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7)
1117화. 불의 마왕(魔王) (6)
싱겁다면 싱겁고 놀랍다면 놀라운 접전을 벌인 후 회군한 신화교 일천 병력은 곧장 휴식에 들어갔다. 실제로 싸우진 않았으나 한때나마 한솥밥 먹던 사람들과 싸울 생각에 심력 소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돌아온 기천웅은 곧장 연호정을 찾았다.
“둘이라…….”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둘 이상이야. 어쩌면 화왕 중 셋이 왔을지도 모르겠네. 상단전을 개방했다면 알 수 있었겠지만, 괜스레 무리하진 않았어.”
“잘하셨소. 적에 관한 정보는 중요하나 무극수 둘이 왔다는 걸 안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오.”
“더하여 산맥 뒤 병력 숫자는 이만 정도로 예측하네. 말 그대로 예측이라 확신할 순 없어.”
“나도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
곰곰이 생각에 빠진 연호정이 다시 입을 연 것은 무려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멀리서도 거대한 불기둥이 보이더이다.”
“일격에 팔 하나는 끊어 놓을 줄 알았네. 안 되더군.”
“교주의 안목이라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터. 뭔가 다른 수가 있었습니까?”
기천웅은 내심 감탄했다.
보통 이런 경우 적의 무공 경지가 올라갔다고 생각하지, 뭔가 다른 술수를 부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연호정은 저 병력의 존재 자체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리라.
“사흡화귀공(死吸火鬼功)이라는 것이 있네.”
“무공이오?”
“정확히는 무공과 술법, 나아가 진법까지도 융화된 공부지.”
양천은 깜짝 놀랐다.
“그런 공부가 있소?”
“오화왕 철흠기가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던 비술이야. 두 개 단전에 진법 도형을 그리는데, 그것은 진법임과 동시에 술력(術力)의 술식 역할을 하네. 그것을 완성하면 세상의 어떤 화기(火氣)도 흡수하여 일시적으로 신체 강화, 내공 증폭, 치유력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공부라네.”
좌중은 깜짝 놀랐다.
기천웅이 인상을 찡그렸다.
“폐관에 들기 전, 나는 철흠기에게 사흡화귀공의 연구를 멈추라고 했네. 결국 사흡화귀공 역시 화정을 근간으로 했기 때문이지. 폐관에 들기 전부터 나는 화정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네.”
“음.”
“화정과 연관된 무공과 술법은 무엇이든 좋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일세. 화정이 극한까지 증폭된다면 훗날 혼과 백이 파탄 날 것이고, 화정의 기운을 끌어 쓰게 된다면 그 역시 생명력을 소모하는 일이니 결코 좋지 않다고 보았어.”
“맞는 말이오.”
“하지만 기어이 완성한 모양이더군. 철흠기는 자신을 학자이자 발명가라고 생각하네. 학자의 광기는 강함을 추구하는 무인의 욕망을 뛰어넘기 마련이지.”
“…….”
“그렇다 해도 그걸 본인의 몸에 시험할 줄이야.”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화기를 축적하여 신체, 내공, 치유력 모든 것을 상승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꿈과 같은 무공인바. 화정에 연관된 문제를 제외하면 단점이 없는 무공 같은데.”
“그렇지. 하지만 처음 철흠기가 내게 사흡화귀공의 구결과 법문을 가져왔을 때, 나는 깨달았네. 장점밖에 없는 사흡화귀공은 열양공을 익혔다고 다 연마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야.”
“그럼?”
“선천적으로 과한 음기를 타고난 사람이 아니면 연마하다가 폭사할 수 있네.”
“음양의 조화가 깨진 사람, 와중에 왕성한 음기를 타고난 사람만이 익힐 수 있다?”
기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완성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일 걸세. 그것은 사흡화귀공의 절대적인 한계였어. 완성했다 한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을 게야.”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뭐가 되었든 저쪽 병력에 사흡화귀공을 익힌 부대가 있다면, 교주와 일천 병력은 전면에 나서기 힘들겠소.”
“화정 문제를 배제하면 사흡화귀공은 분명 다시없을 무공이네. 그러나 사람마다 한계는 있고, 결정적으로 화정의 성취에 따라 수용할 수 있는 화기의 한계 또한 분명하네.”
기천웅의 눈이 반짝였다.
“조금 전, 철흠기도 미리 사흡화귀공을 완전히 개방하여 대비하지 않았다면 큰 내외상을 입었을 걸세. 나아가 지속적으로 공력을 쏟아부었다면, 나도 지쳤겠지만 철흠기 역시 축적된 화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네.”
바로 그 부분이 대단한 것이다.
철흠기는 무극에 한 발 걸친 사람에 불과하다. 좌도방문에 능하여 화왕이 된 것일 뿐, 실제 무력만 보면 화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있다.
그런데도 기천웅의 열화신장을 빨아들였다.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면 버티지 못할 거라고는 하나, 일격에 치명상을 입을 만한 무공을 몇 수나 버틸 수 있다면 목숨을 여벌로 들고 다니는 격이다.
