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ame a mythical shepherd slave RAW novel - Chapter 464
나는 그 지점에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원양 항해가 가능한 카라보스 선을 건조해놓기는 했다만 이건 군사작전이니 수백 명은 끌고 가야 한다.
그리고 수백 명이 먹을 음식과 물을 쟁여두고서, 헤라클레스의 기둥 바깥에 자리한 낯선 바다까지 인도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와 함께 가는 이들 중 그 누구도 ‘대서양’이라는 바다를 제대로 겪어본 적 없을 테니. 나조차도 게리온의 섬에 갔을 때 스쳐지나간 것뿐이고.
적어도 지중해까지는··· 기착지를 마련해야 한다.
“걱정이군.”
“파리스, 또 뭐가 걱정이오? 그대가 말해줬던 대로 재앙을 멈추려면 저 작자가 말한 그 땅에 가면 그만 아니오?”
“어떻게 가느냐는 말이오. 지중해 바깥에 있는 바다에. 물과 식량은 어디서 보급받고.”
“···보···급? 그게 왜 필요하지? 뺏으면 그만 아니오?”
아, 또, 아카이아식 ‘상식’이.
“이 기근에··· 수백 명분의 식량을 쌓아두고 약탈당하길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면 말이지.”
“아하. 그걸 잊었군.”
“아무튼 우리에게는 기착지가 필요하오. 젠장, 이제 와서 지중해 곳곳의 섬에다 전진기지를 세워야 한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파리스. 파리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뺏으면 그만 아니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니, 그러니까 식량을 어디서 뺏는다는···”
“식량을 왜 빼앗소?”
내 말에 오히려 오디세우스 쪽에서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온다. 혹시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디오메데스도, 클리타임네스트라도, 네스토르도 모두가 나랑 똑같은 얼굴이다.
다시 오디세우스 쪽을 바라보니.
어.
저 새끼 그 얼굴 또 나온다. 사기칠 때 그 얼굴.
“뭔지는 모르겠는데··· 벌써부터 불안하군.”
“그래서 안 들을 거요?”
“···들어야지.”
내 말에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오디세우스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식량이 아니라, 기착지를 뺏어야지.”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야.
출발 준비 (2)
언제나 그렇듯 겨울 항해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기원후 21세기에도, 기원전 12세기에도 마찬가지다.
3,000년의 세월이 지나고 인류는 달에 닿았지만 항해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해란, 인간의 작은 몸뚱이를 배 하나에 의지해 드넓은 죽음을 향해 내던지는 일이다. 충분히 운이 좋다면 그 너머의 목적지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러나 강철과 석유화합물 등으로 구성된 거대한 성채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같은 행위를 삐걱삐걱 울어대는판자 몇 개에 의지해 해내는 쪽이 더 위험할 것이다.
그게 바다를 앞둔 페니키아인들이 처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모든 상인이 곧 준비된 해적이라 하지만, 페니키아인들은 단순한 해적이라 할 수 없었다. (아카이아인과의 비교는 그들에게 실례다.)
모든 상인이 준비된 해적이라면, 간단한 논리적 추론을 통해 곧 모든 해적은 준비되지 않은 상인일 뿐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바다를 건너는 일은 언제나 목숨을 거는 도박이다. 그리고 그 도박에서 판돈을 따낼 확률이 낮아질수록 도박꾼의 놀이는 오히려 가차 없어진다. 어차피 사형이 확정된 죄수가 아무렇게나 삶을 내던지듯.
아카이아인들이 그랬다.
반대로 페니키아인들을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대신 지중해 곳곳에 섬세하게 중간 거점과 기착지를 심어두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사람 수십 명 사는 작은 마을일 뿐이라도 충분했다. 그곳에는 지나가는 배를 수리할 만한 기술자와 상품, 그리고 배를 위한 먹거리와 마실거리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 거점을 지중해 곳곳에 수십, 수백, 수천 곳씩 뿌려둔 페니키아인들은 그 점 하나하나를 항로로 치밀하게 엮어냈다.
바다 위에서 굶어죽어갈 위험이나, 배가 고장났는데 도움받지 못할 위험, 적대적인 영토에 대뜸 떨어질 위험 등을 하나하나 줄여가면서 그들은 보다 신중한 도박꾼이 되었다.
얼마나 신중해졌느냐 하면··· 괜히 물건 값 안 치르겠다고 싸움을 벌여 제 목숨을 위험하게 하느니 제대로 상인 노릇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설 만큼.
얼마 전까지 아카이아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지만 페니키아인들은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마침내 해냈다.
그렇게 촘촘히 그들의 손길이 남은 지중해가, 앞으로도 그들의 바다로 남을 것이라 페니키아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이번 곡물 수송은···? 아직도 본국에서는 연락이 없나?”
“전혀. 이제 끝장일세.”
이제는 아니다.
바다를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교만이 문제였다. 차가운 바다는 모험과 부, 명예가 아니라 오직 죽음만을 되돌려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 더해, 아이깁토스가 기근 전에 뻗치던 영향력, 무너진 하투샤의 사그라들지 않은 잔향, 거기에 트로이아가 뻗치는 힘까지 얽혀 티레 등 동방 본토의 정세는 심상찮게 돌아갔다.
그래도 유럽 본토에 작은 마을처럼 박혀 있던 곳들은, 야만인들의 공격만 버텨내면 사냥이든 다른 방식으로든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식량을 아예 외부에서 의지하던 작은 바위섬의 거점들은 고사 직전까지 갔다.
