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74
아무렇게나 뒹굴며 살아온 인생이 장부의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서야 되겠냐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은 어찌할 수 없었다.
적엽명은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은 다음 한백에게 말을 건넸
다.
“한장군은 몸을 운신할 수 없으니, 참 복도 많은 사람이
오.”
“작은 복은 일구어 내는 것이고, 큰 복은 하늘이 내리는 것
이라 했습니다. 이게 전부 부지런히 화살을 맞은 노력의 결과
가 아니겠습니까. 노력은 했지만 사실 맞을 때는 무척 아팠어
요.”
“하하하!”
좌중에 모인 사람들은 적엽명의 뜻을 알았다.
그는 하기 힘든 말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게다.
“황유귀, 너한테는 힘든 일만 부탁하게 되는데……”
“괜찮아.”
황유귀는 착잡해지는 마음을 억누르고 웃어주었다.
적엽명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서신을 집어들고 황유귀가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걸…… 광서(廣西) 태평부(太
平府)까지 전해줘야겠다.”
“젠장! 정말 더럽게 어려운 일이군.”
적엽명은 황유귀의 손에 서신을 건네주며 손을 꽉 잡았다.
“조심해라. 너를 잃고 싶지 않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말고 너나 조심해. 관장군에게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해남도에 갇혀 살던 올챙이에게 큰 세상을 보게 해
주려는 우정이다.”
“그런 우정 두 번만 받았다간 뼈마디도 못 추리겠다.”
“그리고…… 무사히 다녀온다면 노인이 되라. 너에게 어울
려.”
“젊은 놈이 노인 소리 들으면 좋기도 하겠다.”
“하하하!”
적엽명은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일일이 손을 잡기도 하고, 어깨를 얼싸안기도 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고름은 짜내야 합니다. 비가를 몰락시킨 원흉과 공적인 원
수가 같은 이상…… 쳐야겠는데, 가는 사람은 나와 화장군입
니다.”
모두들 ‘미쳤어!’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두려웠던 말이 튀어
나오자 새삼스럽게 당황했다.
적엽명이 한혁을, 화문이 한광과 부딪친다는 말인데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인가. 적엽명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반반이지만 화문은 생죽음을 당하라는 소리와 같지 않은가.
단 둘이 간다면 한혁 쪽에서도 무리를 지어 덤비지는 않을
테지만 상황이 불리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
허나, 딱히 방법이 없다.
“아버지와 힘을 합하는 게 어때?”
유소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가주는 적엽명을 극도로 미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사로
운 감정으로 일을 해결하려 들어서는 안 되는 처지. 힘을 합
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으실 게다.
적엽명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내가 가주님과 힘을 합한다면 유가 대 해남파의 싸움이
돼. 그건 아니잖아?”
“그럼 화장군님 대신에 내가 갈게. 아냐. 나도 갈 거야.”
화문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말일 수도 있다. 허나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검을 들고 맞선다면 유소청을 이
길 자신이 없다. 무공면에서는 그녀가 한 수 위임이 분명하
다.
“하여간 고집 하나는 알아준다니까. 형님, 저 앞으로 고생
하겠죠?”
“……”
청천수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몸만 성하다면…… 유소청이 가주기만 하면 한결 마
음이 놓이겠지만 위험이 너무 많은 길이다. 어쩌면 한혁을 만
나기도 전에 난전(亂戰)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죽
을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소청, 우리가 같이 가면 염왕이 외로워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좀 마. 내가 말했지. 이제 세상
끝까지라도 따라가겠다고. 난 따라갈 거야. 더 이상 말하지
마.”
유소청은 두 손으로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손을 풀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 뭐. 따라오지 말라는데 억지로 따라갈 만큼 자존심
없는 여자로 봤다면 큰 오산이야. 흥!”
느닷없이 돌변한 유소청의 태도에 모두 어리둥절했다.
적엽명만이 이유를 짐작했다.
유소청 옆에 한백이 앉아있다. 그는 분명 모종의 계략을 일
러줬으리라.
