속의 풍경과는 달랐다.
‘애초에, 내가 본 왕실은 안 그랬는데.’
왕가의 인정을 받은, 왕가의 마법사가 되었을 때 들렀던 왕실은··· 조금 더 화사한 분위기였다.
잘 관리된 정원과.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
그런 포근하고 따사로운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별궁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이건 왕실이라기보단···.’
차라리 마탑에 가까운 분위기다.
특히나, 집무실의 풍경은 더욱더.
“·····.”
나는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에서 르뤼엘 왕녀는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아까부터 줄곧, 한숨도 쉬지 않은 채.
“두어라.”
“보내라.”
“읽을 가치도 없다. 처리해라.”
그녀는 곁에 둔 수행원에게 작성이 완료된 서류를 받거나, 넘기거나, 찢거나를 반복했다. 쉼 없이 되풀이되는 과정은 좀처럼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빠르네.’
나는 왕녀의 곁에 인형처럼 선 채, 그녀가 처리하는 서류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뭔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왕녀가 처리하는 서류 작업은, 내가 마탑에서 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 보거라.”
한 차례 수행원들을 전부 내보낸 왕녀가, 숨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차게 식은 커피를 홀짝이더니, 팔을 테이블의 구석으로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곳엔 서류 더미가 있다. 한구석으로 몰아두었던 서류 더미.
‘···어?’
나는 거기서 익숙한 문양을 보았다.
‘···저건.’
기사단장, 하인켈 아저씨가 쓰는 문양이다.
그 문양이 맨 위에 올려진 서류 더미를, 왕녀가 테이블의 한가운데로 끌고 온다.
“전장에서 온 편지다.”
내 시선을 의식한 듯 왕녀가 말했다.
“이 서신에는 관심이 좀 생기나 보군.”
“···관심이 있는 분야라.”
“그러고 보니, 그대의 오라비가 잿빛 마법사였던가?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군.”
“예?”
“그대는 로셀경의 양녀 아닌가. 로셀경이 첫째로 들인 양자가 잿빛 마법사, 라니엘 경이니··· 그대의 오라비가 라니엘 경 아닌가?”
···그게 그렇게 되나?
“그렇긴···하죠.”
“뭔가? 굉장히 미묘한 반응이다만.”
왕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서신을 끌고 와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주로, 전장의 상황이나 군의 상태를 보고하는듯한 서신이었다.
“···이런 것도 처리하시는 겁니까?”
“왜, 신기한가?”
“예, 조금.”
“뭐, 사실 전장에 서지 않은 본녀가 이런 일을 처리한다는 것 자체도 우스운 일이지. 실제로, 이와 관련해 내가 처리하는 업무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편지를 몇 통 쓸 뿐이지.
그리 중얼거린 그녀가 툭툭, 깃펜을 몇 번 빈 종이에 두들겨 잉크를 덜어냈다.
“전장 근방의 귀족, 혹은 변경백들에게 서신을 보내곤 한다. 협조하거나, 식량을 지원하라고.”
“···예?”
“물론 본녀가 말하지 않더라도 지원은 할 터이다. 그러나, 내가 한 통의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은 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되지.”
“눈치를 살피게 된다면···.”
“보내지 않을 물품들을 더 보내지. 간단한 식량만이 아니라, 조금 더 귀한 것들을 함께 보낸다는 뜻이다.”
그녀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미친개라는 악명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더군. 대충 처리를 했다간, 내가 미친 듯이 짖어댈 게 뻔히 보일 테니까.”
···변경백의 지원.
문득 나는 떠오르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딱딱한 빵을 뜯어먹는 게 일상이긴 했지만, 가끔가다 기사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가 있었다.
귀족의 지원.
우리가 지켰던 영지에서 보내오는 사치품들.
술이나, 담배, 커피 따위.
세간에선 당연한 것들이나, 전장에선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다. 고된 하루를 견뎌내고,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술병을 까던 날들이 있다.
가끔이었지만.
가끔이기에 기억에 남는 것들이다.
‘···설마.’
나는 왕녀의 뒷모습을 흘겨봤다.
그녀는 여러 귀족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 개중에는, 내가 전장에 있을 때 지원 물품을 보내주던 귀족들의 이름도 분명히 찍혀있었다.
그 모든 게 르뤼엘 왕녀의 닦달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녀의 닦달로 보내졌던 물품도 있었을 테지.
“···굳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굳이, 왕녀님께서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악명을 늘려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는가.
멈칫.
왕녀의 깃펜이 멈췄다.
그녀가 깃펜을 내려놓곤 천천히 나를 돌아봤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없지?”
그녀가 내게 되물었다.
“왜 없다고 생각하나?”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왕가의 인물이기 이전에, 나 또한 이 나라의 사람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은 전장의 기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대도, 나도, 내 오라비도, 그 모두가 말이다.”
“·····.”
“그들이 전장에서 버티고 있기에, 이 나라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나는 그들을 존중한다. 제 한 목숨을 나라를 위해,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마치, 당연한 걸 말하듯이.
“그들의 희생으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면, 그들을 향한 존중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녀는 말로만 하는 것을 싫어한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지.”
툭, 하고 그녀가 편지를 가리켰다.
“말했다시피, 본녀가 그런 기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기껏 해봐야 이런 편지를 보내거나···.”
