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201
“···.”
메넬라오스가 눈을 깜빡이자 다시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순간의 환영이었지만 그는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형님의 단호함 덕에, 내가 이렇게 잘 컸구나. 개 한 마리에 울고 불고 하던 나약한 소년이 사내가 되었구나.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양육법에 대한 훌륭한 고찰과는 별개로, 메넬라오스는 발걸음을 돌려 헬레네의 침소 근처에서 빠져나왔다.
다시는 그 주위에 얼씬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오디세우스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빵을 뜯고 고기를 삼켰다. 중간중간 올라오는 음료들로 목메임을 넘기며, 꾸역꾸역 먹었다.
“우리 딸아! 네 아비가 얼마나 잘 싸웠는지 알려주마! 그 망할 놈들이 거기가 원래 자기 땅이라고 하니, 내가 뭐라 대답했는지 아느냐?”
“뭐라 대답하셨는데요?”
“대답 안했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던 이카리오스가 쾅! 하고 탁자를 두드리자 안 그래도 조용히 고기나 씹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목에 쇠힘줄이 걸려 켁켁거렸다.
다행히 오디세우스가 주최한 만찬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이카리오스의 이야기를 듣느라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 페넬로페마저도.
오디세우스는 장인장모가 바로 옆에 딱 붙어 앉아 식사를 하는 이 숨막히는 상황 속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음료를 마셨다.
“얘, 너희 아버지 성격을 모르니? 뭘 어떻게 대답했긴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리셨는데!”
“원래 너 데려가겠다는 놈팽이 있으면 그렇게 하려고 했었는데.”
“컥, 커흡, 커걱··· 헉··· 허억···.”
“아빠! 그이가 울어요!”
“손님 된 이로서 주인을 울리면 안 되지. 이보게, 괜찮은가?”
“아, 예, 저야, 뭐, 항상 괜찮습니다.”
“하하하, 못난 아들이 담이 작아서 말입니다. 사돈께서 와주신 덕에 이타카에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아닙니다, 라에르테스 님. 저야 다른 놈팽이가 제 딸을 데려가겠다고 그랬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겠지만 이타카의 오디세우스는 다르지요.”
“과연 그렇습니까?”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사돈께서는 참 거짓을 말하기 어려워하시는군요!”
오디세우스는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장인장모이신 이카리오스 님과 페리보이아 님이 슬슬 그를 놀리고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이 숨막혀 하는 꼴을 나몰라라 지켜만 보고 있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이가 숨막히겠어요. 괜찮아요?”
“아, 괜찮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항상 유쾌하셨지요.”
“자네가 날 얼마나 봤다고 내가 유쾌한 걸 아나?”
“···.”
그나마 편 들어 주는 게 페넬로페뿐인데, 그것도 이카리오스의 가시 돋힌 말을 쳐내기에는 부족하다.
업보다.
애초에 페넬로페랑 결혼하려면 스파르타에 발 붙이고 살라 했던 것을 어찌저찌 데려왔으니 이카리오스 입장에서는 딸을 빼앗아간 원수 같은 사위에게 소소하게 복수를 행할 기회 아닌가?
게다가 이카리오스가 도끼로 대가리를 깨부쉈다는 ‘그 망할 놈들’은 죄다 오디세우스가 왕위에 오르니 이것저것 지랄해대던 각지의 족장 놈들이다.
특히 에우리마코스와 안티노오스는 몇 번이나 대놓고 반역을 획책하던 것들인데, 이카리오스가 이타카로 오자마자 대강 죽여주기까지 했으니 그 만한 은혜가 없다.
모두 만일 파리스가 들었다면, ‘아, 그 19권에서 죽는 애들?’이라고 답했을 이름들이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페넬로페와 이타카의 왕위를 노렸던 구혼자들.
지금은 살아있지도 않지만, 어쨌건.
