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Heaven Sword RAW novel - chapter 73
남편을 죽음 속으로 몰아넣고, 자식으로 하여금 에미를 죽
였다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게 하다니.
이 업보를 어찌할꼬.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간 듯 몸이 뜨거워졌다.
꾸르릉……!
전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에 불덩이가 떨어진 것 같다. 인두로 지지는 화끈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한다.
황난영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리고 한 많은 이승을 버렸
다.
##第二十四章 검의 운명.
1
며칠 사이에 해남도는 지진이라도 난 듯 꿈틀거렸다.
엄청난 난리였다.
해남도 섬 전체가 피바다였다는 편이 옳을 만큼 많은 사람
이 죽었다. 이름 없는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이 이름께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영원히 절대강자로 군림할 것 같던 장문인을 비롯하여 석가
주, 범가주가 죽은 것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다를 바 없었
다.
그밖에도 삼십육검 대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황유귀는 끊임없이 소식을 물어왔다.
호귀도 황유귀 못지 않게 비교적 정확한 소식을 빨리 전해
왔다.
비가보 주위에는 또 다른 명물이 생기는 중이었다.
노노가.
감은성에 있던 노노가 창기들이 전부 비가보 주위의 들판으
로 모여드는 바람에 감은성 노노가는 텅 빈 채 버려지고 말았
다.
호귀는 초원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둥지를 틀었다.
남들처럼 반듯한 집은 가질 수 없었고,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도 노노가에서처럼 기둥을 세우고, 흙으로 벽
을 바르고, 야자 잎이나 야자 잎처럼 잎이 넓은 나뭇잎을 엮
어서 지붕을 얹으면 그만이었다.
호귀는 새로운 보금자리에다가 옛이름을 그대로 따다 붙였
다.
노노가란 이름은 해남도뿐만이 아니라 뇌주반도를 비롯한
광동성 전역에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간혹 가다 애비를 잘
둔 덕분에 고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모르는 귀공자들이 노노
가와 정화방의 말을 듣고 해남도를 찾아오곤 했다.
노노가의 창기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물분을 파는 사람, 연지를 파는 사람, 옷을 파는 사람, 간
식거리를 파는 사람……
청루(靑樓)면 어디나 있기 마련인 무뢰배들을 보이지 않았
다. 그들은 감은성 시절부터 없었다. 호귀의 채대가 용납하지
않았다. 비록 무인들에게는 힘을 못쓴다 할지라도 무뢰배들에
게는 염라대왕의 초혼부나 다름없지 않은가.
노노가를 백사구로 끌어들이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이미 유명을 달리한 황함사귀였다.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
하나는 아무리 뱃심이 두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많
은 곳에서 대대적인 살상을 벌일 수 없을 것이니 자연적인 방
어막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지금 효과를 보고 있는 눈의 역할이었다.
사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방편이었으리라.
노노가에서 걷어들인 정보는 직접 눈으로 본 듯 상세하면서
도 정확했다. 반명에 황유귀가 가져오는 정보는 사건의 이면
에 숨겨진 정황을 판단하는 데 아주 유효했다.
호귀는 해남파가 전복된 사건에서부터 누가 어떻게 죽었는
지까지 방대한 양을 알아왔다. 황유귀는 한혁이 해남파를 전
복한 동기라던가, 한광이 어머니를 불살라 죽인 것 등 내면적
인 것을 알아왔다.
“생각났습니다. 그 놈들은 모두 악산(嶽山) 전투에 참가했
던 놈들입니다. 대장군은 기사청 장군. 틀림없습니다.”
화문이 무릎을 쳐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전쟁을 그리워하는 자들입니다. 피를 그리워한다는
편이 더 옳겠지만…… 마치 그 놈 같은 자들입니다.”
한백이 적엽명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늑대 염왕을 가
리키며 말했다.
“고용된 사람들일까?”
“그런 사람들 같으면 벌써 소문이 났게. 아닐 거야.”
호귀 류가 입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닐 겁니다. 해남도에서 전쟁에 참
여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뭉쳤고, 누군가 그들을 조정한
듯 싶습니다.”
“음……!”
적엽명은 기다렸다.
이번에 해남파를 뒤집는 데는 무군이라 불리는 자들의 역할
이 지대했다고 한다.
십이가문은 주춧돌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살아진 듯 했다.
중구난방으로 일어선 자들이 십이가문의 흉내를 내며 서가
(徐家)니 이가(李家)니 하며 떠들어대는 요지경속이 되어버렸
다.
