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Haired U.S. Army Marshal RAW novel - Chapter (450)
451_겨울의 시작 (4)
맥아더 대통령 당선이라는 거대한 폭풍은 전 세계 사방으로 그 영향을 미쳤다.
붉은 혁명의 심장, 모스크바라 해서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강경 반공주의자가 4년간 미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것도 전직 군인 출신. 누구보다 폭력에 익숙할.
‘사상의 조국’을 위해 워싱턴 D.C.의 각종 첩보를 전달해 주는 동지들의 메시지는 이 불안감에 기름을 끼얹었다.
[맥아더는 취임 직후 을 발표할 예정.] [맥아더 대통령은 세계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으로 추측되며, 군사 개입 또한 옵션 중 하나로 고려 중.] [맥아더, 유진 킴 대원수와 회동. 그 직후 월레스와 킴 회동.] [중국 내전, 그리스 내전에 대한 개입 논의.] [극동 방면에서 군사적 이동 관측됨.]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다.
사실 스탈린과 그를 따르는 이들로서는 감히 크렘린의 지령에 간을 보면서 제멋대로 구는 여타 공산주의자들이 뒈지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보다 솔직하게 토로하자면 차라리 남의 손에 죽는다면 웃음을 터뜨릴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 공산주의의 본산인 소련은 그들이 정말 뒈지도록 팔짱만 끼고 있어도 그 영도력에 스크래치가 나지 않는가.
판을 엎어야 한다.
스탈린의 다음 착수는 극동이었다.
* * *
미군 점령지.
경성.
대한민국 과도정부의 수립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시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는 말 그대로 폭발하고 있었다.
군정청은 최우선 현안 중 하나로 라디오의 대대적인 도입을 추진했고, 미군이 들고 왔던 방송 장비는 고스란히 이 땅에 남아 방송국의 새로운 근간이 되었다.
동네 시장통이나 시내 거리엔 까막눈들을 위해 신문 낭독해 주고 돈 받는 이들이 먹고살았고, 사람들은 새 소식이 뭐가 없나 낮이며 밤이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군정청의 교육 사업을 총괄하게 된 김유인은 그 휘황찬란한 후광 때문에 사실상 언터처블로 군림했고, 예산을 벗어나는 일에는 본인 호주머니에 꽂혀 있는 막대한 달러까지 거침없이 던져대며 대대적인 교육 정책을 폈다.
“단 6년, 초등학교 6년 만이라도 애들을 학교에 보냅시다.”
“교과과정은 미리 짜놓은 게 있습니다. 교과서도 다 찍어 놨습니다. 그냥 이대로 쓰면 됩니다.”
“애들을 학교에 보내면 점심밥을 줍니다! 먹는 입 덜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사범학교를 더 늘려야 합니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이들 중 야학에 참여할 분이 더 없는지 적극 독려해 봅시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일단 이 나라를 좀먹는 문맹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한글이라는 이 경이로운 문자를 가진 나라가 문맹률이 80%라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는 게 웬 말이냐!”
“까막눈으로 살다간 또 눈 뜨고 코 베인다!”
시민단체들 또한 이에 호응해 거국적인 문맹 퇴치 운동이 전개되었고, 가로쓰기가 법으로 못 박혔으며,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신문과 잡지에 국한문혼용을 금지하고 오직 한문병기만을 허가했다.
“아니, 한자를 금지하는 건 대체 무슨 발상이랍니까?”
“김유인 박사. 박사가 미국에서 오셔서 잘 모르시나 본데, 한자가 없으면 한글만으로는 뜻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전 한자를 금한 적이 없습니다. 한자가 필요하면 병기를 하라니까요? 왜 그리 한자를 못 잃어서 안달이십니까. 꼭 대중들이 신문을 읽게 되면 뭔가 불편해질 것처럼 구시는군요.”
“이건 인신공격입니다!”
그야말로 불도저.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사람은 모름지기 배워야 한다’는 명제는 소작농 춘식이조차 고개를 끄덕일 진리.
이 불도저를 저지하려던 몇 안 되는 용감한 반대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이내 방송국 스튜디오로 끌려 나와 전 국민이 듣는 가운데 미국 명문대 교육학 박사에게 잘근잘근 밟히며 영혼까지 털려버렸다.
이제 더 이상 착취는 없다.
노력하면 잘 먹고 잘살 수 있다.
독립전쟁으로 자신감이 붙고, 토지개혁으로 자신의 땅마저 되찾은 이들이 나랏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당연한 일.