적어도 열양공을 익힌 상대에게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신체, 내공, 치유력 모든 것이 향상되기까지 하니 더더욱 무서운 무공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양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화왕들이 그 무공을 익혔다면?”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화왕들은 절대 사흡화귀공을 익힐 수 없네.”
“왜 그렇소?”
“말하지 않았나, 왕성한 음기가 필요하다고. 철흠기는 화정을 연마하는 데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 천화에 한 발 걸칠 수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나고도 그 상태였네. 그라면 어떻게든 사흡화귀공을 익힐 수 있었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양기를 지닌 화왕들에게 사흡화귀공의 연마는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어.”
“으음, 그렇구려.”
그때, 연위가 말했다.
“이해하기 힘듭니다.”
“……?”
“사흡화귀공이 놀라운 공부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열양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별무소용인 것 아닙니까?”
“음.”
“그것만 믿고 이 자리에 왔다는 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만에 달하는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긴 합니다만.”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강한 화기를 피워 올리는 술수가 있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한 화기?”
“당장 기 교주의 일격에 철흠기란 자 역시 일시적으로 전력이 올라갔을 겁니다. 그처럼 강한 화력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나 술법 등의 방법이 있다면, 일시적으로 그 무공을 익힌 자들의 능력이 크게 증폭될 수 있습니다.”
연호정이 기천웅에게 물었다.
“열병기도 가져왔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신하기 어렵네. 처음에는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긴가민가하네. 자네 말마따나 사흡화귀공을 부대 단위로 연성했다면 굳이 화력 병기를 가져왔을까 싶네. 거리가 너무 머니까.”
“음.”
기천웅이 확언하듯 말했다.
“신화교도라 하여 모두가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닐세. 특히 여인들은 타고난 양기가 부족하여 본교의 무공과 어울리지 않아. 물론 뛰어난 재능으로 고수의 반열에 오른 여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네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그렇다면?”
“맞네. 만약 사흡화귀공을 배포했다면 그중 대다수는 여인일 확률이 높아. 음양의 조화가 깨져도 양기가 성하다면 그저 신화교의 정통 무공을 연마하면 될 뿐이야. 그러나 음기가 성한 경우라면 사흡화귀공이 큰 도움이 되었을 걸세.”
그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전력 보강.”
“잘 보았네.”
무공을 익힌 여인이 많지 않은 와중에 사흡화귀공의 힘으로 그들 모두가 무공을 익혔다면, 신화교의 병력은 짧은 시간 내에 크게 늘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시간이 워낙 짧아 그들 하나하나가 위협적인 수준으로 성장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가 되기에는 차고 넘칠 만큼의 무력을 쌓았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어쩌면, 동원한 이만 병력 외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이 교단에서 대기 중일 수 있네.”
“일단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리하겠습니다. 적의 수는 이만에서 삼만 사이로 추정되며 적장으로 무극수 둘 이상이 참전했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화기를 흡수해 일시적으로 신체, 내공, 치유력 등이 상승되는 괴공을 익혔으며, 예측기로 강한 화기를 생성하는 방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무턱대고 적과 부딪치는 것은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이 공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 역시 올바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연호정이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얘기하든, 무엇을 명령하든 따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행동이었다. 연호정은 살짝 웃어 보이며 말했다.
“명일 동이 트기 전 아침, 연위 무림장을 위시로 무림맹 이천 병력이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적의 수를 최소 이만으로 잡고 있는데, 고작 이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공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연호정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었다.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연위 무림장과 부마도위 어른, 무허대사님과 탁무자 도사님, 그리고 기천웅 교주를 제외한 다른 분들께서는 이만 퇴청해 주십시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니 넓은 어전에 침묵만이 가득해졌다.
지도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무허대사님.”
“말씀하시게.”
사람이 많으니 말을 편히 한다. 둘만 있었다면 연호정에게 존대하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권신이야말로 중원 최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허허, 그저 오래 살아서 얻은 허명일 뿐이라네.”
“그것이 허명인지 아닌지 증명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탁무자가 깜짝 놀라 연호정을 보았다.
“자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무허대사의 눈은 맑은 시냇물을 연상케 했다.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땡중의 참전을 원하시는가?”
“탁무자 노선배의 상단전을 충분히 잘 관리해 주셨으니, 보름 정도는 노선배 혼자 폐하의 안위를 맡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만에 하나 무허대사가 잘못될 경우, 탁무자 역시 상단전이 위험해진다. 선기 그득한 무당 선산의 봉우리라면 모를까, 이곳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참전의 가부를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연호정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적을 죽임에 있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탁무자가 불안한 눈으로 무허대사를 바라보았다.
권신 무허의 성품은 실로 불자다운 것이었다. 어지간한 악인이라도 교화를 목적으로 대할 뿐, 단호하게 목숨을 앗아 가지 않는 것이 무허였다.
그런 사람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적을 죽이라니? 능력을 떠나 안정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무허대사가 담담히 말했다.
“나와 말코가 폐하의 호위를 담당한 것은 그 외에 달리 할 일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적도 아군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일세. 깨달음의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설령 악인이라도 마찬가지일세.”
“…….”
“그런 내게 적을 죽일 수 있냐는 말은, 토끼에게 하늘을 날아 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해서, 어찌하시겠습니까?”
무허대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날아 보도록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