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80
제 280화
89장. 다시, 대미궁 – 2화
상층으로의 전진은 차근차근 이루어졌다.
절대 서두르지 않았고.
밀린 숙제를 해결하듯이 급하게 몬스터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상대하는 몬스터 하나하나의 데이터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패턴을 체크하며 차례대로 격퇴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륙 전체가 신성 제국 연합의 깃발 아래 안정화가 끝난 만큼, 후방의 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혹시라도 데스먼드 제국을 위시한 타국 세력, 혹은 암흑 교단의 준동이 있지 않을까 걱정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런 위험 요소가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물론 이따금 옛 데스먼드 제국의 땅에서 일부 부흥 세력의 소식이 들리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100명을 채 넘기지 못하는 적은 수.
충분히 제압 가능했다.
그간 라키스를 위시해 눈코 뜰 새 없이 훈련해 온 크리비아 제국군의 위용이 높았기에 걱정이 없었다.
80층까지 막힘없는 전진이 이루어졌다.
한 층의 공략에 하루를 썼고, 공략된 층계 전체는 몬스터가 씨도 남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됐다.
더불어 전투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나와 헤이즈의 기록지에는 이런저런 내용이 빼곡하게 채워져 갔다.
나중에 성마 대전에서 이 몬스터들과 유사한 형태의 마수가 나타나면, 즉각 응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꾸준한 공략과 함께 상승 곡선을 그리는 모두의 레벨을 보며, 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층계가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는 경험치의 양도 충분히 실감이 됐다.
이런 속도라면 정말 최상층까지 공략을 마치면, 모두가 900레벨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여기였군.”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우리 일행의 발목을 잡은 것은 나스 대미궁 81층이었다.
그간 공략을 하면서 수많은 악천후를 경험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81층은.
쏴아아……! 쏴아아!
거친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제는 이 장대비가 평범한 빗물이 아니라, 산성을 가득 머금은 강산성의 비라는 사실이었다.
치이이익. 치익.
빗물이 닿는 모든 바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인상이 찌푸려지는 악취와 가스가 배출됐다.
혹시나 싶어 옷가지 몇 개를 빗줄기 사이로 던져 보자, 순식간에 천 조각이 녹아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사람의 피부도 어렵지 않게 녹여 버릴 듯한 산도였다.
“마족 중에서 산(酸)을 다룰 수 있는 마족이 일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것에 대한 예행연습이 될 것이오.”
나는 동료들 모두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81층 입구.
스타팅 포인트로 불리는 시작점의 반경 25m 정도가 유일한 안전지대였다.
82층으로 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북쪽으로 전진하면서 공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폐하,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라키스가 난색을 표했다.
나나 나오미 같은 경우야 실드를 펼치면 어떡하든 산성비에 노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특히 클로이나 아슈르처럼 자신을 보호하는 기술이 없는 경우에는 아예 방법이 없었다.
물론 실드를 데큐플 트랜센던스까지 끌어올려서, 좀 더 광범위한 영역을 보호하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나의 전투 능력은 1할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다.
게다가 혹 위력적인 공격을 퍼붓는 몬스터가 나타나면 실드가 뚫릴 공산도 컸다.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만큼, 내구성은 반비례해서 급격히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비오 녀석의 추가 옵션을 활용할 때가 된 것 같군.’
나는 가급적 아껴 두려고 했던 선택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타넥스 2기를 한 명의 사람에게 교차 장착을 시키는 옵션이었다.
기존의 타넥스는 타넥스의 몸체에 신체가 부위별로 결합하는 형태로 활용이 가능했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타넥스지만, 앞에서 보면 기계와 신체가 공존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전투에도 간혹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개는 고속 기동이나 부상자 호송을 위해 쓸 때가 많았다.
하지만 2기의 결합은 다르다.
전방, 후방을 전부 결합시키는 형태라서 외부로 노출되는 신체 부위는 얼굴이 유일했다.