그들은 이제 마지막 고민만을 앞두고 있었다.
먼저 죽은 동료의 시신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동료 시민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결할 것인가.
누군가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고, 누군가는 비탄에 빠져 울었다. 누구는 아직도 해안에 나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헛된 희망에 젖거나 신전에 나가 신실한 기도를 올렸다.
물론 모두 쓸모 없었다.
그들이 믿었던 것들은 모두 그들을 배신했다. 오랜 세월 동안의 항해 경험도, 집처럼 편안히 여기던 바다도, 자부심의 근원이 되던 본국도, 그리고··· 신들마저도.
그리고.
-쿵! 쿵! 쿵! 쿵! 쿵!
“뭐, 뭐야?”
“배인가? 배 맞나?”
“미친! 아카이아인들 배잖아! 다들 자식들부터 숨겨!!”
“이보시오! 여기가 페니키아인들의 무역거래소 있는 섬 아닌가?”
“···.”
“···.”
“···.”
“곡물 좀 거래하러 왔는데.”
“···어, 없어. 그런 거 있었으면···”
“아니. 우리가 팔겠다고.”
그들이 전혀 믿지 않던 것들이 그들을 구원했다.
야만인들.
그것도 아카이아의 해적들이.
이야기들을 들어보니 그들은 정부 규제에 반대하는 아카이아의 자유무역주의자들이었다. (밀수꾼들이라는 뜻이다.) 트로이아의 보호무역주의적 정책 기조에 반대하는 그들의 경제투쟁 가운데 이 운좋은 페니키아인들은 자유로운 국제 무역의 수혜를 입게 된 것이다.
“그, 그 보석은 우리 할머니 유품···”
“내가 당신네들 문화는 몰라도, 할머님께서도 당신이 굶어죽길 바라시지는 않을 텐데?”
“···으흑. 으흐흐흑···!”
“고맙게 받아가겠소!!”
물론 ‘수혜’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페니키아인들은 차고 넘쳤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목숨은 건졌으니.
“뭐? 배 타고 나가기만 하면 페니키아인들이 금을 준다고?”
“그래. 밀알 몇 줌 주면 자식도 노예로 팔 기세던데.”
“···오.”
밀과 보리를 그와 같은 무게의 황금으로 바꾼다. 아카이아인들에게 이번 사업은 연금술이나 다름없었다. 연금술을 쓸 수 있는데 구태여 죽음을 무릅쓰고 해적질을 할 필요는 없다.
마침 ‘왠지 모르게’ 왕중왕의 일곱 수하들이나 그 휘하 함대의 감시가 느슨해진 듯도 싶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곡식들을 팔아넘겼다.
물론··· 정도껏 했다. 그들도 이 겨울이 영영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적은 양의 곡식으로도 굶어가던 페니키아인들을 포섭하기에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아카이아인들은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있는 페니키아 거점들의 위치와 그 사이를 꿰는 항로에 대해 파악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 정부의 인위적 개입 따위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모든 과정이 수천 명의 움직임에 따라 물흐르듯 진행되었다. 누구도 이 흐름이 그리는 큰 그림을 파악하지 못했다.
“자, 여깄소. 페니키아인들의 중간기착지들이 모두 표시된 지도요.”
“···.”
“내가 말했지. 기착지를 뺏어야 한다고.”
“그랬···었지.”
“이제 이 기착지들은 우리의 ‘자비’ 없이는 유지될 수가 없소.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소?”
알지. 어떻게 모르겠나.
“안탄드로스의 왕이여, 지중해는 당신 것이오. 축하하오. 페니키아인들이 수백 년에 걸쳐 정복한 바다를 수 개월만에 삼킨 기분이 어떻소?”
“···내 게 아니라 우리 아버지 거겠지.”
“그거나 그거나.”
내 앞에서 비열하게 웃어대는 오디세우스 빼고는.
이런 미친.
정말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
단지 곡식 밀무역에 대한 감시망을 좀 느슨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지도를 보니 아카이아인들이 밀무역 와중에 새로 새운 기착지도 있고, 새로 개척한 해로도 많았다. 저 많은 식민 도시들이 이제는 내 말 한마디에 존망이 좌우되게 되었다.
내가, “곡물 밀수를 멈춰라.”라고 한마디만 하면 이 지도상의 점 속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끝장난다.
트로이아에 그런 권력이 쥐어졌다.
“···이제는 곡물 밀수를 함부로 단속할 수도 없겠군.”
저들의 목숨을 붙여놓으려면.
우리의 목숨줄 일부를 끊어서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내가 벌어놓았던 시간 중 몇 년이 이번 작전 한 번으로 날아가버렸다.
이것이 미래를 팔아가며 현재를 사들인 바보짓이 될 것인가.
아니면, 과감한 도박수를 던져 재앙을 끝내고 제국을 구해낸 신의 한 수가 될 것인가.
“그건··· 이번 항해의 성공에 달렸군.”
나는 오디세우스가 건넨 지도를 접어들고 승강기에 오르며 읊조렸다. 오디세우스는 싱긋 웃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승강기의 창살문 너머, 트로이아에서 가장 높은 등대의 창문 너머.
트로이아 만의 정경이 보인다.
그곳에 모인 인파도 보인다. 트로이아 시민뿐만이 아니다. 안탄드로스와 각지의 광적인 ‘알렉산드로스교도’들, 아카이아 전역에서 모인 장로들, 그리고 제국의 권역 바깥에서 소식을 들은 이들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