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376)
377_케이크 가르기 (1)
소련, 모스크바.
최고중앙지휘사령부, 스타브카(STAVKA).
“독일 파쇼들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예비군의 교대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충원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더딘 것으로 보입니다.”
“전 우크라이나의 해방이 눈앞에 있습니다.”
“세바스토폴과 크림반도를 탈환했으니 보급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스탈린은 끝없이 이어지는 승전보를 들으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처음 독소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의 그 절망감.
자신의 대에서 사회주의 조국이 끝장나는 게 아닌가 하던 그 숨 막히는 시간은 어느덧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고,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둘러싸인 신생 소련은 너무나 취약했다.
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나라는 정권을 잡자마자 백군 반란군, 일본제국, 영미 등등의 침략을 받아야 했고 이 혼란상 속에서 꾸역꾸역 나라를 키우나 싶었더니 이제 독일이 쳐들어왔다.
나라를 지키긴 지켰다. 어마어마한 인민의 피와 시체로 적을 깔아뭉개면서.
팔다리 멀쩡한 남자란 남자는 죄 전쟁터 아니면 군수공장으로 갔고, 나중엔 군수공장의 남자까지 끌어다 전쟁터로 보내고 그 자리에 여성 노동자를 채웠다.
이러고도 병력이 모자란 탓에 소련군은 그 빈자리를 차량화와 기계화로 메꿔야 했다. 랜드리스로 쏟아진 그 막대한 물자가 아니었다면 붉은 군대는 독일과 공멸할 수 있을지언정 반격을 가하진 못했으리라.
물론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수뇌부는 랜드리스를 딱히 거대한 빚이라고 생각하진 않고 있었다.
어차피 자본가 놈들은 소련 인민을 돈으로 구매한 것 아닌가. 여기서 소련이 ‘우린 이제 여력 없음. 이제 좀 쉬련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서방 연합군에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으리라.
미국인들도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물자를 퍼부으며 ‘너네 못 간다는 말은 안 하겠지? 계속 진격할 거지?’라고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었고, 스탈린 또한 베를린을 불태우기 전 전쟁을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복수.
인민의 복수.
사회주의의 복수.
2천만, 3천만 명이 죽었는데 ‘아무튼 나라는 지켰으니 다행’ 같은 현상 유지로 결론이 나는 순간 그날로 소련이란 나라는 종말을 맞이한다.
이 전쟁은 단순히 국토를 수비했다는 데 의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
무수한 제국주의자, 파시스트들과 싸워 결국 공산주의가 승리했다는 거대한 프로파간다의 장이 되어야만 한다.
최소한 독일 국경을 넘어 베를린을 불바다로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러시아인의 유구한 원수, 폴란드만큼은 짓밟아 소비에트에 두 번 다시 고개를 못 들게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영국인들에게 슬라브인의 땅인 발칸반도를 맥없이 내줘서는 안 된다.
최소한, 최소한, 최소한….
이미 호랑이 등에 탄 채 질주하는 형국.
소련이 충분한 전과를 거두고 서방 연합국 앞에서 큰소리 떵떵 칠 수 있는 우월한 포지션에 있지 않은 한, 랜드리스라는 거대한 빚에 깔려 자본주의자들 손에 천천히 피식자로 전락하는 미래가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탈린이 판단했을 때, 그 미래는 매우 가까이에 있었다.
“극동군구의 상황은 어떤가?”
“서기장 동지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언제든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분노의 철퇴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스탈린은 대답 대신 총참모장 바실레프스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그 시선의 뜻을 해석한 그는 얼른 다시 말을 바꿨다.
“독일 파쇼들에게 맞서기 위해 극동의 정예병력 상당수를 차출하긴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번에 중국을 완전 병탄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벌이다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약해진 그 이상으로 만주의 일본군은 훨씬 허약해졌습니다.”
“그건 좋군. 우리가 공세를 펼친다면 만주 전체를 확보할 수 있겠나?”
“싸워 이길 수는 있으나 영역을 확보하는 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영구적 점령을 노린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합니다.”
스탈린의 시야는 잠시 극동으로 향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들은 믿을 수 없다.
모스크바의 지령도 나 몰라라 하는 자들.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르지 않고 저들 식대로 멋대로 뜯어고친 희한한 사상… 그걸 과연 공산주의라고 불러줘야 하나?
결론은 명확하다.
어디서든 따서 갚아야 한다.
