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4
제 274화
87장. 심해의 왕 – 3화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핫핫! 핫핫핫하!”
적막감은 곧 무르테스의 호탕한 웃음으로 말끔하게 씻겨져 나갔다.
차라리 아리송한 말이나 양국의 평화와 원활한 교류를 도모하기 위해 왔다는 등 틀에 박힌 말을 했다면 무시했을 텐데.
자신의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필요해서 찾아왔다니, 왠지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이곳에 올 만큼 자신의 반지가 중요한 물건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무르테스에게 이 반지는 그저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끼고 있는 장신구일 뿐이었다.
왕의 상징이라든가, 사연이 담긴 것이라든가…… 하는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반지를 꼭 필요로 하는 나름의 이유를 듣고 싶어졌다.
“원하는 쪽이 그 이유를 밝혀야겠지.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이유는 들어 봅시다.”
자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대화를 할 생각으로 온 것이기도 했고, 해야 할 말은 충분히 잘 정리해서 왔다.
그러자 무르테스가 말을 이어서 덧붙였다.
“아티팩트 진상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유는 뺍시다. 애초에 그게 목적도 아니었으니.”
“죄송합니다, 대왕.”
“죄송은 무슨. 하지만 내게 합당한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며, 모든 결정은 내가 하겠소.”
“대왕이 끼고 있는 그 반지는 신이라 불리는 초월적 존재를 제외하면, 누구든 한 명을 이 세계에서 격리할 수 있는 반지입니다.”
“오호……?”
금시초문이었다.
정말 왕궁에 있는 흔해 빠진 반지 중 하나인 줄 알았다.
보석함에 담겨 있던 반지 중 색깔이 예뻐서 착용해 온 것이 전부인 그런 반지였다.
한데 이 반지에 다른 누군가를 격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니?
알지 못했으니, 당연히 이 능력을 사용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나스 대륙은 곧 다가올 마왕군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반지를 이용해 최악의 경우에는 마왕을 저와 함께 이 세계에서 격리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쓰고자 합니다.”
“잠깐, 짧은 말 속에 엄청난 내용이 쭉 흘러간 것 같은데.”
무르테스가 맥을 짚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레드는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술술 읊어 댔지만, 그 안의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천 년 전 드래곤과 마왕이 치렀던 그 전쟁이 또다시 도래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일 년 하고, 조금 더 남았습니다.”
“허허…….”
무르테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천 년 전의 용마 대전.
무르테스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클라니아인들은 용마 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레드가 성마 대전을 대비하는 것만큼 절박하고 긴장하는 마음에 공감할 여지는 적었다.
용마 대전 중에도 마왕군이 심해의 문명을 노린다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해수면에서 떨어진 수많은 마물들의 시체가 아클라니아 문명의 터전이 떨어졌단 기록만 있을 뿐이었다.
“대왕의 반지는 제가 가진 수많은 계획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경우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이 반지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결례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대왕을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반지 하나로 마왕을 가둘 수 있다라……. 그러니 더더욱 반지의 가치가 커지는 듯하군.”
“보상을 원하신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 드릴 것이고, 어떤 이야기든 열린 귀로 듣겠습니다.”
자레드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무르테스에게 넘겼다.
물론 최악의 상황도 가정하여 생각하고 있기는 했다.
자레드에게는 꼭 필요한 반지.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면 무력행사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가져갈 생각이었다.
이게 있어야 성마 대전에 대한 ‘보험’이 생긴다.
설사 자신이 성마 대전에서 패배하더라도, 최소한 마왕과 함께 산화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흐음…….”
무르테스가 턱을 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자레드의 면면을 살폈다.
사실 이 반지가 무르테스에게 갖는 가치는 거의 없었다.
반지의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꼈을 뿐, 없어지면 다른 것을 찾아서 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인간 세계의 금화 같은 것도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사실 아티팩트도 별로 탐나지 않았다.
여자?
사랑하는 왕비가 있으니, 다른 여인네에게 주고 싶은 마음도, 돌리고 싶은 시선도 없었다.
‘딱 한 가지.’
하지만 채워지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기는 했다.
열여섯의 나이에 왕으로 즉위한 이후 지난 20년간, 자신의 가슴 한구석을 늘 허전하게 만들었던 감정.
그것은 바로 강인한 힘에 대한 투지, 갈망, 열정……. 즉 살아 숨 쉬는 듯 생생하게 느끼고 싶은 아드레날린에 대한 것이었다.
아클라니아의 모든 백성들은 자신을 우러러 섬겼으며,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함부로 도전하려 하지 않았다.
왕의 귀한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입혔다가는 대대손손 저주가 내릴 불경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내기 운동 같은 것을 하더라도, 그 어느 누구도 무르테스를 감히 건드리지 않았다.
인간들이 재밌게 즐긴다는 축구를 해도, 무르테스는 아무도 막지 않았다.
무르테스는 그것이 마냥 시시했다.
뒤엉켜 치고받고 싸워야만 느낄 수 있을 생생한 고통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지, 인내, 시련의 감정들이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간 세계의 방문자이자 자신과 같은 군주인 자레드에게 제안 하나를 하고 싶어졌다.
생각과 결심은 신속했다.
무르테스가 검지를 폈다.
“딱 한 가지만 충족시켜 준다면, 내 미련 없이 이 반지를 그대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어떻소?”
“결정의 권한은 대왕에게 있습니다. 제안하시죠.”
