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6)
1116화. 불의 마왕(魔王) (5)
소용돌이치는 불기둥은, 허공에 생성되는 순간부터 산맥에 드리워진 잡초들을 모조리 재로 만들어 버렸다.
철흠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화신장(熱火神掌)!!’
신화교의 수뇌부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절기.
하지만 기천웅의 손에서 펼쳐진 열화신장은, 철흠기가 알고 있는 열화신장과 완전히 다른 무공이었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뿜어져 나온 거대한 불기둥이 질풍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거리가 얼마인데, 불꽃을 본 순간부터 피부가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찰나지간, 철흠기는 꿈과 같은 무공을 봤음에 감동했다. 열화신장이 극에 이르면 평범한 손짓으로도 이만한 화력을 낼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전대 교주의 경지가 너무도 대단해서 무공 자체가 변화한 것일까?
뭐가 되었든 철흠기에게 있어 기천웅의 무공이 엄청난 충격이요, 위협이 된 것은 분명했다.
‘위험!’
위험하지만, 철흠기는 이곳이 죽을 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불기둥이 철흠기와 오십여 명의 고수들을 휩쓸었다.
콰아앙!
마치 성문 크기의 화포에 몇 포대의 화약을 쑤셔 넣고 폭발시킨 것과 같은 소리가 났다.
산맥 전체에 거대한 불꽃이 솟구쳤다. 그 불꽃의 크기는 가히 엄청나서, 단 일격에 산불을 낼 정도였다.
하지만.
후우우우우웅!
당장에라도 산맥을 뒤덮을 것 같은 불길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이내 사그라졌다.
“…….”
공기가 사라진 영역으로 차가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치이이이이익!
철흠기의 몸에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의 피부는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화상을 입거나 피가 몰린 게 아니었다. 마치 얇은 피부 아래 시뻘건 불꽃이 오가는 것처럼 반투명한 적광이 몸 전체를 누비고 있었다.
기천웅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우.”
철흠기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엄청난 화력이군요.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아니 흡력(吸力)이 조금만 약했다면 팔 하나는 날아갔을 겁니다.”
“흡력?”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천웅이 순간 드는 생각에 눈을 부릅떴다.
“네놈 설마?!”
철흠기가 미소를 지었다.
“저희같이 실험에 미친 자들은 결과를 내 몸에 확인해 보기도 하지요.”
“……!”
“아직 미완입니다만, 어르신의 무공에 목숨을 잃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아무 말 없이 철흠기를 노려보던 그가 툭 던지듯 말했다.
“우환이도?”
“설마요. 미완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주님의 존체에 이런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 순간, 기천웅은 상단전을 완전히 개방할까 하는 욕망에 휩쓸렸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지금도 조심스레, 수명이 줄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고 있다. 이보다 더 상단전을 개방하게 된다면 철흠기는 물론 산맥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화왕에게도 들킬 수 있다.
화정을 극에 이르도록 연마한 자들이니, 이 정도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오히려 어르신께 놀랐습니다. 이 별것 아닌 목숨을 앗아 가기 위해 수명이 줄어드는 것도 불사하고 무공을 구사하다니, 도무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네놈을 죽일 수 있다면 얼마 안 되는 수명이라도 충분히 줄일 각오가 되어 있느니라.”
“그 정도로 높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요?”
미소 짓던 철흠기의 얼굴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그러나 화신을 부정한 어르신의 존재가, 더는 어르신을 존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어르신을 죽이고 싶군요.”
기천웅이 피식 웃었다.
“웃기는 녀석이로군. 화신 운운하지만, 너희는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구나.”
“……?”
“우리는 삼교라 불리기 전에 삼공가(三公家)라 불렸다.”
“……!!”
“우리 모두에게 신은 오직 하나뿐이었어. 정작 본류의 종파가 사라지니 저마다 신을 자처하는 꼴이라니, 참으로 희극적이도다.”
철흠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기천웅을 노려보던 철흠기가 턱을 들었다.
“이만 돌아가십시오.”
“…….”
“한때나마 존경하던 분이니, 지금은 곱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그리도 사랑하는 대륙 놈들과 함께 죽으십시오.”
“재미있는 말이로다. 이 자리를 끝내는 사람은 네놈이 아니야. 바로 나다.”
“목숨을 걸고 싶으십니까? 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 역시 누구보다 저열해진, 한때는 누구보다 높았던 자를 상대하며 죽는다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기천웅은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지금 철흠기는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손해다. 저 ‘흡력’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기천웅은 이 자리에서 철흠기를 없애 버릴 생각을 접었다.
물론 그것은 철흠기를 감당하기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제아무리 ‘그 능력’이 있다 해도, 전력을 다한다면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저놈 말마따나 정말 미완이냐는 것인데.’
상단전을 개방한다면 그 진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미완인 상태로 전장에 올 수 있는가? 아니겠지. 저놈은 그것을 완성했어. 만에 하나를 위해 나를 속이고 있을 뿐.’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최악을 상정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 전쟁이다.
“좋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네 말마따나, 너 하나 죽이자고 손해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잘 선택하셨습니다.”
“다만, 네놈들이 데리고 온 병력을 직접 봐야겠다.”
철흠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산맥을 넘어가 우리의 군을 정찰한다면, 그 즉시 나와 내 수하들은 어르신이 데리고 온 병력을 공격할 겁니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앙!
엄청난 파공성과 함께 기천웅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철흠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기천웅은 한 줄기 불꽃이 되어 산맥 위를 달리고 있었다.
‘엄청난 속도!’
