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183)
183_피와 강철의 시대 (10)
“참으로 아쉽지만, 제가 끼어들 판이 아닌 것 같군요.”
예상대로 드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랑 장난하나? 그냥 못 도와주겠다고 말하면 될 것을 뭘 그리 구질구질하게 말을 돌리나. 자네가 언제부터 낄 데랑 못 낄 데를 구분했다고.”
아씨, 드럼 주제에 그렇게 팩트 꽂지 말라고. 갑자기 할 말이 궁해지잖아.
“그, 그 뭐시냐, 참모총장 자리는 엄연히 정치권과의 협의를 통해 대통령이 정할 문제라서―”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자네는 날 지지해주면 되네.”
“소장님의 방안대로 중전차를 개발하기에는 시간과 예산이 부족한지라―”
“포드사가 페이퍼플랜 하나 마련하지 않았다고? 그러면 내가 다른 군수기업의 손을 잡고 독자적인 보병전차 계획안을 올려보내도 되겠군그래.”
내가 우물쭈물하자 드럼은 기세를 몰아 어떤 뾰족머리 변호사마냥 신나게 날 난타했다.
으음. 이 양반도 풍둔 주둥아리술 하나로 지옥 같은 관료제 피라미드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몸인데, 그동안 너무 삽질만 해대는 모습만 보다 보니 너무 안일하게 대한 모양이다.
“내가 그렇게 무능해 보이나?”
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건 아니고―”
“그러면?”
오늘 무조건 대답을 듣고 가겠다는 굳건한 의지. 인기남의 인생이란 정말 피곤하구만.
내가 드럼의 입장이라고 가정해 봐도, 확실히 절박하긴 하다.
드럼의 나이를 따져보면 1943년에 정년을 맞이한다.
일찌감치 승진해 군 중추부에 있던 어드밴티지도 마셜이 치고 올라오면서 사라졌고, 심지어 마셜 또한 쇼몽파에 속하는 데다 퍼싱의 신임까지 얻고 있고, 드럼과 친분이 있던 자들은 대부분 드럼보다 먼저 정년을 맞이하고 있다.
코너에게 밀리고 크레이그에게 밀린 끝에 어느새 마지막 기회만 남은 셈이다. 내 지지가 많이 급하긴 하구만.
하지만 그건 그거고. 다음 참모총장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지휘할 전시 사령탑인데… 그걸 드럼이 한다구예? 에바쎄반데.
할 수야 있다. 그래. 할 수는 있지.
근데 왜 마셜이라는 소하와 제갈량급 SSS급 참모총장을 냅두고 스탯 미지수에 성품까지 졸렬한 드럼을 밀어주겠는가? 드럼을 참모총장에 앉혀서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그러니 유감스럽지만 드럼 씨는 저희와 함께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흑흑.
이제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뭔가, 뭔가, 드럼이 듣고 납득할 만한 핑곗거리가 없나?
내 뇌가 생각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척수반사적으로 내 혓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저, 찍혔걸랑요.”
“뭐? 누구한테?”
“대통령한테….”
“지금 나랑 장난치나.”
“아니, 진짠데요.”
나는 10분에 걸쳐 상세하게 ‘대통령이랑 카드게임할 때 밑장 빼다 걸려서 건방진 미친놈으로 찍힌 Ssul’을 풀기 시작했고.
“자네 대통령과 사적으로 만나나?”
“으으음….”
“뭐? 뭐라고?!”
처음엔 흥미 가득해 보이던 드럼은 내 이야기가 끝날 때쯤 되자 마치 코로나 확진자랑 마주 앉아 밥 한 끼 먹은 것마냥 황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미쳤지. 미친놈이랑 일해보려 했던 내가 미쳤어.”
“아니, 그 정도까진―”
“저리 가. 광증 옮을라. 나중에 이야기하지.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허겁지겁 돌아가는 드럼의 중얼거림이 내 귓전에 스쳐 지나갔다.
후우, 저래서야 어찌 패튼 같은 인간들을 다룰 수 있겠는고? 오늘의 일은 능히 옛날 춘추전국의 유세객들이 세 치 혀로 일구어낸 무수한 업적에 비견할 수 있으니, 이 유진 킴의 명성이 또 천지를 울리겠구나… 는 개뿔!
그렇습니다. 나는 망했습니다…. 이제부턴 정말 마셜코인뿐이야….
* * *
드럼의 끈적끈적한 접근을 이 한 몸 롸끈하게 불살라 물리친 것은 좋다.
