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6)
976화. 공백을 만들다 (1)
스스로를 당당히 사신무장으로 칭하는 연호정.
과거 항상 직책, 혹은 연가의 장남이라고만 소개했던 그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스승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그는 일대 난적을 맞이하여 당당히 자신을 사신무의 계승자이며 사신무장이라 칭하였다.
그 말을 뱉으며, 비로소 연호정은 깨닫는다.
이제야 자신이 진정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아버지도, 공공대사도, 제갈문호도, 양천도, 모용군도, 당관도.
누구도 자신을 어리게 보거나 만만하게 보지 않은 것은 물론, 한 사람의 명백한 강호인이자 시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여러 축 중의 하나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연호정은 확신했다.
내 입으로, 온 마음을 다해 당당히 사신무장이라 칭한 이 순간.
바로 지금에야말로 자신이 가문에서, 흑제성에서, 나아가 과거에서 벗어나 진정한 강호인이 되었음을.
자신의 뿌리는 가문이었지만, 자신이 존재하게 해 준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연호정이 비로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개화한 것이다.
크르르!
솟구치는 황금빛 신룡의 위용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껏 이 정도로 거대한 현현 환상을 보여 준 적은 없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황룡기가 높이 솟구쳐 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용형을 만드니, 용수(龍鬚) 한 올이 흩날리는 것조차 보일 만큼 섬세하고 강대한 모습이 만인을 압도했다.
무림맹 병력도, 소뢰음사의 요승들도 입을 떡 벌렸다.
한 사람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거대한 용의 형상을 이룬 것이지만, 그것은 담백한 사실일 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
선악, 어떤 취급을 받건 간에 용은 신수(神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신화 속의 동물이며, 그 자체로 하늘의 의지를 대변한다.
그들은 한 인간의 힘이 만든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불러낸 하늘의 대리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갈(喝)!”
나각뢰의 소름 끼치는 일갈이 요승들의 정신을 깨웠다.
“요사스러운 술법일 뿐이다! 뇌승들은 저따위 눈속임에 홀려 정신을 흐트러트리지 말라!”
요승들의 눈이 번쩍였다.
연호정이 만들어 낸 황룡상은 그 자체로 신비로움의 극치였지만, 나각뢰의 음성은 신비를 깨부수는 현실성으로 가득했다.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은 잊지 않는다. 어지간하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할 텐데, 일갈만으로 정신들을 차리는 걸 보면 그들에게 있어 나각뢰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신비를 현실로 끌어내렸다면, 대지를 전전하는 현실을 다시 하늘의 뜻으로 끌어올리면 그만이다.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우우우우웅.
그에 맞춰 거대한 용이 한순간 흐릿해지더니 꿈틀거리는 거체를 움직여 전면으로 이동했다.
훅!
언제나처럼 연호정의 발걸음은 힘차고 빨랐다.
혈익휘천의 속도는 나지 않았지만, 보는 이들의 눈에는 섬광과도 같은 속도였다. 사람의 인지 능력을 흐트러트리는 황룡 그 자체의 힘이었다.
순식간에 적병들 앞까지 도달한 연호정.
그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각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각뢰가 외쳤다.
“물러나라!”
사선으로 내리치는 광룡부 너머 황룡의 발톱이 보인다.
맞은편 사선으로 올려 치는 나각뢰의 손 너머로 악불의 검은손이 환상처럼 새겨진다.
콰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초고수들의 공방이 시작되었다.
“전군.”
모용우가 탕마신검을 뽑아 들었다.
“진군.”
“우아아아!”
거대한 용이 현신하여 이 싸움을 축복해 주었다.
무림맹 전사들의 눈빛은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다. 나아가는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찼으며, 터져 나오는 함성에는 승리에 대한 맹목적인 욕구와 확신이 어우러져 있었다.
콰콰쾅!
모용우의 적절한 명령도 기가 막혔지만, 그 명령의 순간을 선사한 것은 당연히 연호정이었다.
