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17
17화
“좋네요.”
“그러게요. 밤에 학교를 거닐 기회가 많지 않아 이런 풍경일 줄 몰랐어요.”
“모범생이셨나 보다.”
“아무래도 좀 유별난 어머니가 계셔서..”
“하하.. 이해했습니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저 멀리서 계단이 보였다.
“보이나요?”
“네, 그 자리에 앉아 있어요.”
“여전히 연두색인가요?”
“네.”
“그럼 저도 준비를…”
덕팔이 품에서 소도를 뽑아 피를 내고 낡은 붓을 이용하여 눈가에 발랐다.
“매번 그렇게 해야 하는 건가요?”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네요. 봉인을 잠시 풀어주는 효과가 있는 거라..”
“손가락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그래서 열손가락 돌아가면서 찌르고 있습니다. 하하”
계단 입구에 서게 되자 은혜가 입을 다물었다.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덕팔이 은혜를 뒤로 물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중간쯤 올랐을 때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몽달귀신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몽달귀신이 반응이 없자 조금 큰 목소리로 다시 인사를 했다.
“거기 나무 밑에 앉아 계신 분, 안녕하세요?”
자신을 콕 찍어 인사를 하자 그제야 몽달귀신도 반응하였다. 큰 몸짓을 움직여 고개를 돌렸다.
[그대는 누군가?]“오덕팔이라고 합니다. 아까 오후에도 여기 앉아 계시던데..”
[내가 보이나?]“보이니 이렇게 말을 걸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군. 어리석은 질문을 했어. 나에게 용건이 있나?]“그냥 그렇게 앉아 계시니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까 싶어…”
[없네. 그러니 모른 척 지나가 주게.]“보통 몽달귀신을 악귀라고 하는데 그쪽 분은 좀 다른 모양입니다?”
반응이 시원치 않자 직접 물어보았다.
[나를 몽달귀신이라고 하나? 처음 알았군.]“누굴 찾으십니까?”
[아닐세. 나는 그저 이곳에서 그녀가 오길 기다릴 뿐이네.]“이 학교에 추억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아닐세. 이 나무에 추억이 있을 뿐이네.]“지박령이십니까?”
“그러시군요. 혹시라도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으시다면 이 처자에게 큰소리로 말씀을 하십시오. 그럼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고맙네. 잘 돌아가게.]덕팔이 몽달귀신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서자 은혜도 후다닥 덕팔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조용히 길을 걸어 계단으로부터 저만치 멀어졌을 때 은혜가 입을 열었다.
“되게 오래전에 귀신이 되신 모양이에요.”
“그러게요. 이 학교 학생쯤으로 생각했는데…”
덕팔이 말없이 캠퍼스를 거닐었다.
**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호텔에 돌아왔건만 아영의 강짜는 하늘 끝까지 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 승낙이라도 받은 거야? 그런 거야?”
“아니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왜 저 여자 부모님을 만났는데?”
“딸이 갑자기 어떤 남자하고 살아야 한다고 하니 부모로서는 당연히 걱정되겠지. 그래서 내가 누군지 얼굴을 비추고 인사를 한 것뿐이야.”
“아! 이거 서러워서 못 살겠어.”
“아영아.”
“뭐!!”
“아니, 그냥. 밥 먹었어?”
“못 먹었어.”
“우리 아영이, 배가 고파서 신경이 날카로워졌었구나. 이 오빠가 저녁 차려줄게. 쪼금만 기다려.”
“난, 김치찌개.”
“아, 우리 아영이가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 거구나. 오빠가 금방 해줄게.”
“참치?.”
“당연하지, 김치찌개 하면 참치 아니겠어?”
덕팔이 아영의 비위를 최대한 맞추며 김치찌개를 끓일 준비를 하였다. 그 사이, 샤워를 하러 들어갔던 은혜가 거실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언니! 이리 와 봐요.”
“…네”
아영이 은혜를 쇼파에 앉게 하더니 근엄한 목소리로 용무를 꺼냈다.
“페어플레이라고 알죠?”
“네?”
“경기는 공정하게 해야 한다 구요. 알죠?”
“아.. 네”
“잊지 맙시다. 페어플레이 정신!”
“네..”
은혜가 기가 죽어 그저 아영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아영이 쇼파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은혜가 물었다.
“그럼, 아영씨와 덕팔씨가 가지고 있는 18년간의 추억은요?”