그들은 곧 무슨 연락인가를 취해올 게다. 아니면 저번처럼
야밤에 기습을 가해올 수도 있고, 예전처럼 비무를 청해올 수
도 있다. 좌우지간 행동은 취해오리라.
“여우야, 이제 그만 이리 오지 않을래?”
유소청이 고기 한쪽을 흔들며 염왕을 유혹했다.
염왕은 쪼르륵 달려가고 말았다.
이래서 염왕은 여우라 불린다. 적엽명과 유소청 사이를 오
가며 실속을 챙기기 때문에.
유소청은 리아를 백사구에 있는 엄마 품으로 돌려보낸 후
잔정을 염왕에게 쏟아 부었다.
염왕에게 고기를 먹이는 유소청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
가 가득했다.
유광, 유화…… 삼십육검 중 두 명이 죽고, 적림무인들이
몰살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그게 사람일까. 그
러나 정작 유소청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요행히 혈겁을 피한 십이가문 식솔들이 유가로 몰려들고 있
다는 소문이다. 해남오지 중에는 범위와 석불이 유가에 합세
했고, 한유, 한극(韓克), 한무(韓茂)를 비롯한 수십 명이 유
가로 몰려들었다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해남 삽이가문 중 유일하게 혈겁을 피한
가문은 유가밖에 없으니까.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살 수는 없다.
유가가 토끼처럼 보인다면 한혁도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호랑이로 성장하고 있다면 철퇴를 가해야 한다. 유소청 자신
이 한혁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했으리라.
장문인이 남긴 마지막 안배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이든 사람들이 남아 발길을 지연시키는 동안 발전가능성
이 높은 후기지수들, 혹은 한혁에게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그들은 유가로 모이며, 유가주의 지휘를 받아 한
혁과 싸운다.
한혁과 맞설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소극적이지만
유일한 방책이었다.
한혁은 일어섰다하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해남도 전체
를 태워버릴 테니까.
각 가문에서 한 형제처럼 지내는 식솔들이 따른다는 전제
하에서 계획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혁에게 동조할 줄이야.
해남파가 둘로 갈린 형상이다.
비가의 지리적 위치는? 해남파는 오지산에 위치해 있다. 해
남도 중앙이다. 그 코앞에 비가가 있고, 비가를 지나 서남쪽
으로 내려오면 유가가 위치한 앵가해가 나온다. 교묘하게 비
가가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나를 친 사람은 건곤검 한혁이다. 그는 탈혼검을 익혔어.
손도 쓰지 못할 만큼 강한 검. 네가 전검을 익혔다고 하지만
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야. 내가 전에 말했지. 남해삼
십육검 다섯 명을 동시에 벨 무공을 지녀야만 된다고. 한혁이
그래.”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형이 입을 열었다.
청천수는 두 가지를 가지고 고민했다.
진실을 말하면 적엽명은 틀림없이 한혁과 싸우려고 할 게
다. 그렇게 되면 죽는다. 차라리 지금 이 시점에서 손을 털고
물러났으면. 비가보의 재건이고 뭐고 다 필요 없는데. 동생만
살아준다면.
동생에 대한 진한 사랑이었다.
지난 세월동안 한 번도 주어보지 못한 사랑이고, 그런 마음
이 자신에게 들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에게 동생은 늘 여
족인이었으니까. 허나 지금은 다르다. 사귀와 우화대원들을
접하면서 바뀐 생각은 동생을 순수한 동생으로 받아들이게 만
들었다.
해남파에 상대도 되지 않는 인원을 가지고 당당히 맞서는
동생, 얼마나 장한가.
그런데 한백이 말해주었다. 적엽명은 그 사실을 말하지 않
더라도 일이 끝나기 전에는 해남도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일…… 바로 한혁과의 싸움이 아닌가.
그는 그럴 바에는 복수심이라도 부추겨 주자는 의미에서 마
음속 말을 말하고 말았다.
“비가를 몰락시킨 원흉과 공적(公敵)이 모두 한혁에게 집중
되는군요. 한혁에게.”
그 뿐, 적엽명은 더 묻지 않았다.
어떻게해서 한광에게 졌다는 소문이 나돌게 되었는지, 탈혼
검을 익힌 한혁이 왜 자신만은 죽이지 않고 살려줬는지에 대
해서.