이카리오스가 그들을 모조리 죽이고서 그들의 도시를 차지해준 덕분에 오디세우스의 입지는 훨씬 더 커졌다. 당분간은 이렇게 고생하면서 장인장모의 비위를 맞춰줘야만 한다.
···라고 만찬자리가 끝난 뒤 푸념하자 페넬로페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는 말한다.
“그래요? 누구는 아예 시가에 살고 있는데요? 지금 내 앞에서 하소연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어지긴 하는데. 그렇지만 당신 아버지가 나한테 조금 너무한 것 같진 않습니까?”
“글쎄요. 당신도 정치적으로 아버지 덕 본 게 큰 걸 모두가 아는데, 가만히 있어요. 정 힘들면 내가 지켜줄 테니까.”
페넬로페는 혀를 내밀고 웃으며 오디세우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오디세우스는 얼얼해진 이마를 쓰다듬으며 헛웃음을 짓는다.
“어차피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계시는데 두 분도 장난에 선을 넘기시진 않겠죠.
걱정 마요. 오히려 연회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우리 두 집안의 우애가 공고하니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에게는 더 까불지 말자고 생각할 테니. 당신이 바라마지 않던 것 아녜요?”
“그건··· 맞죠.”
오디세우스는 이 작은 섬이 어쩌다 군도 왕국의 중심지가 됐는지 몰라 한숨을 쉬었다.
케팔로니아 섬과 자킨토스 섬과 등지의 건방진 족장들이 계속 왕권에 기어오르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은 이제 일상이었다.
“젠장, 어리다고 온갖 개자식들이 달라붙어서는 이것저것 내놓으라고 어찌나 기어오르던지···.”
오디세우스의 아버지 라에르테스가 멀쩡히 뒤에 버티고 있을 때도 이 모양이니, 페넬로페의 집안이 제공해준 뒷배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더 고생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그 망할 개새끼들은 크로노스의 아들께서 모조리 타르타로스로 던져버려야···”
“쉿.”
오디세우스의 떠벌거리던 입을 페넬로페가 막는다.
“나쁜 말은 쓰지 마요. 옆방에서 텔레마코스가 자는데.”
그리 말하며 페넬로페가 슬쩍 문을 열자, 그 말대로 작은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그들의 어린 아들이 보였다.
걸음마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고 여린 텔레마코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
오디세우스가 그 아이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며 무언가 심장 속에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책임감이라 할 수도 있고, 애정이라 할 수도 있을 감정이 그의 가슴에 내려앉는다.
“···미안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가 열었던 문을 닫으며, 뒷머리를 가볍게 긁는다.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어요. 앞으로는 조심하죠.”
“풉.”
“···음?”
“당신은 바보야.”
페넬로페가 입을 가리고 웃더니 침대 쪽으로 살살 다가간다.
오디세우스가 직접 만든 침대였다.
커다란 올리브나무를 베어 그 밑동을 다듬고, 직접 송곳을 박은 뒤 금과 은과 상아로 장식해 자줏빛의 소가죽끈을 둘러매어 만든 침대.
“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인 줄 알아요?”
그 위에 페넬로페가 부드럽게 걸터앉는다.
“우리 부모님이 오신 뒤로 기쁘기도 했지만··· 얼마나 바빴는데.”
이 세상에서 아테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남자로서,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는 순식간에 뭔가 낌새가 이상해졌음을 알아챈다.
페넬로페의 눈가가 가늘게 휜다.
“텔레마코스가 이렇게 얌전히 잘 때도 흔치 않고··· 밤에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때도 적었고···.”
아.
“그렇네.
내가 바보였네. 당신 말이 맞아요.”
오디세우스는 빠르게 침대 곁으로 다가가 페넬로페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의 베일을 벗겨 저 멀리 던져버리는 동안 페넬로페는 조용히 오디세우스의 귀에 속삭인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아버지도 제 사촌의 일로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실 테니.”