“그게 뭐요?”
“따라 갈 수가 없잖아요. 저로서는… 그러니 제게 시간을 조금 줘도 되지 않을까요?”
“오호라.. 이 언니 보소?”
아영이 다시 쇼파에 앉아 은혜를 노려보았다. 은혜가 움찔하였지만 몸을 뒤로 빼진 않았다.
“뭐, 좋아요. 어차피 당분간 둘이 붙어 다닐 거 같으니까 인정하죠. 대신 페어플레이 정신! 알죠?”
“네, 그거면 돼요.”
“… 근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우리 오빠가 어디가 좋은 거예요?”
“저는… 딱히 덕팔씨를 좋아하지 않는데요?”
“??”
“아영씨가 페어플레이를 하자고 하니 이제부터 좋아해볼까 해서…”
은혜가 쇼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영이 그런 은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은 밥을 한 솥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 같았다.
“강적을 만났네.”
**
10인용 전기밥솥에 가득 밥을 하였지만 두 여인의 식탐에는 매우 부족한 양이었다. 아침은 간단히 먹겠다는 두 여인의 헛소리에 전기밥솥을 이용하였다가 아침을 굶게 된 덕팔은 쇼파에 앉아 어제 저녁, 아영을 위해 밥을 하고 남은 것으로 만든 누룽지를 씹고 있었다.
그마저도 출근길에 입이 심심하다며 아영이 반을 빼앗아가 남은 것은 이제 겨우 한 줌뿐이었다. 은혜가 늦은 출근을 위해 준비를 하였고 은혜를 호위하기 위해 덕팔도 출동 준비를 하기 위해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거실로 나와 보니 덕팔이 아껴 놓았던 누룽지를 은혜가 씹어 먹고 있었다.
“이 누룽지, 정말 맛있는 것 같아요. 딱딱하지도 않고 바삭하고 고소한 것이 너무 맛있어요.”
“하.하.하. 그래요? 많이 드세요.”
덕팔이 시계를 힐끔거리더니 목 함에서 약재 주머니 몇 개를 꺼냈다.
“아버님께서 약주를 좋아하시나요?”
“네. 사업상 드시기도 하지만 당신이 좋아하셔서 사업 핑계를 대고 드시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차는요?”
“차는.. 글쎄요? 커피는 종종 드시는데 그 외에는 드시는 걸 못 봤네요.”
“그래요? 어제 진맥을 했으면 좀 더 정확할 텐데..”
덕팔이 약재를 집어내는 걸 망설이자 은혜가 덕팔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건 뭐예요?”
“약재요. 심장이 좋지 않다고 하시니 도움이 될 만한 걸 만들어볼까 싶어서요.”
“정말요?”
“술로 만들면 1석2조가 될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진맥을 못 해봐서”
“술을 만드는데 진맥도 해야 해요?”
“아무래도 약술이 될 것 같아서요.”
“그럼 점심때 잠깐 들릴까요?”
“아.. 이 더위에 정장을 입고 싶진 않은데..”
덕팔이 망설이는 이유가 옷차림 때문이라는 사실에 은혜가 폭소를 터트렸다.
“저희 아버지, 그렇게 고지식하신 분은 아니에요. 그저 잠깐 뵈러 왔다고 하면 이해해 주실 거니까 점심시간에 잠깐 들려요.”
“네.”
두 사람이 출근길에 올랐다. 강남에서 한국대학교까지 차로 한 시간 남짓. 라디오는 두 사람의 어색함을 없애는 데 매우 유용하였다.
띠리리링.
덕팔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덕팔씨, 윤석철이 미끼를 물었어. 시간 약속을 해야 하는 데 언제가 좋을까?]“오늘만 아니면 어느 때곤 좋습니다, 가급적 저녁으로 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오늘은 안 돼?]“오늘이 그믐이거든요. 아마도 오늘 밤에는 난리가 날겁니다. 윤석철씨한테도 죽기 싫으면 오늘 밤에는 절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세요.”
[호호호.. 알았어. 그럼 내일 저녁에 집으로 간다고 할게. 수고해]“네, 변호사님”
덕팔의 전화 통화의 귀을 쫑긋거리던 은혜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네, 아영이가 부탁한 일인데 슬슬 결과가 나오려나 봅니다.”
“어디를 가시는 것 같던데?”
