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77)
977화. 공백을 만들다 (2)
발이 묶여 땅을 뒹굴며 끌려간다.
나각뢰 인생에 이런 굴욕은 또 없을 것이다. 혈불경에 달하기 전, 아니 처음 무공을 배운 후 수많은 대결을 벌였지만 이처럼 모양 빠지는 꼴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각뢰는 침착했다.
혈불대염력으로 보호되는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땅을 마구 구르며 끌려가고 있었지만, 정작 몸은 멀쩡했다.
오히려 이런 꼴을 당하자 화가 나면서도 냉정해졌다.
‘숙적!’
강하고 기교 넘치며 빠르고 변칙적이다.
상대의 무공은 자신과 박빙이다. 그 말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는 뜻. 마음을 바로잡지 못해 빈틈을 보여 주면 진짜로 죽을 수 있다.
나각뢰는 상대를 일생의 숙적이라고 여겼다. 그 정도 확신 어린 마음으로 임해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까딱였다.
피피피피피핑!
육십여 발의 혈공신주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토해 내며 쏘아졌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굉장하군.’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그리고 강자들이 쓰는 무공들은 하나같이 범상치가 않다.
손을 대지 않고 물체를 움직이는 경지를 허공섭물이라 했다. 당연히 나각뢰의 술수 역시 허공섭물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하지만 수십 개의 구슬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쏘아 내는 이 수법은, 단순히 허공섭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암왕 선배의 상단전 능력과 비슷하다.’
누가 더 고차원적인지는 모른다. 다만 나각뢰의 상단전 운용법은 당가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하물며 만천화우라는 희대의 신공을 창안한 당관과도 달랐다.
세밀함에서는 떨어지지만, 더 빠르고 더 유연하다.
파아아악!
연호정의 몸이 벼락처럼 움직이며 육십여 개의 혈공신주를 모조리 피해 냈다.
그 자리에서 피하고 싶어도 후방을 제외한 전방위를 노리고 쏘아져 오는지라, 아예 위치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위치가 바뀜에 따라 나각뢰의 몸도 연호정을 향해 꺾였다.
후우우웅.
몸통이 꺾이는 순간, 불가사의한 움직임으로 일어난 나각뢰가 교룡쇄를 붙잡았다.
우우우우우웅!
황룡기로 가득하던 교룡쇄에 혈불대염력의 공력이 침투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대단한 공력!’
미량의 내공이 침투했는데도 즉각 알 수 있었다.
단순 내공량만 따지면 나각뢰의 압승이었다. 단순히 조금 많고 깊은 수준이 아니라, 아예 차원을 달리했다.
검제 남궁승, 도제 종리백의 내공보다도 훨씬 깊다. 내공량으로는 명실공히 천하제일을 논해도 이견이 없을 듯했다.
‘불필요할 정도로 내공이 많아. 그 말인즉.’
치리링!
두 사람이 교룡쇄를 잡으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연호정이 있던 자리를 관통한 혈공신주들이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으로 다시 나각뢰의 머리 위에 자리했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이 미친 요승의 주 무공이 저 구슬이라는 것이다.’
파바바바바박!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였다. 마치 육십 개의 번개 줄기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성천의 일좌, 패왕 연호정과 내공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 저와 같은 암기술까지 구사한다. 내공량도 내공량이지만, 분심(分心)의 묘리까지 체득한 진짜 강자의 능력이었다.
혈공신주들이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치리리리리링!!
어느새 연호정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백룡부가 빠르게 회전하며 핏빛 번갯불들을 모조리 튕겨 냈다.
허공섭물에는 허공섭물이다. 애초에 피할 곳도 없었으니, 이 선택은 강제될 수밖에 없었다.
나각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법이로고.”
동등의 강자라고 인식은 했지만, 각자가 자신하는 분야가 있는 법이다.
상대의 허공섭물은 자신보다 아래라고는 하나, 자신을 제외한 서장 무림 누구와 붙어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하다는 걸 한 수만으로 알겠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을까.”
추르르륵.
염주 줄에서 풀려나온 나머지 혈공신주.
사방으로 튕겨 나갔던 구슬들까지 총 백여덟 개의 붉은 구슬이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배회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이리저리 회전하는 백여덟 개의 구슬은 마치 붉게 물든 저녁노을처럼 화려한 색조를 뽐내고 있었다.
