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827)
827화. 삼세(三勢)의 주인 (2)
“부주님.”
“들어오시게.”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백서가 들어왔다.
홀로 술을 마시던 양천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빨리 옮기든지 해야겠네.”
“예?”
“이 동굴 말이야.”
양천이 입맛을 쩍 다셨다.
“뭔 사람 하나 들어올 때마다 저 큼직한 돌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는데, 한 번씩 나도 깜짝깜짝 놀란다네.”
“아, 예.”
백서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그래, 무슨 일로 오셨는가?”
“다름이 아니라 절강 쪽 첩보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음?”
“일전에 모종의 고수들이 오가고 있다 보고드렸던 곳 말입니다.”
“아, 그랬지.”
“최근 절강에서 들어오는 여러 물자가 강서로 향하고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무척이나 고요한 이동이어서 저희도, 무림맹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조심조심 이동했길래?”
“각종 상단과 표국을 통해 물자를 분산하여 강서까지 나르고 있었습니다. 목적지는 강서 옥화산(玉華山) 인근으로 추정됩니다. 한데 그 양이…….”
백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엄청나다고 합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비단이나 목재, 병장기 등의 양을 헤아렸을 때 묵룡부 일 년 예산에 맞먹는 금액이 나올 수도 있을 듯합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묵룡부의 일 년 예산 규모는 여느 대문파와 비교를 불허한다.
물론 묵룡부는 매달 천문학적인 금액을 벌어들이고 있으며, 불필요한 곳에 돈을 쓰지는 않았다. 투자할 때는 과감하지만, 괜한 일을 벌이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걸 감안해도 묵룡부의 일 년 예산액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르긴 몰라도 구대문파의 일 년 예산을 합친 것만큼은 될 것이다.
그만한 금액이 강서에 모이고 있다?
“전에 말한 고수 집단은 어떻게 되었나?”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 고수 중 일부는 옥화산 부근에 있고 나머지는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인원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옥화산으로 이송되는 물품들을 하나씩 호위하러 간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도 따로 조사해 봤겠지?”
“예. 면밀히 조사를 진행하였는데, 도통 기원을 알 수 없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기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드러내는 기도나 움직임을 봤을 때는 분명 중원의 무학을 연성한 자들 같은데, 아직 연원을 추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스윽.
편안했던 양천의 자세가 다소 절제된 모습으로 변했다.
“연원을 추적하기 힘든 무공이라?”
“그렇습니다.”
“……새외의 무공도 분명 연원을 찾기 힘든 무공인데.”
삼교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 가능성을 열고 조사 중이랍니다. 다만 사음교에 뿌리를 둔 사공이나 신화교의 열양공은 아니라고 합니다. 마공은 아니니, 당연히 광혈교 쪽의 무공일 가능성도 작다고 합니다.”
“온갖 기기묘묘한 무공을 쌓아 둔 놈들일세. 수십 년 동안 중원에서 암약하며 문파들을 잠식하고 자금을 빼돌렸어. 기이한 무공들도 다수 앗아 갔으니, 새로이 창조하여 고수를 길러 낼 시간은 충분했겠지.”
“예.”
“그쪽 첩보대에 힘을 더 실어 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고드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인가?”
“옥화산 인근으로 수많은 인부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인부?”
“주위 경계가 삼엄하여 첩보대도 접근하지 못하는 중이지만, 망치 소리와 각종…….”
“성이라도 쌓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삼교.’
중원에서 다 사라진 줄 알았다.
개방과 흑도 정보단이 일치를 본 사안이니만큼, 대놓고 활동할 만한 놈들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작정하고 숨어 지낸다면 못 숨을 것도 없다. 중원 땅은 너무나도 넓다. 무림인이들이야 이 지역, 저 지역 유랑 생활을 하지만, 일반 범부에게는 바로 옆 지역도 타국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까마득하다.
‘천하의 정보력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각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천하 전체에 퍼져 있지만, 세밀함에 한계가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보원을 수십만 명 이상 두지 않는 한, 해당 지역의 온갖 사사로운 정보까지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
오히려 그만한 물자 이동과 무림인들의 출현을 알아차린 흑도의 정보력을 칭찬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에는 무림인도 많고, 상단과 표국도 많으니까.
“개방에서는 알아차린 기색이라던가?”
“개방 수뇌부에게까지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강서와 절강 인근에서 활동하는 개방도들도 그들을 주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보고입니다.”
“그렇군.”
백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정보를 무림맹 측에 알릴까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섣불리 인원을 급파하면 그놈들의 경계가 더 심해질 수 있네.”
“첩보대도 그렇게 분석하긴 했습니다.”
“개방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하니, 그들도 조만간 알아차리겠지.”
“하지만 너무 늦게 알리면 동맹 간의 신뢰 문제가 대두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호정에게는 알릴 생각이네.”
“예?”
“아, 만나지 못했나? 조금 전에 나갔는데.”
양천이 술병을 흔들었다.
“자네가 준 술 석 잔 먹이고 보냈네. 무림맹으로 간다고 하더군.”
백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버, 벌써 말입니까?”
양천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확실히 많이 바뀌긴 했네.”
“아.”
백서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지만, 그럼에도 놀라움과 의아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흑도 문파들을 다뤄야 할 사람이 벌써 무림맹으로 가다니요?”
“이 사람아. 본부에 그놈 말고는 인물이 없나? 나도 있고, 자네들도 있잖은가?”
“무,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번 흑도 문파들을 휘어잡은 정책은 철저히 연호정의 주도하에 이뤄졌다.
