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80
80화
교수 연구관 A동 102호
노인의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세어 나왔다.
“그 괴팍한 양반하고 9년을 살았다고? 고생이 많았겠군.”
“딱히 그러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덕팔이 어색하게 웃으며 눈썹을 긁자 노 교수가 다시 웃었다.
“9년 동안 그리 배웠으면 나는 가르칠 것도 없겠군. 주입식 교육이 최고의 교육이다? 하하하, 맞네. 맞아. 우리한테도 그랬지. 일단 외워라. 외우다 보면 의미는 저절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셨던 것 같군.”
“뭐, 외워도 의미가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이 알게 되니 이해가 쉬워지긴 했습니다.”
“그렇지. 허허허”
노 교수는 즐거웠다. 이 학교로 옮긴 지 6년. 통합의대가 신설되고 지금 본과 4학년이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다.
노 교수, 아니 김정학 교수는 한의학계에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본교에 있었다면 석좌교수로 평생 존경을 받았을 것이었지만 그는 한국대에 한의대가 설립되는 것이 자신의 명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의학을 배척하던 양의학의 중심이 바로 한국대였으니까!
“한의사 자격증이 필요해 입학한 것인가?”
“그런 목적도 있었고, 스승님 외에는 달리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에 다른 식견도 배우고자 했었습니다.”
“굳이 한국대가 아니어도 되었을 텐데?”
“입학 전에는 한국대에 들어와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뭐, 아니지만요.”
“민 교수는 자네를 법대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네. 학칙에 따르더라도 민 교수의 말이 옳아.”
“그렇군요.”
“아쉽지 않은가?”
“아쉽습니다. 법대에 재입학신청만 해도 입학이 되는 줄 알았으면 굳이 수능 공부를 하지 않았을 텐데.. 좀 억울합니다.”
“허허허.. 자네도 선생님만큼이나 독특한 친구군. 이 한국 땅에서 한의사 자격증이 없이는 약한 재도 다리지 못하네. 알고 있지?”
“네..”
“그럼에도 아쉽지 않나?”
“에… 아쉽다고 여러 번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런데 자네의 눈빛은 왜 전혀 아쉽지 않다고 말을 하고 있지?”
“…. 아쉽습니다. 정말로, 아쉽습니다. 도와주세요. 꼭 통합의대에서 졸업을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 한 번만 살려주세요.”
덕팔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을 하자 노 교수가 다시금 크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친구군.”
“…이럴 정도로 아쉽지는 않습니다. 교수님”
“허허허.. 알겠네. 자네를 한번 살려보도록 하지.”
덕팔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가려 하자 노 교수가 웃으며 덕팔을 불렀다.
“자네..”
“네, 교수님.”
“그 차를 다 마실 생각인가?”
보온 통까지 빼앗긴 덕팔이 투덜거리며 교수 연구관을 나오다가 은혜와 딱 마주쳤다. 은혜가 시계를 보더니 방긋 웃었다.
“나 보러 왔구나. 근데 왜 A동에서 나와요?”
**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덕팔씨가 저랑 학교 동기일 줄은 몰랐네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게 중요하죠. 한국대 법대 08학번 오덕팔! 좋았스..”
은혜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민하지 말고 법대로 가요. 제가 볼 때 덕팔씨는 2년 안에 사법고시 패스 할 수 있어요.”
“은혜씨, 사법고시 제도가 사라져서 로스쿨에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되죠. 까짓 거!”
“학부 2년, 뭐.. 2년간 학점을 전혀 못 땄으니 계절학기까지 풀로 들어도 3년은 다녀야 할 것이고, 로스쿨을 다시 3년 다닌다 치면 변호사 시험에 바로 합격해도 최소 6년 후에나 사람구실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통합의대에 있으나 법대에 가나 똑같다?”
“그렇죠.”
“그럼 학부만 졸업하고 취직해요. 우리 아빠가 덕팔씨를 꼬셔볼라고 얼마나 노력 중인데요? 대한 그룹에 입사하면 되겠네.”
“하아… 안 된다는 거 잘 아시면서…”
“그냥 해본 말이에요. 제가 좀 알아볼게요. 이런 경우가 덕팔씨만 있지는 않았을 거니까.”
은혜가 덕팔을 달래며 다시 시계를 보았다.
“수업 있으면 얼른 가요. 저도 1시간 있다가 수업이라 점심이나 먹어야겠네요.”
“도시락?”
“네”
“호호호.. 가요. 밥 먹으러.”
“수업 있는 거 아니었어요?”
“원래 첫주는 휴강이 미덕이라구요.”
은혜가 활짝 웃었다.
**
한국대 법학관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민 교수가 내민 학생기록부를 살피던 법대 학장이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성적이 훌륭하군요. 당시 전체 차석. 이번 입시에도 전체 차석이네요?”
“네, 성적은 좋습니다.”
“그런 학생을 저희에게 내주시겠다는 말씀인가요?”
법대 학장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학칙이 그러니…”
“일신상의 문제가 있는 학생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전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지 학칙 그러하여..”
“이런 사례가 처음은 아니었지요. 보통은 학생의 됨됨이를 살펴 서로 끌어가려고 하지 밀어내는 경우는 무척 드문 일입니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다면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학장의 날카로운 눈빛에 민 교수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제 고등학교 동깁니다.”
“네? 아하…”
민 교수의 고민을 이제야 이해한 듯하였다.
“그럼 저희가 받도록 하지요. 오덕팔 군에게 재입학 신청서를 제출하라고 하십시오. 뭐 많이 늦기는 했습니다만, 08학번으로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교수와 학생이 동기동창이라면 서로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직도 도제시스템이 적용되고 있는 한의학계에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학장은 민 교수의 그런 사정을 이해하고 덕팔을 수용하고자 했다.
