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79
제 279화
89장. 다시, 대미궁 – 1화
나스 대륙력, 1418년 1월 1일.
나는 늘 그랬듯이 새해 첫날의 의식을 치르듯 라피르의 물약을 들이켰다.
버그의 살아 있는 증거와도 같은 물약.
마실 때마다 내가 의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새삼 인지케 하는 물약이기도 하다.
똑똑.
동틀 녘의 박명(薄明)에 맞춰 들리는 노크 소리.
“들어와.”
“폐하! 맛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해 왔어요!”
“늦잠 자다가 만들었지? 머리가 왜 그래?”
“네? 머리가 왜……. 아, 아앗! 죄송해요, 폐하! 다시! 다시 머리를 해서 올게요!”
“야야! 먹을 건 놓고 가야지!”
나는 뒷머리가 부스스하게 한참을 말려 올라가 있는 헤이즈를 가리키며 웃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새해 첫 식사는 자신이 꼭 챙기고 싶다며 그저께부터 노래를 불렀던 헤이즈.
그래서 해 뜰 때 맞춰서 식단을 준비해 올 수 있으면 그러라고 했는데, 그만 늦잠을 잔 모양이다.
“아흑,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머리카락이 좀 떡지면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봐 봐. 누워 있었던 얼굴 그대로잖아?”
“폐하는 잘생기셨잖아요. 뺨에 눌린 베개 자국도 멋지게 만드는 분이 폐하이신 걸요.”
“야, 누가 듣는다. 그런 말은 조심해. 진짜인 줄 알잖아.”
“정말이에요!”
헤이즈가 또랑또랑한 눈빛을 밝히며, 식탁에 앉은 내게 조심스럽게 음식들을 내밀었다.
스테이크부터 시작해서 내가 항상 체중 및 건강관리를 위해 챙겨 먹는 채소들까지.
나를 위한 100% 맞춤형 식단이었다.
육식을 유독 좋아하고, 향이 강한 채소를 싫어하는 내 특성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는 식단.
헤이즈가 아니면 만들어 줄 수 없는 나만을 위한 식단이기도 했다.
나는 바로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고, 전투적으로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마침 배가 고팠던 참이었다.
오물오물. 냠냠.
“맛있네.”
“입에 맞으세요?”
“네가 만든 요리는 다 맛있어. 게다가 메리 요리장에게서 특훈을 받은 실력이잖아?”
“맞아요! 요리장님께서 수석으로 졸업해도 될 것 같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죠!”
“그렇게 자화자찬하면 좀 부끄럽지 않아?”
“헤……. 그래도 폐하께서 맛있어 해 주시니 너무 기뻐요.”
“왜 내 것만 해 왔어? 헤이즈, 너도 같이 먹을 것도 챙겨 오지.”
“저는 만들면서 많이 먹었답니다. 보세요. 배가 엄청 나왔잖아요?”
힘껏 배를 내미는 헤이즈의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아마 헤이즈가 나왔다고 말하는 저 배가 진짜 나온 배라면, 이 세상 사람들 중 배가 안 나온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유독 자기에게만 혹독한 기준을 적용하며, 자존감이 낮은 모습을 보이는 헤이즈.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느낀 유일한 그녀의 단점이다. 이타적인 성격과는 별개로 낮은 자존감.
그래도 디바인 세븐의 치유사로서 전장 이곳저곳에서 활약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늘어난 헤이즈였다.
이번 나스 대미궁에서 좀 더 많은 역할을 맡는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진 모습을 볼 수 있을 터다.
식사 내내.
헤이즈는 마치 맛있게 밥을 먹는 자식을 보듯이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현생 초창기에는 그런 모습이 종종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제는 나도 헤이즈와 아이 콘택트를 하며 열심히 오물거리면서 식사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진 느낌이랄까?
이제는 눈빛만 봐도 서로가 원하는 바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어쩌면 늘 내 곁에 있었던 헤이즈이고, 그런 헤이즈를 늘 보아 왔던 나이기에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헤이즈.”
“네?”
장난스럽게 헤이즈를 은근한 눈빛으로 지켜보자, 부끄러운 듯 헤이즈가 몸을 배배 꼬았다.
뒤로 넘긴 오른쪽 발끝을 바닥에 동동 구르는 것이 정말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헤이즈의 순수함은 한결같다.
세상이 변하고,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변했지만 헤이즈는 늘 똑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날도, 그리고 지금도, 헤이즈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떠날 채비 했지? 오늘 정오에 모두 모이기로 했잖아.”
“그럼요! 아마 두 시간 정도 후면, 황궁에 클로이도 도착할 거예요!”
“클로이 여왕님?”
“아! 그렇죠. 클로이 여왕님. 반가운 마음에 예전처럼 이름을 부르고 말았네요.”
“이젠 어엿한 그레이 엘프의 통치자인 만큼, 격을 낮추는 말은 삼가도록 해.”
“네, 폐하.”
“드디어 출발이네…….”
만감이 교차했다.
나스 대미궁을 100층까지 공략하고 나면, 이제 어느 정도 나와 동료들의 성장도 확실하게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즉, 최종 스펙업이라는 뜻이다.
