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361
그래. 그렇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저들과 함께 이 도시가 불타지 않았음을, 우리 역시 죽지 않았음을 축하해야지.
우리의 집에서.
***
지금 포로에다가, 병사들의 수까지 합하면··· 못해도 한 1만 명 정도는 되려나?
이 정도 규모의 인원이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하는 경우는 보통 침략하러 왔을 때 말고는 없다.
“파리스, 도착했구나!!”
“아저씨! 아노이토스는요?”
“곧 도착할 게다. 지금 당장은 시민들을 진정시키느라 바빠 보이더구나.”
당연히 우리는 먼저 연락을 해놓았다.
내가 공들여 마련해 놓은 등대 신호 체계로 먼저 출발한다고 알려놓았고, 그 다음으로는 아노이토스를 트리에레스에 태워 먼저 보내놓고서 도착 예정 일자나 경로, 인원 구성 같은 자질구레한 세부사항을 전달했다. 그 외에도 전서구를 중간중간 보내놓았고.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안탄드로스 곳곳은 벌써부터 반쯤 축제 분위기였다. 스클레오스가 며칠 전에 미리 준비를 마쳐놨는지 북쪽 대로에서부터 이미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었다.
전부 우리 시민들이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대감에 찬 미소를 보낸다.
스클레오스가 준비해준 망토를 걸치고서, 이노와 함께 나란히 선다. 부케팔로스에 올라타려다가 이노와 함께 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
대신 부케팔로스는 머리에 황금으로 만든 관을 씌운 채 우리 바로 옆에서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으니, 함께 선두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문이 열리자.
“파리스 알렉산드로스!!”
“도시의 수호자여!!
모든 곳에서 함성이 울려퍼진다.
나는 그 순간 압도감을 느꼈다.
운동선수든 연예인이든 슈퍼 스타가 고향에 돌아오면 ‘경 안탄드로스 군민들의 자랑 다르다노스 파씨 7대손 파리스, 올림픽 금메달! 축’ 같은 현수막 달아주고 그러지 않는가.
그리고 뚜껑 열린 차에 태우고서 화환 목에 걸어준 다음 길거리 순회 퍼레이드 같은 거 해주고.
애들이랑 동네 어르신들이 싸인해달라고 하면 예의 바른 미소와 함께 가지고 있던 펜으로 티셔츠와 스케치북과 등짝에다 이름을 휘릭 휘갈겨주고.
나는 그 모든 과정이 마냥 귀찮고 힘들기만 할 줄 알았는데.
“아, 알렉산드로스!! 안탄드로스의 수호자!!”
“케브렌의 딸 오이노네!! 위대한 전략가!!”
“파리스 만세! 철쇄대 만세! 안탄드로스 만세! 위대한 헤파이스토스 만세!”
아니다. 고양감이 머릿속을 윙윙 울렸다.
그것도 그냥 올림픽 메달 따고, 오디션 프로그램 1위 한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이겼다. 아니, 우리는 살아남았다.
저기, 저 시민들 모두가 나와 생사를 함께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이 자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여러분이라느니 하는 상투적인 말도 진심으로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육로로 트로이아에서 안탄드로스까지 움직이며 쌓인 피로를 모두 잊고 그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우리는 안탄드로스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개선 행진에 참여했다.
원래대로라면 왕궁에 도착해서 좀 쉬었다가 움직였겠지만, 스클레오스가 말하길 이미 시민들이 흥분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단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시민들이 헹가래를 치러 나와 이노를 궁전에서 빼내올지도 모른다고.
도시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그야 자연스러운 일이기는 하다. 안탄드로스인들은 말 그대로 ‘신화적인’ 전투를 치르며 세계 최강국에 가까웠던 하투샤의 군대를 무찔렀다.
그 사실에서 흥분과 열광을 느끼지 않으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직후에는 아직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고, 내가 안탄드로스를 떠났던지라 시민들은 제대로 승리를 만끽할 새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돌아오자, 시민들의 환호가 펑 하고 터져나온 거다.
철쇄대원들이 나와 이노를 둘러싸고 걸어오며, 안탄드로스의 시민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꽃잎이 그들 모두의 머리 위로 흩날리고 화려한 천들이 그들의 발 아래 깔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노이토스가 전차를 타고 다가와 내게 합류했다.
“파리스 님.”
“아, 아노이토스? 수고가 많았네.”
