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989)
989화. 내려놓으니 하늘이 보였다 (6)
“군사님.”
“음?”
공석이라 호칭은 그러했지만, 아버지를 보는 제갈아연의 얼굴에는 짙은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모용가주가 뵙기를 청한다고 해요.”
제갈문호가 피식 웃었다.
“모용가주만?”
무림맹 내, 무수히 많은 눈을 깔아 둔 그였다. 중원 전역의 정보도 받고 있지만, 특히 맹 내의 상황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훤히 꿰고 있었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연 소부주도요.”
“알았다. 정자에서 기다리시라 해라. 금방 나간다고.”
군사라는 게 하루라도 편히 쉴 만한 자리가 아니다. 그간 그를 보러 온 사람들이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그러한 군사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용군과 연호정은 다르다.
제갈문호는 두 사람을 예전처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마음은 편했지만, 보는 눈 때문이라도 대우는 해 줘야 했다. 그게 옳았다.
제갈아연이 나가고, 제갈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관을 바로 했다. 그러고는 책장으로 가서 몇 가지 서류를 꺼내 확인했다.
‘음.’
내용을 확인한 제갈문호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이제는 이 정도도 까먹는가.’
하루하루 수많은 정보가 머리에 입력된다.
사람의 머리에는 한계가 있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대량의 정보를 죽을 때까지 저장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총량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중요도에 따라 잊기도 하고 평생 기억하기도 한다.
제갈문호는 무수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까먹는 것도 많아졌다.
‘잠을 좀 늘려야 하는데.’
동경 앞에 서서 한 번 더 매무새를 정돈한 제갈문호가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후.
정자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고, 제갈아연은 그 아래에서 공손히 서 있었다.
딸을 보는 제갈문호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어렸다.
‘못난 애비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무공 재능도, 군략 재능도 뛰어난 아이다.
강호 어떤 가문의 여아보다 미모도 빼어나고 성품도 좋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군사를 아비로 두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업무에 치이고 있었다. 나이가 제법 찼지만, 그래도 충분한 공부가 필요한 시기인데 아비의 일을 돕고 있는 것이다.
딸 덕분에 그나마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사 일이 무림맹 중추 역할 중 하나라면, 딸은 무림맹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딸은 이틀 전에 과로로 잠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내공이 깊은 덕에 회복이 빨라 다행이었다. 쉬라고 했지만, 딸의 성격도 보통이 아닌지라 곧장 업무에 투입되어 여러 일을 처리해 주었다.
군사로서 맹의 운영 때문에 차마 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 정도로 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제갈문호의 속은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정말, 제대로 얘기를 해 봐야겠어.’
군사 일도 중요하지만, 딸의 미래도 중요하다. 더는 딸의 미래를 망치려 들지 말자.
그렇게 상념을 접은 제갈문호가 정자로 걸어갔다.
스륵.
연호정과 모용군이 일어났다.
정자로 올라간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연 소부주와 모용가주를 뵙소. 참으로 오랜만이오.”
“…….”
두 사람은 따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났구나. 어쩔 수 없지.
제갈문호는 씁쓸함을 안고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연호정도, 모용군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무언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어찌……?”
“참으로 어이가 없소이다.”
모용군의 첫마디는 그와 같았다.
“제정신이오?”
바로 본론인가?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앉아서…….”
“너.”
모용군이 제갈아연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숙수에게 가서 음식 한 상 차려 오라 하거라.”
“네?”
“어서!”
화아악!
모용군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의식적으로 내공을 방출한 게 아니었다. 강한 분노와 놀라움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방출되는 기세였다.
제갈아연은 깜짝 놀라 주춤했다. 그녀의 무공 역시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무극에 오르기 전 공공대사를 상대로도 승리했던 모용군의 압도적인 기파에는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문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기가 지셨다면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아연아, 가서 음식을 준비해 달라 말하거라.”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저희가 배가 고파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군사님.”
“음?”
모용군의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자각도 없는 것이오?”
이쯤 되면 제갈문호라고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몰골을 보시오. 지금 그게 사람 몰골이오?”
“……?”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제 볼을 쓰다듬었다.
모용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맹주는 군림하고 결정하는 자리요. 그러나 군사는 실질적으로 무림맹을 이끌어 가는 행정업의 정점이지. 그런 사람이 그렇게나 말라비틀어진 몸뚱이로 무얼 할 수 있단 말이오?”
말랐다고? 내가?
제갈문호는 생각했다. 자신이 그렇게 말랐는지.
돌이켜 보면, 의관을 갖출 때 얼굴 살이 제법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자주 입었던 옷이 헐렁해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이 이렇게 놀랄 만큼 말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맹 내 분위기 일로 맹주께서 찾아오셨을 적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만간 군사부 인원을 확충하도록 합시다. 군사께서 직접 뽑으셔야겠지만, 나와 봉공들도 괜찮은 인재들을 추천할 테니 이번 기회에 휘하 군사들을 늘리는 것도 괜찮겠소.’
그날 저녁부터 맹주 명령으로 이틀에 한 번씩 탕약이 올라왔다.
그래도 이렇게나 자신을 챙겨 주시는가 싶어서 고마운 마음에 탕약을 챙겨 먹었다. 물론 그 고마움조차 업무가 바빠서 곧장 잊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였던가?