물론 덕팔이 낸 성적도 그 결정에 한몫하였다. 법조계를 지배하고 있는 법대에서 수석 입학을 하였다면 천재 중에 천재라는 뜻! 학교를 빛낼 새로운 법조인이 탄생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로 보였다.
민 교수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법학관을 나섰다. 자신을 이끌어준 스승인 김정학 교수는 덕팔을 통합의대에 남기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민 교수는 그것이 싫었다. 단순히 동기동창이기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덕팔이 예전처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었다.
“다시는.. 2등으로 밀려날 수 없어.”
한국대 의대를 포기하고 한의대 중 최고의 명문으로 대접받은 대학에 수석 입학, 수석 졸업을 하면서 한의대 최연소 교수까지 되었다. 덕팔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은 줄 곳 1등이었으니 덕팔만 없으면 되는 것이다.
교수 연구관을 돌아가던 민 교수의 눈에 덕팔이 보였다. 그의 곁에는 예대 교수인 최은혜가 있었다.
“뭐야? 최 교수를 어떻게 아는 거지? 오진우! 너는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민 교수의 가슴에 질투심이 싹트고 있었다.
**
덕팔에 대한 학교의 조치는 계속 연기가 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덕팔은 김정학 교수의 부름을 받아 매일 같이 각종 차를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교수님, 이렇게 차잎을 넣으시구요. 전원 버튼만 누르시면 됩니다.”
8시 30분. 김 교수의 출근 시간에 맞춰 차배달을 하던 덕팔이 전자상가에서 차를 다려주는 보온통을 사가지고 와 김 교수 연구실에 설치해 주었다.
“허허.. 그런 좋은 게 있었나? 한번 우려보게.”
덕팔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꽃잎깨가루차를 우려 내주었다. 사기 찻잔에 담긴 차를 음미하던 김 교수가 아쉬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우려 주는 차보다는 맛이 훨씬 덜하군. 아쉬워. 많이 아쉬워.”
김 교수의 말을 들은 덕팔이 차를 따라 마셔보았다.
“… 젠장”
덕팔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욕지거리를 내뱉자 김 교수가 웃었다.
“보온 통으로 쓰면 딱이겠군. 잘 쓰겠네. 차는 저 통에 들어갈 정도면 좋겠어. 암.. 그렇고말고..”
대용량 다기를 사 온 것을 후회하며 김 교수에게 인사를 하곤 연구실을 나왔다.
“아.. 한발, 한발이 지뢰밭이구나.”
덕팔이 한숨을 내쉬며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민 교수가 교제를 옆구리에 끼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너한테 교수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 재 입학신청서나 내.”
“제 의사는 분명히 밝혔는데 다시 말씀드릴까요?”
“그럼 이 학교에서 영원히 떠나는 거지.”
민 교수가 쌀쌀맞은 태도로 덕팔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지뢰밭 다음은 똥밭이었구나. 아이구, 내 팔자야.”
**
오늘은 금요일.
덕팔의 수업도 한 과목뿐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겠다며 30학점을 신청한 동기들은 오늘도 쌍코피를 터트려야 했지만 덕팔은 점심 식사를 집에서 할 수 있는 축복받은 날이었다.
인체 생물학 시간은 덕팔로서도 재미있는 과목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하며 많은 의서를 읽어 보았기에 덕팔에게 익숙한 과목이었지만 교제가 원서였다. 의학 영어로 지껄여 놓은 인체 생물학 교제는 덕팔에게 영어사전을 손에 쥐게 만드는 흥미로운 목표가 되었다.
“형님, 전자사전도 있는데 왜 불편하게 두꺼운 영어사전을 들고 다니세요?”
“즐겁잖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단어를 찾는 즐거움, 한번 찾아본 단어를 다시 찾으면서 내 머리의 한계를 느끼는 즐거움.”
“하여간, 형님도 좀 이상한 분이에요.”
온주환이 머리를 흔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 과목은 의대 교수님이 직접 강의를 한다. 외국물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말의 반이 영어였다. 수업 자체를 알아듣기 어려우니 학생들도 매우 힘들어했다.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투덜대기 시작했다.
“저렇게 혀를 꼬아야 하나?”
“그러게.. 한국말도 아니고 영어도 아닌 외계어를…”
다들 한마디씩을 하며 짧은 점심시간을 즐기러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온주환도 책을 주섬주섬 챙기며 덕팔에게 물었다.
“형님, 식사 안 해요?”
“난 오후 수업이 없어서 집에 가서 먹으려고..”
“맨날 도시락 싸 오고, 집에 가서 먹고.. 그럼 애들하고 친해지기 어려워요.”
“왜? 인사도 잘하고 지내는데?”
“에이.. 그렇다고 친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가? 암튼 신경 써줘서 고맙다.”
“흐흐, 그럼 저는 밥 먹으로 갑니다. 다음 주에 뵈요.”
온주환이 손을 흔들며 강의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지금 시각 11시 50분. 긴 줄 뒤에서 점심시간의 반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할 때이다.
**
차를 몰아 학교를 빠져나갈 때 전화가 걸려왔다.
띠! 차량 스피커에 휴대폰이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더 파르?]“감독님?”
[하하,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지?]“방금 끝났습니다.”
[역시 내 감은 틀리지 않는다니까?]“옆에 한유리씨 있습니까? 어제 제 시간표 훔쳐보던데?”
“저 촬영 없는 거 아닙니까?”
[쪽 대본 나왔어. 열심히 찍어야 할 분량이야.]“달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덕팔이 핸들을 꺾어 용인 세트장으로 차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