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4)
974화. 때가 오다 (4)
풀썩.
야하륵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스르릉.
제국검을 집어넣은 연위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
기천웅은 떨리는 눈으로 야하륵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살이 날붙이에 베이는 소리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야하륵의 목에는 이렇다 할 상처가 없었다.
지금의 기천웅은 연위가 무슨 수로 야하륵을 쓰러트렸는지 보지 못했다. 다만, 연위가 가진 알 수 없는 힘의 실마리 정도는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심검(心劍)인가?”
“그렇소.”
기천웅이 서글픈 눈으로 연위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목을 베지 않았나?”
“이 사람이 죽기를 바라오?”
“…….”
“이 작자는 스스로 죽음을 바라는 것 같긴 했소만.”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기천웅을 보며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내 심검의 활용도가 어디까지인지는, 정작 나조차도 알지 못하오. 하여 나 역시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발휘하지. 애초에 진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아무 때나 막 쓸 수 있는 능력도 아니오.”
“…….”
“상단전과 중단전이 이어지는 끈을 잠시 베었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실제로 베인 것은 아니오. 베였다고 착각하게 만든 것뿐이지.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자각한다면 본래대로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오.”
기천웅이 탄식했다.
“난 자네가 이 사람의 목을 쳤어도 뭐라 하지 못했을 걸세.”
“당신이 무서워서 놔둔 것이 아니오.”
연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어전이오. 내전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당장 피를 볼 수는 없소.”
“…….”
“더하여, 당신의 사람이었지만 이곳의 주인은 폐하 한 분이오. 그분께서 허락하지 않았는데 목을 벨 수는 없소.”
“그런 것까지 따질 만큼 널널한 상황은 아니라고 보았네만.”
“나는 그저 그분의 뜻을 짐작했을 뿐이오. 틀렸다면, 그때 베어 버리면 그뿐이지.”
가만히 연위를 보던 기천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내게 고마워할 것 없소.”
“자네가 먼저 나서 주지 않았다면 나도, 호교신장도 마무리가 좋지는 못했을 거야.”
“그랬을 거란 가정이 필요한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때였다.
덜컹.
어전의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등장했다.
뒷짐을 진 채 쓰러진 야하륵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저자인가?”
연위가 오체투지하였다.
“그렇습니다.”
“일어나게. 만날 때마다 그리 몸을 낮출 참인가?”
“송구하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위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황제가 계단 중간까지 내려와 털썩 앉았다.
언제나처럼, 그는 권위 있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황제가 바로 옆에 있는 기천웅에게 손을 뻗었다.
“나도 한 잔 주게.”
“남이 입 댄 것을 받아 마셔도 되겠나?”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기천웅이 술병을 건네자 황제가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좋구먼.”
황제의 눈이 기천웅을 향했다.
야하륵을 바라보는 기천웅의 얼굴은 정말이지 복잡해 보였다.
황제가 말했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었네.”
“……알고 있네.”
“사람을 너무 믿어 버렸구만, 자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고 살아가려면 혼자 살 수밖에 없지.”
뜻밖의 말에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 말이 맞네.”
황제는 어제처럼 기천웅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잠깐 사이에 많이 부드러워졌음을 말투만으로 알 수 있었다.
기천웅이 한숨 쉬듯 말했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못 봤네. 미안하이. 나 때문에 일국의 황제가 죽을 뻔했어.”
“안 죽었으면 된 것이지.”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오랜 벗들이 나누는 대화 같았다.
“아직도 모르겠군. 호교신장은 본교에서 가장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었네.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랬어. 마음이 강해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고,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이 세운 가치대로 사는 사람이었네.”
“…….”
“도대체 왜 이리 변해 버린 것인지.”
“올바른 사람이었을지언정 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기천웅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특유의 존재감으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위엄을 선보이던 황제가, 지금은 마치 어느 마을의 촌로처럼 보였다.
“신념이란 자아를 지탱해 주는 힘이자 영혼 그 자체라네. 신념으로 사는 자가 신념이 꺾이게 되면, 직진만을 거듭했던 습관밖에 남지 않게 되지.”
“……!”
“왜 나를 죽이려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저자의 마음에도 대의는 있었다고 보네. 대의 없이 살아왔다면 그저 교주를 따랐을 뿐 직접 행동할 생각은 못 했을 게야.”
“……그렇군.”
“저자는 저자 나름대로 세상을 그리고 있었네. 그 세상이 오지 못하리란 걸 직감한 자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자 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야.”
황제의 눈이 깊어졌다.
“짐도 그러했지.”
하늘이 내린 재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만백성의 삶을 책임지려 했던 군주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떨어져 정국을 무시한 채 주색에 빠져들었다.
실제로 황제는 당시 자포자기했었다.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감추려 했다고는 하지만, 비할 데 없는 좌절감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이 아니다.
황제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일 년 남짓이 걸렸다.
그 일 년이, 황제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빠른 동시에 가장 느렸던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강했네. 하지만 강해서 다시 일어난 게 아니야. 일어나려 하는 순간 강해졌지.”
“…….”