모두들 돌아가고 적엽명과 송지만이 남았다.
“할 말이 뭐죠?”
송지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쳐 나왔다.
언뜻 들으면 평상시의 말투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
에게든 톡 쏘듯이 말하니까. 허나 적엽명은 말속에 포함된 살
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석두 형과 나의 비무는 정당했소.”
순간 송지의 안색이 흙빛이 되어 굳어졌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아내의 입장에서는……”
“아는 척 하지 맛!”
송지는 앙칼진 음성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장군이오.”
적엽명의 말에 송지는 숨이 막힌 듯 말문을 닫아 버렸다.
“수많은 싸움…… 시체, 시체…… 그들에게는 전부 가족이
있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은 아무도 없소. 해남도로 들
어올 당시의 난…… 감정이 메말라 있었소. 그런 사람에게 한
여인이 복수를 하겠다고 찾아왔소. 내 감정은 솔직히…… 하
고 싶으면 해보란 투였소. 무시한 거요. 무공도 모르는 아녀
자가 이를 갈면 언제까지 갈겠냐 싶어서. 그래서 내버려두었
는데……”
송지는 원독에 가득찬 눈초리를 보내올 뿐이다.
“이제는 알게 되었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여인의
한(恨). 석두형이나 나나 검을 뽑으면 죽이지 않으면 죽는 무
인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하등의 가책도 없소.”
송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용서해 주겠소? 마음을 무시한 죄. 비웃은 죄.”
“용서해 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송지의 아랫입술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용서 못해. 용서 못햇! 반드시 내 자식들이 죽이게 만들
거야. 반드시!”
송지는 눈물을 또르륵 흘려냈다. 그리고 뛰쳐나갔다.
한백, 화문, 유소청, 황유귀, 수귀, 청천수.
이들은 대청에서 나오는 즉시 따로 모였다.
“해남파와 싸우는 일이라면 우화가 바라던 바지. 남해삼십
육검이 없는 해남파라면…… 탄에게 연락하는 것이 좋겠어.”
황유귀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전면전입니다.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한백이 걱정했다.
“호호호! 연락하지 않으면 섭섭해 할 거예요. 전면전을 하
겠다면 하죠 뭐. 우리에게 병법의 달인이 있고, 노방의 귀신
이 있는데 뭐가 두려워요?”
호귀가 황유귀의 의견에 동조했다.
“전면전이라면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몇 사람 안되지
만 큰 힘이 될 거예요.”
“일이 그렇게 풀린다면 한 사람이라도 모을 수 있는 사람은
다 모아야죠.”
한백은 이미 생각을 그 쪽으로 굳힌 듯 했다. 단지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걱정한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하자구.”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유귀는 곧바로 백사구를 향해 총
총걸음을 옮겼다.
“유가에는 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장군께서 눈치챌 겁니다. 유가에 가는
일은 아무래도……”
한백은 호귀를 쳐다보았다.
“호호호! 걱정 마요. 아이들 중에 발걸음이 잰 아이들이 꽤
있으니까. 넉넉잡고 이삼 일만 붙들어 매줘요.”
“그 일은 내가 하죠.”
청천수가 빙긋이 웃었다.
2
적엽명은 난감했다.
화화부인과 형이 발목을 잡아버렸다.
“네가 살아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형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고, 너는 돌아오
지 못하고…… 우리 집 대가 끊기는 구나.”
그 때 이미 적엽명은 다음 말을 예상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
었다.
“형님……”
“대를 잇게 해다오. 조상님께 향이나 피워드리게……”
형의 간절한 부탁을 매정하게 뿌리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유소청은 볼을 노을 빛으로 물들이면서도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안 따라간다고 했어. 아이를 낳아서 잘 키울 거야.
돌아오지 않아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 줄 수 있
어.”
유소청까지……
적엽명은 진정 난감했다.
한백을 찾아갔지만 명쾌한 답은 듣지 못했다.
