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202
나는 그 말에 굳이 답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여 절하고 곧장 내달렸다.
다급한 마음에 심장도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노를 보고만 싶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더러운 열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내 의지가 아니더라도, 내 뜻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속에서 곰팡이처럼 자라나 어느새 박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그 여자’를 향한 심상이 너무도 불경스럽고 끔찍했다.
구역질이 났다. 마치 내 몸과 영혼이 내 것이 아니게 되는 듯한 느낌이다. 헬레네를 열망하는 내 마음과 그로부터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서로 싸워댄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에 꺾여 잠도 못 이루고 관절을 뒤틀며 몸을 떨어대던 시간들마다, 나는 스스로를 깊이 증오했다.
그러나 ‘파리스’처럼은 되지 않았다.
그는 새 가족들의 왕자 대접에 취해, 고향과 옛 가족을 버리고 오이노네까지 버린 상태에서 헬레네를 납치해온 쓰레기니까.
애초에 그 새끼는 신의고, 책임감이고, 뭣도 없던 개새끼니까, 그렇게는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 그 모든 걸 뚫어내고서 나는 여기까지 달려왔다.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더 기다렸다가는 정신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무뿌리 사이를 뛰어넘으며 미친듯이 달려나가던 나의 앞을···
[잠깐.]한 소년이 막아선다.
위험하게도 활과 화살을 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비로운 눈빛으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 어린애를 보고 갑자기 왜 어른을 불러세우냐고 묻거나, 혼자 이 숲에서 뭐하는 거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애욕을 다스리시는 분이시여.”
[여기서부터는, 넌 나와 함께 간다.]소년 신,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날개를 접더니 몇 번 그를 퍼덕여 천천히 어느 나무둥치 위에 몸을 안착시킨다.
나는 그의 말에 한참 달려오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킨다. 땀이 내 온몸을 적시고, 옷가지들은 이미 반쯤 다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그리고 한 가지 전해줄 말이 있기도 하고.]그 말에 나는 불안이 엄습하여 고개를 쳐든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프로디테 님께서는 제게 황금화살을 쏘아주시겠노라고 스틱스 강에 맹세하셨습니다.”
[흥분하지 마라. 나는 어머니의 맹세에 대해 잘 안다. 우리가 네게 갑자기 맹세를 어길 일은 없을 것이다.나는 연인 되는 요정을 바라보는 네게 화살을 쏴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녀를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겠지. 네가 바라는 일이 그런 것 아니었나?]
“···맞습니다.”
[다만, 네가 생각하던 것과 결과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러 왔을 뿐이다.]“예?”
에로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다시 날개를 퍼덕인 뒤 공중을 떠오른다. 가까운 나뭇가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가 잠시 고민하더니 한 마디를 던진다.
[네가 이전에 제우스 님의 딸을 어떻게 보았었는지, 기억은 나나?]“···.”
나는 헬레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려 애쓴다.
그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의 복잡했을 감정과, 그때 느낀 인상에 대해 되새기려 해본다.
“···아뇨.”
모르겠다.
그것들은 이미 황금화살이 가져다 준 그 역겨운 감정에 이미 휩쓸려 빛을 잃었다.
[그래. 옅은 색채 위에 다른 강렬한 색채를 덧칠하듯이, 약하고 작고 사소한 것은 강하고 크고 중대한 것에 잡아먹힐 것이다.그리고 나의 화살이 네게 주는 감정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하다. 가장 고결하고 강대한 신들조차도 그 앞에 굴복하고 말 정도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절망하지 말라는 뜻이다. 불멸하는 신들이든, 필멸자들이든 보통 사랑이란 조잡하고도, 그 색이 옅으며,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사랑의 신이, 갑자기 사랑을 조소한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몸을 띄우기 시작하는데, 나는 선뜻 발을 뗄 준비를 하지 못한다. 방금 에로스가 말한 바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에로스가 남긴 무언가 중요해 보이는 말들,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하며 그 뜻을 맞춰본다.
헬레네의 첫 인상, 강대한 감정, 그리고 필멸자의 ‘조잡한’ 감정···.
“아.”
에로스가 천천히, 그리고 씁쓸하게 웃는다.