연호정의 상식적이고도 쾌속한 일 처리에 놀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일 처리가 실질적인 효과를 불러일으켰으니, 백도 출신의 후계자라고 내심 불만을 가졌던 사람 중 많은 이가 그의 능력에 감화되었다.
백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양천과 가장 가까운 부하로서 연호정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직접 본 사람이지만, 그의 출신과 지난 행적 때문에 온전한 신뢰를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연호정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아무리 힘을 합쳐 삼교와 맞서야 한다지만, 이렇게까지 정성 들여 묵룡부의 힘을 강화하는 것은 백도 출신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능력과 정성, 거기에 인간 본연의 매력까지 출중하니 신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연호정의 진정한 능력은, 그 힘이나 재능보다는 거칠고 파격적인 모습을 신뢰로 바꾸는 특유의 언행일지도 모른다.
“그놈이 여기까지 일을 벌여 놨으니, 수습은 우리가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지 않겠나. 그게 좋은 그림이지.”
양천이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하루 정도는 쉬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 말했는데 들어 먹지를 않더구먼. 바쁘기도 오죽 바빴겠지만 다 속내가 있는 게지. 저 혼자 잘해서 흑도를 휘하에 두면, 사람들이 나나 자네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
“그럼에도 내가 녀석을 잡은 것은, 제대로 후계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네.”
“이미 패왕은 후계자가 아닙니까?”
“그 며칠의 시간만 있어도 호정을 보는 눈이 또 달라지지 않겠는가? 단숨에 흑도 문파들을 휘어잡은 사람에서, 그 문파들을 실질적으로 통합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사람으로.”
“……!”
양천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몸뚱이 안의 결석은 어지간해선 빠지지 않지. 신뢰와 불신도 마찬가지라네.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고, 한번 실망한 사람은 어지간해선 믿지 않아.”
“…….”
“정적이 생길지언정 그놈에게 돌아가는 찬사가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커졌을 걸세. 나쁘게 보는 놈보다 좋게 보는 놈이 훨씬 많을 테고, 그 신뢰의 결석은 앞으로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게야. 그놈은 그걸 거부하고 떠난 것일세.”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무림맹 행을 막으신 겁니까?”
“자네들의 충직함을 믿었기에 녀석에게 다 주려고 했네. 내게도 결석이 생겼잖은가? 녀석에 대한 신뢰라는 결석이.”
“…….”
“녀석도 아는 게지. 그걸 위해선 나나 자네들이 그림자 속에 묻힐 수밖에 없다는 걸.”
잔을 비운 양천이 고소를 지었다.
“다 좋은데, 참 쓸데없는 데서 배려를 해. 하긴, 그게 그놈의 매력이긴 하다만.”
백서는 생각했다.
‘변하셨다.’
연호정을 후계자로 세운 이후, 양천은 확실한 변화를 보였다.
성격은 그대로지만 한결 여유가 생겼고, 사물을 보는 눈이 더 깊어진 것 같았다.
예전에도 명민함으로는 누구 못지않았던 사람이, 이제는 현인(賢人)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 쥔 힘은 그대로일 것이다.
양천은 더 뛰어나졌고, 더 무서워졌다.
그리고 주군을 그렇게 변화시킨 연호정에 대해, 백서는 놀라움과 씁쓸함, 그리고 걱정과 기대감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알짜배기 힘든 업무만 다 감당한 주도자가 알맹이를 놓고 갔으니, 우리도 빨리 수확을 해야겠지.”
양천이 술병을 빙빙 돌렸다.
향이 더 살아나는지 병 주둥이에 코를 갖다 댄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낫들 챙기라 하게.”
“명을 받듭니다.”
“그리고 대충 일이 끝나면, 백서 자네는 보타암으로 갈 채비를 하게.”
백서의 눈이 빛났다.
“일전에 말씀하셨던 그 일을 진행하실 생각이신지요?”
“천하 제패의 꿈을 다른 식으로 이루려 하네. 그렇다면 기존에 써먹으려던 쇠스랑도 손질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잔을 채우던 양천이 문득 대전의 돌문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이라…… 과연 그곳에서 호정에게 어떤 대우를 해 줄까 궁금하군.”
* * *
“정말 그러실 겁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런 걸 묻냐.”
패율이 단창을 손질하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게 따로 연락이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점창에서 내놓은 자식이 맞다.”
“하지만 맹에 도착하면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준비 시간이 없었습니다. 정말 파문당할 수도 있어요.”
“말했잖느냐? 파문이 대수냐고. 사지 근맥만 안 잘리게 도와라. 사문에 찍힐지언정 아직 병신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무기를 손에 쥔 건지, 짐 덩이를 짊어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짐 덩이가 아니라 무기가 될 수 있게 네 능력을 보여 봐라.”
한숨을 쉰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비와 강량, 진양이 차례로 보였다. 그리고 한옆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막원도 보였다.
연호정이 진양에게 물었다.
“정광에게 가 봤어?”
“한 번 들렀는데,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소. 그런 정광의 모습은 처음 봤소이다.”
“제대로 집중하는 모양이군. 어쩔 수 없지. 수업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벌써부터 기도가 심상치 않소. 돌아올 때쯤 되면 나보다 강해져 있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럼 좋은 일이지.”
“씁쓸한 일이겠지. 그나저나…….”
진양이 막원 옆에 서 있는 여인에게로 눈을 돌렸다.
“……정말 저 여자도 같이 가는 거요?”
“다들 준비됐지?”
진양의 질문을 무시한 연호정이 크게 기지개를 켰다.
“슬슬 출발하자. 불편해진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