“저자가 강했다고? 그렇지 않네. 강해 보였던 것뿐이야. 만약 진정 저자가 강했다면, 자네 아들이 진즉 죽이거나 직책을 박탈시키고 멀리 유배라도 보냈겠지.”
“……!”
“결국, 자네 아들이 보기에도 저자는 경우에 따라 써먹을 수 있을 만큼 불안정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네.”
기천웅이 다시 한번 탄식을 토해 냈다.
결국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욕심 하나로 교단을 비운 자신 때문에 신화교가 이 모양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피어올랐다.
“내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함께하자고 오는 길에 폭탄을 들고 왔으니, 황제가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실망한 건 사실이지.”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네. 나는 나대로 저들과 싸우겠네. 무림이 나와 내 권속들을 지탄하고 공격하려 해도, 우리가 알아서 묵묵히 싸워 보겠네.”
기천웅의 말을 듣던 황제가 연위에게 물었다.
“가주께서는 지금 교주의 말을 어찌 생각하시는가.”
“신(臣)이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그런 격식은 떼어 놓자고. 이건 어명이네.”
연위가 고개를 똑바로 들며 말했다.
“단순하고 속 편한 도피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천웅의 눈이 흔들렸다.
황제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가주를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똑똑해서도, 강해서도 아니야. 올바른 마음을 품고도 지혜롭게 살고 있기 때문이라네.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아.”
“과찬이십니다.”
연위가 기천웅을 보며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당신이 데리고 온 수하가 폐하를 시해하려 하였소. 이는 나라 전체가 흔들릴 만한 큰일이오.”
“……알고 있네.”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지.”
“그 책임을 지기 위해 이리 말한 것 아닌가?”
“말했듯, 요구를 접겠다고 말한 것은 도피고 무책임한 발언이오. 책임은 그렇게 지는 것이 아님을 알잖소?”
“하면 내가 무엇을 하길 바라나?”
“그것은 폐하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오. 다만, 폐하께서는 바다와도 같은 마음을 지닌 분이니 이번 사태만으로 당신을 공격하거나 내치려 하지는 않으실 거라 감히 예상해 보오.”
기천웅이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책임을 지려거든 더 열심히 일할 생각을 해야지, 어딜 내빼려고 그러시는가?”
기천웅이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말은 그렇지만, 황제는 이 일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화교의 병력이 황궁의 감시를 벗어나 뚝 떨어지게 되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내다보기 전에, 황제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주고 용서하였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황제의 배포와 너른 마음에 고마울 따름이네.”
“무슨 일이 터졌든, 내가 무사하니 되었네. 중요한 것은 미래이며, 미래를 그리려면 의심암귀(疑心暗鬼)해선 안 돼.”
“…….”
“내 눈에도, 그리고 연가주 눈에도 교주는 나를 어찌할 생각이 없었어. 우리는 그렇게 판단했고, 쓸데없는 의심도 안 할 걸세.”
“그저 고마울 따름이야.”
“다만 연가주가 말한 것에 더해, 책임을 위해 내게 내놔야 할 것이 하나 있네.”
“무엇을 해 주면 되겠는가?”
“화정(火精).”
“……!!”
기천웅은 물론 연위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황제가 신화교의 화정을 내놓으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화정이라면…… 화정을 형성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뜻인가?”
“달리 무슨 뜻이 있겠나?”
“그것은……!”
“왜?”
황제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아까우신가?”
가만히 황제를 보던 기천웅이 쓴웃음을 지었다.
“화정은 신(神)의 무공임과 동시에 저주받은 마공이라네. 과하게 욕심을 내는 순간 온몸을 불살라 버리는 폭탄이지.”
“그렇다고 들었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당해야만 하네.”
묘한 말이었다.
감당할 수 있다가 아니라,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짐이 화정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내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라네.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야.”
“……!”
“왜? 뜻밖인가?”
“솔직히…… 그렇네.”
“강해지기 위함이라면 곡경의 사공을 익혀도 되고, 저기 연가주에게 부탁하여 내 몸에 맞는 무공을 구해 달라고 해도 되겠지.”
“물론 그렇긴 하네만.”
황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겉보기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짐은 알 수 있네. 이 몸뚱이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
“내 꿈은 이 세상이 평화를 되찾는 것이야. 세상에 영구적인 평화 따위는 없다지만, 적어도 당장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낫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 내 천명(天命)은 완수되었다고 볼 수 있네.”
“…….”
“그러나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내 수명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네. 달리 내공심법이나 선단법(仙丹法)을 익히며 하루하루 삶을 늘리기에는, 짐이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네.”
“그래서 화정을?”
“그리고 죽을 걸세.”
“그게 무슨 말인가?”
황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야하륵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은 무심했다. 그러나 기천웅과 연위는 그의 마음이, 생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처음 연가주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저자의 목적이 짐을 죽이려는 것임을 직감했네.”
“…….”
“그리고 생각했지. 그 상황을, 저자의 행동을 이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
“비로소 답이 나왔네. 기실 답은 진즉 나왔지만,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고민했지.”
“그 답이 무엇인가?”
“짐이 진짜 죽으면 되지 않나?”
기천웅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황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짐은 죽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