근데 내가 무슨 수나라 백만대군 물리치려고 청야전술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이런 임시방편으로 버틸 순 없는데. 아이고 머리야.
내가 탈진한 채 드럼의 마수에서 벗어나자, 오늘 무슨 나쁜놈들 면담 특집이라도 찍는지 또 다른 인간이 내 시야에 잡혔다.
오늘만큼은 안 된다. 인성이 뒤틀린 인간은 하루에 한 명만 상대해야 한다고.
“왜 사람을 봐놓고 슬쩍 가려 합니까.”
“아아니,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다 티 나니까 그냥 따라오시지. 기다리는 사람이 좀 많으니.”
에드거 후버의 서늘한 시선에 나는 쫄 수밖에 없었다.
이 양반이 열심히 일해야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게 아닌가. 홀애비 냄새 풀풀 나는 관사는 이제 지겹다고.
그렇게 끌려간 곳은 정부 청사의 한 회의실.
“다 온 것 같군요.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비의 날갯짓만으로도 지구 반대편에 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수십 년에 걸쳐 온갖 깽판을 친 유진 킴의 날갯짓은 대체 얼마나 역사를 바꿨겠나.
“우선 FBI가 뒤쫓고 있는 일련의 독일 간첩 및 친독 세력에 대해 간략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배포한 보고서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후버의 건조한 목소리가 장내를 채웠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처음엔 악성 사생팬처럼 들러붙으며 자꾸 ‘구국의 결단’ 같은 개소릴 해대던 히틀러는 이제 도리어 내 모가지를 따고 싶어 하는 희한한 꼬락서니였다. 누가 세계구급 싸이코 아니랄까 봐 이해가 불가능한 인간이다.
내 황당한 기분은 둘째치고, 타국 수반의 쿠데타 권유와 협박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미합중국 행정부 역시 무언가 반응을 해야 했다.
그 결과 국내 수사를 전담하는 FBI와 법무부, 그리고 해외 첩보를 전담하는 국무부가 동시에 움직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실제로 이 자리엔 후버뿐만 아니라 법무부와 국무부 관료들도 자리해 있었으니.
“또한 합중국의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주민 단체의 동향에 대하여―”
“단언컨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자들은 일본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이민자들은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듯이 일본군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여 본국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을 잠재적인 간첩으로 간주해야 할지 여부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원래 부처 간 협력이 어려운 이유는 밥그릇 싸움도 있지만 선례의 문제도 있는 법인데, 한번 협력과 공조가 시작되면 이러한 장벽도 낮아지는 법. 그 결과 국내의 타국 간첩에 대한 경계와 감시 역시 더욱 커졌다.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 끌려오게 된 거지.
히틀러도 만나봤고, 생명의 위협도 느꼈고, 일본의 수뇌부도 만나봤고, 서부 아시아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고… 군부와는 아무 관계 없이, 그냥 내가 여기 출석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극에 대해 국제연맹에서 규탄 결의안을 발의했지만, 일본은 연맹 탈퇴로 응답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일본제국의 저의를 재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킴 장군은 어떻게 보십니까?”
“군부의 입장을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지요?”
“아닙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거머쥔 이민 2세대 아시아계 미국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크으, 이게 바로 사회적 인정이란 건가. 어깨가 괜시리 들썩인다.
솔직히 내가 보통 잘난 게 아니잖은가. 물론 미래지식 치트빨이긴 하지만 그런 건 잠시 넣어두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떠받들며 “스게엣, 유진 킴 대단해에엣!” 해주는 대신 미친놈이라거나 노예라거나 제갈량의 비단주머니라거나, 아무튼 제대로 된 대우를 안 해준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자존감을 수급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그런 인정과 별개로, 지금 법무부 사람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행정명령 9066의 냄새가 솔솔 풍긴다.
일본계, 하와이는 예외로 치고 본토에서 거주 중인 일본계의 행동이 의심을 살 만한 건 사실이다. 실제로 황국의 승리를 위해 사보타주나 그 이상의 헛짓거리를 할 사람도 없진 않을 테고.
그런데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중국계가 국민당을 후원하는 것과 조선계가 임정을 후원하는 것도 똑같은 논리에 걸릴 수 있단 말이지. 선례가 생기면 골치 아파진다고. 당장 2차 대전이 끝나면 매카시즘의 시대가 오는데.
“일본제국의 사상적 근간엔 대동아공영, 다시 말해 일본이 맹주가 되어 전 아시아를 괴뢰화하겠다는 방침이 깔려 있습니다.”
나는 대강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결국 이건 군부와 의회의 의견을 들어볼 수밖에 없을 듯하네요.”