“아, 그래. 당신 사촌의 일로 떠나온 거라 했었지. 기억나는군요.”
오디세우스는 자식의 어깨를 덮고 있던 망토의 끈을 페넬로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풀어헤치는 모습을 본다.
“지금쯤 저 망할 메넬라오스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허둥대고 있을 거예요. 스파르타에서 아버지한테 보낸 사절이 몇 번이나 왔었죠?”
“3번.”
“···비공식적으로 접촉해온 이들까지 합치면?”
“수도 없이 많죠.”
-쪽.
오디세우스가 고개를 숙여 페넬로페의 목을 간지럽힌다. 페넬로페는 간지러움에 오디세우스의 어깨를 때리며 뒤로 드러눕는다.
“그래요. 그 짐승 같은 인간들이 제 불쌍한 사촌을 무슨 가축처럼 가둬놓고 있잖아요. 저와 안면이 있던 궁정의 많은 사람들도 ‘사라졌고요’.”
보통의 부부에게 이런 이야기는 흥을 깰 만한 주제지만, 이들은 보통의 부부가 아니었다.
오디세우스는 열망에 가득한 눈으로 페넬로페를 내려다보는 한편, 머리로는 스파르타와 메넬라오스, 헬레네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아무리 헬레네 님을 위해서였다고 장인어른의 마음이 불편하시겠죠. 괜히 저를 더 놀리고 활기차게 사냥다니면서 시름을 잊으시려는 건 저도 압니다.”
“그럼 이해해줘요.”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의 위로 천천히 기어오른다. 페넬로페는 장난스럽게 오디세우스의 머리를 밀어내고 잡아당기기를 반복하면서 작게 웃는다.
“그리고, 불쌍한 내 사촌 헬레네에 대해서도 생각해줘요.”
“그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그녀는 내 가족이니까.”
오디세우스는 몸을 돌려 페넬로페의 바로 옆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두 사람의 얼굴은 이제 손 한 뼘 거리보다도 가까이 있다.
“그 역겨운 사기꾼, 친족살해자, 식인쟁이, 근친상간자들의 가문에 속하게 된다니 얼마나 끔찍할까. 당신의 사촌을 구해낼 법은 이 머릿속으로 반드시 생각해내겠습니다.”
“믿어요.”
“정말로?”
“믿으니까. 이렇게 같은 침대에 누워···”
-쿵. 쿵. 쿵. 쿵.
반쯤 헐벗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들려오는 발걸음소리에 놀라 몸이 굳는다.
···괜찮다. 지금은 한밤이고, 애초에 이 늦은 시간에 이 근방에 알짱댈 이들이라 해봐야 오디세우스가 어릴 적부터 알았던 일꾼들일···
“내 딸! 내 딸!!”
“주책이라니까! 당장 돌아가요! 완전히 사람이 고삐가 풀려서는 이게 뭐하는 짓이예요! 다 큰 남녀의 침실에 들르는 게···”
“사랑하는 사위와 늦은 달밤에 사냥이라도 나서려는데 그게 그렇게 나쁜···”
-벌컥.
“···.”
“···.”
“···.”
“···큼, 장인장모님. 보시다시피···”
···그 뒤로 있었던 일에 대해 오디세우스는 기억에서 깡그리 잊어버리기로 했다.
다 큰 남녀가, 부부가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을 뿐인데 그 광경을 보고 주저앉아 오열하던 장인어른에 대한 기억이나.
그 상태에서 공황상태에 빠져 뭐라 묘사하기 민망한 차림새나 자세로 장인장모 앞에서 얼어붙어 있던 두 사람의 추태나.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아이고, 우리 둘째 손주 볼 날이 안 멀었네?”라고 말을 꺼내다 한층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었던 장모님의 거대한 실수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잠에서 깨버려 엉엉 울던 텔레마코스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달려온 호위들이나, 그 뒤로 이어진 온갖 개판, 난장판에 대해 오디세우스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러니까.