“군사님만이 아닙니다.”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힐끔거렸다.
“아연이도 예전보다 많이 말랐습니다. 눈이 푹 꺼졌어요.”
“……!”
“결정적으로, 두 분에게서 예전과 같은 생기(生氣)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업무가 과다해서, 혹은 수련이 과해서 몸이 야위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제갈 부녀는 예전보다 생기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내공량이 아니라 생기, 즉 생명력 그 자체가 줄었단 말이다.
제갈문호는 깜짝 놀랐다. 허튼소리를 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니, 진정 자신과 딸에게 문제가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모용군이 혀를 찼다.
“원정이 깎여 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소?”
“…….”
“맹주에게 가서 따져 봐야겠군. 도대체 아랫사람들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군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모용군은 진심으로 분노한 듯했다.
연호정이 말했다.
“다행히 원정이 깎인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길어 봤자 사나흘 안쪽이라고 보는데, 그간의 피로가 누적되어 급격하게 타격을 받은 듯싶습니다.”
“……!!”
“외부의 충격으로 기가 흔들린 것은 아니니 며칠 푹 쉬면서 운공과 약으로 몸을 보하면 금방 예전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며칠…….
제갈문호는 자신의 원정이 타격을 받았다는 말보다 딸의 원정이 타격을 받았다는 것에 경악했고, 푹 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란 말에 안심하기보다는 며칠이나 걸린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다.
연호정이 정자에서 내려갔다.
“아연이는 올라가서 쉬고 있어. 내가 숙수에게 다녀올 테니까.”
제갈아연은 당황했다.
“아, 아니 나는…….”
연호정이 말없이 그녀의 등에 손을 대었다.
순간 제갈아연은 벼락을 맞은 듯 흠칫 놀라며 굳어졌다.
우우우웅.
황룡기가 스며들며 그녀의 내부를 바람처럼 휘감았다.
연호정이 손을 떼며 말했다.
“다행히 혈도와 단전들은 멀쩡하다. 다만 오랜 피로 누적으로 내장 기관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어.”
“그, 그 정도야?”
“의원에게 갈 정도는 아니야. 의원이라고 딱히 방도는 없다. 잘 먹고 푹 쉬는 게 최선이거든.”
“호정.”
“올라가서 쉬고 있어. 그간 고생이 너무 많았다.”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안쓰러운 눈빛, 미안하다는 말,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라는 위로 앞에서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안 좋아질 테니까.
나아가, 자신보다 아버지가 훨씬 더 고생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연호정이 그런 말을 해 주니 알 수 없는 감정이 확 올라왔다.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피로가 극심한 상태가 지속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럴 수 있다. 연호정이 제갈아연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제갈아연이 정자로 올라오고, 연호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제갈문호가 안쓰러운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아연아. 너는 이만 거처로 가서 쉬는 게 좋겠다.”
“아니요. 그럴 수는 없지요.”
순간 울컥해서 눈물이 나왔지만, 그녀의 눈빛은 별빛처럼 초롱초롱했다.
황룡기로 잠시지간 기운이 나기도 했지만, 흐트러진 정신력이 다시 칼날처럼 곤두섰기 때문이었다.
“두 분께서 찾아오신 일에 관해서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께서 짚지 못한 부분을 제가 짚을 수도 있지요. 이 자리는 저도 함께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아연아.”
“간다고 제대로 쉬지 못할 거라는 거,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모용군의 표정은 여전히 불퉁했지만, 제갈아연을 보는 그의 눈빛만큼은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군사의 혈육이라면 저 정도 강단은 있어야 한다. 그 부분에서 모용군은 제갈아연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 후, 연호정이 돌아왔다.
“아무래도 식사도 오래 못하신 듯하여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로 준비해 달라 말했습니다. 금방 온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소부주에게는 내 할 말이 없네.”
자신의 모습도, 그리고 강량과 진양에 관해서도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연호정은 웃지 않았다.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지만, 웃으면서 대화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왕지사 얘기가 나온 김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시지요.”
“그래, 그렇게 하세나.”
“맹 내에 흑도를 몰아내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요?”
강량과 진양에 대한 언급은 일부러 배제했다.
두 사람에 관한 얘기는 본론이 끝난 후에 해도 된다. 지금은 무림맹 그 자체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이 옳았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움직임은 옛날부터 있어 왔네. 다만 쉽게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 뿐이지. 서로의 의견을 조율한다고는 해도, 당장 전쟁이 코앞이니만큼 우리도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일을 진행한 부분이 없지는 않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야 그런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화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위기에 둔해지기 마련이니까요.”
“안타까울 뿐이라네.”
“다만 그냥 두고만 보고 계시지는 않았을 텐데, 대체 일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질문을 바꿔야 하네.”
“……?”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왜 즉각 조치하지 않았느냐가 이번 사태의 핵심과 관련되어 있네.”
제갈문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사태를 주도한 측에 영향력 있는 세력의 누군가가 개입되어 있네.”
“……!”
“자칫 잘못하다간…… 맹의 의결 기관이 쪼개질 위험이 있을 정도의 최중요 세력일세.”
연호정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한 청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