“어째서지요?”
“일본의 사상을 교정해 줄 방법은 오직 전쟁뿐이니까요.”
내 즉답에 법무부 관료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일개 관료가 논할 문제는 절대 아니지.
한동안 공허하기 그지없는 논의를 주고받은 후 회의는 파했고, 관사로 돌아가려는 내게 후버가 따라붙었다.
“어째서 조금 더 강경하게 주장하지 않는 거요?”
“뭘 말입니까.”
“전쟁 말이오!”
“지금 저더러 문민통제의 원칙을 씹으라고 권유하시는 겁니까?”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말이지.
“그러면, 독일과 일본이 명백히 세계를 상대로 한판 붙어볼 모양새인데 뻔히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이 방관만 하고 있겠단 뜻인가?”
“방관까진 아니고… 예전에 제가 포장 좀 해달라고 부탁드린 사람 하나 있잖습니까?”
“그놈? 나는 못 미더운데.”
“가짜 신분, 그러니까… 딱지팔이로 위장해서 유럽에 던져놓으면 모양새가 볼 만할 겁니다.”
히틀러도 아직 직접적으로 암살자를 보낸 건 아니니, 나도 적당한 선에서 기르는 개 한 마리 풀어놓으면 쌤쌤 아니겠나.
후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독일은 모르겠지만, 일본 쪽은 당신이 똑바로 챙기시오.”
“물론이지요. 나 좀 가족의 품에 돌아가게 빨리 독일 간첩이나 잡아 달라고요.”
서로가 서로의 등에 채찍질을 하니 행복해 죽을 것 같다. 빌어먹을.
* * *
뉴욕의 낡은 주택가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남자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합중국으로 건너왔고, 다양한 일을 하며 견문을 넓혔다.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남자는 마침내 자신의 사업에 도전했고,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을 거머쥘 수 있었다. 오, 자유의 나라여!
하지만 운명은 그를 배신했다.
“저는, 저는 억울합니다!”
이민자, 그것도 이탈리아계라는 사실은 그에게 풀려날 수 없는 족쇄였다.
그는 버려졌고, 그를 떠받들던 세상의 여론과 주변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매도하기 급급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차가운 창살뿐.
그렇게 그는 오랜 세월, 억울함을 곱씹으며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형기를 채워 풀려났으면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비정한 세상은 그를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지 않았다.
“출소하셨군요.”
“누, 누구십니까? 당신들?”
“저희가 누군진 알 필요 없습니다. 얌전히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그는 검은 코트 입은 무리들에게 반강제로 끌려갔고, 뉴욕에 오게 되었다.
“당신에겐 선택지가 있습니다.”
“머, 멋대로 끌고 와서는 선택지가 있다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듣기나 하십시오. 이대로 추방되어 고향인 이탈리아로 꺼지거나, 아니면 여기서 우릴 위해 일하면 됩니다.”
“당신네들은 누구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그건 알 필요 없습니다.”
저 불룩한 주머니.
아무리 봐도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저 주머니 안에 있는 자그마한 쇳덩어리가 그를 향해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말이 선택지지, 답이 정해진 강요에 불과했다.
“여기 있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 귀하께서는 ‘사업 아이템’을 열심히 고안해주시면 됩니다.”
“예?”
“귀하의 놀라운 사업 수완에 저 높으신 분들이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각종 경제, 금융, 시사 등을 공부할 수 있도록 저희가 지원해드릴 테니, 저번에 했던 것처럼 멋진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오직 저 검은 코트 놈들을 위해 온갖 사업 모델을 고안하고, 현실성이 없다며 반려당하고, 때로는 더욱 모델을 심화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리고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예?”
“그동안 열심히 고안하였던 사업 아이템을 들고 유럽으로 가시면, 저희가 그 사업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겠습니다.”
“하지만―”
“여기, 약소하지만 군자금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내민 작은 꾸러미를 풀어보니, 안에는 각종 금붙이와 보석이 들어 있었다.
“이, 이거면, 사업이 아니라 그냥 내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것 같소만.”
“그러면 저희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그땐 지금 같은 기회도 없을 겁니다.”
“…사업을 해도 죽긴 매한가지 아니오?”
“완벽하게 신분을 세탁해서, 원하는 곳에서 유유자적 행복한 말년을 즐길 수 있도록 준비해 드리지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런 일을 시키려고 자신을 붙들었을 테니까.
남자, 찰스 폰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폰지는 ‘폰지 사기’의 원조 격 인물로, 예전에 잠시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