달려온 호위들 보고 당장 나가라고 호통쳐 쫓아보내고, 다리에 힘이 풀려 눈물 줄줄 흘리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장인을 장모님이 애처럼 달래며 데리고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그 뒤에 혼신의 힘을 다해 텔레마코스를 진정시킬 때까지의 모든 기억을 말이다.
그 모든 과정을 끝마친 뒤 다시 침대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어떠한 불꽃도 튀기지 않았다.
“···.”
“···.”
···그저 깊은 허망함과 탈력감만이 살포시 내려앉았을 뿐.
“나, 나는 부모님이 어떤지 좀 보러 갈게요?”
“···그래요. 장인어른께서 충격이 커보이시던데.”
우리가 받은 충격만 하겠냐만은.
지혜로운 오디세우스는 그 말은 입밖으로 꺼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가 입을 꾹 다무는 동안 페넬로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허망하다.
오디세우스는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침실을 나서는 페넬로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머릿속으로 온갖 잡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아니, 다 큰 딸이 자기 남편이랑 그, 그렇고 그러는 게 뭐가 그리 충격적이길래 오열까지 한단 말인가? 손자가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진 줄 알고?
무슨 헤라 여신께서 휙, 던지고 간 것도 아니고 자기 딸이 10달 배아파 낳은 아들인데···
-쩍!!
오디세우스는 폐가 튀어나올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잡념을 몰아낸다. 어둠과 고독을 되
씹으며 그는 다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헬레네.’
일단 가장 먼저 잡힌 생각의 조각이었다.
제우스의 딸이자 스파르타의 여왕. 정치적으로 완전히 구석에 몰려 메넬라오스에게 패배만을 겪고 있는 가련한 영혼.
이번에 오랜만에··· 아니, 결혼한 다음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외부 행사에 참가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꽤나 중요한 행사였다. 살라미스에서 이뤄지는 헤시오네의 반환.
재수없게도 안탄드로스의 군주 파리스가 갑자기 몸져눕는 바람에 헬레네는 꼼짝없이 스파르타로 다시 붙들려오게 생겼지만···
그래도, 그 미모라면야 뭐,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제 편을 끌어오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오디세우스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까.
(이 점에서도 오디세우스는 역시 지혜로웠다. 페넬로페를 보는 자신의 눈이 애정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점을 착실히 감안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귀족들, 왕들이 그 자리에 참석했을 터였다. 오디세우스는 비록 장인장모님을 모시는 겸, 헬레네를 탄압하는 아트레우스의 자식들에게 항의할 겸 참석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자리에 나갔을, 헬레네가 포섭한다면 가장 유익할 상대가, 흠···
오디세우스는 오랜만에 ‘벗’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허, 하필 그런 자리에서 앓아눕다니.”
그리고 일어나서는 곧장 미케네로 갔다지. 참 바쁜 양반이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트로이아의 왕자이자 떠오르는 세력인 안탄드로스의 지배자.
그런 파리스에게 헬레네가 호감만 사두었더라도 앞으로 그녀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되리라.
아니, 어쩌면 그 미모로 유혹해서 아예 연인으로 만들 수 있었을지도···
“···하, 그럴 리가.”
에이.
그 친구가 그럴 리가 없지.
자기 옆에 있던 요정을 그리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가.
오디세우스는 몇 번 헛웃음을 뱉다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자신의 친구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져든다. 몇 년 새 말도 안 되는 거물이 된 프리아모스의 아들을.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부인이 돌아오지 않자 그냥 포기하고 침대에 폴짝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왠지, 잡생각이 많이 드는 밤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
-사박.
“주군께서 돌아오셨다!”
“당장 밧줄로 배를 묶어!!”
“끌어당겨!!!!”
사방팔방에서 외치는 소리.