“그것 참, 곤란하군요. 혼인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
는다면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텐데. 혼인부터 치르는
게……”
적엽명이 걱정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전녕 돌아오지 못한다면 유소청은 아비 없는 자식을 낳게
된다.
한 여자의 일생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리지 않는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송지가 어떻게 사는지 보면 알지 않은가.
출발은 예정대로 될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탄이 산에서 내려왔다.
그는 여족인 사십여 명과 함께 왔다. 전에 봤던 대력십검,
그리고 이제 갓 검을 든 듯한 삼십여 명.
“섭섭하구나. 해남파와 싸우는 것이 우화의 숙원이라는 것
을 잘 알면서 이번 일에 빼다니.”
탄을 본 다음에야 적엽명은 어머니와 형, 그리고 유소청이
꾸민 거짓을 눈치챘다.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이들을 데리고 가봐야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도 데리
고 가야 하는가.
적엽명이 하루 낮과 밤을 고민하는 사이 비가에는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유가주 유질을 포함한 무인 이백여 명.
“딸자식을 채갔으면 인사를 하러 와야지, 인사를 받으러 오
게 해서야 쓰겠는가.”
유가주는 가벼운 말로 그동안의 어색한 감정을 풀었다.
유가주는 적림을 비롯한 영재들이 몰살을 당해서인지 십 년
은 더 늙어 보였다.
“한혁을 죽이지 않으면 가주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실 게야.
아니 내가 용서하지 못해.”
전방은 싸늘한 눈길을 보내왔다.
“해남도를 떠나려 했는데 남아야겠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땅덩이라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수 있는
지.”
석불은 웃지 않았다.
그는 늘 얼굴에 웃음을 달고 다녀서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
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웃지 않는다. 행동도 기이해졌
다. 그는 간단한 인사말만 건네고는 방안에 틀어박혔다.
유가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개미를 베는 단순한 행동을 질
리지도 않는지 눈을 뜨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반복한다고.
“살아남아라. 너는 한 번 꺾어봐야겠어.”
범위의 눈빛은 잔잔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그의 눈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컸구나.’
대번에 느껴졌다. 해남도를 들어올 때 선상에서 보았던 범
위와는 전혀 달랐다.
하패(夏佩), 악전(岳琠), 박생(朴生)……
열두 가문이 소가주들이 전부 살아남아 인사를 해왔다.
두 명만 없다. 전혈과 한광.
적엽명이 여족인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이 떠돌기 전까지는
더없이 다정했던 친구들이다. 십이용봉회의 일원들. 그 후에
는 원수가 되었고, 결국 무신년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
지만.
“장군이…… 되었다며?”
“음.”
그들은 서로 어색했다. 주고받는 인사말도 짧았다.
적엽명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이들이 모두 움직인다면 그야
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한혁과 부딪치는 곳이 어디일지
는 몰라도 아마 넘치는 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게다.
밤이 되면서부터는 또 다른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여족인들이다.
여족인 중 젊은 사람들이 몽둥이, 가래 등 손에 잡히는 대
로 들고서 비가보를 찾았다.
“이것이 노인들의 중재안이야. 우화를 죽인 대가로 이들을
싸우게 하라는.”
황유귀는 씩 웃었다.
그들은 황유귀 술이 인도했으되 수귀 탄을 찾아왔다. 탄을
새로운 우화로 인정한 것이다.
우화의 정체는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한다는 철칙은 깨어져
버렸다.
좁은 울타리 안에 한인과 여족인들이 같이 병장기를 손질하
고 있으니. 며칠 전만 하더라도 이런 광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광경을 먼저 보인 곳이 있다.
무군.
그들은 전쟁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가 하나로
뭉쳤다.
전쟁에 참여하면 그렇게 된다. 한인인고 여족인이고 따질
틈이 없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옹다옹하다가도 전쟁이
벌어지면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
한인을 구하다가 죽는 묘족(苗族), 납고족(拉枯族), 수족
(水族), 요족(瑤族)…… 그리고 그들을 구하다가 죽는 한족.