“아닙니다. 어··· 저도 함께 준비하기야 했지만, 굉장하군요.”
아노이토스가 말하는 굉장함은 단순히 화려한 풍경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저 멀리 아직 복구되지 않은 17지구의 공동주택들을 보았다.
반쯤 허물어진 벽은 다시 지어지다 말았지만, 마치 그 허물어진 사이가 통로라도 되는 듯 흥분한 주민들이 그를 통해 밖으로 나오며 우리가 행진하는 큰길로 달려왔다.
우리를 보러. 아니, 우리와 함께 축하하러.
도시 곳곳에 아직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다. 허물어진 건물의 잔해,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 골목골목마다 위험하게 널린 마름쇠들.
하지만 이 활기는··· 그런 것들로 꺾이지 않았다.
부모들은 제각기 무슨 꼬치라든가 먹을 것을 양손에 들고 아이에게 나눠준다. 상점 주인들은 오늘은 모든 품목이 공짜라면서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눠준다.
“···그래, 굉장해. 아주 굉장해.”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노이토스의 말에 동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왠지 이 순간을 기점으로 이 도시가 빠르게 모든 상흔들을 극복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전투의 잔해든, 입었던 피해든 간에 순식간에 털어버리고 더 거대한 무언가로 자라날 것 같다는 생각.
그들은, 이 도시는 다른 무엇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을 얻었다.
승리의 경험.
그제야 나는 트로이아의 여느 도시도, 안탄드로스처럼 극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낸다.
트로이아는 싸움을 피했고, 칼리폴리스는 안탄드로스의 함대로부터 보호받았다.
물론 안탄드로스도 수많은 영웅들과 족속들이 동맹으로서 참전했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장한 채 자신의 공동주택에서 적들을 향해 무기를 내던지던 시민들이었다.
“위대한 안탄드로스 만세!!!!”
“알렉산드로스의 안탄드로스 만세!!!!”
그리고 적장을 죽인 것은 도시의 왕인 나였고.
그 순간순간의 기억은 모두의 뇌리에 새겨졌다.
시민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외치면서 느끼는 감각은, 되새기는 경험은, 이 안탄드로스라는 공동체의 깊은 뿌리를 형성할 것이었다.
불과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인구 3,000명 수준의 마을이었던 이 도시가, 수년만에 급속하게 체급을 불린 신생 도시가, 아카이아인, 루위인, 아이깁토스인, 하티인 등등 수많은 족속들이 뒤섞인 이 도시가···
정말로 ‘하나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이 도시의 본격적인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간다면?’
안탄드로스와 함께 싸웠던 아소스, 아스티라, 테베, 가르가라, 아르다미티온, 리르네소스 등은 이 승리를 어떻게 느낄까? 자신들의 승리처럼 기뻐하며 기억할···
···아니다. 너무 나갔다.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의 잡상을 지우고서 앞으로 이어질 일들을 잠자코 고민했다.
마침, 오이노네가 다른 곳을 보는 동안 아노이토스가 입을 열었다.
“주군. 듣기로는 막대한 지분의 전리품을 손에 넣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아노이토스에게는 논공행상의 결과를 제대로 말해준 적이 없다. 이 행사를 준비하러 급히 트로이아를 떠나느라.
내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이나 무장, 그리고 적 포로들의 숫자를 말해주자 아노이토스의 눈이 크게 떠진다.
“어, 그러니까··· 여기 있는 포로가 전부가 아니라 하셨습니까?”
“···그래. 아마 내가 받은 몫의 절반도 한참 못 미치겠지.”
안탄드로스는 인구가 3,000명일 때도 도시라 불렸다.
그리고 내가 수만 단위의 포로를 얻었다는 건, 곧 도시를 몇 개나 세울 수 있는 사람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고.
나는 잠시 나를 뒤따르는 행렬을 살펴보려 고개를 돌렸다.
개선 행진을 위해 강철로 중무장한 철쇄대, 그리고 시민병.
그 뒤로 이어지는 수천의 포로들과 전리품이 담긴 수레들.
···도시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숫자의 사람들.
내가 ‘소유한’ 사람들.
나는 순간 무거운 기분에 다시 고개를 돌린다.
아노이토스가 내게 그토록 많은 전리품을 얻은 걸 축하한다며 눈물 흘리고, 전차 위만 아니었다면 몇 바퀴고 공중제비를 돌았을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떨었지만 나는 무시했다.
나는 환호하는 수만의 시민들을 보았고.