이튿날 아침, 비가보에는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경주자사와 관군들이 식전부터 들이닥친 것이다. 관군들은
비가보를 두겁으로 에워싸고, 경주자사는 비가보에서 선물한
황풍을 타고 거만하게 앉아있었다.
“비건은 나와서 포박을 받으라.”
경주자사가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건 관
군 다섯 명이 소리를 맞춰 똑같은 내용으로 고함을 질렀다.
“다시.”
“비건은 나와서 포박을 받으라.”
“한 번 더.”
“비건은 나와서 포박을 받으라.”
비가보가 들썩일 정도로 큰 소리에 늑대 염왕이 먼저 으르
렁거리며 달려나갔다. 하지만 비가보를 둘러싼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는 금방 꼬리를 말고 되돌아왔다.
적엽명이 경주자사 앞으로 걸어갔다.
경주자사와 이 장 정도의 거리에 이르렀을 때 관군 몇 명이
창을 들이밀며 더 이상 걸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동시에 비가
보를 둘러싸고 있던 관군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적엽명과 관군 사이의 거리는 이 장.
적엽명은 혼자, 관군은 이백여 명.
그러나 관군들은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절대 초강자 반열
에 들었던 전가주를 죽인 사실은 해남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적엽명의 무위(武威)를 겁내고 있다.
적엽명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서있을 뿐이다. 허리
에 검 두 자루를 차고 있지만, 양손을 축 늘어트리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다가서지 못한다.
“포박을 받으라 했소?”
적엽명은 마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평대로 말했다.
일순, 경주자사의 얼굴이 붉어지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불
쾌한 것이리라.
“너의 죄목은 네 가지다.”
“너의 죄목은 네 가지닷!”
경주자사가 소곤거리듯 말하면 관군 다섯 명이 있는 구관조
(九官鳥)처럼 따라 말했다. 있는 힘껏 목청을 돋구어서.
“하나, 유배된 죄인들과 접촉했다.”
“……”
적엽명은 묵묵히 들었다.
“둘, 죄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셋, 유배된 죄인을 물에 빠
트려 죽였다. 넷, 애꿎은 사람들을 활로 쏴 죽였다.”
경주자사는 할 말이 있냐는 듯 쳐다보았다.
“죄인과 접촉했다? 접촉했지. 시인하오.”
경주자사의 얼굴이 득의만면해졌다.
“그러나 죄인에게 배운 무공으로 원의 장군들을 죽이고 나
라에 공훈을 세웠으니 그 죄는 사해진 것.”
“뭐, 뭣!”
경주자사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
다.
“이는 황상께서도 아는 사실인데 경주자사가 황상께서도 주
지 않은 벌을 주려는 것이오?”
“뭐, 뭣! 네 이놈! 어디서 감히 지엄하신 황상을……”
분기탱천하여 노기를 터트리던 경주자사의 안색은 일순간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너무 창백하여 푸르스름하게 보일 정도
였다.
적엽명이 공손한 태도로 품에서 꺼내드는 단검.
검집도 손잡이도 모두 황금빛이다. 손잡이는 용의 머리 모
양을 양각(陽刻)한 것이고, 검집도 용 한 마리가 음각(陰刻)
되어 있다.
확실히 황상이 하사한 단검이다.
만약 적엽명이 이 단검을 가짜로 만들어 지니고 다닌다면
황상을 능멸한 죄로 참형(斬刑)을 받게 된다.
황금빛과 용은 황제의 상징이다. 따라서 황금빛은 오직 황
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 백성들은 아무리 돈이 많고, 지체가
높아도 황금빛을 사용할 수 없다.
용 문양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황룡(黃龍)은 황제의 상징. 백성들이 황룡을 사용하면 황제
를 지칭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 다. 역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
서 백성들은 일반적으로 적룡(赤龍)을 사용하곤 한다.
무림인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불문(佛門)만은 한정적으로
금제가 풀리지만 병장기를 황금빛으로 할 수는 없다. 금도(金
刀), 금창(金瘡), 금검(金劍)…… 금자가 들어가는 모든 병기
들도 날만 금빛으로 만들 수 있지 적엽명이 들고 있는 것처럼
검집에서 자루까지 온통 황금빛으로 만들 수는 없다.
“어물(御物)이오.”
적엽명은 담담히 말했다.
경주자사는 더 이상 거만하게 말 위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단검의 진위여부는 차제하고 일단은 어물을 받들어야 한다.
경주자사는 황급히 말에 내려 무릎을 꿇었다.
