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40)
140화 제3장 물러서지 않을 때(5)
“진짜? 하… 미쳤네. 알았어. 고생했고, 내가 확인하고 다시 연락 줄게.”
탁!
당직실 근무를 보던 황은우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방금 막 이믿음의 노티를 받은 직후였는데, 구두쇠 환자가 결국 초음파와 혈관 조영술 검사를 받게 시켰다.
그 결과가 방금 나왔는데, 무려 후벽 심근경색이란다.
그것도 세 개의 혈관에 협착을 동반한.
이 말인즉 순환기 내과가 아닌 흉부외과에서 구두쇠 환자를 수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순환기 내과에서 풍선술을 받는 환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 병동 환자가 하필이면 깐깐한 구두쇠 환자라니…….
일이 꼬이면서 심사까지 배배 꼬였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했던지라 황은우는 불평, 불만조차 오래 할 수 없었다.
아직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응급 수술의 스케줄을 잡는 것이었다.
-흉부외과인데요, 응급으로 수술방 좀 잡으려고요. 환자 번호 알려 드릴게요.
-응급인데요, 지금 마취과 선생님 콜 할 수 있을까요? AMI(Acute myocardial infarction, 급성 심근 경색) 환자인데 검사가 지체됐습니다. 최대한 빨리 붙여 주세요.
.
.
황은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귓가가 뜨겁도록 여기저기 전화를 해댔다.
그의 노고가 통했는지 수술방을 예약하고 마취의와 수술 간호사, 인공심폐기 기사를 배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집도의를 배정하는 일뿐이었다.
‘돌겠네.’
황은우는 인쇄해 놓은 수술 스케줄 표를 확인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교수들 대부분은 정규 스케줄이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지금 시간에 시간이 빈 교수마저 없었다.
딱 한 명의 심장 전공 교수가 있긴 했지만 세미나 참석차 지방으로 내려갔다.
도움받을 손길이 없다는 사실에 황은우는 순간 절망이 눈앞이 깜깜했다.
절망이 우르르 밀려왔다.
하지만 그에게는 절망한 시간조차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저 은우입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신가요?”
그는 동아줄을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서인석 펠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은우야 왜?
“오늘 쉬는 날이시는 거 아는데…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병원 와 주실 수 있나요?”
-…….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교수님이 안 계셔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황은우는 미안함에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현 상황을 노티했다.
모처럼 쉬는 날에 병원에 와서 응급 수술을 해 달라?
이것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부탁이라는 사실을 황은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환자를 살릴 사람은 서인석밖에 없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교수님 연구실에서 논문 정리 중이었거든. 곧장 수술방으로 갈게.
수술을 흔쾌히 수락하는 서인석의 목소리가 황은우는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휴, 살았다.
“그런데 선생님, 지금 제가 당직 중이라서 어시스트를 못 섭니다. 저희 과 픽스할 이믿음이라는 친구가 퍼스트를 서야 할 것 같아요.”
-인턴이 퍼스트라고? 심지어 AMI인데? 성호나 다른 애들은?
침착하던 서인석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인턴이 수술방에서 제1 보조를 서는 일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다 수술 중입니다. 정 불안하시면 인턴 상황 보게 하고 제가 수술방에 들어갈까요?”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많이 애매하네. 병동하고 응급실 교통정리 안 되면 일이 훨씬 꼬일 텐데.
“…….”
-은우 넌 그냥 당직실 지키고 있어라. 수술은 인턴이랑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황은우는 목소리에 최대한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서인석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던져 준 것 같아서.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떨어진 응급 수술을 맡은 것도 모자라 제1 보조는 인턴이었다.
이 정도면 현실이 아니라 악몽 아닐까.
-됐어. 우리 과가 원래 이렇지, 뭐. 수고해라.
담백한 작별 인사와 함께 통화는 끊어졌다.
신호 없는 교차로처럼 중구난방이었던 상황이 그의 손을 거쳐 어느 정도 안정이 된 것이다.
황은우는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엄청 위험했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니 순간 머릿속이 아찔했다.
만약 이믿음이 응급실로 내려가지 않았다면 초음파 검사도, 혈관 조영술도 없었을 것이다.
환자는 니트로글리세린만 받아서 귀가했을 테고, 얼마 뒤 심근경색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후 책임은 당연히 당직의인 황은우에게 쏟아질 테고.
그러니까 이믿음 덕분에 황은우 자신도, 구두쇠 환자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기왕 잘해 준 거 한 번만 더 잘해 주라. 부탁하자.’
황은우는 이믿음이 수술에서 활약하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 * *
“응급 수술이 있니?”
“네, 지금 바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인석은 콜폰을 가운에 넣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근 한 달 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일.
모처럼 존경하는 양순재 교수와 논문에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응급 수술이 잡혔고, 심지어 제1 보조가 인턴이라고 한단다.
아무리 성격 좋은 서인석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허허 웃어넘길 수 없었다.
연구실을 떠나기 전 서인석은 양순재에게 현 상황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양순재가 한 말은 꽤 충격적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구나. 믿음이가 어시스트라서.”
“그 인턴을 아시나요?”
“내가 천재 외과의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지? 그 친구가 바로 자네랑 수술을 할 믿음이란 친구야.”
“그렇군요.”
서인석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양순재는 폐·식도 파트의 대가.
서인석은 심장 파트의 심화 과정을 밟고 있는 펠로우 2년 차.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서인석은 양순재를 존경하고 있었다.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
수술에 임하는 태도가 일반 교수들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양순재가 천재라고 치켜세울 정도라면 이믿음은 대단한 인물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퍼뜩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양순재가 단순히 이믿음에게 콩깍지가 쓰인 게 아닐까, 의심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 선생, 내 말이 아직 안 믿기지?”