해남도는 폐쇄된 환경이라서 더욱 여족인을 인정할 수 없는
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쌓여왔던 감정은 비가보에서도 나타났다.
여족인은 여족인들끼리, 한인들은 한인들끼리 뭉쳐서 서로
를 간섭하지 않는다.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면서 언제든지 상대해 줄 수 있다는 인상을 풍
기고 있다.
해남 무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굽실거리던 여족인들이 동
등한 위치에 선 것이 탐탁하지 않은 게다. 또한 여족인들은
사람이면 다 똑같은 사람이지 너희가 뭐 그렇게 잘났냐는 식
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휴우! 어쩌면 전쟁이 좋은지도……’
적엽명은 오히려 그 길이 한인과 여족인을 화합하게 만드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비가보에 모인 전력(戰力)은 고스란히 건곤검 한혁에게 전
달되었다. 비가보에 모인 사람들 중 ‘무군’이라 칭하는 곳에
속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는 해남파와의 싸움이 시작되면 등을 찌를 사람이다.
“여족인들 중에 있을 거네.”
유가주의 말에 황유귀, 수귀, 호귀는 인상을 찡그렸다.
“허허허! 그래도 귀신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쯧!”
유가주는 혀를 찼다.
“유가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무군은 여족인들 중에 있습
니다.”
한백이 나섰다.
삼귀도 한백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비로소 심각해졌다.
“지금 여기 모인 해남무인들 중에는 군에 갔다 온 사람이
없습니다. 오로지 무공만 익힌 사람들입니다. 무군에 속할 자
격이 없는 사람들이죠.”
한백의 말은 타당했다.
“아이, 속상해. 이 놈들을 어떻게 찾아낸담.”
호귀가 턱을 고이며 고민에 잠겼다.
해남 무인들은 호귀의 그런 모습에 놀란 모양이다. 하기는
적엽명 일행은 호귀의 행동이 눈에 익어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은 놀랄 수밖에 없다.
모습은 사내인데 하는 행동이나 음성은 꼭 계집이지 않은
가.
턱에 수염마저 나지 않은 호귀는 남장여인(男裝女人)으로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발 빠른 황유귀가 고생을 해야겠죠.”
한백은 황유귀를 바라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어요?”
황유귀는 자신이 고생하게 되었다는 생각보다 간자를 색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 것 같았다.
“경주지부에 다녀와야겠어.”
적엽명이 말했다.
“경주지부?”
“음. 경주지부에는 군에 다녀온 사람들을 적어놓은 장부가
있어. 여족인들이 이름을 적어가지고 가서 대조해 보면 될 거
야. 편지를 써 줄 테니 가능한 빨리 다녀와.”
“흐흐흐! 이번에는 푸짐하게 대접받겠는걸. 지난번에 그렇
게 혼쭐났으니.”
적엽명은 황유귀가 고마웠다.
비가보에서 경주지부로 가기 위해서는 오지산을 지나가야
한다.
해남파 본문이 있는 곳이다.
분명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하지만 황유귀는
어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는다.
“구월 오일, 궁바의 안식처야. 그 때까지는 와줘야 해.”
“걱정 마. 충분해.”
적엽명은 서둘러 서신을 작성했고, 황유귀는 서신을 집어들
자마자 횅하니 빠져나갔다.
“인원이 양쪽에서 열 명씩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누가 가겠
습니까?”
한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건곤검 한혁이 보내온 서신 내용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
다.
– 적엽명촌경(赤葉明村逕) 비건(蜚乾) 전(前)
一. 구월(九月) 오일(五日) 정오(正午), 궁바의 안식처인
호평평야에서 생사(生死)를 결(決)하자.
一. 당일에는 세(勢)와 세(勢)로 싸운다.
비무(比武)로 승부를 결하는 것이 무인다운 행동이나, 본문
에 무군이 있어 사기진작을 필요로 하며, 적엽명촌경 비건에
게도 이백사십 명 상당의 무인이 있기에 좋은 승부가 되리라
고 생각, 이에 정한다.