그리고 내 뒤에서 따라오는 수천의 포로들의 존재를 떠올리며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들의 존재가 이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따위를 생각하면서.
도시를 몇 번이나 돌면서 이어진 기나긴 승전 행진은 헤파이스토스 신상 앞에서 막을 내렸다. 내가 불꽃이 일어나는 망치를 들어올리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연회 (1)
-쿵. 쿵. 쿵.
“파리스 님? 오이노네 님? 연회 준비하셔야 합니다. 지금 아소스와 가르가라에서 온 장로들이 파리스 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잠시만··· 어제 우리 늦게 잠들어서 아직 눈 뜨기가···”
왜, 누가 나를 꿈결 같은 휴식 시간에서 깨어나게 하는 거냐.
어째서 인생에는 ‘그래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 같은 게 없는 거지? 트로이아도 지켰잖아? 전쟁도 이겼잖아?
온갖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하면서 다시 고향에 돌아왔으면 이제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만 남은 거 아닌가?
백설공주가 왕자님이랑 결혼했으면 됐지. 누가 백설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왕자의 왕위계승 리스크와 왕실 지지도 하락, 보수당 내각 내 왕당파의 실각 따위 구질구질한 사정을 보고 싶어 하나?
“흐아아··· 졸려어···.”
“···나도.”
···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나와 이노는 주섬주섬 어제 대강 급하게 벗어던졌던 옷을 주워입었다.
우리는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란 걸 잘 알았으니까.
우리는 이제 도시 재건 관련 실무도 봐야 하고, 왕궁에 손님이 오면 응대도 해야 하고, 트로이아랑 다른 동맹들에 일 생기면 파견도 나가봐야 한다.
그게 삶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는 문을 열어 손님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선다. 화려한 음식들이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이리저리 깔리고, 기다리고 있던 각 도시 장로들의 얼굴이 밝아진다.
안탄드로스는 이 일대 도로망의 중심이다. 거기에 서쪽 아스티라와 안탄드로스 사이의 거리가 10킬로미터쯤이고, 동쪽 아소스와 안탄드로스 사이의 거리가 30킬로미터를 좀 넘긴다.
당연히 이 도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빠르게 사방으로 그 소식이 퍼질 수밖에 없다.
사나흘도 지나지 않아 인근 도시들에서는 난리가 났고, 정확히 열엿새 되는 날 안탄드로스와 도로로 연결된 모든 도시에서 왕과 장로들이 달려와 승전을 축하했다.
그렇다. 안탄드로스의 영향권 아래 있는 모든 도시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리르네소스의 왕 브리세우스부터 아드라미티온에 머무르고 있던 텔레포스, 아스티라와 아소스, 가르가라의 장로들과 온갖 유력자들까지.
···내가 이들을 소집한 게 아니다. 심지어 텔레포스는 미시아의, 그것도 그 페르게몬의 왕이잖아. 내가 무슨 권리로 내 왕궁에 그를 ‘소집’하겠나.
솔직히 이제 한동안은 나한테 반역자 아니냐고 시비 거는 놈들도 없겠지만, 나는 무슨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처럼 나대고 다니기 싫단 말이다.
“파리스 알렉산드로스 만세!”
“위대한 안탄드로스의 승리를 축하드리오!!”
너무··· 어··· 이렇게 자기 나와바리의 사람들 모아가지고 축하받고 그러면 뭔가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다.
괜히 점쟁이한테 찾아가서 ‘내가 왕중왕이 될 상인가?’라고 물어봐야 할 것 같고.
왠지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내가 곧 칼리폴리스의 간(奸), 다르다노스의 흉(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같은 대사를 쳐야 할 것 같고.
어린 아스티아낙스는 결국 트라키아에 유배를 갔다고 사약을 받는다거나 할 것 같고.
어차피 저딴 짓 했다가는 스틱스 강의 맹세 때문에 100% 하데스의 왕국으로 끌려간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리스 비극 같은 데 수천 년 동안 박제당할 테고.
···아무튼.
“축하드리오, 안탄드로스의 왕이여!”
“위대한 알렉산드로스여! 우리 시민들은 모두가 당신께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어하던 내게 자기들이 알아서들 찾아왔다는 소리다.
나는 잔뜩 억울해진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외려 멀뚱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잠시 수십 명의 사람들과 어색한 시선 교환을 이어가던 나는 무언가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아, 그래. 그렇지···. 너네가 찾아온 데 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긴 하지.