그녀가 뒷말을 뱉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수호한 이 나라가, 내부서부터 아예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것 정도겠지.”
“·····.”
그런가.
“그렇습니까.”
그게, 당신의 목적이었는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왕녀를 바라보았다.
일전에 말했다시피, 나는 왕녀와 같은 유형의 사람을 종종 만나곤 했다. 다름 아닌 전장에서.
소드 마스터 쿤텔이 그러했고.
기사단장 하인켈이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모든 것을 내건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설계된다.
‘존엄마저 버려가면서.’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간다.
소드 마스터 쿤텔은, 죽음의 칼 가니칼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평생을 검(?)에 매진했다.
기사단장 하인켈은, 인류의 수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전장에 서 있다.
‘그리고, 제 1 왕녀 르뤼엘은···.’
그 실마리가 보인듯한 기분이다.
어쩌면 억측일지도 모르지만, 눈앞의 인물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건 무슨 눈이지, 교수?”
나를 향해 묻는 왕녀를 바라본다.
그녀를 바라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하러 가겠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지 않은가?”
“우선 바깥 것들을 먼저 치워야 할 것 같아서.”
나는 별궁의복도를 가리켰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 * *
라니엘은 집무실을 빠져나옴과 동시에 손가락을 까딱였다. 스톡(Stock)된 주문이 빛을 발한다.
침묵(Silence).
은신(Stealth).
별궁의 복도를 지나가는 시녀 중, 그 누구도 라니엘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다. 라니엘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그 끝에 서서, 뒤를 돌아본다.
별궁의 시작점부터, 왕녀가 머무르는 곳까지 이어지는 통로에 새겨진 회로를 읽는다.
‘···더럽게 많이도 깔아놨네.’
얼핏 보면 왕실을 수호하는 회로로만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눈에 힘을 주면 숨겨진 회로들이 보인다. 그것도 아주 많이.
‘조금 더 지켜보다 치울까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라니엘은 손목을 꺾으며 숨을 뱉었다.
‘제 1 왕녀, 르뤼엘.’
본래, 왕가의 정치질에 간섭할 생각은 없다. 정해진 업무 이상을 할 생각도 없었다.
‘왕녀가 맡긴 것은, 죽음에서 지키는 것.’
그것과, 이것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복도에 깔린 것은 그녀를 감시하는 것들이니까. 그녀를 지키기만 하겠다면, 이것은 그다지 치울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당장 가까이에서 말을 엿듣는 건 치워버렸고.’
남은 건, 임무에 그닥 방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치울 필요가 없는 것들이다.
“·····.”
그러나, 라니엘은 그것을 치우기 위해 복도의 앞에 서 있었다.
수당 외 업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
그것을 굳이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라니엘 개인의 호의의 범주다. 통로의 끝에 선 그녀는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시팔, 얻어먹은 술이 당최 많아야지···.’
종종 전장에서 지원받았던 사치품들.
가끔 견디기 힘들 때마다 빨아 재꼈던 술병을, 그 독하기만 한 술들을 라니엘은 기억한다.
세간에선 흔하나, 전장에선 귀한 것들.
그것을 대접받은 대가로.
세간에선 귀하나, 라니엘에겐 흔한 것들.
그를 대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후우.”
짧게 숨을 내뱉는다.
별궁의 복도에 손가락을 가져다 붙인 채, 라니엘이 마나를 흘려보냈다.
회로를 타고 마나가 흐른다.
라니엘의 머릿속에 회로의 구성이 그려진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무력화시킬지도.
‘우선, 끌어내야겠지.’
별궁을 지키는 수호 회로의 틈새에 숨어든 회로다. 우선, 숨겨진 것들을 끌어낼 필요가 있다.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다.
여태까지 해왔던 일에 비하자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었으니까.
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지난 5년간 라니엘은 전장에서 수많은 회로와 마주했다. 그녀는 그것을 해체하고, 박살 내고, 때로는 숨겨진 회로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 전부가 누구의 회로였는가?
무려 고대 리치, 스케발이 짜올린 회로다.
전장에서 5년 동안 라니엘은, 마법사들의 악몽이라 불리는 스케발의 회로를 전담해 왔다.
그에 비해, 눈 앞에 펼쳐진 회로는 어떠한가.
수준 차이를 생각하면 웃음만 나올 뿐이다.
‘이건 뭐, 애들 장난 수준도 아니고···.’
그런 그녀의 눈에 궁중 마법사들이 장난질을 쳐둔 회로는, 어린애들이 쌓아 올린 장난감 탑과도 같다.
툭, 하고 별궁의 복도를 건드린다.
그것만으로 숨겨져 있던 회로들이 드러난다.
왕녀의 거처까지 쭉 이어진 회로들을 따라, 라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따라 걷는다. 그녀가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잿빛 마나가 피어오른다.
사락.
피어오른 마나가 회로를 무너트린다.
그 과정은 요란하지도 않다. 잿빛 마나가 닿는 순간 그걸로 끝이다.
파삭.
궁중 마법사들이 쌓아 올린 회로가 박살 나고, 쪼개지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회로 이렇게 새기는 거 아닌데.”
피식, 하고 라니엘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보기에는 형편 없는 회로들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