一.싸움은 병장기만을 사용할 것이며 노방을 허락하지 않는
다.
이에 양쪽에서 각기 열 명씩 호평평야에 파견하여 구월 오
일까지 감시케 한다.
완숙에 이른 전검(戰劍)을 기대하며. 건곤검(乾坤劍) 한혁
(翰赫)
비가보에 있는 무인들 중에 무군이 섞여 있다는 사실은 한
혁의 서신에서 알아냈다.
철저한 피의 싸움.
한혁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한마디로 무도(武道)니 예의(禮儀)니 다 집어 던지고 적자
생존의 싸움을 하자는 소리다.
적엽명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다.
이런 싸움이라면 바로 그가 전문이지 않은가.
비거보에도 난관이 있다. 한인과 여족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것. 그것을 이루면 최강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오합지졸(烏合之卒)이 되고 말리라.
“한가에서 사검이 나오지 않나, 패륜아가 나오지 않나……
우리가 가겠네.”
한유가 나섰다.
한유와 한혁은 나이가 비슷하다. 남해삼십육검에 든 것도
같은 해다. 그러나 한유는 한혁이 너무 뛰어난 바람에 바위에
깔려있는 조약돌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는 불평 한 마디 늘어놓지 않았다.
본문에도 발길을 들여놓지 않기로 유명했다.
사실 이번 일이 터질 때까지 남해삼십육검이 거론 될 때면
모를까 한유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적엽명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회합을 이끄는 자리에 올라 있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
니라 군웅(群雄)들이 자연스럽게 밀어 올린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가 장군이라고 알려진 소문도 큰 몫을 했으리
라.
* * *
구월 이일.
살아생전 마지막일 수도 있는 날들이다.
비가보에 있는 무인들은 술통에 파묻혔다. 옆에는 좋은 유
혹거리도 있었다. 노노가의 창기들.
술에 취한 무인들은 하나 둘씩 노노가로 자리를 옮겼고 술
과 여색에 파묻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적엽명은 마음껏 취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술에 젖어 있으면 체력이 떨어진다. 확실하다. 허나 그것은
일 년 열두 달 술통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군대에
서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술을 마음껏 마시게 한다. 그래도
취해서 곯아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내일 당장 죽을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취하겠는가.
군인들은 술기운으로 싸운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어도
아픈 줄 모르고 병기를 휘두른다. 절대 절명의 갈림길에 선
인간들은 모두 그렇게 싸운다. 그럴 때 술기운은 득이 될망정
해가 되지 않는다.
적엽명은 유소청의 방문을 받고 기뻐했다. 허나 지금은 조
금도 기뻐할 상황이 아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소청.”
“이름만 부르지 말고 말을 해봐.”
“난 죽지 않아.”
“알아.”
“믿어.”
“믿고 있어. 그거하고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야?”
“군에 이런 말이 있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색(女色)을
밝히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어멋!”
“이번 일이 끝나면 바로 혼인하자.”
“정말 자신 있지?”
유소청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굴도 초췌해진 것
이 요즘 도통 잠을 못 이루는 모양이다.
“믿는다며?”
“그래도 불안하니까 그렇지.”
“난 그 누구하고도 자신 있어.”
유소청은 느닷없이 가슴에 안겨왔다. 그리고 비 맞은 참새
처럼 오돌오돌 떨었다.
“믿는데…… 믿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어.”
적엽명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화부인과 형님이 발목을 붙들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 낸
술수.
그런데 유소청은 그 일을 실행하자고 난리였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니 자신을 더
이상 혼자 내버려두지 말라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 된다.
만일 결과가 나쁘게 나타나면 새로운 인연을 찾을 수 있도
록 해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도리다.
적엽명은 유소청을 꼭 안아주었다.
* * *
구월 삼일.
무인들은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안 좋은 현상이다.
술을 멀리한다는 것은 긴장하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런 현상은 해남무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족인들, 특히 대력십검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더욱 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