[필멸자들의 사랑이란 나약한 것이다. 황금화살을 맞은 뒤 네가 연인에게 느낄 감정에 비해서는 너무도 하찮은 것이지.]내가 지금껏 느껴온 이노에 대한··· 감정은 대단한,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이노가 고양이 흉내내는 앞에서 내가 새소리를 내며 웃고 떠든다든가, 함께 별하늘을 보며 엉터리 별자리와 천문도를 그려내는 게 좋을 뿐이었다.
소소한 웃음이, 잠깐 스치던 시선이, 서로 벌이던 말다툼이나 그 뒤로 이어지던 화해의 눈물이 사소하게 소중했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헬레네에게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반추한다.
···찬란했다.
태양처럼.
어쩌면, 이노를 향한 감정을 묻어버릴까 두려워했을 정도로.
[필멸자들은 그런 것에 집착하더군.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자신의 것인지 아닌지, 그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네가 화살을 맞고서 느낄 사랑이 네가 느껴온 사소한 감정에 비해 못하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라. 이제껏 네가 연인에게 느꼈던 사랑이 초라하고 비루한 것이었다며 번민하지 마라.
필멸자의 여린 영혼은 그 괴리감에 쉽게 찢어져버릴 테니.]
그는 익숙하다는 듯 멍해진 내 표정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네 연인과 함께하게 된다는 그 사실 외에는 생각하지 마라.]“···.”
머리가 멍해진다.
갑자기 막막한 마음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자, 에로스는 천천히 다시 땅으로 내려앉더니 내가 발을 떼기를 기다려주었다.
-사박.
···나는 결국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그것 말고 내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에로스가 내 조금 앞에서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네 연인에게 닿기까지 머지 않았다. 빠르게 말해야 할 거다.]“화살을 쏘기 전까지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잠깐이면 충분합니다. 화살을 맞기 전에 아주 잠시만 연인을 마주보고 싶습니다.”
[···.]에로스는 내 말을 듣고는 침묵하더니, 조용히 뒤로 빠져 기다린다. 나는 그의 침묵이 수긍이라 받아들이고 그를 지나쳐 걸어간다.
에로스는 조용히 근처의 수풀 사이로 숨어들고, 나는 어느새 나무들 사이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습하지만,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내 폐를 채운다.
찬 이슬을 맞은 풀들이 이러저리 길게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노란색으로 빛나는 이름 모를 풀꽃들이 고개를 내민다.
그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어느 작은 연못의 수면에 주름이 잡힐 때.
그 옆에 이노가 뒤돌아서 앉아 있었다.
그 어깨가 들썩이기에 고개를 내밀어 살펴보자 이노의 하얀 손가락에 장기말들이 들려 있다.
어설프게 깎아만든 장기판과 장기말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 탁, 하고 내려놓자 왕이 순식간에 전차와 병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한다.
한 게임의 끝이었다.
“···네가 이겼네?”
“파리스!”
함께 이야기 나누고픈 것이 참 많다.
같이 먹거나 마시고 싶은 것들도 많다.
둘이서 하고 싶은 놀이들도 아직 수도 없이 남았다.
그 작고 작은 조각들이 짜임새 있게 모여 이노를 향한 나의 마음을 이룬다.
그녀가 나를 뒤돌아본다.
갈색 머리에, 투명한 눈을 가진 나의 연인.
반쯤 비치는 가볍고 시원해보이는 옷자락이 바람에 마구 휘날린다. 나는 왠지 이노가 그대로 바람에 날아가버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폭.
“가, 갑자기 왜 그래? 파리스?”
“그냥.”
그대로 이노를 안아들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소박한 즐거움이 끝나버리기 전에 이노와 함께 눈을 마주치고 싶었다.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하늘의 가장자리를 불그르슴하게 물들인다. 이미 동쪽에서부터 조용히 은빛 별들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이노의 두 눈동자가 빛난다.
나를 향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별빛을 쏘아내린다. 이 찰나 같은 순간이 마치 영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는 전력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향해 웃어보인다.
[이제 되었나?]그리고,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나의 웃음이 멎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파리스, 왜 그래?”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줘.