일단 그냥 내가 그동안 많이 도와줘서 온 것 같은 텔레포스와 그 아들 에우리필로스는 제외하고.
나머지는 실질적으로 안탄드로스의 동맹시이자 영향권이다.
저 중 안탄드로스의 서쪽에 있는 도시들은 안탄드로스를 향해 아카이아인들의 침공해왔을 때, 필록테테스가 이끄는 군대를 막는 데 내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다.
반대로 안탄드로스의 동쪽에 있는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투샤의 대군에 아예 성벽째로 삭제될 뻔한 곳들도 있으니.
모두가 이번 전쟁에서 각자 역할을 다했다. 안탄드로스 대신 저들의 도시가 무너지고 부서지며 버텨준 덕에 우리는 지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프리아모스가 내게 가장 많은 몫의 전리품을 챙겨준 데는 내가 트로이아를 제외하면 가장 거대한 세력을 일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제 몫을 떼어다 줄 사람이 많다는 말이다.
저들은 말하자면··· 내 식구들이다.
상석에 앉아 있자니 손님으로 온 이들이 하나둘씩 나와 이노의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올린다. 나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면서 저 도시들의 공로와 현재 사정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따져본다.
어디는 개박살이 났고, 어디는 식량이 모자라고··· 그런 것.
물론 다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그런 건 저들을 책임지고 지도하는 내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 사실이다.
전날부터 아노이토스를 들들 볶아 급하게 동맹시들의 상황을 알아본 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 가장 강력한 왕으로서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텔레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저들이 완전히 그대의 수하가 되었군.”
“···.”
저게 뭔 소리인가 싶어 가만히 입을 다물고 텔레포스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적당히 포커 페이스를 유지했는데도 내가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파악했는지 텔레포스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나? 그대의 아버지이신 트로이아의 왕중왕께서 그대에게 가장 많은 몫을 떼어준 이유를. 물론 그대의 공로가 압도적인 탓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미 안탄드로스에서 물리친 적들로부터 얻은 전리품은, 그대가 다른 이들에게 분배해준 것 빼고는 고스란히 그대 것이 되었는데. 따로 다른 몫까지 챙겨주지 않았나?”
“당연히 제 동맹들에게 각자의 몫을 떼어주라는 아버지의 배려겠지요.”
“그렇네. ‘자네의 동맹들’에게 말일세.”
“···.”
아.
나는 그제야 텔레포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깨닫는다.
“이제 누구도 이 모습을 보고 반역을 운운하지 못하겠지.”
프리아모스가, 직접 인정한 나의 영역이니까.
나는 지금까지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단 사실에 허탈해져 잔 속의 음료를 비운다. 텔레포스는 낄낄 웃으며 자기가 데려온 시종에게 음료를 받아 마시는데···
저거 술이네.
“두 번 태어나신 분께 귀의하셨습니까?”
“아니. 이제 저 불경한, 아니 신기한 음료를 마셔도 신들의 진노를 사지 않는다기에 궁금해서 시도해보는 걸세. 크···으윽···우웁.”
텔레포스가 급하게 들고 있던 잔에다 내용물을 뱉어내니 나는 그에게 입을 헹굴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빨리 이 고통을 씻고 싶다는 듯 입을 물고 씹다가 겨우 숨을 들이켰다.
“···쓰고, 뜨겁고, 어지럽고, 떫군. 이런 걸 트라키아의 왕은 대체 어떻게 입에 대고 사는지 모르겠네.”
아, 그랬지. 지난 싸움에서 디오니소스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나자 공개적으로 자신이 신도임을 밝혔었지. 연회에서도 몇 모급 마셨고.
이제 음주자임을 밝혀도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처음에만 그렇습니다.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그 뜨거운 맛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되고, 어지러운 감각도 기분 좋게 느껴질 겁니다.”
“설마··· 자네도?”
“제 도시에는 괜찮은 양조장이 많지요. 누가 후원하겠습니까?”
나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제조법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고, 어차피 술이란 물건은 엄격히 금지되지만 않으면 금방 퍼지게 되어 있다. 양성화도 그만큼 빠르겠지.
아니, 조만간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나온 것처럼 신들에게 제주(祭酒)를 바치게 될지도 모르지. 아카이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신들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게 이미 상식이니까.
