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g Player RAW novel - Chapter 294
제 294화
93장. 황도의 대혈투 – 1화
성마 대전 발발 이틀 후.
“…….”
한 줄기 빛도 닿지 않는 심연 속에서 레크나트가 눈을 떴다.
더 빠른 회복을 위해서 모든 정보를 차단했고, 오로지 자신의 몸의 회복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효과는 있었다.
이대로라면 일주일이 아니라, 6일 차가 되는 시점에도 능히 완전해진 몸으로 나설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내가 나가도 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레크나트는 전황을 파악하기에 앞서,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정신 연동을 전개했다.
직접 현장을 살필 수는 없지만, 레크나트의 심계와 연결된 마족 99좌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상태를 살핀다고 해 봤자 생사(生死)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개전 2일 차.
지금까지 목숨을 잘 보전하고 있는 마족이 있다면, 그들이 있는 지점은 이미 정리가 끝났다는 뜻일 테니까.
“후후, 역시.”
정신 연동은 최상위, 상위 마족들부터 천천히 연결이 이루어졌다.
서열 한 자릿수의 마족들은 볼 것도 없이 모두 건재했고, 10위권의 마족들도 모두 무사했다.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태어날 때부터 우성학적으로 우월한 우리 마족을 이길 수는 없다.”
이는 레크나트의 신념이었다.
마족은 우월하고, 인간은 열등하며, 드래곤은 그 중간에 애매하게 낀 존재라는 생각.
신이 선택한 종족이 바로 ‘마족’이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하고 있던 신념이었다.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푸른색의 느낌. 최상위 마족들의 생존 확인을 통해 레크나트의 확신은 더욱 강해졌다.
한데 바로 그때.
“아니?”
서열 20위 마족, 아스모드라와 정신을 연동하는 순간, 레크나트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꺼져 버린 불빛.
아스모드라가 죽은 것이다.
다시 확인을 해 봐도 똑같았다.
“오류인가?”
첫 번째 반응은 현실 부정.
레크나트는 투장(鬪將)으로 기세가 높은 아스모드라가 죽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어진 정신 연동에서 추가로 생겨났다.
“고르츠, 알페어, 21위, 22위, 23위가 연달아 목숨을 잃었다고?”
두 눈을 의심했다.
정신 연동에 오류는 없었다.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어서 서열 24위 마족부터는 다시 생존이 확인되는 신호가 감지되기는 했다.
하지만 레크나트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상위 서열에서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손실이 발생했다.
“…….”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여유만만하게 상황을 관조하던 레크나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래도 24위부터 50위 서열 구간까지는 괜찮았다.
중간중간 죽은 마족이 일부 있기는 했으나, 이는 예상했던 범주 내에서의 희생이었다.
하지만.
“…….”
서열 55위 이후를 확인하던 레크나트의 표정이 아예 흙빛으로 변해 버렸다.
“……다 죽었다고?”
완벽하게 꺼진 생명의 불씨.
응당 생기를 뿜어내며 각 마족의 생존을 알리고 있어야 할 불빛들이 모두 꺼져 버리고 없었다.
전멸(全滅).
완벽한 몰살이었다.
개전 이틀 만에.
마족 전체 중 4할이 증발했다.
“제아무리 자레드가 뛰어나다고 한들, 그놈이 모든 공간을 아우를 수는 없다.”
레크나트의 생각은 일견 타당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절대적인 개념이 존재하고, 자레드는 한 명뿐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마족의 피해가 발생했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자레드를 제외하더라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인간들이 많은 것인가?”
레크나트의 정보는 예전에 이카젤라가 전달한 내용에 상당히 치중되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레드에 대한 경계심은 있었지만, 라키스나 레나 등을 위시한 동료들에 대한 정보는 상당히 부족했다.
강해 봤자 자레드 하나 정도.
혹은 인간계에서 대마법사나 소드 마스터로 불리는 한둘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오산이었고, 이틀에 걸친 여유는 오히려 재앙으로 다가오게 됐다.
“지금 현신하면…….”
위험하다.
불완전한 몸 상태에서 인간계에 강림한다면, 기존의 힘의 절반도 제대로 못쓸 공산이 컸다.
최소 이틀.
그만큼의 절대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레크나트의 판단이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내가 무엇을 놓친 것인가? 인간이 과거의 드래곤들보다 더 강하다고?”
레크나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용마 대전 초창기에도 이런 대형 사고는 없었다.
드래곤들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게릴라전을 벌였기에 패한 것이지.
지금처럼 힘 대 힘으로 붙은 전투에서 마족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자레드를 위시한 인간들이 아무리 대비를 잘했다고 한들, 마왕군의 군세는 그런 대비에 쉽게 무너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레크나트가 분노의 일갈을 토해 내며, 다시금 심연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반드시 필요했다.
“내가, 내가 나서면…….”
모든 것은 정리된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레크나트는 분노를 참고, 인내하기로 했다. 인간들의 승리는 고작 3일간에 불과할 것이다.
곧.
현실에 지옥이 강림할 터였다.
* * *
어느덧 찾아온 새벽녘.
3월의 초입에 머물러 있는 나스 대륙의 날씨는 북부와 남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추웠다.
특히 내가 있는 이 북부 지역은 이틀째 폭설이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아.”
고르자스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음에도 참을 수 없는 피로감이 몰려왔다.
아티팩트 툴팁을 보면, 영원히 자지 않아도 될 것처럼 적혀 있기는 하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2일, 48시간.