이게 떨어지면 연호정으로서도 막을 길이 없다. 그전에는 전방뿐이었지만, 이번에는 허공과 후방까지 막아야 하는 돌격이 시작될 것이다.
나각뢰의 동공이 시뻘건 빛을 토해 내는 그 순간.
파지지지직!
뇌광이 이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을빛 하늘 절반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나각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강하군.”
우우우우웅!!
허공에 떠 있던 구슬들이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내공 침투, 기공 강탈이다. 나각뢰가 황룡기로 가득 찬 교룡쇄에 혈불대염력의 공력을 쏟아부어 절반을 장악했다면, 이번에는 연호정이 혈불대염력의 내공 흐름에 끼어들어 암기술을 방해한 것이다.
카드드득!
교룡쇄가 아픈 비명을 질렀다.
“강하지만, 창의력이 부족해.”
연호정의 눈이 또 한 번 번쩍였다.
순간 나각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쩍!
저 멀리 절벽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순 등 뒤에서 거대한 돌풍이 휘몰아쳤다.
‘도끼!!’
절벽에 꽂혔던 그 무지막지한 도끼가 뽑혀 날아오고 있었다.
교룡쇄, 혈공신주 내공 방해, 광룡부의 이기어검술.
삼중의 기공술이 동시에 펼쳐졌다.
“이익!”
파바바바박!
남은 절반의 혈공신주들이 후방으로 쏘아지며 광룡부와 충돌했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광룡부의 궤도가 바뀌었다.
쾅!
힘이 분산됨을 느낀 연호정이 있는 힘껏 교룡쇄를 당겼다. 나각뢰는 그대로 바닥에 등판을 찍었다.
그로 인해 허공에 떠 있는 혈공신주의 영향력에도 금이 갔다. 나각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황룡기를 물리치고 다시 영향력을 되찾은 나각뢰가 연호정에게 공격을 가했다.
파바바바박! 퍼억!
대부분의 혈공신주를 피했지만, 그중 하나가 연호정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친 것에 불과한데도 손톱만큼의 살 뭉텅이가 날아갔다. 말도 안 되는 관통력이었다.
그러나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씨익 웃기까지 했다.
철컹!
순간 나각뢰의 발목을 휘감았던 교룡쇄가 뻣뻣해졌다.
연호정이 땅을 박찼다.
콰아앙!
하늘 높이 날아오른 그가 그대로 교룡쇄를 휘둘렀다.
황룡신왕공의 내공으로 강철보다 단단하게 유지된 교룡쇄는 얇지만 부러지지 않는 거대한 창봉이 되었다. 그리고 창봉 끝에 매달린 나각뢰는 인간 철퇴가 되었다.
연호정은 나각뢰라는 ‘무기’를 그대로 휘둘렀다.
광풍구룡살, 무참의 투로를 가지고.
콰아앙!
철퇴 부분인 나각뢰의 몸까지 내공이 침투하진 않았지만, 인간을 무기처럼 휘둘렀다는 부분에서 대단함이 희석되지 않는다.
퍼어엉!
그야말로 낭패를 당했음에도 곧장 튀어 오른 나각뢰가 혈수인을 펼쳤다.
번쩍!
백룡부로 혈수인 장력을 쪼갠 연호정.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목에 감긴 교룡쇄를 푼 나각뢰가 비로소 자유를 되찾았다.
“이놈!”
파바바방!
벼락처럼 움직이는 나각뢰.
반경 오 장 안에 시뻘건 빛이 번뜩인다 싶더니, 어느새 환영과도 같은 나각뢰 넷이 더 생겨났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술법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대단한 초식도 아니었다.
‘분신술!’
진짜 분신술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이동, 잔상을 만들어 제각기 다른 형상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무식한 경지의 신법이었다.
차라리 술법으로 만든 가짜라면 모르되, 모든 것이 진짜인 이상 대응하기가 더 어렵다.
다섯 나각뢰가 입을 열었다.
“탄주(彈珠).”
피피피핑!
백여덟 개의 구슬이 다섯 방향에서 소용돌이치며 쏘아졌다.
허공에 떠 있는 이상 지상에서처럼 자유로이 움직일 수는 없다. 굳이 힘을 써서 분신술까지 만든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연호정의 몸이 회전했다.
쩌저저저저저정!!