“네, 내일 적진에 들어갈 생각이에요.”
“저도 같이 가는 거죠?”
“아뇨. 집에 얌전히 계셔야 합니다.”
“왜요? 절 지켜주셔야 하잖아요.”
“호텔에 안전장치를 해 놨습니다. 그러니 오늘 밤, 내일 밤 모두 집에서 안전하게 TV를 보시면서 휴식을 취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아영이도 같이 집에서..”
“어휴…”
은혜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덕팔이 그런 은혜를 힐끔거리곤 피식 웃어버렸다. 두 여인이 친해질 수 있을까? 세상일은 알 수 없다지만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임은 틀림없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은혜가 강의하는 ‘고려미술사의 이해’라는 과목은 덕팔로 하여금 기나긴 수면의 길로 안내를 하였다. 오늘도 몽달귀신이 앉아 있는 계단을 지나쳤지만, 몽달귀신은 고개를 떨군 채 오늘도 상념에 빠져 있다고 하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대한 그룹 본사를 찾은 덕팔은 최진학의 환대를 받았다. 은혜가 미리 연락해 놓았는지 점심 약속도 취소한 채 덕팔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진맥과 함께 심장에 좋은 약주를 만들어 오겠다고 하자 약주를 언제 맛볼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일주일이면 됩니다.”
“그래? 그럼 내가 직접 가지러 가겠네. 가는 김에 우리 딸이 어떻게 사는지도 좀 구경할 겸, 자네 시래기 된장국도 맛볼 겸, 자네랑 소주도 한잔할 겸, 아주 좋아. 하하하”
최진학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 속이야 알 수 없지만 보이는 모습은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 그룹 본사 건물을 나오며 덕팔이 진이 빠진 모습으로 투덜댔다.
“아버님께서 굉장히 열정적이시네요.”
“약술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 때문이겠죠. 점수를 크게 땄어요.”
“하아… 부담 백뱁니다.”
“호호호, 저 오후 강의 없는데 어디로 가죠?”
“집으로 가야죠. 약주를 만들려면 손이 많이 가니 얼른 준비해야겠네요.”
덕팔이 차를 몰아 펜트하우스에 입성하였다.
덕팔이 거실에서 분주히 움직이자 은혜가 덕팔의 뒷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였다.
“술을 만드는데 술이 안 들어가요?”
“네, 대신 증류수가 필요해요.”
“약국에서 사 올걸..”
“만들어야죠.”
덕팔이 옹기 몇 개와 대롱을 가지고 와 안동 소주를 만들 듯 옹기를 이어 붙이고는 화로에 불을 붙였다.
쉼 없는 부채질에 땀이 범벅이 되었지만 덕팔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불의 세기를 조절하고 있었다.
“괜히 술을 만들어 드린다고 했나 봐요.”
덕팔에게 수건을 건네며 에어콘을 조금 더 강하게 튼 은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현대의학으로 유지가 되거나 치료가 될 정도였으면 나서지 않았을 겁니다.”
“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나요?”
“혈색이 지나치게 좋았습니다. 강제로 심장을 움직이게 하니 혈류가 빨라져서 혈색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심장은 학대를 받고 있는 거죠.”
“의사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요.”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그럴 겁니다. 저는 한의사는 아니지만 제가 배운 바로는 그랬습니다.”
“선생님께서 한의사셨다고 하셨죠?”
“네”
“덕팔씨도 한의학에 대해서 잘 아시겠네요?”
“아뇨. 저는 그쪽으로는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건 다른 분야죠. 일반 한의학에서 다루지 않는, 다룰 수 없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해가 안 돼요.”
“여기 이 약재들은 정상적인 자연에서는 자랄 수 없는 것들이죠. 영기가 강하거나 사념이 강한 곳에서 한시적으로 자랐다가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들은 도감에도 없는 것도 있죠. 그런 약재들을 이용해서 극단적인 처방을 합니다. 물론 약재가 떨어지면 그것도 불가능 하구요.”
“이 약재들은 모두 산속에서 가져오신 모양이네요.”
“네, 이 약재가 마지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덕팔이 쌓아 놓은 약재는 꽤 많았다. 하지만 조금씩 소진하다 보면 언젠간 다 사라질 것이다. 누군가는 꼭 필요함에도 도움을 받지 못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런 귀한 약재들을 아버지의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고 하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