꼬박 한숨도 자지 않고 체력을 아낌없이 퍼붓는 혹사를 산정하고 에서 만들어진 아티팩트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밀려드는 피로감에 나는 바위에 대충 몸을 기대어 눈을 잠시 감고 있었고, 옆에서 헤이즈가 아낌없이 치유술을 시전해 줬다.
아마 헤이즈가 없었다면, 지금 세상모르고 지면에 코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하하! 마족 놈들, 얼마든지 오라지! 우리가 또 깨부수자고!”
“죽지 않는 괴물이니 뭐니 해서 긴장했더니, 뭐 별거 아니었구먼!”
“우리만 승리한 게 아니라고 하는군! 여기저기서 마족들이 죽어 나가고 있는 모양이야!”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승전보 위주로만 소식을 전달하기에 더 그런 점도 있었다.
굳이 다른 전선의 비극을 그들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어서다. 선의의 정보 차단인 셈이다.
하지만 전황 전체를 파악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마냥 행복해할 수만은 없었다.
“폐하, 너무 근심하지 마세요.”
“알아. 아는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냉정하게 되지는 않네.”
옆에서 헤이즈가 내 머리를 쓸어내려 주었다.
전황 전체를 보면.
우리 ‘신성 제국 – 이종족 연합’이 7대3의 비율로 분명히 승전을 거두고 있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3의 비율로 패배한 곳.
이 전장이 문제였다.
내가 기억하는 최상위 마족인 서열 3위 아카로프트를 위시한 최정예 마족들이 나타난 곳.
발렌시아 왕국은 그야말로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단 이틀 만에 벌어진 잔혹한 결과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백성들이 빠르게 피난을 했으며.
미리 구축한 지하 대피소에 숨어들어, 무기한 버티기에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전국에 착실하게 만들어 둔 대피소는 표준 인원을 지킬 경우, 최소 4주를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상태였다.
다만 마족과 마수들이 바보가 아니고, 언제든 대피소는 찾아낼 수 있기에 안심은 금물이었다.
“칸트라 제국도 타격이 커.”
근심의 범위는 더 커졌다.
칸트라 제국도 발렌시아 왕국처럼 상위 마족의 공격을 받았고,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통신 방해 어보미네이션으로 인한 연락 두절로 지휘 체계에 혼선이 빚어졌고.
그 과정에서 치유사단을 엄호하던 부대와 주변의 연계가 무너지면서 치유사를 대거 잃고 만 것이다.
칸트라 제국의 황제 알카디우스를 통해 전달받은 소식에 따르면, 종잇장처럼 갈가리 찢겨 죽는…… 그야말로 학살의 장이 펼쳐졌다고 했다.
전략적으로 치유사들을 먼저 노려, 우왕좌왕한 틈을 통해 그들을 모조리 제거했다는 것이다.
즉, 마왕군도 바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일반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지성체이고, 당연한 얘기지만 전략 전술을 사용할 줄 알았다.
문제는 칸트라 제국이 이런 부분에서 마족의 지성을 너무 얕봤고,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다는 것이다.
헤이즈만큼은 아니더라도, 칸트라 제국의 치유사단은 많은 전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변수가 사라져 버렸고, 칸트라 제국군은 마왕군과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교전에서 모조리 패배했다.
이미 칸트라 제국의 수도, 칸트라디아는 불바다가 된 상태이고, 황제는 다급히 피난 중이었다.
그때, 헤이즈가 물었다.
“폐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세요?”
“알카디우스의 말에 따르면, 수도를 불태우고 대학살을 펼친 뒤 엄청난 크기의 암흑 원석을 바로 깨부쉈다고 하는군.”
“그 뒤로 종적을 감췄고요?”
“맞아. 아마도 예전에 이카젤라가 대규모 전력을 우리 수도로 단번에 텔레포트를 시켰던 것처럼……. 아!”
기억의 흐름을 좇던 나는 불현듯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도에서는 지난 이틀 동안, 총 다섯 차례의 전투가 있었지만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
황도의 상징성은 물론, 백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 것이다.
아세로와 모이즐의 무기, 아티팩트 제작을 위한 설비도 모두 황도에 몰려 있어 정예 전력을 배치해 두었던 것이다.
한데 갑자기 다수의 마왕군이 종적을 감췄고, 아직까지 보고가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라면.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폐하! 폐하!
마스터 스톤의 불빛이 정신없이 점멸을 반복하며, 다급한 연락병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말하라.”
-황도 남쪽입니다! 남쪽에서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대규모의 마왕군이…… 크아아아악!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이어서 들려온 연락병의 비명.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마족들이 황도를 확실히 분쇄할 타깃으로 삼았다는 것을.
아마도 고문 등을 통해서 죽인 칸트라 제국의 병사들로부터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연합군의 맹주는 크리비아 제국이고, 그 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 정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이즈, 출발하자.”
“네, 한시가 급한 것 같아요.”
굳이 내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헤이즈는 바로 말뜻을 이해한 듯했다.
황도는 상징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중요한 기반 시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곳이 무너지면 지금까지 승리를 거두고 치열히 싸워 왔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된다.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은 곳이 황도지만, 내가 없으면 반나절도 채 버티지 못할 터였다.
얼마나 많은 마족이 올 것이며, 그들의 서열은 어느 정도일지, 아직 아무것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전장으로 향하고, 적을 마주하고, 죽기 전까지 처절하게 그들을 상대해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