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coming a doctor since age 1 RAW - chapter (190)
190화 제3장 어둠을 먹는 꽃(5)
검시대 위로 푸르죽죽한 색깔을 띤 심장이 올라왔다. 한때는 선분홍빛으로 요동쳤을 심장은 이제 한낱 고기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범균이 너는 하대정맥에서 혈액 채취하고, 나는 심장을 부검하마.”
“네, 교수님.”
혈액 채취와 심장 부검, 이 둘은 부검 중에서도 내가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지켜본 결과 사망한 손정균은 외상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채취한 혈액으로 독극물 검사를 한다면 어떤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심장이야 손정균이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니 가장 중요한 장기임이 틀림없었고.
나는 눈을 빛내며 고성우의 심장 부검을 쫓았다.
과연 심장에는 예상했던 문제가 존재했다.
좌심방은 앞서 절개한 좌심실, 우심방, 우심실에 비해 표면이 더 진한 보랏빛을 띠었다.
즉, 울혈이 존재했던 것이다.
울혈이란 쉽게 말해서 혈류가 정상적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상태를 말했다.
좌심방 울혈로 인한 좌심방의 혈액 순환 장애.
거기서 파생된 심장마비가 손정균의 정확한 사망 원인이었다.
‘수상하네.’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부검 결과가 내 상식과 꽤 어긋나 있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킬 만한 울혈이 존재했다면 말이다.
퇴원 전에 실시한 심전도 검사에서 먼저 수상한 기미가 포착됐어야 했다.
그런데 퇴원 전 실시한 심전도 검사는 세상 멀쩡했다.
뭐, 울혈이 급성으로 생겼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게 자주 일어나는 일도 아닌데…….
“범균아, 좌심방에 울혈 발견했다. 사진 좀 찍어라.”
고성우의 지시에 보조의가 좌심방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 했던 건 아마 이거겠죠?”
“네, 맞습니다.”
“호기심을 다 해결하셨으면 이제 가 보셔도 될 것 같은데요.”
고성우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긴, 업무와 상관없는 제삼자가 곁에 있는 게 달가울 리 없겠지.
하지만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한 번 더 버티기로 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폐를 해부하는 것까지만 확인할 수 있을까요? 환자는 흉강경 폐 절제 수술을 받고 퇴원한 당일 사망했습니다.”
“…….”
“폐 부검 결과까지 확인해야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럼 딱 거기까지예요. 아셨죠?”
“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자면… 차후에 혈액 검사 결과가 확인되면 제게도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허허, 이 사람이 갈수록 선을 넘네. 그쪽은 적당히도 모릅니까?”
고성우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내 무례를 꼬집었다.
관계자도 아닌 제삼자가 부검에 들어오는 것도 사실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부검 결과까지 알려 달라고?
당신이 무슨 형사라도 되느냐고 쏘아붙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나는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전생에 터득한 설득의 비법 중 하나인 동정심 유발 작전에 나섰다.
아직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는 가마솥에 누룽지처럼 검시실에 눌어붙어 있어야 했다.
“제가 잘못을 해도 100번은 잘못했죠. 다만 교수님께서 단 한 가지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아직도 이해할 게 남았어요?”
“유족께서 제게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 그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요.”
나는 통사정을 해서 고성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가까스로 검시실에 다리를 붙이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어차피 그쪽이 원하는 결과는 안 나올 것 같지만 폐 절제할 때까지는 확인해 봐요.”
“네, 감사합니다.”
기대와는 달리 이어지는 폐 부검에서도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닷새 전 흉강경으로 잘려 나간 환자의 폐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폐포와 기관지에서도 타살을 의심할 정황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그동안 민폐를 끼친 것을 사과하고 소득 없이 검시실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
독극물 검사 결과 이상 소견 무.
외상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섭취한 독극물도 없는 상황.
이제는 감히 누구도 손정균의 타살 의혹을 주장할 수 없었다.
손정균의 목숨을 앗아 간 이는 저승사자였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니까.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면서 며느리를 의심하던 손정균의 아버지는 크게 절망했다.
형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으며 지은이는 그러게 왜 사서 고생했냐며 나를 놀려 댔다.
하지만 나만큼은 이번 사건을 완전히 다 내려놓지는 않았다.
회귀한 흉부외과 의사로 길러 온 감각이 핏대를 세워 말하고 있었다.
해결해야 할 의혹은 아직 남아 있다고.
사건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덕분일까.
부검 결과가 나온 그 주 목요일.
나는 이번 사건의 열쇠가 될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 * *
목요일 아침은 평소와 손톱만큼도 다를 바 없었다.
어제와 비슷한 아침이었고, 아마 내일도 비슷하게 경험할 아침이었다.
나는 4시 30분쯤 기상해서 씻고 에너지 바와 커피로 배를 채운 후 당직실로 들어갔다.
당직 근무를 섰던 수현이를 좀 쉬게 하고 내가 대신 당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EMR(전자의무기록)을 살피던 도중이었다.
나는 거지가 친구를 하자고 찾아와도 될 만큼 가운이 지저분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캐비넷에서 넣어 둔 새 가운과 지금 입고 있는 더러운 가운을 교체했다.
“아…….”
새 가운을 입으면서 나는 탄식을 터뜨렸다.