그야말로 대단한 속도였다. 아무리 무공 차이가 심하다지만 그 역시 천화에 한 발 걸친 사람인데, 기천웅이 언제 저기까지 도달했는지 느끼지 못했다.
찰나지간 그는 이를 악물었다.
병력을 공격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데리고 온 병력을 공략하는 것보다 기천웅을 막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기천웅은 단숨에 그것을 파악했고, 움직였다. 그야말로 벼락과도 같은 결단이었다.
철흠기가 소리쳤다.
“배교도들을 쳐라!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여라!”
파바바박!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린 철흠기가 서둘러 산맥 위로 달렸다.
철흠기는 연마한 무공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이 신법이었다. 그는 무인이기보다는 학자이자 기술자에 가까웠다. 칼과 주먹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신법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천웅에게 뒤지지 않는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다.
훅!
기천웅의 움직임은 가히 섬광과도 같았다.
무게 없는 불꽃이 질풍보다도 빠른 속도로 산맥 정상을 향해 쏘아진다. 철흠기의 놀라운 신법보다 두 배는 더 빠른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새 기천웅이 산맥 정상 가까이 도달했다.
철흠기가 이를 갈며 외쳤다.
“안 돼!”
그때였다.
콰아앙!
달려 나가던 기천웅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놀란 철흠기가 재빨리 방향을 전환했다. 그 기세 그대로 달리면 기천웅과 부딪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방향을 전환하고 나서야 철흠기는 자신이 기천웅에 대한 존경을 다 없애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기천웅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가 죽는 모습을 오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파팡!
몇 차례 땅을 박찬 철흠기가 산맥 위로 올라섰다.
산맥 정상, 기천웅의 맞은편 오 장 거리에 한 명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일왕(一王).”
신화교가 거느린 화왕들은 저마다 앞에 숫자를 붙여 서열을 구분한다.
그중 첫 번째인 일화왕은 교주를 제외하고 가장 오랫동안 천화에 머문 자이며, 그 무력 역시 신화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대고수였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다른 화왕과는 격이 다른 자라는 뜻으로 일왕, 첫 번째 왕이라고만 불렀다.
일왕 찰극평(刹克坪).
철흠기와 달리, 기천웅처럼 온전한 서역의 피를 지닌 첫 번째 불의 왕이었다.
그는 기천웅보다 훨씬 더 기골이 장대했다. 연호정이 봤다면 진양 같은 놈이 또 있다며 감탄했을 만큼 골격이 크고 팔다리도 길었다.
칠순이 넘었는데도 사십 대 중년으로 보이는 찰극평의 외양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과 같았다.
“역시 철흠기 저놈 하나만 온 게 아니었구나.”
“물론입니다. 오화왕은 본교에 다시없을 인재이나, 그 재주가 무공과 전략에 닿아 있지 않음을 모두가 알지 않습니까.”
찰극평의 목소리는 담백하면서도 낮아 듣기가 좋았다.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네 녀석이 이 부대의 좌장이냐?”
“적이 되어 버린 어르신께 그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명확히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놈 이외에 다른 놈이 대군을 이끌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네놈이라면 이해가 간다. 우환이 놈이 이번 황궁 공격에 제대로 힘을 실었군.”
찰극평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 같아선 싸우기 전 마지막 술잔을 올리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래. 나도 네놈의 술은 받아 보고 싶었느니라.”
철흠기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기천웅에게 있어 찰극평은, 정말이지 마음을 다해 신뢰를 준 최고 충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배신감도 크지만, 막상 이렇게 만나니 분노보다는 애석함이 느껴졌다.
그런 기천웅의 마음을 알았을까.
찰극평의 목소리가 확연히 가라앉았다.
“제가 방금 얼마나 놀랐는지, 어르신께서는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느닷없이 돌진하는 기천웅을 막고자 살기를 담아 일장을 쳐 냈다.
그것이 찰극평에게는 몹시 놀라운 순간이었다. 적이 된 기천웅과 목숨 걸고 싸울 생각은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부딪치게 되어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철 화왕.”
“말씀하십시오.”
“배교도들을 공격하는 수하들을 물려라. 저들은 모두 본교의 정예들이다. 그대의 수하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괴롭히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같은 화왕이지만, 철흠기는 찰극평에게 무척이나 깍듯했다.
삐이이익!
철흠기의 휘파람 소리에 일천 병력을 공격하던 그의 수하들이 빠르게 산맥으로 돌아왔다.
찰극평이 담담하게 말했다.
“별동대로 일천은 너무 많군요.”
“내 생각에도 그러하다.”
“접전을 염두에 두셨습니까?”
“그렇다.”
“하면, 저 별동대를 이끌고 저희와 초전을 불사르시겠습니까?”
“물론 그럴 생각을 갖고는 있었다만.”
기천웅의 눈이 깊어졌다.
“이 산맥 너머의 병력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너희 둘이 나를 막는다면, 아무래도 힘들겠지.”
전혀 힘들지 않다. 적어도 상단전을 완전히 개방한다면, 두 사람을 몰아칠 힘이 기천웅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되었다.
과거는 과거고, 이미 묻은 인연은 덧없을 뿐이었다.
적이 되어 버린 수하들을 격파하기 위해 기천웅은 더 살아야 했다. 복수를 위해, 그는 더 살 수밖에 없었다.
‘적장을 비롯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으니, 별동대의 진군은 충분히 목적을 이뤘다.’
찰극평이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날짜는 말해 주지 않겠지?”
“물론입니다.”
가만히 찰극평을 노려보던 기천웅이 몸을 돌렸다.
그때, 찰극평이 말했다.
“어르신.”
“무어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나마 이렇게 뵙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기천웅이 눈을 감았다.
“믿는다. 그 말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