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Death Knight RAW - chapter (149)
악신의 영역은 차원의 바깥. 외차원에 몰려있었다.
그곳은 우주의 빈자리나 마찬가지인 영역이었다. 온통 어둠만이 전부였고, 땅과 하늘. 그리고 벽이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물리법칙도 이곳에서는 그 의미를 잃었다. 그 대신 악신의 뜻이 곧 법이었다.
그들은 이 공간의 주인이자, 또 공간 그 자체였다.
바로 그곳에 이변이 일어났다.
-마. 맙소사. 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양의 뿔이 달린, 보라색 피부의 여인이 경악했다. 그녀의 목은 한 남자의 손에 붙잡혀있었다.
“검은양. 네가 말했었지. 나를 잊지 않겠다고.”
-그. 그건. 철회하겠다. 지구에는 눈도 돌리지 않을게! 그러니, 제발…!
검은양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스르륵.
우진의 손아귀 힘이 약해졌다. 그에 검은양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을 때였다.
꽈악!
-커억…!
“미안하지만.”
우진이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난 후환은 남기지 않는 스타일이거든.”
그 순간, 검은양의 몸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눈. 코. 입. 그리고 모공을 뚫고 넘쳐흘렀다.
-키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검은양의 몸이 천천히 붕괴했다. 동시에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 역시 쩍쩍 갈라졌다.
우진은 붕괴하는 세계를 둘러봤다.
‘이 광경을 보는 게 몇 번째지?’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본 광경이었다.
또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본 광경이기도 했다.
우진이 처음 악신의 구역에 떨어졌을 때. 그는 마치 망망대해에 떨어진 한 방울 잉크와도 같았다.
금세 바닷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악신을 사냥했다. 악신이라 해도 다 똑같은 수준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좀 더 약했고, 어떤 이들은 좀 더 강했다.
우진은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밟아 올라갔다. 그들을 죽이고, 영혼을 흡수하고, 신격을 강탈했다. 그 힘으로 더 강한 악신을 죽이러 갔다.
하나씩. 하나씩.
그 결과. 바다는 잉크로 물들었다.
우진의 신격은 지구에 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성장했고, 그만큼 악신의 세력은 줄어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았을까.”
우진이 손을 움켜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지친 겁니까?=
에아가 물었다. 그녀는 이미 수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경험한 존재였다. 하지만 우진은 아니었다.
끝없이 악신과의 싸움만을 반복했으니, 정신이 무너질 만도 했다.
“지쳐?”
하지만 우진은 헛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 표정은 수천 년 전과 똑같았다.
“그럴 리가. 다만,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부족하다고요?=
“그래. 뱀이 말했던 ‘전지전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잖아?”
우진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가 에아를 돌아봤다.
“역시 악신만으로는 부족한가?”
=…우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쩌저적. 와장창!
그때. 검은양의 영역이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뭐. 농담이야.”
우진은 피식 웃으며, 깨져나간 공간 너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곳에는 모래처럼 많은 악신과 그 권속들이, 우진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봐. 아직 죽일 놈이 저렇게나 많이 남았잖아?”
우진이 기껍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악신의 무리 가운데에서 왕관을 쓴 붉은 용이 불꽃을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천한 인간과, 그와 붙어먹은 더러운 빛의 탕녀야. 너희의 오만이 하늘에 닿았다. 심판을 받아들여라.
그가 말하는 순간. 악신과 권속들이 우진과 에아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에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악신들이 연합할 줄이야…!=
본래 악신들은 이기적인 존재다. 그들이 손을 잡는 일은 드물었다. 오히려 반목하고 시기하며 서로 방해할 뿐.
“그만큼 우리가 위협적이라는 뜻이겠지.”
우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가 한쪽 손을 뻗자, 신격으로 이루어진 검이 생겨났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군. 슬슬 일일이 찾아가는 게 귀찮았는데.”
붉은 용이 그를 비웃었다.
-신격을 얻었다 하나, 인간은 인간이로군.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 어리석음으로, 너는 목숨을 잃, 큭!
우진의 검이 용의 목을 노리고 들어갔다. 용은 급하게 피했지만, 칼날이 비늘을 스치는 것까지 회피할 수는 없었다.
비늘이 벗겨지며 검은 피가 뚝뚝 흘렀다. 붉은 용이 노기를 터트렸다.
-네 이놈. 내가 말하고 있거늘!
“그래서 어쩌라고.”
우진은 허공을 밟으며 용에게 검을 겨누었다.
“나불대는 걸 지켜봐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내가 봤는데, 너희 악신들은 항상 말이 너무 많아. 외로워서 그런가?”
-…이 불경한 놈이!
붉은 용이 콧김을 내뿜었다. 유황 냄새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이다음에 약속이 있어서 더 놀아주지 못할 것 같은데. 이래 봬도 바쁜 몸이라서.”
우진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가셨다. 신성한 빛이 그의 몸에 갑옷처럼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그만 떠들고 덤벼.”
*
악신과 악마의 유해가 공허를 가득 채웠다. 무한에 가까운 공간이 좁아 보일 정도였다.
그 가운데. 핏물로 목욕을 한 듯 온몸이 붉은 남자가 있었다. 그의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아아. 더럽게 질긴 놈들이었어.”
우진이 불평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의 입술이 길게 호를 그렸다.
“그래도 덕분에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에서 영롱한 빛 구체가 떠올랐다.
번쩍!
빛 구체가 폭발하듯 광채를 터트렸다. 동시에 어둠만이 존재하던 허공에서 빛이 한 줄기로 늘어나더니, 그 속에서 두루마리가 출현했다.
촤르륵!
두루마리가 우진과 에아를 감싸듯이 구 형태를 이루었다.