그 변화는 분명 빠르게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슬슬 밝히고 나중에 주류를 공공연히 안탄드로스의 주요 수출품으로 삼는 게 낫다. 아이깁토스는 포도가 귀하면서 포도주에 대한 수요가 높으니 시장은 이미 충분하다.
“조언을 주신 것도 감사하니 한 말씀 드리자면, 나중에 텔레포스 님의 도시 내의 디오니소스 신도들과 대화가 안 된다 싶으면 제게 부탁하셔도 좋습니다. 제 이름은, 그들에게 분명 통할 테니까요.”
거기에 텔레포스에게 빚도 지우고 다른 지역의 디오니소스 신도들에게도 영향력을 뻗친다.
내 말에 텔레포스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에게, 이제 탄압할 수도 없게 된 디오니소스 신도들은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일 테니.
아, 텔레포스와 대화하느라 시간을 너무 길게 끌었다.
나는 잔을 들어올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환담을 나누던 손님들 모두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안탄드로스의 장로들, 안탄드로스의 장인들, 그 밖에 여러 도시의 왕과 장로와 상인들.
저들 중 반수 이상은, 나의 어릴 적을 안다.
내가 9살, 10살을 넘겨가며 대장장이 일을 배우고 본격적으로 이 도시를 장악해갈 때부터 저들은 나를 알았다.
처음에는 나를 스클레오스 아저씨의 옆을 따라다니는 시종 같은 아이로 착각했고, 이윽고 모든 진실을 깨달았을 때는.
“···그대들은 나의 오랜 동지요.”
이미 우리 모두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도시와 도시가 로마식 가도로 연결되었다. 농민들은 쇠로 만든 쟁기로 밭을 일궜고, 상인들은 쇠로 만든 동전으로 거래를 대신했다.
저들은 나를 존경하거나 의심하기도 했고, 친밀히 여기거나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모두 함께 있다.
“그대들이 나와 함께했기에 나는 이곳에 서 있소. 그대들이 나와 함께했기에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소.”
“파리스 알렉산드로스!!”
“위대한 수호자여!!”
내 말에 누군가 감격에 찬 얼굴로 외치며 두 팔을 하늘 위로 올린다. 몇몇 사람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내 이름과 별명을 연호했다.
이제는, 저 별명도 슬슬 익숙해지는 것 같다.
파리스의 별명이 ‘수호자’라니. 우스꽝스러운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름도, 명예도 나의 것이다.
“나는 벗들을 잊지 않소. 나는 내 곁에 서준 이들에게 오랜 빚을 갚을 것이오.”
그리 말하면서··· 나는 심호흡을 한다.
내가 얻은 여러 ‘전리품’들의 목록을 헤아려 본다.
티레의 왕이 타고 다니던 화려한 전차, 그리고 그 훌륭한 왕홀, 하투샤의 대왕이 입었던 청동 갑주, 우가리트의 왕이 쓰던 온갖 보석 장신구들···.
그런 귀한 것들은 머릿속에서 제한다. 그런 명예로운 선물은 나중에 몇몇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나눠주는 편이 충성심과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클 것이다.
다음에는 그런 명예의 상징이 아닌, 좀 더 실용적인 물건들을 떠올려본다. 수백 마리의 말이나, 이런저런 무기와 자원들.
말은 안 된다. 본격적으로 수백 마리의 말들을 풀어놓고 기르면서 육종하다 보면 질 좋은 군마와 기병을 얻어낼 수 있을 테니.
“적들의 수레를 끌던 소들이 수백 마리 남았소. 그 중 50마리는 리르네소스의 왕에게 선물하겠소. 또한 테베의 왕에게는···”
하지만 나머지 가축이나 자원들은 충분히 줄 수 있다. 귀금속들, 온갖 무구들, 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분배해도 괜찮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로들.
노예들.
이 시대 안탄드로스에서 노예는 무슨 엄격하게 분리된 불가촉천민이 아니다.
물론 아이깁토스쯤 가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동네에서 노예라는 건, 엄밀하게 규정된 신분적 제약 같은 게 아니다. 19세기에 쓰인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데 나오는 그런 이미지와는 다르다.
대부분의 노예는 나나 우리 부모님 같은 ‘이웃’이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의 노예는 아노이토스가 말했듯 가끔씩 잡혀오는 이방인이나 전쟁 포로들뿐인데 그리 흔하지 않다. 인구 비중이 크지도 않고.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만 명. 도시 십수 개를 세우고 무너뜨릴 수 있는 숫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