그것도 마정석 강화 세공이 들어간 특수 고글과 보호대가 정면을 가리기에 사실상 ‘로봇 인간’이 되는 셈이었다.
타넥스는 쉽게 녹이 슬지 않는 켈디아로 세공이 되어 있고, 모든 외피가 마정석 코팅 작업까지 되어 있는 마도 공학의 집성체였다.
즉, 일부 내구성의 감소는 불가피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악조건에서 인체를 지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자, 각자 몸을 충분히 풀도록 하시오. 전원 타넥스를 착용하고, 81층 공략에 나서도록 하겠소.”
내가 간결하게 정리된 명령을 내리는 순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간 타넥스와 연계한 전투 훈련을 한 적은 있었다.
타넥스 1기와 결합하는 형태로 고속 기동 훈련이나 공격 훈련을 한 적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완전 결합을 한 적은 없었다. 즉, 시뮬레이션 가상훈련만 했었던 것이다.
“성마 대전이 꼭 우리가 원하는 환경에서 전투가 이뤄진다고는 장담할 수 없소. 대비는 다각도로 해야 하니 너무 놀랄 것 없소.”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타넥스는 인체가 버틸 수 없을 외력을 충분히 버티고, 불가능한 속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때를 위해서 사비오에게 거액을 투자해 가면서, 마도 공학 연구를 시켰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끼면 똥 된다.
이번에 확실하게 타넥스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총 20기의 타넥스를 각각 10명의 인원에게 배분하고, 실드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간 타넥스를 이용한 개인 훈련을 나는 질리도록 했으니, 굳이 또 하고 싶진 않았다.
“…….”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올라, 새로운 파일럿과의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보조 기체와의 동기화도 동시에 추진합니다.
여기저기서 타넥스에 탑재된 인공지능 올라가 부지런히 안내 멘트를 떠들어 댔다.
동시에 철컥철컥, 소리와 함께 기체가 안정적으로 동료들의 몸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아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녀의 자그마한 몸에 맞게 알아서 기체가 조정되어 맞춰졌다.
“와, 꽤 두꺼운 기체라고 생각했는데 몸과 결합하니 생각보다 그리 무겁진 않군요. 움직임도 자유롭고요.”
라키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다시 검을 움켜쥐고.
휘익! 쉬이익!
전후좌우로 열심히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보통 몸의 감각이나 반응이 느려지게 되면 덩달아 검격도 무뎌지기 마련인데.
그런 둔화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나는 그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사비오의 제작 실력에 엄지를 힘껏 치켜들었다.
아마 녀석이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중이라면, 내가 치켜든 엄지를 흐뭇한 표정으로 보았을 것이다.
“모두 연동된 타넥스에서 외피 보호 시동어 한 번씩.”
“외피 보호.”
“외피 보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외피 보호 명령을 내리자, 몸체 전체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이제 이 정도면 산성비의 영향력은 급감할 것이다. 표면이 조금 녹슬 수는 있지만, 그건 적은 비용으로 수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크르르르르…….
바로 그때.
거센 죽음의 빗줄기를 가르며, 검은 실루엣 수십 개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강화 어보미네이션이군.’
잊을 만하면 나오는 더럽고, 추악하며, 흉측하기 그지없는 누더기 골렘.
어보미네이션이 또 등장했다.
강화 어보미네이션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외피가 물리적 공격에 완전 면역이라는 것이었다.
즉, 마법 공격이나 신성력이 가미된 공격이 아니라면 피부, 아니 털끝 하나도 벨 수가 없다.
‘이때를 위해서 모두 신성력 무장을 마쳐 뒀지. 아티팩트도 고루 분배했고.’
나는 심안으로 살핀 동료들의 상태를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모두의 스탯창에 ‘신성력’ 스탯이 골고루 포진해 있었다.
특히 신성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헤이즈의 신성력은 여기 있는 모두의 것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우우웅!