양순재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마치 서인석의 불안한 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솔직히 그렇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믿음이를 경험해 보면 알겠지. 믿음이의 이름처럼 믿음이를 믿어 보게. 그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테니.”
“네, 그럼 저는 이만.”
짧은 대화를 마친 뒤 서인석은 연구실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했다.
환자의 상태도 궁금했고
이믿음이란 인턴의 실력도 궁금했다.
* * *
‘휴, 일단 한 고비는 넘겼네.’
나는 스크럽(수술 전 소독)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경민의 노안을 이용해 구두쇠 환자가 끝내 초음파 검사 및 혈관 조영술을 받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관상동맥 분지 중 세 곳이 협착된 후벽부의 심근경색을 진단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집에 귀가했다가 몇 시간 뒤 다시 응급실을 방문해 사망했던 전생과 달리 환자가 정상적으로 수술대에 오르게 됐으니까.
이로써 환자의 생존 확률은 비약적으로 올라간 셈이었다.
행복한 결말의 마침표는 물론 수술 자체가 되겠지만.
‘역시 든든하단 말이지.’
환자의 수술이 무난하게 이뤄진 데는 황은우의 역량도 컸다.
수술 스케줄을 잡는 것도 당직의의 능력이었다.
당직의가 어리바리하면 수술 시작 시간이 더뎌지고, 어디선가 나사 하나가 빠진 채 진행되기 마련이니까.
이런 에이스가 전생에서 탈주를 해 버렸으니 흉부외과가 잘 돌아갈 리가 있나.
흉부외과를 위해서라도.
황은우 본인을 위해서라도.
또 나를 위해서라도 황은우는 전생과 달리 흉부외과에서 오래오래 근무해야 했다.
스크럽을 마친 뒤 수술 장갑, 가운, 수술모, 루빼, 마스크를 착용한 채 수술실로 들어갔다.
“고일섭 환자분 맞으시죠?”
“네.”
“후벽성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으러 온 환자분 맞으시죠?”
“네.”
나는 익숙하게 타임아웃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고일섭의 환자 팔찌까지 확인했다.
응급실에선 장군처럼 씩씩했던 고일섭이 수술실에선 완전히 긴장하고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레 수술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 흔한 충수돌기 절제술마저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지금 느끼는 긴장감과 두려움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일섭이 불쌍해 보이지 않았던 건 그가 응급실에서 했던 진상 짓 때문이었다.
의사도 사람이다.
좋아하는 환자가 있고, 싫어하는 환자가 있기 마련이다.
“긴장하지 마시고 천천히 심호흡하세요.”
나는 안 좋은 감정과 기억을 최대한 물리치며 고일섭을 구슬렸다.
그리고 중심정맥관 삽입, 폴리(소변줄) 삽입, 기관 삽관, 가슴 주변의 면도 등의 핵심 처치를 뚝딱 해치웠다.
마취의가 도착했을 땐 전신 마취까지 부탁했다.
집도의가 도착했을 때 곧바로 수술할 수 있도록 만반의 세팅을 한 것이다.
이번 수술의 핵심 포인트는 누가 뭐래도 시간과 정확도였다.
고일섭의 구두쇠 기질로 검사와 진단이 밀리지 않았던가.
그로 인해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기에 수술 속도와 정확도로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지이이잉.
한발 늦게 제2 보조를 설 타과 인턴이 도착했다.
그 뒤에 대망의 집도의가 등장했다.
서인석 교수, 아니 현재는 서인석 펠로우.
내 이번 생의 멘토가 양순재 교수라면 서인석은 내 전생의 멘토였다.
따뜻한 카리스마로 흉부외과를 바른길로 인도하던 사람.
내가 강태섭의 간사한 계략에 빠지기 전까지 가장 많이 의지하던 사람.
인생을 한 번 거슬러 수술실에서 서인석을 마주하니 가슴이 벅찼다.
은우 선배처럼 당신도 이번 생에서는 흉부외과에 남아 주세요.
먼 훗날 과장으로 부임하는 강태섭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세요.
저도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서인석이 듣지 못할 혼잣말을 속으로 삼켰다.
“벌써 수술 준비에 마취까지 끝났구나. 엄청 빠른데?”
수술실에 들어온 서인석은 내가 알던 대로 환자의 상태부터 살폈다.
수술 전 처치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믿음이니?”
“네, 선생님.”
“안 그래도 양 교수님과 대화하고 있었는데 네 칭찬이 자자하더구나. 제1 보조를 맡겨도 부족하지 않은 인재라고.”
“양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호, 자신 있다, 이거지? 제발 허풍이 아니길 비마.”
이후 서인석은 나를 정식 제1 보조 취급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러니까 레지던트 3, 4년 차를 다루듯 나를 다루겠다는 소리였다.
나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꼬치꼬치 간섭을 받지 않아야 나도 능동적이고 빠르게 수술 보조를 할 수 있었다.
양 교수님 덕분에 모처럼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에 나는 벌써 설레고 흥분됐다.
내가 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수술 시간은 대폭 줄어들 것이고, 수술 정확도는 대폭 상승할 것이다.
당연히 그만큼 환자의 생존율 또한 올라가고.
이제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순간.
나는 집도의를 마주 보는 제1 보조 위치에 섰다.
빨간 베타딘이 묻은 솜으로 환자의 가슴을 소독한 뒤 하얀 방포를 덮었다.
“지금부터 후벽부 심근경색에 의한 관상동맥 우회술을 실시합니다.”
서인석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술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