가운 주머니에 보약 몇 봉지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손정균이 퇴원하는 날 아침 내게 줬던 보약들 말이다.
손정균과 나와의 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느끼며 나는 보약 한 포를 쭉 들이켰다.
사건의 발단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오전 컨퍼런스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심계항진, 그러니까 심한 가슴 두근거림을 느꼈다.
쿵. 쿵. 쿵.
조금 과장해서 심장 박동이 내 귓가에 들리는 것만도 같았다.
평소에는 느껴 보지 못한 증상이라 나는 크게 당황했다.
최근 피곤하다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없었으며 카페인 부작용 따위는 더더욱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먹은 보약에 수상한 비밀이 숨어 있다고.
오전 정규 스케줄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진단검사의학과를 찾았다.
보약을 내밀면서 성분 의뢰를 요청했다.
“대체 이런 건 왜 부탁하시는 거예요?”
진단검사의학과 직원이 세상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병원에서 진행하는 성분 분석이란 대체로 입원 환자가 의원이나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물의 성분을 확인하기 위해 진행하기 때문이다.
보약의 성분 의외를 하는 경우는 내가 알기로도 없었다.
“저희가 분석하는 검체물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런 걸로 저희 시간 빼앗으시면 안 돼요. 도로 가져가세요.”
냉정하게 말하는 직원에게 나는 미리 챙겨 간 뇌물인 커피를 바쳤다.
정말 고생이 많으신 것은 알지만 이번 한 번만 부탁한다면 애걸복걸했다.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를 보이자 직원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번 한 번뿐입니다?”
“물론이죠. 저도 염치를 아는 사람인데.”
직원이 보약과 커피를 챙겼고, 나는 수술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바로 수술실로 올라갔다.
보약 성분 분석을 진단검사의학과에 의뢰는 했다만…….
보약에 대한 내 감정은 사실 체념이 9할이요, 기대가 1할이었다.
기대치가 낮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얼마 전 부검을 통해 독극물 검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독극물 검사 결과는 이상 무였다.
만약 보약에 독극물 성분이 들어가 있었다면 그때 검출됐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보약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훌쩍 지나 버린 오전 스케줄.
점심 시간이 되어 당직실에 있던 나는 콜폰으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성분 분석 의뢰를 받아 주었던 직원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보약에서 특이한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성분의 이름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은 난생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내가 아는 독극물이라면 청산가리, 농약, 양잿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는 그것이 인지도가 낮은 독극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다 복용 시’ 심계항진과 구토, 나아가서는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도.
독극물 분석에서 ‘그 성분’이 검출되지 않은 이유 또한 명백했다.
독극물 분석 카테고리에 그 성분은 보통 빠져 있기 때문이다.
혈액 검사를 할 때 ‘그 성분’의 존재를 미리 알고 표적 검사를 하면 발견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성분’을 발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손정균 아버지의 말이 맞았구나.
손정균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보험금을 노린 비정한 아내에게 목숨을 잃었구나.
잉꼬부부 행세를 했던 아내에게 역겨움을 느끼며 나는 병리학과에 전화를 걸었다.
이제 숨겨진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할 시간이었다.
전화가 돌고 돈 끝에 나는 손정균의 부검을 담당했던 고성우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내가 이름을 밝히자 고성우는 짜증부터 냈다.
-밝혀질 것은 다 밝혀진 것 같은데? 아직도 미련이 남았습니까?
고성우는 인사도 없이 한참 동안 내게 비난을 퍼부었다.
-의사면 의사답게 환자나 치료하란 말입니다. 어줍지 않게 탐정 놀이 할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
-그리고 나는 뭐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 줄 알아요?
“손정균 씨 자연사한 거 아닙니다. 살해당한 겁니다. 제가 증명할 수 있어요.”
나는 묵묵하게 고성우의 이야기를 듣다가 강하게 한 방 날렸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온화하게 들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내 의견을 강하게 어필해야 하는 때가 있는데 이번에 필요한 것은 후자였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랄까.
-증명? 당신이 무슨 수로 타살을 증명해요? 계속 잠꼬대하면 통화 끊겠…….
“혹시 겁먹으셨습니까? 교수님이 부검이 불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요.”
나는 고성우의 말을 잘라 먹으며 일부러 그를 도발했다.
도발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막다른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손정균이 타살이라는 사실만 입증하면 고성우도 나를 이해해 줄 테고.
-하… 어디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단, 허튼소리 했다간 나도 가만히 안 있어요. 흉부외과 과장님께 가서 단단히 따질 겁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손정균 씨 혈액 샘플 남은 거 보관하고 계시죠?
-있는데 그건 왜요?
퉁명스러운 고성우의 목소리.
“제가 병리학과에 약물을 들고 직접 갈 테니 혈액 샘플로 독극물 검사를 다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씨구, 벌써 형사 다 되셨네. 가져와 봐요.
고성우가 먼저 통화를 끊었다.
나는 점심 식사도 거르고 보약을 챙겨 병리학과를 찾았다.
병리학과 회의실에서 만난 고성우의 얼굴은 모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걸로 독극물 검사를 하시면 제가 무례했던 이유를 알게 되실 겁니다.”
나는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보약을 고성우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고성우가 나와 보약을 번갈아 보다니 혀를 찼다.
“당신 미쳤지?”
나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보약 안에 투구꽃 성분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코니틴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