“폐하, 이번에는 반드시 지난 공략에서 아쉬웠던 부분까지 모두 보완할 수 있도록 할게요.”
“좋아. 더 강해져서 돌아오자.”
결연한 의지가 차올라서일까?
꽈악!
나도 모르게 헤이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는 정말 하루하루, 일분일초가 소중해졌다.
소중한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지금은 더욱 부지런해져야만 한다.
서쪽.
지평선 너머 어딘가에 있을 나스 대미궁을 향해, 내 시선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1일 후.
드르렁, 푸우-.
새근새근. 쉬익쉬익.
모두 잠이 들고.
유일하게 잠을 청하지 않은 자레드가 멀찍이 나아가 베이스캠프 주변을 정찰하는 동안.
스슥. 스스슥.
부스스 일어난 헤이즈는 챙겨 온 일기장에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히힛.”
복기하던 헤이즈의 입가에는 미소가 잔뜩 걸려 있었다.
모든 동료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을 정도로 59층에서 그녀는 실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자레드는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았고, 모든 공략을 동료들에게 맡겼다.
내심 반신반의했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간 자레드와 쌓아 온 수많은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방식을 전투에 응용해 보았고.
결국 빈틈을 찾아내어 확실하게 보스 몬스터를 ‘분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레드는 59층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을 자신을 제외한 동료들에게 분배했다.
지금은 마정석과 같은 금전적인 가치가 있는 것보다는 아티팩트 같은 것이 더 중요했는데.
마침 모두에게 쓸 만한 물건들이 골고루 나와 줬다.
덕분에 기분 좋은 스펙업을 마친 동료들은 지금 베이스캠프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같은 날씨였기 때문에 모두 잠에 깊게 들었다.
“휴우.”
헤이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의 경지를 끌어올리고 싶은 욕심은 비단 헤이즈만의 것이 아니었다.
전부 같은 생각이었다.
자레드를 제외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된 존재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7성의 벽에서 큰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이자벨이 그랬고, 정교한 오러 다루기에 힘들어하고 있는 레나가 그랬다.
미아도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6클래스의 벽을 뚫는 듯하더니, 계속 정체를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한숨을 쉬어?”
“원하는 만큼 능력의 성장이 안 되는 것 같아서요.”
그사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자레드가 헤이즈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경 1km 내에 위험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마리 보였었던 ‘잡몹’들은 보이는 즉시, 분해해서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목마다 타넥스를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해 두고는 자레드도 캠프로 돌아왔다.
“무슨 점수가 정해져 있는, 그런 변화가 아니잖아. 모든 행동을 성장에 귀결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저 원리 원칙에만 충실해 봐.”
“예를 들면요?”
“내가 이렇게 치유술을 사용하면 뭔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지 말고, 그냥 동료를 최대의 효율로 치유하는 그 자체에 집중하라는 거지.”
“아…….”
“본질과 욕심이 주객전도가 되면 안 돼. 내가 노력을 하라고 한 것도 욕심을 더 내라고 한 게 아니라, 그럴수록 더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라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였어.”
“제가 어리석었어요! 집요하게 고민하고 떠올리면, 어느 순간 막힌 것이 뚫리듯 열릴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뚫리는 거였으면 모든 마법사들이 9클래스가 됐겠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건 아냐.”
자레드의 조언을 듣고 나니, 답답했던 마음이 순간 뻥 하고 뚫리는 기분이었다.
자레드가 트리스티스 아일랜드 지도를 펼쳐 보이며, 헤이즈에게 설명을 이어 갔다.
“내일 60층부터 시작해서 80층까지는 최대한 속도전으로 갈 거야. 여기까지는 내가 알기로 고생시킬 만한 녀석들은 없어.”
“정말요?”
“물론 저마다 특색은 있겠지만. 쉽게 말하자면 앞서 낮은 층수에서 만났던 녀석들의 ‘강화 판’ 정도일 뿐이야.”
“상위 개념의 몬스터이긴 하나, 특별할 것은 없다는 말씀이시죠?”
“응, 맞아.”
자레드는 예전 에서의 기억을 더듬으며, 꼼꼼하게 내용을 짚어 갔다.
80층까지는 순수 화력전이었다.
버그와 꼼수를 사용하는 구간도 적고, 파티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하는 구간에 가까웠다.
“그럼 81층부터가 관건이겠네요.”
“여기서부터는 마족과 유사한 녀석들을 보게 될 거야.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곳이거든.”
“신이 그렇게 만든 거겠죠?”
“그렇지.”
정확히는 개발진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레드가 걱정하는 구간은 81층부터였다.
그리고 90층부터는 정말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난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성마 대전 ‘연습 모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 다양한 시련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룡점정에 해당하는 100층의 보스 몬스터 ‘원(One)’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꼭 100층까지 공략해서 완벽한 끝을 보고 싶어요.”
“나도 동감이야. 성마 대전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100층의 한계를 뛰어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으니까.”
자레드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마왕 레크나트의 분신이라고도 불렸던 100층의 보스 몬스터, 원.
녀석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