“나와 한번 겨뤄 봅시다. 날 꺾으시오. 그럼 반지는 자레드, 그대의 것이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심해의 왕과의 전투라니.
이것만큼은 자레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최초의 도전이자 실험이었다.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소. 적어도 홈그라운드의 이점은 있어야겠지. 우리가 싸울 장소는 물이오. 이 수중 궁전처럼 육지와 비슷한 공간이 아니라.”
“그렇군요.”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레드로서는 이 역시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상대는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이고, 자레드에게 물은 어쨌든 방해 요소이기 때문이다.
일단 물속에서의 전투는 거리가 멀면 멀수록, 마법으로 타격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무르테스의 말대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이곳에 왔으니 그의 제안을 따르는 것이 옳았다.
무력으로 빼앗으려 했어도 어차피 무르테스는 같은 방법을 썼을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눈뜨고 빼앗기지는 않겠지.
“어떻소? 날 꺾는다면, 반지는 그대의 것이오. 날 꺾지 못한다면, 당연히 반지는 내 것이겠지. 간단한 것 같은데.”
“좋습니다. 그럼, 장소를 제게 안내해 주십시오.”
여기까지 온 마당에 소득 없이 뒤돌아서거나, 구차하게 이런저런 조건을 달 생각은 없었다.
자레드가 그의 제안을 쾌히 받았다.
난생처음, 에서조차 경험해 본 적 없는 수중전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 * *
‘일단은…….’
나는 무르테스가 전투를 위한 장비 착용을 하는 동안 나름 전략 구상을 하느라 생각에 잠겼다.
그는 전력을 다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적당히 힘겨루기를 하다가 사람 좋게 악수하고 수고했다고 말하며 끝내는 그런 전투를 사양한다는 뜻이다.
무르테스가 그런 의지를 천명한 이상, 나도 전력으로 그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퍼펙트 실드를 유지하면 좋겠지만, 그러면 마법 대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물속이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에 내게는 몸 전체를 보호할 수 있는 실드가 필수적이었다.
다만 퍼펙트 실드가 6클래스인 만큼 안정성은 좋지만, 마법 활용이 까다로웠다.
즉, 자유로운 전투를 위해서는 1클래스 마법인 실드를 활용하는 것이 좋았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실드가 깨지기 딱 좋은 상황이 되고.
그렇게 되면 맨몸으로 심해의 수압을 받아 내야 하는 힘든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물론 바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스톤 스킨이나 아이언 스킨 같은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해서 방어할 수는 있으니까.
문제는 그렇게 석화, 강철화 마법을 쓰면 전투 능력이 0이 된다는 점이다.
‘정교한 계산이 필요해.’
정말 치밀하게 계산된 공격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전투는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전투가 주를 이뤘다면.
이번에는 스타일을 정반대로 바꾸어야 했다.
이성적이고 계산적이어야 하며, 치밀하고 냉철하게 설계된 페이즈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르테스에게 휘말려, 내가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고전만 하면 다행이고.
패배와 동시에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
성마 대전은커녕, 신태풍이 환생한 자레드의 삶이 4년 차를 맞이하기도 전에 그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항상 인생이 도전과 시련의 연속이었는데, 이번에도 다르지 않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현생에서 환생한 이후, 내 삶은 늘 도전의 연속이었던 것 같았다.
애초에 나스 대륙 북부의 오지에서 시작된 영주의 삶이었다는 점에서 제법 난이도가 높은 삶이었다.
이번에도 그 과정의 연장선일 뿐이다.
목적이 있어 이곳을 찾아왔고, 늘 그랬듯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
황금 갑주를 갖춰 입은 무르테스가 보무도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전장이 될 장소까지는 그대를 정령의 힘으로 보호하도록 하지. 자, 내 손을 잡으시오.”
생각지도 못한 무르테스와의 스킨십(?)이 영 어색했지만, 어쨌든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즉시 내 몸 전체를 따스한 물의 기운이 감쌌다.
무르테스의 말대로 물의 정령을 부리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괜히 이그니스와 비에나가 그리워졌다. 바람과 불의 정령의 힘을 부리는 것이라면 나도 자신 있는데.
드르륵륵.
이윽고 궁전 천장의 문이 자연스럽게 열리며, 나와 무르테스는 빠르게 수중으로 이동했다.
무르테스가 위아래로 손짓을 하자, 방금까지 물기 하나 없던 어전까지 모두 물로 채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집기들이나 병장기들은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것들은 물이 있어도 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듯했다.
심해 문명의 새로운 질서와 환경은 내가 살고 있는 ‘뭍’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윽고 우리는 적당한 수중의 위치에 도착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심해 생물들이 저마다의 경로를 그리며 움직이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1분을 주지. 그 뒤로는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할 것이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단히 각오하시오. 어설픈 자비를 기대한다면, 그냥 죽는 게 나을 것이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는 경고성 짙은 무르테스의 말에 같은 대답으로 응수하고는 바로 거리를 벌렸다.
계산, 설계, 대비, 노림수.
한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무르테스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더 위력적인 공격을 가해 올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 이상의 위력을 발휘할 것이 뻔한 상대!
이카젤라를 만났을 때도 긴장하지 않았던 내 양손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분의 시간이 흘렀고.
“하아아압!”
무르테스가 기합과 함께 내게 일권(一拳)을 뻗었다.
그 순간.
“…….”
나는 볼 수 있었다.
집채만 한 물의 회오리가 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해 오는 것을.
만만찮은 상대와의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