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393)
394_청기사 (6)
프란츠 슈미트는 걸신이라도 들린 듯 연신 소시지를 입에 처넣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맛보는 이 놀라운 식감.
그래. 사람은 역시 고기를 처먹고 살아야 한다. 따뜻하건 찹찹하건 무슨 상관이겠나? 아무튼 고기가 입에 들어가고 있는데.
제법 부유하게 살았을 이 집의 주인 일가는 번쩍번쩍 윤기가 흐르는 총구 앞에서 올바른 애국심을 깨닫고 그들에게 집을 내주었다.
가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하나는 제발 짐이라도 좀 싸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세상에. 짐이라니? 지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진 못할망정 짐을 싸겠다니?
“야, 이 되바라진 새꺄. 너 혼자 다 처먹나?”
“니들은 딴 거 처먹었잖아.”
“처먹다니. 오해가 좀 있네. 다 애국이야, 애국. 전쟁터에 나선 군인을 위해 헌신하는 게 무슨 대수라고.”
화약과 진흙 냄새 사이로 다른 냄새가 나는 놈들이 하나둘 지하실로 들어와 오크통 뚜껑을 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고, 프란츠는 그들을 대충 밀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고즈넉하고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을 이 집 정문에는, 감히 독일 민족과 총통 각하를 위해 헌신할 것을 거부한 남정네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러게 마음 좀 곱게 쓰지.”
이제 전쟁터에서 넋이 나가 제정신을 못 차리던 프란츠 슈미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를 겪었는가.
얼마나 많은 적을 이 손으로 죽이고, 살아남기 위해 한 명의 게르만 전사로서 투쟁해 왔는가.
온실 속에서나 살던 나약한 자들이 엄마를 외치며 미쳐버릴 때 그는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으로 굳세게 마음을 다졌다.
적의 끝없는 포탄 세례와 무한한 듯한 폭격 앞에서 운 없는 자들이 무수히 죽어나갈 때도 그는 하늘이 돌보듯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는 일에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야 총통께서 교시한 약육강식의 이치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지금까지 죽은 자들은 모두 약자였고, 강자인 그가 약자들에게서 취하는 건 자연이 굴러가는 원리원칙이었다.
문득 그는 집 위층 창문 너머로 여자들이 흐느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울면서도 쳐다보고 있는, ‘저는 미군의 간첩입니다’ 팻말을 목에 건 채 매달린 집주인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꼭 집에 있을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남자.
우리 가족은 다르다.
저렇게 될 리 없다.
적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이 촌구석에 웅크려 미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저 가족과, 그래도 베를린에서 먹고살던 우리 가족이 같을 리가 없잖은가.
총통께서 최후의 부대를 일으켜 연합군을 싹 쓸어버리고 나면, 그는 위풍당당하게 아버지보다 더 급수 높은 훈장을 가슴팍에 매단 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아버지는 아들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알고 연신 감탄하며 비로소 마음을 고쳐먹고 옳은 길로 돌아올 테고, 어머니와 동생 또한 그의 노고에 보답을 받아 훨씬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지.
그걸 위해서라면.
그는 이 지옥에서 더 싸울 수 있었다.
***
“이러다 뒈지겠네.”
“뒈지긴 뭘 뒈지나. 이미 반쯤 뒈진 거 같은데.”
“남은 절반도 조만간 뒈지겠다고, 이 자식아.”
콘라드 슈미트는 연신 쌍욕을 중얼거리며 묵직한 M1 개런드를 매만졌다.
이 망할 군복을 입으니 절로 옛날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그 옛날처럼 배는 끊임없이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고, 몇 년을 회춘하기라도 한 건지 뇌를 거치지 않고 연신 질펀한 욕이 튀어나와 혀를 조심해야 했다.
“뒈지면 집에 못 돌아가잖냐. 애가 둘이라며?”
“한 놈은 모르겠네. 친위대에 자원 입대했거든.”
“애비한테 물려받은 가락이 있으니 잘 살아 있겠지. 아니면 따뜻한 포로수용소에서 미제 스프라도 받아 먹고 있거나.”
“그럼그럼. 그놈이 그래도 꾀가 있어서 어디 가서 죽을 놈은 아냐.”
콘라드의 눈에 저 멀리 건물 모서리에서 알짱알짱 고개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미군 한 명이 보였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준.
격발.
탕 소리와 거의 동시에 그 미군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고, 순식간에 피와 뇌수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지금.”
그 양키의 동료들이 총에 맞은 전우를 붙들려고 밖으로 뛰쳐나왔고,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탕! 타탕!
콘라드의 손에 죽었던 이 바로 옆에 또 한 구의 시체가 생겨났고, 연신 쏟아지는 총탄에 미군은 시체 수습을 포기하고 도망쳤다.