육신의 속도라면 아직도 비왕 공손백룡을 최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기술의 쾌공(快功)으로 치자면 연호정이야말로 최고의 무술가라 할 수 있었다.
짧게 잡은 교룡쇄를 벼락처럼 휘둘러 무려 다섯 번의 승공세를 내치니, 그 많던 구슬이 경풍에 휘말려 모조리 튕겨 나갔다.
나각뢰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놈은 대체!’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자신의 공격을 막아 내서가 아니었다. 막은 것보다도 무공을 운용하는 방식 자체가 엄청났다.
보아하니 도끼로 구사하는 무공인 듯한데, 그걸 철쇄를 굳혀 쾌공으로 변환해 휘두른다.
일발의 위력은 줄지라도 속도가 빨라지니, 오히려 경풍을 일으키는 데에는 훨씬 더 유리할 것이다. 심지어 그 잠깐 새에 네다섯 번이나 구사해 일말의 사각까지 감춰 버리는 능력은 단연 백미였다.
자신의 몸뚱이를 초식처럼 휘두른 것보다 저게 더 대단했다. 무공의 구현 방식이 어떠한 틀에도 매여 있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파팡!
허공에서 번쩍인다 싶더니 반대편 방향을 찍고 대지로 내려서는데, 그 속도가 뇌음천보경보다 느리지 않았다.
이어서 곧장 철쇄가 날아오겠구나 싶었는데, 놀랍게도 장력이 날아왔다.
자유롭고도 유연한 장법, 금룡번천장이었다.
콰앙!
혈수인으로 상쇄했지만 상대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장 치고 들어와 두 주먹을 휘두르는데, 철쇄로 둘둘 만 두 주먹에서 엄청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혈공신주를 이용해 반격할 틈이 없었다. 나각뢰가 빠르게 양손을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두 사람의 주먹이 부딪치며 대지에 화려한 흔적이 새겨졌다.
나각뢰는 당황했다.
‘뭐가 이렇게……!’
빠르다.
신법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권장의 속도는 한 수 뒤지고 있었다.
‘너무 빨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철쇄를 감은 탓에 발경이 부딪치면서 기괴한 소리를 마구 터트리는데, 그것이 기묘하게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음공까지!’
이 한 번의 싸움만으로 연호정의 성장을 알 수 있었다.
언제나 파괴적이고 자신만만한 공격을 구사했던 그였다. 상대가 더 저돌적이면, 그보다 훨씬 더 강하고 파괴적인 힘을 이용해 상대하길 즐겼던 그였다.
지금은 달랐다.
상대의 무공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냉정히 판단한 후, 상대에게 가장 효율적인 무리(武理)를 이용해 적을 압박하고 있었다.
나각뢰는 더 강한 힘, 더 다채로운 무공보다 더 빠른 공격으로 상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공량에서도 앞서고 허공섭물의 기예에서도 앞서는 상대. 심지어 신법도 빠르다.
그러나 근접 육탄전은 다른 모든 무공보다 수준이 낮았다. 물론 그 낮은 수준조차도 무림 정상급이라 할 만하나, 맨손 박투술로 수많은 전투를 치러 온 연호정에게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상대에 따라 가장 효율적인 무공을 구사하는 사람. 언제나 전방에 나서서 적장을 상대하니, 그의 뒤를 쫓는 것만으로도 승리의 깃발을 거머쥘 수 있다.
‘이것이다.’
금룡번천장, 금룡진악권은 물론 반룡장, 용형칠기보에 연가십삼권까지 구사하는 연호정은 비로소 깨닫는다.
‘이것이 사신무의 진짜 묘리다.’
사신무라는 기예에 국한될 필요도 없다. 상대에 따라서 가능한 모든 수법을 총동원한다.
나아가, 단순히 무공만이 아니라 깨달음까지 녹인다. 지금 그의 무공은 연가의 무공과 사신무는 물론 도제 종리백의 단호한 직선형 투로, 심지어 음제 하은교의 음공 무리까지 섞어 버렸다.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는 무공, 전투술이었다. 그 쾌속하고 다채로운 무공이 나각뢰의 정신과 양팔을 너덜너덜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파악!
어느새 철쇄를 풀고 나각뢰의 양팔을 쥔 연호정이 힘차게 머리를 휘둘렀다.
빠각!
코뼈와 앞니가 부러진 나각뢰의 눈이 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