타넥스를 고속으로 기동시키며, 헤이즈가 강화 어보미네이션의 군단 위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내가 딱히 어떤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으나,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정확히 인지한 것 같았다.
“미아!”
“네, 폐하!”
나는 바로 미아를 불렀다.
곧 대지에 쏟아지게 될 신성력의 향연에 부채질을 하려면 그만한 공격이 필요하기에.
“모든 어보미네이션을 타격할 수 있게 공격의 각도를 잡아 봐.”
“알겠어요!”
전투에 익숙해진 미아는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맡은 바를 잘 소화해 냈다.
레나와 더불어 든든한 10대.
여전히 어린 만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높은 녀석이기도 했다.
장담컨대 나오미보다 미아가 더 빠른 성장을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가지고 있는 특수 성향의 개수에서부터 이미 12 대 3으로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미아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꾸준한 조언과 함께 그녀의 성장을 도울 생각이다.
바로 그때.
“하아아앗!”
헤이즈의 일갈과 함께 하늘에서 그야말로 우윳빛의 섬광이 지상으로 빗발쳤다.
마치 먹구름의 틈새를 뚫고 내리쬐는 햇빛처럼, 눈길을 확 잡아끄는 섬광이었다.
여기에 이어서.
과아아아!
미아가 전개한 ‘바람 칼날’이 굉음을 내며, 그녀를 중심으로 반달 모양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람 칼날은 길이 30m가량으로 매우 길쭉한 바람 공격 마법이었다.
마치 부메랑을 눕힌 듯한 형태로 날아가게 되는데, 그 바람결의 끝이 매우 날카로웠다.
내가 퍼펙트 실드로 한 번 막아 본 적이 있는데, 집중하지 않았다면 산산조각이 났을 대단한 위력의 일격이었다.
미아는 현재 6클래스.
하지만 바람 마법의 위력만 놓고 보면 그녀보다 상위의 1, 2클래스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강력했다.
괜히 바람 마법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것이다.
“…….”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헤이즈와 미아의 연계 공격을 지켜보고 있었다.
관찰은 매우 중요하다.
마왕군과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대륙 전역이 온통 전장이 될 것이고.
언제, 어디서, 어떤 동료와 호흡을 맞추게 될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가서 뒤늦게 호흡을 맞추려고 하면 늦는다.
그래서.
서로가 어떤 공격 성향과 패턴, 능력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중요했다.
내가 나스 대미궁 공략 내내 강조했던 부분으로, 자기 레퍼토리만큼이나 동료의 레퍼토리도 꼭 챙겨 보라고 일렀었다.
덕분에 이번처럼 누군가의 독무대, 혹은 합동 무대가 펼쳐질 때면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리고 저마다 머릿속으로 열심히 시뮬레이션을 하는 모습이 가감 없이 보였다.
그만큼, 다들 열성적이었다.
철퍽! 철퍼덕!
이윽고 헤이즈의 신성력 섬광을 전신으로 받아 낸 어보미네이션들의 몸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기본 성향이 마수, 그러니까 악성향의 몬스터인지라 신성력이 상극이었다.
신성력 ‘샤워’가 끝나자 그 단단해 보이던 외피가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처럼 야들야들해졌다.
그 위를 미아의 바람 칼날이 할퀴면서 지나가자.
뻐엉! 뻐어어엉!
여기저기서 귀를 시원하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어보미네이션들이 풍선처럼 뻥뻥 터져 나갔다.
장관이었다.
“오오오!”
모두가 감탄했다.
꽤 까다로울 것 같았던 어보미네이션 군단이 단 두 명의 협공으로 빠르게 분쇄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냐, 이제 시작일 뿐.”
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스르르륵. 스륵. 스르륵.
사방으로 흩어진 강화 어보미네이션의 신체 부위들이 마치 자석처럼 서로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합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 부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최악의 형태의 마수가 눈앞에서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