그리고 1순위는 반드시 동유럽이어야만 한다. 극동 따위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옛 차르 니콜라이 같은 머저리나 할 짓이고.
“주코프 동무.”
“예.”
“얼마나 시간을 주면 독일 놈들을 격파하고 진격할 수 있겠나?”
“루마니아까지 진격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번 동계 작전의 목표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전과가 부족하네. 얄타에서 서방 정치가들과 만났을 때 우리의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힘듭니다. 루마니아 진격만 하더라도 막대한 피를 흘려야 합니―”
“더욱 심층적으로 논의해 서방이 우릴 업신여기지 않도록 만들겠습니다.”
성질머리 하나는 인상적인 주코프가 막 대거리를 하려던 찰나 바실레프스키가 끼어들었다.
스탈린은 뭐라 한마디 할까 말까를 잠시 망설이다 고개만 까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장내엔 군부 인사들만이 남았다.
“…할 수 있겠소? 난 못 할 것 같은데.”
“까라는데 어쩌겠나, 까야지. 굴라그 가고 싶나?”
주코프는 슬며시 힙플라스크를 꺼내 입에 가져다 댔다.
대부분의 러시아인이라면 으레 보드카이려니 짐작하겠지만, 사악한 미제 자본주의자의 상징인 콜―라를 군부의 핵심 인사가 빨아대려면 충분한 위장 전술이 필요하지 않겠나.
“루마니아? 루우마니아? 멋대로 대뜸 질러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라는 게요?”
“이보쇼, 그럼 당신네들이 거기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든가 했어야지. 자기들도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해놓고 나보고 어쩌란 말야.”
“총참모장 동무는 서기장 동지의 총애를 받는 몸 아니오.”
“내가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놈이니까 총애를 받는 거 아뇨. 우리 다 아는 사람들끼리 순서 바꿔서 말하지 맙시다. 주코프 동지, 방금 좆될 뻔한 거 내가 구해준 거요.”
“어차피 짤려도 금방 돌아오더만. 저번엔 잘 쉬었수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잡담이 끝나고, 이들의 눈빛은 다시금 맹수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동계 전역을 개시한다고 치면.”
“미제 친구들 랜드리스가 원활해진 덕에 훨씬 더 많은 물자가 하역되고 있지. 얼어 죽는 친구들은 좀 줄어들 게요. 기갑 전력도 제법 확충되었고.”
“퍼싱 전차는 좀 어땠소?”
“끝내주지. 파쇼 놈들이 기갑 전력으로 일발역전을 노렸다간 그놈들의 뚝배기를 다 터뜨려 줄 수 있을 거라 믿소.”
최악의 시간.
앞에는 전쟁기계 독일군, 뒤에는 숙청의 칼날을 번뜩이는 스탈린.
여기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그 험준한 시간을 오직 일신의 실력만으로 헤치고 올라온 소련 최고의 재능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군이 훨씬 멍청해진 지금이라면.
그걸 물어뜯지 못할 바보는 이 자리에 없었다.
* * *
같은 시각, 지구 반대편.
필리핀.
수천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이 섬나라는 동남아시아 자원지대와 일본 본토를 잇는 항로상에 있어 핵심 요충지 중 요충지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와 뒤이은 일본의 대전략 변경으로, 동남아시아 각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각자도생에 나서게 되었다.
일본이 바라던 바는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해주고 이들이 옛 주인인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에 맞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는 것이었으나.
“우리는 여러분의 독립을 인정할 용의가 있습니다.”
“일본이 여러분을 후원한 건 단순히 여러분이 우리와 싸우다 죽길 바라서일 뿐입니다. 그 짧은 시간 점령군으로 진주했던 일본군이 어떤 패악질을 부렸는지, 여러분도 잘 알잖습니까?”
버마를 위시한 영국령 동남아 식민지들은 어차피 태평양 전쟁의 주전장이라 할 수 없으니 과감히 제외.
나약한 네덜란드 따위의 의견을 과감히 무시한 미국은 적극적으로 동남아 각국의 포섭에 나섰고, 제법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필리핀은 다소 상황이 달랐다.
“이 땅의 현지인들 상당수는 기존 식민 지배자인 미국인들과 유착되어 있다. 이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우리가 떠나기 무섭게 등에 비수를 찌를지도 모른다. 철저히 박멸해 그 역량을 제거해야 한다.”
필리핀 자치령 정부는 일본에 투항하였으나, 일본제국은 이들을 포섭하는 대신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개시했다.