앞으로 너를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너와 영원하기 위한 거니까.
영원, 영원이라. 불멸하는 신들이 실재하는 세상에서 필멸자가 외치는 영원이란 얼마나 덧없고 하찮은가.
고작 한 줄기 화살이, 한 순간의 따끔거림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데 어떻게 영원을 논한다는 말인가.
화살 한 발에 나는 헬레네를 향해 영혼을 불태웠고, 이제 이노를 향해 그러려 한다.
에로스가 말했던 이전의 ‘나약한’ 사랑을 지워버리고 이노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서, 이노를 안아든 상태로 살짝 몸을 돌린다.
핑,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파공음이 울리고.
다시 나는 두번째로 그 따끔한 감각을 느낀다.
“파리스? 뭐해? 왜 계속 눈을 감고 있어?”
“···.”
“파리스? 무슨 일 있어? 이, 이것 좀 내려놔 봐. 너 얼굴빛이 안 좋은데···”
“아냐.
아무것도 아냐.
나는 괜찮아.”
나는 웃으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한 요정이 내게 안긴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파, 파리스? 괜찮은 거 맞아? 왠지 평소랑 다른 느낌인데···.”
여전히 갈색 머리에, 투명한 눈을 가진 나의 연인.
여전히 반쯤 비치는 가볍고 시원해보이는 옷자락이 바람에 마구 휘날린다.
여전히 함께 이야기 나누고픈 것도, 같이 먹거나 마시고 싶은 것들도, 둘이서 하고 싶은 놀이들도 수없이 많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감정이 심장을 불태워버리지는 않는다. 끊임없는 욕망이 나 자신을 갉아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이노를 내려놓는다. 어리둥절해하는 이노 앞에서 더 어리둥절할 표정을 지으며 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달라진 게 없지?
왜 여전히 나는 이노를 옛날처럼 좋아하지?
아직도 이노와 하고 싶은 거라고는 사소한 흙장난이나 소꿉놀이뿐이고, 이노에게 바라는 거라고는 간식을 먹을 때 내 몫을 남겨줬으면 하는 것밖에 없다.
불 같은 욕망 대신, 그저 일상에서 마주하는 그런 소소한 요구들이 내 마음에 들어찬다.
이노를 당장 끌어안고 탐하고 싶은 마음보다도, 그저 이마를 맞대고 서로 오랫동안 마주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옛날과 정확히 똑같이.
저 구석에 숨어있던 에로스의 활을 살핀다. 활시위가 비어있다.
이번에는 내 팔을 본다. 금가루가 묻은 작은 흉터가 남았다가 곧장 사라진다.
“···.”
“파리스?”
나는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두 가지 문장을 떠올린다.
황금화살을 맞으면 상대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조차 휘감아버릴 강렬한 사랑을 하게 된다.
이노를 본 뒤 황금화살을 맞았는데도 이전과 변한 게 없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뒤.
말을 잃는다.
“파리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 걱정하지 마.
“걱정이라도 있어? 우리 별자리 놀이라도 할래?”
그래, 그러자. 나 너랑 별자리 만들고 싶어.
그 다음에는 흙덩이를 서로에게 던지면서 놀고 싶어. 그러고 나서 제대로 씻지도 않고서 뒹굴거려서 궁전의 일꾼들이 경악하는 걸 보고 싶어.
채소랑 다른 거 안 먹고 그냥 너랑 과일이랑 단 것만 먹고 싶어. 나무 위에서 같이 자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둘 다 굴러떨어지는 것도 좋아.
그냥, 그냥 같이 있고 싶어.
이노가 내 눈물을 닦아준다.
“그럼 같이 있자.”
“···.””
언제나처럼.
항상 그랬듯이.
나는 여전히 이노를 좋아했다.
황금화살은 아무···
···그랬다.
외전-다섯번째 스타시몬
“파리스? 무슨 일 있어? 이, 이것 좀 내려놔 봐. 너 얼굴빛이 안 좋은데···”
“아냐.
아무것도 아냐.
나는 괜찮아.”
“파, 파리스? 괜찮은 거 맞아? 왠지 평소랑 다른 느낌인데···.”
-와작.