힘으로 나각뢰를 밀쳐 날려 버린 연호정은 곧장 그를 쫓아갔지만, 두 고수가 자아낸 발경의 여파가 소뢰음사 병력의 진형을 크게 뒤흔들었다. 가까이 있던 요승 십여 명은 아예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핏덩이가 되어 죽었다.
그렇게 무림맹은 소뢰음사와의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퍼퍼펑!
나각뢰의 장력은 일타, 일타가 무거우면서도 그 속도가 벼락과도 같아 연환장(連環掌)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연호정의 대처도 신속했다. 그 무거운 광룡부를 한 손으로 쥐고 나뭇가지처럼 휘두르는데, 강력한 장력 세 발이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었다.
‘이놈이!’
화가 났지만, 동시에 나각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고수였다.
그것도 자신과 맞상대가 가능한 고수였다. 처음 선공을 빼앗긴 것부터 전권에서 자신을 이탈시킨 한 수, 거기에 한 손으로 홍불장(紅佛掌) 세 발을 아무렇지 않게 분쇄한 걸 보면 보통 놈이 아니었다.
‘설마 반로환동인가?!’
번쩍!
자신을 쫓아오던 연호정이 어느새 머리 위 허공에서 나타났다.
허공에서 움직여, 더 높은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 허공답보는 어렵지 않은 기예였지만, 이렇게 빠르고 수준 높은 움직임은 나각뢰도 몇 번 본 적이 없었다.
연호정이 힘차게 광룡부를 휘둘렀다.
광풍구룡살의 일초, 무참이었다.
콰르르릉!
휘몰아치는 금빛 경력에 반경 십여 장에 달하는 범위가 무차별로 터져 나갔다.
단 일격으로 지형지물을 바꿔 버리는 무공이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진심이 아님을 나각뢰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연호정을 피해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나각뢰의 눈이 음험한 살기를 발했다.
후우웅!
부풀어 오르는 가사 자락.
시작부터 절기를 꺼내 드는 그였다. 저 정도 고수와의 실전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힘을 아낄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뢰음사의 비전 신공 중 하나, 혈불대염력(血佛大念力)의 공력을 끌어모은 그가 혈수인(血手印)을 펼쳤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마치 불꽃에 휩싸인 거대한 바위가 하늘 끝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포달랍궁의 전설적인 무공 대수인(大手印)과 동급으로 평가받는 서장 최강의 장공 중 하나 혈수인.
거대한 핏빛 손바닥이 연호정은 물론 대지를 통째로 갈아 버릴 기세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연호정이 광풍구룡살의 이초, 승공세를 펼쳤다.
콰르르릉!
연호정의 발목이 땅을 파고들었다.
엄청난 압력에 내부가 진탕되는 듯했다. 혈수인의 공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라, 단순히 밀고 들어가는 힘만 생각하면 소림의 대력금강장보다도 강한 듯했다.
나각뢰라고 멀쩡하지는 않았다.
허공에서 어느 정도 몸놀림이 자유로운 그들이었지만, 과격하기 그지없는 승공세의 참격은 혈수인 공력을 서너 갈래로 쪼개며 그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푸화아악!
폭죽처럼 피어나는 핏물이 압권이었다.
퍼펑!
허공을 밟아 가며 땅으로 내려온 나각뢰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풍성한 가사 자락 대부분이 걸레짝이 되어 버렸다. 몸 이곳저곳에 베인 상처가 가득한데, 그마저도 혈불대염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팔다리가 날아갔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놈이……!”
첫 기습, 그리고 밀쳐 내는 후속타.
홍불장과 무참, 혈수인과 승공세까지 격렬하지만 짧은 공방을 벌이며 나각뢰는 실감했다.
‘까딱하다간 죽는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죽음의 공포였다.
고작 몇 번의 공방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줄은 몰랐다. 나각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때, 나각뢰의 머리에 맴도는 목소리.
‘사신무의 이십육 대 계승자, 당대의 사신무장 연호정이 나다.’
사신무니, 계승자니 하는 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해서 상대의 말을 다 흘려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연호정이라는 이름 석 자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이제 보니…… 네놈이 그 연호정이란 놈이구나.”
“나를 아나?”
