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15)
1115화. 불의 마왕(魔王) (4)
얼마나 진군했을까.
산맥과 오백여 장을 남기고, 기천웅이 손을 들었다.
“여기서 대기하라.”
구마하가 거대한 깃발을 들었다. 그러자 일천 병력이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깃발 한 번 드는 것만으로 일천 병력이 동시에 멈추었다.
군기가 엄청나게 잘 잡혀 있다는 증거였다. 황궁에서 풀어진 생활을 했지만, 전투에 들어가면 철저하게 반응한다. 그들의 힘은 같은 수의 다른 병력보다 훨씬 더 대단할 게 분명했다.
말을 몰아 산맥 아래까지 다가간 기천웅이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나더러 이곳을 올라가라는 것은 아니겠지.”
크지 않은 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웅혼한 산맥을 타고 올라 순식간에 집화령 불꽃에 닿았다.
그러자 곧장 반응이 왔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파라락.
어둠을 뚫고 수많은 고수가 산맥 중턱까지 내려왔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중턱까지 내려왔으니 서로를 확인할 수 있으나 거리가 충분히 멀었다.
하지만 기천웅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직선거리로 수십 장 거리지만, 나타난 고수들의 면면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천웅은 상당히 놀랐다.
“네놈이 이곳에 왔을 줄이야.”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반백의 머리를 한 청년이었다.
머리카락만 보면 오십, 육십 대로도 보이는데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젊다. 젊은이의 머리가 센 것이 아니라 청년과 노년 사이 어딘가를 거닐고 있는 듯한 기괴한 인상이었다.
그 기괴함만 제외하면 체격도 당당하고 생김새도 준수하다. 중원인과 서역인의 혼혈처럼 보이는 그는 밤의 어둠처럼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내가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철흠기(鐵欽起)가 기씨 일가의 어른을 뵙습니다.”
전대 교주도 아니고 그냥 교주도 아닌 기씨 일가의 어른이란다.
심상치 않은 칭호다. 그러나 기천웅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지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철흠기라는 존재 자체였다.
“재미있군. 다섯 번째 화왕이 대군을 이끌고 오다니. 그것도 이런 중한 전투에.”
기천웅의 발언은 분명한 의미를 지녔다.
쉽게 말해 너처럼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대군을 담당했느냐는 뜻이었다.
무척이나 자극적인 발언이었지만, 철흠기는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억지로 그러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 화가 나지 않는 듯했다.
“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이다.”
기천웅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화왕 철흠기. 화정의 성취는 누구보다 빼어나나 천화에 이르고도 아무 발전이 없었지. 솔직한 말로, 네 녀석은 진정한 천화에 오르지도 못했어. 화정에 대한 비교 불가의 이해도가 아니었다면 그 경지에 한 발 걸치기도 힘들었을 게야.”
“그렇지요. 제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차분하군.’
철흠기는 예전부터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그가 화왕이 된 것은 어떻게든 천화에 이른 그 무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철흠기는 무공보다 술법과 독술 등, 중원에서 말하는 좌도방문의 술수에 능한 자였다.
능하다는 것은 곧 그 부분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며, 실제로 철흠기는 그 분야를 정복하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덕분에 그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여러 물품을 제조하기도 했다. 신화교가 보유한 화기의 절반 이상이 철흠기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화기 대부분은 중원에서 만든 화포 병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애초에 열병기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몇 년의 공부로 화포를 만들어 낸 것은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다.
신화교에서도 그런 철흠기의 재능과 열정을 인정하여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었고, 이후 그는 화화술에 필요한 성화분도 적게나마 양산했으며 독과 암기, 신묘한 술법도 만들었다.
그런 철흠기가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병력으로 밀어붙이겠다는 뜻이 아니다. 화포 등 각종 병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천웅은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또 누가 왔느냐.”
“…….”
“너의 재능과 능력을 떠나, 황궁을 공략하기 위해 너만 보냈을 리가 없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본교는 황궁을 공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 왔다. 말하자면 황궁을 점거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중원 정벌의 일차 목표일 터, 한 번의 실수로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렸으니 두 번 실수하지 않기 위해 교의 전력을 집중했으리란 걸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느니라.”
“역시 그렇군요.”
철흠기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거리까지 좁혔는데도 제대로 읽지를 못하시는군요. 본래 어르신의 능력이었다면 이 산맥 너머의 병력을 모조리 꿰고 계셨을 겁니다.”
“…….”
“교주님께 당한 상단전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셨습니까?”
기천웅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그깟 상단전 하나 무너졌다 한들 너희를 손봐 주는 데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러시겠지요.”
철흠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수명 문제를 뒤로한다면, 수백 개의 화탄을 몸에 품은 화신(火神)의 무공을 뉘라서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
“의아한 것은 고작 저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어르신께서 무공을 드러내느냔 것인데…… 그 무공, 마지막 복수를 위해 아껴 두실 생각은 없으신 모양입니다.”
상단전 문제는 물론, 지금 상황에서 함부로 무공을 쓰면 수명이 줄어들 것도 알고 있다.
기천웅이 차갑게 웃었다.