관군들도 마찬가지다. 이백여 명이 일제히 창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황상께서는 황공하옵게도 이 검을 기도위(騎都尉:종사품
무관) 직품(職品)을 내리시며 하사하셨소.”
경주자사의 얼굴이 샛노랗게 변했다.
기도위라면 자신과 같은 직품이지 않은가. 그러나 같은 직
품도 직품 나름. 한쪽은 해남도에 유배되다시피 밀려온 관원
이요, 한쪽은 황상께 어검(御劍)까지 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장군이다.
경주자사는 믿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스물 대여섯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적엽명이 기
도위 장군이라는 게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어검을 손에 들고 있는데.
“두 번째, 죄인의 무덤을 파헤쳤다? 적사장군의 시신 밑에
는 은궤가 묻혀있었소. 비가에서 잃어버린 은궤. 알고 있었
소?”
“……”
경주자사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잊었다.
“세 번째, 유배된 죄인을 죽인 것은 어의 황역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시신을 누가 가져왔는지 물어도 되겠소?”
“해, 해남파 무인이……”
경주자사는 체념한 표정으로 순순히 대답했다.
“공소(公訴)를 처리할 때는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하는
데 처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소?”
“……”
“애꿎은 사람들을 활로 쏴 죽인 것은 말하지 않겠소. 궁금
한 점이 있거든 관충장군에게 직접 여쭤 보시오.”
“과, 관충 장군!”
경주자사의 얼굴은 절망으로 뒤덮였다.
황유귀가 경주지부에 들어가서 알아낸 사실 중 가장 크게
부각된 것은 자사의 나태함이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않겠는가. 자사가 나태하니 관군들이라고 그러지 않을
리 없다.
해남도에서 경주지부는 있으나 마나 한 관청이었다.
해안 경비도 마찬가지다. 해안 경비를 맡은 관군은 노름을
하거나 술에 취해 있기 일쑤였다.
그런 나태함은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관충장군이 몰래 잠입시킨 무장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 그
렇다. 관군들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은 틈을 타서 무군이 마
음놓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물론 한백 혼자만의 추측일 수도 있다. 무군이 그런 살인을
하기 위해서는 관충 장군 옆에 간자(間者)가 붙어있어야 한
다. 그런 조건이 채워졌을 때만 성립되는 추론(推論)이다. 무
군의 수가 아무리 많다 한들 해남도 해안 전체를 지키고 있을
수도 없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자를 기다리기 위해 일년
내리 지키고 있을 수도 없으니까.
“나를 포박하러 온 것은 건곤검 한혁의 부탁을 받은 것 같
은데, 안 그렇소?”
“장군……”
경주자사의 말은 사정조로 변했다.
“알았소.”
경주자사의 태도로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를 더 추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나를 포박한 다음 어떻게 하려고
했소.”
“제발 이 일은 불문에……”
“자사 같으면 불문에 붙이겠소?”
“그저 일의 진상이나 알아보려고……”
경주자사로써는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리라. 본인을 면전
에 두고 참형에 처할 계획이었다고 어떻게 말하랴.
한혁에게는 이제 재화(財貨)가 넘쳐난다. 열두 가문을 장악
했으니 그 돈을 모두 모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해남도 전부가
그의 땅이요, 그의 소유인 것을.
적엽명이 적사장군의 무덤 속에서 캐낸 은덩이정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리라.
‘두 가지가 예상됩니다. 본인이 직접 비무를 청해오는 것.
검에 자신이 있으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른 하나는 관
부를 이용하는 겁니다. 경주자사는 해남파의 비위를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니 무슨 부탁이든 적당한 이유만 대주면 움직일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소?’
‘건곤검의 힘은 엄청납니다. 무군에다가 십이가문을 실질적
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내관영, 외관영의 일부 무인
들, 수련총 무인 전부를 흡수했습니다. 유가를 제거하고 나면
그 사람들이 해남파의 모두입니다. 너무 약하지 않습니까? 사
람은 많지만 인물이 없습니다. 반면에 유가는 사람이 적지만
인물이 많습니다. 유가주, 범위, 석불, 한유는 남해삼십육검
의 일인들. 그리고 그에 필적하는 무인들 다섯 명. 모두 일당
백의 무인들이니 만만치 않을 겁니다. 한혁의 신경은 유가에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한혁과 한광이 직접 나서서 제거하
려고 하겠지요. 해남파의 저력은 보존한 채.’