나각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의 제자이자 당대 소뢰음사의 방장이 귀에 피가 나도록 주절거렸던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심해야 할 고수가 존재합니다. 사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권신과 검선은 동대륙 정점의 고수들로서, 그 깨달음이 반선의 영역에 달했다지요. 사부님께서 그들에게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당대 제일의 강자라 불리는 이들이니만큼 신경을 쓰셔야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연호정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삼교가 이를 가는 놈인데, 놀랍게도 그놈 혼자서 삼교의 대륙 진출을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지략도 뛰어나지만 젊은 나이에 이미 정점에 오른 무력으로 하늘이 내린 천재라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권신, 검선.
그리고 패왕.
일신, 일선, 일왕이다. 이 세 사람이야말로 대륙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제자는 말했다.
무공보다도 심기와 지략을 타고난 제자의 말을 나각뢰는 십 할 신뢰했다.
하지만 그들 중 하나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중 가장 어리다는 연호정의 무공이 자신과 박빙을 이룰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제자 놈 말이 맞았구먼.”
툭!
굵고 기다란 염주를 끊어 손에 쥔 나각뢰.
“네놈이 연호정이란 말이지.”
“영광이군. 내 이름도 알고.”
“어지간히 설쳤던 모양이구나.”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설쳐 대는 게 내 일이라.”
“이놈!”
파아앙!
나각뢰가 연호정을 향해 뛰어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때 그 신법이다.’
신마림으로 가는 길에 붙었던 소뢰음사의 고수 혈승이 보여 주던 신법, 뇌음천보경이었다.
하지만 나각뢰의 뇌음천보경은 혈승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훨씬 더 수월하게 구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언제, 어떤 자세에서도 저 속도와 안정성이 나올 것이다. 상대는 혈승보다 한 수 위의 고수인 것이다.
쿵!
연호정의 전권 코앞에서 멈춘 나각뢰가 진각과 함께 좌장을 휘둘렀다.
또 한 번 혈수인이었다. 혈수대장공(血手大掌功)이라고도 불리는 그 무공은 혈승 역시 구사한 적이 있지만, 나각뢰는 그보다 훨씬 더 풍부한 발경을 보여 주었다.
쾅!
혈수인이 뿜어짐과 동시에 연호정 역시 과격한 진각으로 힘을 모아 금룡진악권을 구사했다.
콰아앙!
두 사람이 제각기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피피피핑!
충격파가 엄청난데도 나각뢰의 후속타는 벼락처럼 빨랐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뚫고 날아오는 것은 굵고 큰 염주였다.
무려 육십여 개의 염주가 전방을 뒤덮으며 쏘아지는데, 그 속도가 육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였다.
연호정의 왼 손목 밑에서 교룡쇄가 쭉 빠져나왔다.
치리리리링! 카카카카캉!!
기물(奇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각뢰만이 아니었다.
염주 한 알, 한 알이 신병이기와 같은 강도를 지니고 있지만, 연호정의 교룡쇄는 내력에 따라 길이가 조절되는 희대의 기물이었다.
철쇄를 원형으로 둘러쳐 임시 방패를 만들고 그 위에 황룡기를 두르니, 제아무리 소뢰음사의 신물 백팔혈공신주(百八血功神珠)라도 뚫을 수가 없다.
후우웅!
튕겨 나온 혈공신주들이 살아 있기라도 한 듯 나각뢰의 몸 주변을 돌았다.
번쩍!
벼락처럼 교룡쇄를 수거한 연호정이 광룡부를 던졌다.
혈수인으로 광룡부를 내치려던 나각뢰는 순간 연호정의 왼손 밑으로 삐져나온 철쇄가 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번쩍! 콰아앙!
광룡부가 나각뢰의 뒤쪽 절벽에 손잡이만 남기고 꽂혔다.
촤르르르륵!
동시에 땅을 뚫고 들어간 교룡쇄가 나각뢰의 발목을 휘감았다.
연호정이 오른손으로 교룡쇄를 쥐었다.
“이리 와.”
치링!
황룡기의 괴력 앞에 나각뢰가 땅을 갈며 끌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