일본 군정 당국은 점령 시점에서 이미 필리핀을 조선, 대만과 같은 영구적인 제국의 식민령으로 굴리기로 결심했고, 그러려면 우선 이들이 제국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조련해야만 했다.
사방에 필리핀인들의 시체가 줄을 이었고, 필리핀의 행정체계는 산산이 조각났다.
얼마 되지도 않는 필리핀 점령 기간 동안 일본군은 그 와중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천황 숭배를 필리핀인들에게 주입하려 했고, 당연히 이는 현지인의 저항의식만 더욱 자극했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 필리핀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상당수는 철수하여 중국으로 떠났고, 허울만 좋은 독립을 얻은 필리핀 괴뢰정부는 당연히 어마어마한 저항에 직면했다.
“미군이 돌아온다!”
“새로운 시대를 쟁취하자!”
“잽스를 죽여 자유를 얻자!!”
1차 대전의 전쟁영웅, 유진 킴의 오른팔로 불리며 필리핀에서 크나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아나스타시오 퀘베도 베르는 너무나 당연히 일본군의 척살 명단 가장 꼭대기에 그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는 저항군을 이끌고 밀림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고, 일본군과 필리핀 괴뢰군은 몇 차례 토벌 작전을 수행했으나 결국 그의 목을 얻는 덴 실패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시오, 림 장군.”
“무슨 일이십니까?”
“필리핀군의 역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되오? 어째서 제대로 된 포위망을 구성하지 않냔 말이야!!”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필리핀군이라고 해봐야, 미개한 놈들이 밥이나 좀 얻어먹으려고 군문에 들어온 놈들이 태반이라 상관의 말도 제대로 못 듣습니다.”
“상관 명령을 안 듣는 것도 아니고 못 듣는다고? 통역 제대로 되는 것 맞나? 지금 농담하시오?”
“이놈들이 영어도, 스페인어도, 타갈로그어도 모르니 어쩌겠습니까. 진짜 못 알아듣는 겁니다.”
필리핀 자치령군을 대표해 항복한 비센테 림 장군은 일본군의 압력과 협박에도 요지부동이었다.
“비센테 림 저자를 당장 처형하고 우리 말을 잘 듣는 놈으로 새로 앉혀야 합니다.”
“내버려 둬. 그걸 누가 모르는 줄 아나?”
“하지만―”
“재수가 없어 1차 대전에 참전 못 했다 뿐이지, 킨 장군의 1년 선배 아닌가. 미 육군 사관학교의 몇 안 되는 유색인종이라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더군.”
“그놈의 킨 장군, 킨 장군. 어차피 미국 장성이면 죄다 선후배 관계일 텐데 무얼 그리 두려워하십니까?!”
“정 죽이고 싶거든 대본영의 승인이나 받고 오시게. 아, 내 이름은 좀 빼주고. 근데 후임으로 앉힐 인사가 있긴 있나?”
몇 번씩 실제로 살해당하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림은 끝까지 살아남아 성공적으로 필리핀군의 보존 및 태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이름에 친일 부역자라는 오명이 완전히 씻겨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는 전혀 그 사실에도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을 뿐.
그리고 일본군의 힘이 약해진 순간.
“때가 되었다. 이제 인내의 시간이 끝났다. 가자!”
“자유 필리핀 만세!!”
좌익 공산 게릴라와 우익 저항군, 아나스타시오가 이끌던 별도의 부대 등 거의 모든 필리핀 내 반일 저항세력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최우선 목표는 미군이 상륙할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미국의 개 같으니라고. 그런 일이라면 우린 빠지고 마닐라를 치겠소.”
“그러시든지.”
물론 매끄러운 협조는 얼마 가지 못했다.
공동의 적을 두었을 뿐,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확실한 점 하나는.
“빌어먹을 아이크. 언제 오나 내가 진짜 죽을 뻔― 어?”
“반갑네, 후배님.”
“…이 전쟁터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더글라스 맥아더가 가지 못할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네. 자. 나랑 팔짱 끼고. 치이즈.”
팡!
무수한 카메라맨들을 바라보며, 맥아더 장관은 아나스타시오를 꽉 끌어안았다.
“우리의 모든 적, 그리고 모든 아군에게 알리시오. 더글라스 맥아더가 돌아왔다고.”
세찬 파도에 바짓자락을 적시며 맥아더는 콘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