“늙었다고 투덜대더니, 총질 잘하는데?”
“총이 잘 맞네. 미제가 좋긴 좋구만.”
국민돌격대라는 이 웃기지도 않는 부대는 어째 총부터 자급자족을 해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시체 파먹는 쥐새끼처럼 야금야금 무기와 군장을 하나하나 챙긴 끝에, 콘라드는 전신에 미제 군수품과 죽은 독일군의 그것을 휘감고 다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지난 대전쟁에서 양키들이랑 싸워봤다고 말했던가?”
“아니?”
“뫼즈-아르곤. 좆같은 곳이었지. 그때도 미군 놈들은 싸우는 법은 모르는 주제에 무슨 아편 빤 새끼들처럼 악을 쓰고 달려들더라고.”
다시 한번 총성.
이번엔 빗맞았다.
“그 새끼들은 무슨 요술 램프라도 얻었는지 사람도 물자도 징글징글하게도 쏟아지던데, 이제는 예전보다 더 잘 싸우는 거 같아.”
“그냥 우리가 늙은 게 아니고?”
“늙기는 뭘 늙었다고. 내가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셋째 하나 뚝딱 만들 수 있어, 짜식아.”
“아침에 서 있는 걸 못 봤는데. 아직 서나?”
“그럼. 이 총보다 더 단단하고 올곧게 선다고.”
타타탕!!
그들이 있던 창문 방향으로 미군이 연신 총탄을 갈겨댔고, 콘라드는 부리나케 몸을 옆으로 돌려 그 섬뜩한 총알의 파도를 피했다.
“야.”
“마, 맞았어. 빌어먹을.”
“있어 봐. 의무병 불러 볼 테니까.”
“틀, 렸어. 쿨럭, 쿨럭! 배때기에, 하, 옘병. 재수도, 재수도, 없네.”
그는 죽어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맞은 부위가 좋지 않다. 엄청난 기세로 피가 쏟아져 바닥이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저건 5분도 걸리지 않을 터였다.
“많이 아프냐.”
“어. 존나, 숨이 안, 안, 쉬어, 쉬어져.”
“도와줄까.”
“아니. 내, 손에, 모, 모, 목걸이.”
그는 조심스럽게 엎드려 핏물을 헤치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벗긴 후, 마찬가지로 시뻘겋다 못해 꺼먼 피로 범벅이 된 오른손에 들려주고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 자식들, 집, 기억, 하나?”
“그래.”
“돌아가면, 소식좀, 좀, 좀, 전해, 전.”
“전해주마. 쉬어라.”
“먼저 간다. 넌 오지 마라.”
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클라라.”
그의 부인은 과연 저 마지막 단말마의 목소리를 꿈에서나마 들을 수 있을까.
콘라드는 천천히 죽은 이의 눈을 감겨주고, 그의 허리춤에 있던 수류탄과 탄창을 챙겼다.
“이 꼴을 먼저 보고 싶어서 군에 갔더냐, 못난 놈아.”
그래도 친위대는 나치 새끼들이 제법 챙겨준다고 하니, 그처럼 거렁뱅이가 되어 시체의 품을 뒤질 일은 없을 거다. 하인리히 힘러가 아무리 버러지 같은 인간이래도 제 따까리들은 잘 챙기겠지.
“아저씨, 괜찮아요?”
“뭐가?”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무덤덤하시길래.”
그의 아들내미보다 두 살인가 더 나이가 많다던 젊은이가 달달 떨면서 묻는 말에,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무덤덤한 게 아냐. 그냥, 익숙해져 버린 거지.”
“익숙···.”
“이런 거에 익숙해지면 정신이 망가져버린다. 너희처럼 어린 친구들은 견디긴 하되 익숙해지진 말려무나.”
전쟁이 끝난 뒤, 오랜 고생 끝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집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 눕기만 하면 그 천장에는 함께 싸우다 먼저 간 전우들의 머리통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수십 년이 지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 머리통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지만.
이제 그들은 새 머리통과 합류해 지금 그의 머리 위를 다시금 배회하고 있었다.
다 잊었나 했는데, 그때 먹던 짬밥부터 죽은 이들의 얼굴까지 어찌 이리 하나같이 어젯일처럼 선명하단 말인가.
“탱크!! 탱크다!!”
“미제 전차다!!”
우르릉거리는 소리. 바닥 다 갈아 엎어지는 소리.
강철의 사신이 그 거대한 주둥이를 번뜩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어쩌죠?”
“어쩌긴.”
“총알이 전차를 뚫진 못하잖아요?!”
“아군을 믿어야지.”
