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190
제 190화
66장. 성동격서의 계책 – 1화
조용했다.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대미궁 지하 25층에는 기척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변한 것도 없었다.
타천사 가즈넬라의 죽음으로 열린 차원문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저 차원문으로 들어가면 대미궁 밖으로 이동하게 된다.
다만 아직 자레드가 자고 있어 클로이는 조용히 그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쌀쌀한 공기 탓에 추워하는 자레드를 보며, 주변에 모닥불을 제법 많이 피워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 동안 보스 방 전역을 샅샅이 뒤져 시체를 찾았다.
그리고 10개의 아티팩트를 챙겼다.
다만 클로이는 아티팩트의 가치에 대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깨어나면 자레드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그리고 욕심내지 않았다.
이 아티팩트는 전적으로 자레드를 위한 보상이라고 생각했기에.
‘자레드 님은 아티팩트를 볼 때마다 꼭 눈에 뭔가가 보이는 것 같았어. 누구에게 가장 쓰임새가 좋을지, 그런 정보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느낌.’
클로이는 늘 그것이 신기했다.
꼬치꼬치 물을 수 없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지만, 아티팩트 속의 뭔가를 꿰뚫어 보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자레드의 안목을 신뢰하기에 그의 옆에 쌓아 둔 아티팩트에 대해서는 관심을 거뒀다.
만약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아티팩트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늘 자레드가 알아서 챙겨 주기 때문이다.
“음…….”
곤한 잠에 빠진 자레드는 입맛까지 다셔 가며, 잠의 달콤함을 즐기는 듯했다.
다행인 것은 쓰러지기 전에 스스로 응급처치를 해 둔 덕분에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클로이가 30분 정도 전에 챙겨 왔던 회복 포션 하나를 먹인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조용히 회복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곁에서 지켜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앉아서 골똘히 자레드만 바라보던 클로이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자레드를 향해 걸어갔다.
스으윽.
“…….”
누워 있는 자레드의 앞에 멈춰 선 클로이가 몸을 낮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모든 게 완벽해.”
그리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레드에게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마음속에 너무 오래 담아 두고 있던 나머지, 자연스럽게 나와 버린 진심이었다.
외모도 뛰어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클로이는 자레드의 모습 하나하나가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그 감정을 한곳에 모으니, 연정(戀情)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클로이도 연애소설이니 하는 것들을 읽은 적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클로이에게 연애소설은 그저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허구가 담긴 헛소리의 집합체였다.
잠들어 있는 연인을 보니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는 표현도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감정이 그러했다.
모든 것이 무방비 상태가 된 자레드에게 ‘무엇이든’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짧은 키스?
아니, 그 이상의 깊은 스킨십에 대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지 부끄러울 정도로!
정답은 하나였다.
좋아하니까. 마음이 있으니까.
그와 다양한 교감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클로이는 이제야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고 명확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항상 격하게 끓어오르던 감정을 차갑게 식도록 만드는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이 그레이 엘프라는 것.
언젠가는 동족의 곁으로 돌아가 인간과 떨어진, 엘프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인간 여인네들처럼 순수하게 사랑에 빠져 버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주르륵.
영문을 알 수 없는 괜한 눈물이 났다. 답답함? 아마도 그런 감정이겠지.
“…….”
클로이는 말없이 자레드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자레드가 잠든 틈을 타 태어나서 가장 과감하게, 그리고 진심을 담아 보내는 애정 표현이었다.
키스.
그것은 연인의 손길처럼 따뜻하고, 맛 좋은 떡처럼 쫄깃쫄깃하면서, 향 좋은 꿀을 맛보는 것처럼 너무나도 달콤했다.
……쪽. ……쪽.
적막 속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을 몰래 삼키는, 숨길 수 없는 속삭임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클로이는 자레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 *
[신체에 누적된 대미지가 목걸이의 신묘한 힘을 억제합니다.] [비정상적인 생체 신호가 감지됩니다. 수면욕에 대한 통제가 강제로 해제됩니다.]‘내가 어지간히 몸을 혹사하기는 했군. 하긴, 환희의 찬미나 대회복을 쓸 생각으로 가즈넬라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아 냈으니.’
눈을 뜬 나는 그대로 쓰러진 나머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정보창의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고르자스의 목걸이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푹 잠이 든 덕분에 힐 마법과 치유 포션의 효과가 몸 전체로 퍼져 나갔으니까.
눈을 떠 보니 몸이 가벼웠다.
쓰러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환희의 찬미를 쓴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환희의 찬미] [본인에게 사용 가능합니다.]그대로였다.
“괜찮으세요?”
그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이였다.
다만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1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계속 거기 있었어?”
“네.”
“미안해. 내가 대책 없이 뻗어 버려서, 클로이 네가 무료했겠네.”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대답과 동시에 클로이가 고개를 휙 돌렸다.
삐진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클로이가 무사하니 다행이었다.
혹시 그사이에 무슨 변수가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저는 잠시 주변 구경을.”
파팟.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에서 클로이가 사라졌다.
내가 옷매무새도 엉망인 데다가 옆에 모아 놓은 아티팩트의 상태도 살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는 모습이었다.
일단 그녀가 모아 둔 아티팩트는 모두 아공간에 넣었다.