“이미 살 만큼 산 나이다. 필요하다면 남은 장작을 밀어 넣는 것에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저는 어르신의 연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심에 대해 논하는 것이지요.”
“…….”
“교주님을 상대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물론 그렇지.”
기천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대륙 땅에는 우환이 놈을 감당할 만한 고수가 발에 챌 정도로 많더구나.”
“…….”
“당장 내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만 부지기수거늘, 우환이 놈이 어찌 그들을 감당할 수 있으랴.”
철흠기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그는 기천웅의 말에서 담백한 진실을 읽을 수 있었다.
기천웅은 일파의 지존이었고 신이라 불리던 남자였다. 다른 부분은 다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신감은 절대적이라, 굳이 자신을 낮추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대륙 땅에는 고수도 많다는 겁니까?”
“글쎄다. 솔직히 말하면, 삼교가 손을 잡는다면야 고수의 숫자에선 충분히 압도할 수 있지 않겠느냐.”
“…….”
“그것이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너희가 손을 잡겠느냐?”
철흠기가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손을 잡을 수도 있지요.”
“손을 잡는 게 아니라 잡아먹히고 있겠지.”
“……!”
“사음교주의 사악함은 너희로선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우환이 놈은 이미 그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어. 너희라고 다를 것 같더냐.”
“아무리 교주님의 부친이라 해도, 그런 발언까지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용납할 수 없다면?”
훅!
기천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기세가 오로지 철흠기에게 집중되었다.
순간 철흠기가 움찔했다. 안 그러려고 했지만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용납할 수 없다면? 용납하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네가 내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더냐?”
우우우웅!
공기가 떨려 오는 듯하다.
기천웅의 눈빛, 그리고 그 목소리에 실린 위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대륙에 들어와 평온하고 담백한 모습만 보여 줘서 많은 사람이 잊고 있는 부분이 있다.
기천웅은 삼교의 수장이었다. 단 한 곳만 제대로 기습해도 중원 무림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강력한 조직의 수장이었던 사람이다.
그 무력은 성천 최강을 논하는 권신과 검선마저 목숨을 걸어야 싸움이 성립될 정도다. 신화교에서도 기천웅에 근접한 자는 있지만, 그를 넘어선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엄청나군.’
철흠기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킬 뻔했다.
‘온전한 힘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 상단전은 무너졌지만 오히려 화기(火氣)의 밀도는 더 깊어진 것 같은데.’
기천웅만 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더 강해졌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하지만 몸이, 마음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잃어버린 상단전을 대신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단순 화력(火力)만 보면 저 괴물은 더 강해진 게 분명했다.
‘과연 화신 강림의 전설을 불러온 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상황에서도 철흠기는 짙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욕심이 있었다면, 조금만 더 야욕을 드러냈다면 우리 중 누구 하나도 소교주의 반란에 침묵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인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천웅에 대한 교도들의 신뢰는 압도적이었다. 그가 대륙 정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도, 교도들 대다수가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그에 대한 신앙심을 거두진 않았다.
철흠기조차도.
화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의 철흠기조차도, 전대 교주이자 새로이 강림한 화신이라 불렸던 기천웅을 위해 영혼을 바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는 의미 없는 과거다. 저자는 강림한 화신이 아니라, 화신의 탈을 쓰고 꿈만 보여 주었던 잔불에 불과해.’
철흠기가 담담히 말했다.
“지금의 저라면 어르신의 삼십초지적도 되기 힘들겠습니다.”
“삼십초?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 아니더냐. 네놈이 내 손에서 십 합이나 버틸 수 있을 성싶더냐?”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것이지요.”
철흠기가 오백 장 밖에 주둔하고 있는 일천 병력을 보았다.
“그나저나 대륙 놈들도 참 치졸합니다그려. 설마하니 어르신과 배교도들을 보내 이쪽을 떠보려 하다니, 대륙에는 그렇게나 인재가 없습니까?”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다 어디로 들었는지 모르겠군. 오해하지 마라. 이 임무는 내가 자의로 선택한 것이니라.”
“임무라…… 화신이라 불렸던 분께서 임무를 내리는 게 아니라 그것의 수행을 자처하셨군요.”
“화신? 그게 먹을 수 있는 것이더냐?”
어떤 의미로는 장난스러운, 그래서 놀라운 발언이 기천웅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세상에 화신은 없느니라. 화신의 탈을 쓰고 교도들을 착취하는 사기꾼만이 존재할 뿐이지.”
“……!”
순간 철흠기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대륙 놈들에게 어디까지 오염된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 입에서 화신을 부정하는 발언이 나오다니요?”
“화신이라 믿었던 자를 배신한 놈의 입에서 나온 말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더냐?”
“완전히 망가져 버렸군요.”
철흠기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말, 더는 못 쓰게 되어 버렸습니다.”
“글쎄다. 네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나는 네놈에게 하나 받을 것이 있느니라.”
“설마하니 목숨은 아니겠지요.”
“그 설마가 맞다.”
기천웅이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나의 무공이 네게 충분히 닿겠구나.”
“수명을 포기하겠다는 뜻…….”
그때였다.
기천웅의 오른손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훅!
거대한 불기둥이 소용돌이치며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