그 두루마리에는 태초에서 현재까지 이어져 온 모든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우주의 역사였다. 우주는 그가 간직해온 모든 차원의 기록을, 그에게 드러내 보였다.
마치. 그에게 자신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듯이.
=…이게 뱀이 말했던 힘인가요.=
전지전능.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또 바꿀 수 있는 힘이었다.
우진은 그런 힘을 갖춘 존재가 되었다. 그의 뜻에 따라 우주는 창조될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창조신.’
빛의 여신인 에아에게도, 너무 거창하고 경이로운 개념이었다.
“음? 이건.”
두루마리의 끝부분이 불에 탄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우진이 그 지점을 응시할 때였다.
지잉.
파노라마처럼 우주의 기억이 재생됐다. 그곳은 중세를 연상케 하는 도성과 숲이 있는 세계였다.
우진은 물론. 에아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에란델…?=
그 기억이 비추는 장소는 에란델이었다.
이윽고. 평화롭던 세계에서 전화(戰禍)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령왕이 이끄는 불사의 군단은 앞을 가로막는 도시와 왕국을 차례차례 무너트렸다.
교단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주춧돌 하나 남기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다.
그 가운데에서. 사령왕이 기뻐하며 소리쳤다.
-아아…! 이것이 바로 신격인가. 드디어 이 힘을 손에 넣었구나!
죽음의 신격이 휘몰아치며, 차원 전체가 악신의 영역처럼 썩어들었다.
그렇게 사령왕은 새로운 악신으로 거듭났다.
=…이건.=
에아가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합니다. 이, 이렇게 심한 일은 일어난 적 없을 텐데요.=
“….”
우진은 말없이 그를 지켜봤다. 이윽고 영상은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바로 지구였다.
-죽음의 군주여. 네게 힘을 준 것은 나다. 내게 복종하라.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군. 뱀이여. 그 혀를 조심해서 놀리는 게 좋을 거다.
이진호의 몸을 빼앗은 뱀과, 신격을 얻은 사령왕이 전쟁을 벌였다.
그 가운데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내로라하는 헌터들도 눈앞의 신에게는 무력했다.
그 싸움의 여파는 곧 지구를 넘어 차원 전체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두루마리는 끝났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진. 능력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은 벌어진 적이 없었잖아요?
방금 본 것은 우주가 기록한 역사였다.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하는 필연이었다.
하지만 에아는 그런 역사를 경험한 적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게 맞아.”
우진이 말했다. 그의 입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 그래. 결국 그렇게 된 거였나.”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봐. 지금 여기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잖아. 누군지 모르겠어?”
=…아.=
방금 보인 역사에서 등장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우진이었다.
“내가 이세계로. 에란델로 전이되지 않았다면, 이대로 됐겠지.”
우진이 에란델에 전이되지 않는다. 그럼 흑기사도 없다. 사령왕은 계속해서 불사의 군단을 직접 지휘했을 것이다.
“내가 교단만 집요하게 공략했던 것과 달리, 사령왕은 산 자에 대한 원망으로 모든 걸 멸망시키려 했겠지. 교단뿐만 아니라 지상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우진. 설마 당신은 그런 걸 알고, 사령왕의 수하를 자처했던 겁니까?=
에아가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그냥 한시 빨리 너랑 사령왕한테 복수하려 했을 뿐이야.”
우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네가 날 소환하고 부려 먹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서?”
에아는 우진에게 말했다. 그를 에란델에 소환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그럼 날 에란델로 소환한 개새끼가 누구일까. 항상 궁금했단 말이지.”
우진이 피식거리며 두루마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야 알겠군.”
새로운 영상이 펼쳐졌다. 그곳은 지구였다. 10년 전.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대학 등록금 벌려면 알바 빡세게 다녀야겠네. 후우. 열심히 하자!
통장을 보면서 애써 의지를 다잡는 청년이 보인다. 순둥순둥한 눈매에 열정이 감돌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을 놓지 않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 개새끼가 나였네.”
우진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청년의 모습이 스르륵 흐려졌다.
-어. 어어? 뭐야. 이거! 으아악!
어린 우진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에란델은 빛의 용사를 맞이하겠지.
“돌이켜보면 참 엿 같은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악신에게 대적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까 추억이었다. 그딴 개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이세계에서 지낸 세월은 죽도록 힘들었다. 아니. 실제로 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지구를 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쓰레기 같았던 이세계 생활. 또 그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힘.
우진은 그 둘을 전부 긍정했다.
…반짝.
두루마리를 둘러싼 빛이 약간 약해졌다.
우진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이 힘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닌가 보군.’
아쉽진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지직.
사령왕과 함께 신성력에 녹아들던 흑기사의 육체가 재구성됐다. 이윽고 그의 몸이 지구의 한곳. 즉. 과천 대공원에 떨어졌다.
화아앗-!
동시에 두루마리가 빛에 잠기더니, 이윽고 그 내용이 바뀌었다. 불에 탄 듯 끊어져 있던 끝부분이 재생되며, 끝없이 펼쳐졌다.
=…우주의 역사가 변했네요. 우진. 당신 때문에.=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이야기였다.
“바뀐 게 아냐.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지.”
=네? 그건 무슨 말이에요?=
“우리가 겪은 것만이 진짜 역사라고. 그것뿐이야.”
=…이해가 안 되는데요.=
“못해도 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우진은 두루마리를 바라봤다. 두루마리는 천천히 접혔다.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리고 두루마리는 빛의 구체로 돌아왔다.
“잊은 건 아니지? 우리가 이 지랄을 떤 목적.”
아까보다 확연히 작아진. 그럼에도 무궁무진한 힘이 느껴지는 신격을 손에 들고, 우진은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권속 주제에 제멋대로 군 놈들. 재교육 한 번 시켜줘야지.”
150. 돌아왔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