왠지 에로스는 지금 이 순간 입안에 바삭하며, 씹을 때면 카샥카샥한 소리가 나는 간식이 손에 쥐여져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파리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에로스는 그 간식거리가 발명되려면 저 대서양 너머의 옥수수라는 신묘한 벼과 작물이 수입되어 와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앞으로 2,600년은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리고 그 간식이 팝콘이라 불리게 되리라는 사실도.
다만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가 울고 있는 모습이나, 저 케브렌의 딸 오이노네가 그런 파리스를 달래려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이나···
“그럼 같이 있자.”
흥미롭다.
미칠 듯이 흥미롭다.
이제껏 아폴론이나 포세이돈, 제우스 같은 다른 절조 관념이란 게 부재하는 신들에게 황금화살을 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저 요정, 오이노네가 위로해주자 파리스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비비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인다.
에로스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저렇게 눈이 붕어 눈처럼 되어서도 잘생겼다. 아니, 왠지 눈가가 촉촉한 게 오히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당연히 에로스도 느낀 기분을 상대 요정이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눈을 보고 속상한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꼭 끌어안는다.
그렇게 꼭 끌어안은 채 풀밭에 누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왠지 모를 이상한 분위기가 퍼지면서 공기가 달짝지근해지자 오이노네가 파리스의 어깨끈을 풀러내고 파리스가 요정의 허리띠를 끌르며···
[거기까지.]갑자기 부드러운 손바닥이 나타나 에로스의 양눈을 가린다. 에로스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목소리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짐작해낸다.
[···어머니?] [거기까지 보도록 하거라. 넌 아직 어린 걸?] [아, 아니, 잠깐···.]갑작스럽게 등장한 어머니가 입에다 손가락을 대고서 에로스의 뒷덜미를 붙잡은 채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날아다니는 아프로디테가 손짓하자 분홍빛으로 빛나는 구름과 안개가 저 둘이 머무르던 연못가를 감싼다.
그러자 숲 곳곳에서 탄식성과 야유소리가 낮게 울려퍼지는데, 아마 이 숲의 싹수가 노란 요정들인 듯했다.
아무튼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횡포에 당황한 에로스가 헛웃음을 짓는다.
[···어머니가 언제부터 그리 정숙과 순결을 신경쓰셨습니까? 남자든 여자든 추하게 서로를 욕정하는 꼴이란··· 이미 수백수천 번도 더 보았습니다.헐벗은 필멸자들이 끌어안고 서로를 욕망해 보았자 어차피 저한테는 별 감흥도 없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처음이군요.] [내가 어리다면 넌 어린 거란다. 부모한테 말대답하는 걸 보니 아직 어린아이 같구나.] [···어머니께서 그렇다면야.]
에로스는 어머니의 억지에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꼈다.
자기는 다 컸다 주장하지만, 영락 없는 장난감 안 사줘서 삐진 아이의 태도였다. 보통 이렇게 삐진 아이의 화는 엘리베이터 버튼 눌러주게 하면 풀어진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에는 엘리베이터도 그렇고, 엘리베이터 버튼도 물론 발명되지 않았다. 아프로디테는 잠시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민하다가 에로스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서, 기분은 어땠니?]고전적인 수법인 화제 돌리기였다. 에로스가 뭐라 투정부리기 전에 아프로디테는 구름 하나를 딛고 폴짝 뛰어올라 에로스의 혀를 씹게 만들었다.
에로스는 불만에 차서 얼굴을 찌푸리다가, 결국 순순히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이야기를 꺼내야 했을 문제니까.
[···이런 기분은 처음입니다.] [어째서지?] [아니, 어머니께서는 방금 프리아모스의 아들이 지은 표정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분명 어딘가에서 훔쳐보셨을 텐데요?] [그래. 저기 구름 너머에서 지켜봤지. 멀리서 지켜봐서 잘 모르겠는데, 파리스의 표정이 뭐가 어땠길래?] [당황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제가 화살을 쏘아 맞힌 뒤, 파리스는 눈을 뜨고서 곧바로 애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시선의 변화가 크게 없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곧 제 쪽을 보더군요.정확히는 제 활 쪽을 말입니다.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