쿠웅!!
어디선가 홀연히 날아온 판저파우스트 한 발이 전차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순식간에 사신은 거대한 캠프파이어로 전락해 새빨간 불꽃덩어리로 변모했다.
“아아아악!!”
“카아아아악!!”
“꼬맹아.”
“전 꼬맹이 아닌ㄷ-”
“그럼 저 친구들한테 한 발 좀 꽂아 봐.”
“내버려 둬도 죽을 텐데 쏘라구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그거뿐이니까.”
“······그러죠, 뭐.”
청년은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총을 겨냥하고, 발사했다.
온몸을 버둥대며 결코 꺼지지 않을 불길을 끄려 용을 쓰던 미군 병사는 마침내 움직임을 멈추고 쓰러졌다.
“이게 예의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새끼들에게 예의를 차리라고요? 뭐가 좋아서요?”
“그냥 아저씨 말 좀 들어라. 밤에 누워서 조금이라도 편히 자고 싶으면.”
이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만프레드.”
“제 이름은 오톤데요. 오토 마이어요. 이 아저씨, 사람 이름도 안 외우셨네. 제가 아저씨 목숨도 한 번 구해준 것 같은데-”
“너도 내 나이쯤 먹어봐. 오토든 만프레드든 그게 그거잖아.”
“전혀 안 비슷하거든요?”
“1주일만 더 살아 있어봐. 그럼 이름 외워줄게.”
목이 칼칼하다.
수통에 입을 댄 그는 더 이상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조금 전 죽은 이에게 다시 다가간 콘라드는 수통도 챙겼다.
피범벅이 된 그 수통도 비어 있었다.
***
서쪽에서 푸른 물결이 독일의 문지방을 넘고 안방을 향해 한 땀 한 땀 전진해 올 무렵.
동부 전선에서도 붉은 물결이 모든 것을 휩쓸기 시작했다.
“총퇴각! 퇴각하라!”
“가진 물자를 모두 파기하고 후퇴한다! 물러난다!”
총통의 후퇴 금지령, 그리고 공세 명령이 결정적이었다.
– 소련군은 단숨에 전장을 너무 넓혔다. 지금이야말로 공세 기회다!
– 서방 국가들은 의사결정이 신속하지 못해 우리가 전과를 거두었어도 협상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터. 하지만 독재자인 스탈린은 언제든지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면 협상 테이블에 나올 수 있다! 스탈린을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공세를 해야 해!
총통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머리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방과의 협상 운운하던 그는 이제는 또 스탈린과의 협상을 논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조각 남은 신뢰마저 스스로의 손으로 지워버리는 꼬락서니.
이 미친 명령을 막기 위해 움직였던 자들은 모조리 해임당했고, 결과는 참혹했다.
마침내 독일의 본토이자 성역인 동프로이센에 소련군이 당도한 것이다.
“이것 좀 봐.”
“독일인들 사는 집 좀 봐!”
“세상에. 이게 뭐야.”
지상에 도래한 지옥, 동부 전선을 구르던 이반들은 동프로이센에 당도하자마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정신적 충격을 맛봐야 했다.
아늑하고 따뜻한 벽돌집.
아무 집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보이는 각종 가재도구와 라디오.
“이상해. 이런 거 이상하다고.”
“정신 차려.”
“독일인들은 대체 왜? 왜 우리한테 쳐들어온 거야? 이렇게 잘 살면서, 모두가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면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 전쟁을 일으켰냐고! 왜! 이 개새끼들아! 이 시발놈들아!”
“꺄아아악!!”
소련군은 새로이 발을 들인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광범위한 징병을 개시했다.
물론 이들의 징병 시도에 당연히 반발이 있었지만, 이미 소련군은 막강했고 그 모든 반발을 찍어누를 힘도 있었다.
“징병 시도에 저항하는 반동 소굴은 모조리 지워버리게.”
크렘린의 도장이 찍힌 명령서는 면죄부가 되었고, 얼마 전까지 독일에 부역해 소련을 침략할 물자와 장정을 내놓던 마을들은 이제 새 정복자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만 했다.
하지만 소련군 또한 조급하긴 매한가지.
“더 빨리 진격할 순 없나?”
“서기장 동지. 이 이상 나아가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예상됩니다.”
“앞으로 내 앞에 올라오는 보고서에서 사상자나 피해에 관한 부분은 모두 지워버리게.”
서방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답은 NO였다.
“우리가 독일과 폴란드를 짓밟지 않는다면 서방의 모험주의자들이 헛짓거리를 할지도 몰라. 반드시 이를 저지해야 하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동지!”
아직 소련은 더 희생할 수 있었다.
결과만 나온다면, 희생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