무심코 뒤돌아보자 바다새들이 울며 내가 막 내린 배의 난간에다 똥을 싸고 도망친다. 항만의 잡부들이 욕설을 뱉으며, 웃통을 깐 채 밧줄을 있는 힘껏 당겨 배를 끌어온다.
저 새, 저 해안선, 저 목소리들··· 모두 익숙한 것들인데, 마치 10년만에 다시 마주하는 것 같은 생경한 기분이 든다.
“주군, 오셨습니까.”
“···아. 스클레오스.”
“아카이아에서 많이 앓으셨다 들었습니다. 혹시 몸 어디 편찮으신 곳은···”
“괜찮아요, 아저씨.”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스클레오스를 웃으며 밀어내고 나자, 왠지 그는 수심이 깊어진 듯한 모습으로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문득 부두 안쪽의 물결 없는 수면을 내려다 보니, 나는 꺼내려던 말이 다시 나오지를 않았다.
반쯤 풀린 동공, 초점을 잃은 시선, 하얗게 질린 얼굴, 기이하게 굳어버린 표정.
나는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노는 어딨죠?”
“···지금쯤 숲에 있을 게다.”
스클레오스는 내가 앞뒤 안 가리고 던진 질문에 당황한 듯했지만, 순순히 답해준 뒤 길을 열었다.
“마차가 필요하겠니?”
“아뇨. 저 혼자 가면 돼요.”
그래, 나 혼자 가야 한다.
나는 다가오는 철쇄대원들조차 뿌리친 채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안탄드로스를 통과했다. 도시의 북문으로 빠져나가 얼마간 걷다 보니 곧바로 이다 산의 어느 자락에 닿았다.
인적이 점차 드물어진다. 몇몇 인부들이 저 멀리서 숲을 오가며 목재를 나르고 있을 뿐,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새소리만이 가까워온다.
나는 허리춤에 매고 있던 작은 병 하나를 집어든다.
긴장에 손이 덜덜 떨린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이빨로 쥐어뜯듯 마개를 뽑고 나서, 곧장 근처의 바위에다 빠르게 내용물을 붓는다. 끈적하고도 풍부한 빛을 띄는 액체가 돌을 타고 흘러내려 흙에 섞인다.
거룩한 올리브유다. 나는 내용물이 다 부어지는 것을 보다 못해 다급하게 병을 집어던지고는 무릎 꿇는다.
“요, 요정들이시여. 이 산과··· 들판의 주인들이시여···.”
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풀내음을 잔뜩 머금은 바람이 내게 훅 끼쳐온다. 그 풍속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사람의 형상들이 익숙하게 숲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왜 불렀지?] [멍청아, 안탄드로스의 군주가 저렇게 안달나서 혼자 숲으로 오면 어떤 건지 몰라?] [···아아아아, 우리 막내랑 뭔가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고 싶은가 보지? 남들 보면 부끄러운 짓이라도 하면서?] [미쳤나 봐! 주책이야!] [쟤네도 이제 다 큰 부부인데 이 정도 농담도 못 해?]한결 같은 이들이다.
내가 어릴 적 이노와 함께 흙이나 파먹고 함께 놀던 시절부터, 도시들을 이끌고 나라 하나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군주가 된 지금까지.
그들에게 지난 10여 년은 한숨 한 번 쉬면 지나갈 그런 세월일 테니.
나는 그들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말한다.
“···예, 이노를 찾고 있습니다.”
[뭐야, 왜 그 잘생긴 애가 반쪽이 돼서 돌아왔어? 왜 저렇게 상태가 나쁜···] [쉿.] [눈치 없게!] [···이노는 저 북서쪽 연못에 있어. 어딘지는 알지?]“예··· 제가 이노를 목말 태우고 놀아주던 곳 말씀이시군요. 저, 혹시 부탁이 있는데.”
[가봐. 근처의 다른 요정들한테 얘기해서 그 근방은 비워놓을 테니까.]“가, 감사합니다.”
[막내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빨리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