모두의 시선이 대한민국 신정부 수립을 향해 쏠리는 가운데.
최근 들어 어마어마한 골초가 되어버린 허가이는 급속도로 몸에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타가 공인하는 친소파.
모스크바에서 대학까지 졸업한 이 나라 최고의 엘리트 중 한 명.
그의 권위는 결국 모스크바로부터 비롯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와 이어진 끈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거세될 팔자.
그런 그에게 크렘린의 지령이 떨어졌다.
[조선반도의 신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노동자, 농민을 규합하여 좌익 총투쟁에 나설 것.]총투쟁이라니.
대통령 선거는 모르겠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충분히 과반 집권도 노려봄 직한 노동당이 총투쟁에 나서라니?
무척 무례하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지만 그는 다시 한번 당의 지령을 청했고, 다시 받은 대답은 너무나도 뚜렷했다.
[조선에 설립될 신정부는 겉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 실상은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며, 예브게니 킴과 미 제국주의자들의 괴뢰로 기능하리라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지고 있다.특히 새로이 집권할 맥아더는 강경 반공주의자로 중국의 공산 혁명에 개입할 의사가 명백하며, 크렘린은 조선 신정부가 미제의 앞잡이로서 내전에 개입할 가능성이 크다 보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 소비에트 연방은 갓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이 또다시 강대국의 놀음판에 휘말려 피를 흘리게 되는 불상사를 극구 피하고자 하기에, 지금이야말로 조선 인민의 단결된 힘으로 괴뢰의 주박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정부 수립을 파행으로 이끌 것.]
당의 명령은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이제야 막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 나라가 국공내전이라는 지옥도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혁명을 일으켜서라도 저 개미지옥에서 벗어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역시 모스크바의 판단은 옳다.
하지만 완벽하게 자기합리화를 끝낸 허가이조차 현실의 벽 앞에서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어야만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당조차 완벽히 장악하지 못했다. 당장 당수부터가 여운형이잖은가.
게다가 당내 공산주의자들조차 허가이 그 자신이 있는 소련파, 모택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연안파, 그리고 양 파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 인사들도 있었다. 이래서야 무슨 총투쟁을 하란 말인가.
다만 반대로 보자면, 여태까지 무력 투쟁에 가장 반대해 온 것이 소련파였던 이상 그들이 오케이하는 순간 공산 계열은 의견의 일치를 보는 셈.
결단을 끝낸 뒤 그의 행동은 신속했다.
“투쟁합시다.”
“어이쿠, 크렘린의 개목줄 주인이 생각을 바꾸셨나 보지요?”
“그래서 안 할 거요? 조선의 아들들이 중국 공산당 동지들을 향해 총을 쏘게 내버려 둘 생각이오?”
“당신네들이 언제부터 모택동 동지를 동지로 생각했는진 모르겠다만… 지금으로서는 손을 잡아야겠지요.”
아니나 다를까, 연안파 또한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으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는 건 매한가지.
나라를 엎어버리기로 합의한 후엔 일사천리였다.
“일제를 상대로 투쟁하던 의용병들 상당수가 그대로 자유대한군단에 투신, 지금 대한경비대와 경찰에서 일하고 있소.”
“부르주아지들이 설마 그걸 모르겠소?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들 먼저 쓸어낼 게요.”
“그리고 신분을 숨긴 채 잠입한 이들 또한 있지요. 놈들이 숙청을 끝냈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신념으로 무장한 이들이 총을 거꾸로 잡고 저들의 등을 찌를 것이오.”
무력 탈취.
“항만 노동자들은 군정청과 자본가들, 밀수꾼 사이에 끼어 곤욕을 치르고 있소. 이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일으킵시다.”
“철도 노동자들도 파업한다면 군의 이동을 틀어막을 수 있을 텐데, 어떻소?”
“왜놈 기술자들이 여전히 군정청의 면죄부를 받고 뻔뻔스레 제자리에서 일하고 있잖소? 쪽바리를 몰아내라는 명분이라면 대중 지지도 등에 업을 수 있을 것 같소만.”
“민족 정기 수호라는 명분이라면 공단 노동자들도 총파업에 가담시킬 수 있겠구료.”
파업 계획.
“군수공장에서 무기도 빼돌립시다.”
“중국으로 가는 밀수로 위장해 군수물자를 확보할 수도 있겠어.”