‘나에게 신경쓸 틈이 없다 이거군.’
‘장군은 기껏해야 관장군님이 파견한 밀정 아닙니까. 유가
와 손 잡은 사람도 아니고, 해남도에서 일어난 일이 관장군님
께 보고된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죽이면 그만이지요.’
‘나는 관부에서 건드릴 수 있어도 유가는 건드리지 못한
다?’
‘명분이 없지 않습니까. 유가를 건드리기에는.’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한 가지만 알아내면 밀명이 끝난다.
한혁과 손을 잡은 장군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기사청 장군
이다. 죽은 팽훈 장군이나 문공 장군이 그렇다고 말해준다.
증거.
기사청 장군이 한혁과 손을 잡고 공물을 강탈했다는 증거를
잡아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황유귀가 알아온 정보, 임고현에서 죽은 사람들은 해남도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그 중에 한 명은 한혁의 건곤
검법에 죽었다. 틀림없이 기사청 장군이 보낸 무장들이다.
모든 증거를 지워버렸다. 한혁이 해남파를 전복시키면서 기
사청 장군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기사청 장군이 먼저 손을 썼거나. 경주지부에서 죽은 열두 가
족들이 시신을 설명하려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적엽명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결정했다.
경주자사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돌아갔다.
올 때는 기세 당당하게 왔지만 갈 때는 말도 타지 않았다.
적엽명이 선물로 준 황풍을 비가보에 다시 건네주었다. 하기
는 적엽명이 장군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에도 황풍을 타기는
거북했으리라.
다른 때 같으면 선물로 준 말이니 타도 괜찮다고 말했으련
만 적엽명은 순순히 받았다.
지금 비가보에 있는 황담색마 일곱 마리는 황함사귀의 영혼
이 깃든 말이다. 그 말들은 비가보의 희망이라는 의미 이상을
지니게 되었다. 적어도 적엽명에게만은.
“왜 말 안 했어? 장군이라고.”
유소청이 짐짓 모른 척하고 물었다.
“알고 봤더니…… 여자는 모두 여우라는 말이 맞네.”
“뭐야!”
“한백이 전부 말해준 걸로 아는데?”
“쳇! 알고 있었어?”
“눈치로.”
“여우가 따로 없네. 나도 좀 봐도 돼? 황상이 하사하신 어
검.”
“하하하……!”
“……?”
“자, 실컷 봐.”
적엽명은 대수롭지 않게 어검을 넘겨주었다.
“이, 이것! 나무로 만들었잖아!”
“경주자사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경주자사 같은 사
람은 절대 확인 같은 것 은 안 해. 할 엄두를 못 내지.”
“적엽명촌경.”
“……?”
“여우.”
“뭣!”
“호호호! 앞으로 여우라고 부를 꺼야. 여우. 여우야, 우리
는 들어가자.”
유소청은 염왕을 부르며 깔깔 웃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웃는 것 같다. 저렇게 오래오래 웃도록 만
들어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아무래도……
적엽명은 목부와 창기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대청에 불러
모았다.
“그 동안 많이 도와주었는데, 부탁을 좀 더 할까 하고……”
첫마디는 매우 가벼웠다.
“호귀, 네가 옆에 있으니 앞으로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쌀 떨어질 때마다 찾아가려고 하는데.”
“호호호!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소리도 몰라?”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어.”
“하하하!”
적엽명은 호쾌하게 웃었다.
어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농담 같은 것은 거의 못하
는 사람이다. 누가 농담이라도 할 냥이면 그저 빙긋이 웃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데 오늘은 스스로 농담을 꺼내고 있다.
“화문 장군, 장군은 늘 나와 같이 죽겠다고 했는데 그 말
믿어도 될지 모르겠네.”
오늘은 적엽명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장군, 죽을 자리는 고르셨소?”
화문은 단순했다. 그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적엽명
을 보면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느낌을
호귀처럼 감출 줄 몰랐다.
“이런……! 그렇게 말하니 내일이라도 꼭 죽을 사람 같소.
내 말은…… 죽기 전에 총각 장가라도 가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총각 귀신은 죽어서 몽달귀신이 된다고 합니다.”
화문은 잠시 말을 잊고 적엽명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리고 씹어뱉듯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장군의 의중은 알고 있소. 나는…… 걱정 마시오.”
취채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그녀는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속으로
앓는 심정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화문의 지극한 보살핌
에 희망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말은……
그녀는 손톱이 살 속에 박힐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