왕도로 돌아가면, 동료와 신하들을 위해 적재적소에 배분할 생각이었다.
아공간에 넣으며 살짝 살핀 결과, 마력이나 지혜와 관련된 아티팩트는 없어 보였다.
내 몫이 될 아티팩트가 없으니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아티팩트의 급수가 높지도 않았고.
나는 우선 상태창을 열어, 내 스탯부터 확인에 들어갔다.
그간 알뜰살뜰히 칭호와 가호를 챙기고, 수련법으로 올린 몸 상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레벨업으로 얻은 잔여 스탯은 전부 마력에 투자한 뒤, 바로 확인을 이어 갔다.
[자레드 – Lv. 245] [근력 : 935][체력 : 600] [마력 : 30,583][지혜 : 1,535] [민첩 : 390][매력 : 480] [물방 : 1,255][마방 : 2,259] [신성력 : 550] [잔여 스탯 : 0]‘마력 3만! 이제 무디두스의 기도까지 합치면 6클래스 마법도 데큐플 트랜센던스가 가능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마력의 성장이 눈부셨다.
트랜센던스의 최종 단계가 바로 10단계인 데큐플이 아니던가? 초월 마법의 끝의 끝이다.
드디어 6클래스라는 현재의 내 수준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 화력을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법 방어력도 이제 4클래스까지는 사실상 면역에 가깝고, 5클래스 마법에 대한 대응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춘 것이나 다름없어.’
물방, 마방이 정말 든든했다.
물리 방어력도 1천이 넘어가게 되면, 어지간한 화살 공격 정도는 작은 생채기 수준으로 끝난다.
또한 지혜 스탯은 곧 1600.
이 정도라면 동급 마법사 – 지혜 400 정도의 마법사 – 에 비해 3.5배가량의 화력을 낸다.
‘레벨 5만 더 올리면 다음 심안 능력도 개방이 될 테고, 55를 더 올리면 초월급 아티팩트인 안젤루스 링이 특전으로 주어지지.’
내 상태와 실력, 위치가 확실하게 파악되니 기분이 좋았다. 아울러 동기부여도 확실하게 됐다.
지금의 내 스탯이라면 8클래스 마법사와도 충분히 호각세로 싸워 볼 수 있다는 계산이 선다.
클래스는 두 단계 뒤처지지만, 다른 부분에서 확실하게 커버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내게 있어 4클래스 이하의 마법사들은 한 명이든 백 명이든 잔챙이 수준이야.’
‘당사자’들이 듣는다면, 섬뜩할 수 있을 계산도 확실히 섰다.
단언컨대.
어지간한 마법사로는 내 앞길을 감히 가로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충분히 승부수를 던져 볼 수 있겠어.”
나는 그간 남몰래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나만의 ‘전쟁 계획’이 이제야 승산이 있겠다는 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은 돌아가서 진행할 일.
이제 대미궁에서의 볼일은 끝났으니 돌아갈 때다.
* * *
왕국으로 바로 복귀하기에 앞서, 나는 잠시 신데르스 왕국에 들렀다.
물론 통보도 없이 불쑥 방문한 것은 아니고, 이즈엘과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통신석을 썼다.
이 통신석은 자신을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연락하라며 이즈엘이 내게 준 연락 수단이었다.
그래서 통신석으로 방문을 알린 뒤, 신데르스 왕국 외곽에 위치한 별장에 미리 들어와 있었다.
클로이는 별장 밖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눈치껏 이즈엘과의 자리에서 빠져 있는 상태였다.
우우웅.
이내 소환음이 들렸다.
동시에 내가 있는 제법 큼지막한 특실 안의 소환 마법진에서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한 명은 눈에 익은 이즈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데르스 마법사단’의 수장 레피니티였다.
레피니티는 나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예를 갖춘 뒤.
“그럼 신은 잠시.”
“그렇게 해 주시오.”
이즈엘에게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
국왕과 국왕의 자리.
은밀한 만남의 자리에 제3자의 자리는 없었으니까.
“대왕, 오랜만입니다.”
이즈엘이 먼저 나를 반겼다.
“못 본 사이에 더 멋져지셨군요. 대왕,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나도 그를 반겼다.
서로가 서로를 대왕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이 사뭇 어색하기도 했지만, 당연한 지칭이기도 했다.
이제는 이즈엘이니 자레드니 하는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는 없으니까.
“대왕.”
“말씀하세요.”
카이클의 시신을 인계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오늘 이 자리만큼 친서보다 확실하게, 그리고 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없을 테니까.
“우리 크리비아 왕국은 곧 전쟁에 돌입할 예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왕국은 당연히 협력할 것입니다. 말루스, 보누스 왕국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는 없지요.”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수순이다. 나도 알고 이즈엘도 알고, 심지어 적국이 될 그들도 알고 있을 뻔한 노림수.
그때, 나는 새 이름을 꺼냈다.
“다가오는 9월. 우리 왕국은 파우페르 왕국을 칠 것입니다.”
“에, 뭐라고요……?”
그 순간, 이즈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성동격서의 계책.
우리 왕국을 살피는 모든 시선이 온통 보누스 왕국과 말루스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내가 꺼낸 선택지는 제3의 국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