“우리가 비트에 숨겨 놓은 화기도 제법 남아 있습니다.”
무장 마련.
“지금 곧장 무력 봉기를 하면 명분이 없소. 먼저 자문위원회를 비롯한 의회 내에서부터 우리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해야 하오.”
“노동당 하나 장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말이오?”
“당내 회색분자들은 어차피 여운형을 제외하면 피라미들, 그의 카리스마에 따라 움직이는 허수아비들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현상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여운형을 제거합시다.”
“당신 미쳤소?!”
“나는 놀랍도록 제정신이오. 김구 그 작자가 부리는 똘마니 중에 우리 동지 몇이 숨어 들어가 있소.”
김구의 이름을 내세운 의인이 여운형을 암살한다면?
군정 당국이 제아무리 좌우합작과 협치를 내세웠다 한들, 여운형이 하루아침에 시체가 되어버리는 순간 좌우합작은 잿더미가 되고 여론은 동요하리라.
노동당 장악에 걸림돌이 되는 여운형을 치우면서 동시에 명분까지 만든다는 이 매력적인 제안에, 자리에 있던 이들은 전원 동의했다.
“그러면 제일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김유진.”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조선인.
그 이름 석 자의 무게 앞에 혁명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들조차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뜻밖에도 가장 덤덤한 것은 허가이였다.
“그자라면 우리가 해결할 수 있소.”
“어떻게?”
“일본 공산당 또한 우리와 발을 맞추어 전면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에 돌입할 테니까. 제국주의자들의 시점에선 조선보다는 일본이 더욱 중요하니, 그곳의 동지들을 모두 짓밟기 전엔 김유진도 쉽게 거동하지 못할 터.”
김유진은 서서히 조선 땅에서 발을 빼 일본을 제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건전한 민주주의 수립을 위해 외국인인 그는 빠지는 것이 옳다’는 겉치레를 내세우긴 했으나, 이 먹을 것 없는 땅은 제 부모와 형제, 그리고 졸개들을 내세워 대리 통치하고 본인은 노른자위인 일본에서 크게 해먹겠다는 추악한 발상이란 게 너무나도 뻔하지 않은가.
어쨌거나 그가 사실상 일본 통치에 집중하고 있고 심심하면 태평양을 오가는 지금, 일본 열도에서마저 대대적인 궐기가 이루어진다면 천하의 김유진도 동시에 손을 쓰긴 어려우리라.
“하나 더 논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뭡니까?”
“포섭해야 할 인물이 있소. 박상희 말이오.”
몇몇 사람들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족보를 따지자면 박상희는 미국 땅에서 무려 박헌영과 함께 행동하던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혁명의 붉은 깃발이 오르는 순간 동참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라.
하지만 박헌영은 어느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고, 박상희는 몇 년간 억류되어 있다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그는 노동당에 입당은 하였으되 당내 어느 계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계몽운동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변절자 아니오?”
“변절했다면 대놓고 김가의 편에 붙거나 하다못해 여운형 밑으로 갔겠지요.”
“우리가 궐기한다면 우익 놈들이 박상희를 살려 둘 리가 없습니다. 목숨이 아깝다면 우리 쪽으로 붙지 않겠습니까.”
“그 동생은 어쩌고? 김유진의 개잖소!”
“애초에 제 형을 구명하겠다고 입대한 잡니다. 박상희를 거쳐 그 동생을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대한경비대를 고스란히 혁명의 전위대로 쓸 수 있어요!”
성공했을 때의 메리트가 너무나 크다.
이들의 혁명 계획은 점차 그 모습을 뚜렷하게 갖춰나가고 있었다.
다만 불행한 점이 있다면.
“장군님. 긴급한 판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교차검증은?”
“아직 우리 정보원이 저 회합에 가담할 만큼 고급 자원은 아닙니다만, 노동당 내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대단히 활발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군 정보 당국과 OSS는 바로 지금을 기다리며 도청을 비롯한 첩보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단 사실.
“대원수께는 내가 직접 보고를 올리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들이 포섭 대상으로 거론하는 인물… 조니 팍 사단장인가?”
“그렇습니다. 친형인 생-히 팍 또한 저희의 요주의 감시 인물로, 거물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잘만 하면 그림이 아주 예쁘게 나오겠는걸.”
새 대통령 각하께 바칠 취임 축하 선물로 너무나 완벽한 초이스 아닌가.
미군 또한 이 나라를 저 배은망덕한 빨갱이들에게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