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ch the ghost munchkin! RAW novel - Chapter 83
83화
강남의 모 룸싸롱.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형님, 오셨습니까? 드라마 잘 보고 있습니다.”
실실거리는 웨이터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저놈이 에이스를 가장 많이 데리고 있으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늘 모시던 방으로 모실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익숙한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씨X…”
욕부터 나온다. 오늘 15회 대본을 받아보았다. 크크크, 이젠 단역이 되었다.
“아시아의 프린스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더니.. 결국 남의 등에 칼이나 꼽는 잡범으로 만들어?”
배성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이놈의 정신은 끊어지지가 않는다. 내일부터 A팀은 한국대에서 야외촬영을 한다. 자신은?
크크, 오늘 A팀이 찍어놓은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 폐 공장으로 가야 한다. B팀과 함께..
15회 대본을 보니 가관도 아니었다. 자신이 그 떡팔인가, 똥파린가 하는 놈을 죽인 복면인이고 한유리가 그놈의 복수를 위해 자신을 잡는다는 내용이었다. 16회 대본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자신에게는 대본이 전달되지도 않았다.
즉, 자신은 15회에서 하차를 하는 것이다.
“주연이라며!!!!!”
배성우가 악을 썼다. 그 소리에 놀란 웨이터가 들어왔지만, 배성우가 손짓하며 밖으로 내보냈다.
덜컹..
다시 문이 열리더니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새끼.. 예쁜 여자들은 다 저 새끼가 관리를 하나?
여자가 배성우의 옆에 앉자 배성우의 손이 깊게 파인 가슴골로 들어갔다. 아직 술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배성우는 개의치 않았다.
“오빠…”
“뭐? 싫다고?”
“아니, 좋아..”
피식.. 배성우가 웃었다. 이런 년이 꼭 있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날 꼬시면 단역으로나마 TV에 얼굴을 비칠 수 있을까 하는 헛된 기대로 다 퍼주는 년들이 있다.
“오빠… 왜 화가 났어?”
“넌… 몰라도 돼.”
“한유리 때문이구나.”
“한유리?”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배성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맞다. 그년이 그놈을 데리고 온 그날부터 모든 게 틀어졌다. 모든 건 다.. 그년 때문이었다.
“그 여자 때문에 짜증이 난거구나.”
여자가 배성우의 턱선을 손등으로 쓰러 주며 배성우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죽여 버려!”
“뭐? 이런 미친…”
“기회가 있잖아요. 아직.. 마지막 장면이 남았으니까… 사고로.. 죽여! 버려!”
“사고…로… 죽인다…”
배성우도 알지 못하는 사이 눈이 풀렸다.
덜컥..
방문이 열렸다.
“형님, 우리 가게 에이스들로만 추려왔습니다! 들어와라.”
웨이터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고 있는 배성우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
한국대학교의 명물 중 하나. ‘우림호’라 이름 지어진 아담한 호수.
지름만 200m가 넘는 이 호수가 한국대학교 정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학교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이 호수를 가로지르는 십자형 다리를 만들었는데 이 또한 명소가 되어 많은 이들이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곤 하였다.
이 우림호에서 열형 여형사의 마지막 회가 촬영되고 있었다.
덕팔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하였고, 한유리는 오랜만에 교복을 입게 되었다며 치마를 팔랑거리면서 마냥 신나하였다.
“오올! 아저씨, 교복이 꽤 잘 어울리네요?”
“나이 서른 넘어서 교복을 입게 될 줄은 몰랐네요.”
“머리를 그렇게 하고 뿔테 안경까지 쓰니까 딱 고등학생인데 뭘…”
덕팔이 한유리가 들이민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약간 웨이브 진 검은 머리에 얇고 동그런 뿔테 안경을 쓴 남자는 분명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동안이었다.
“자자.. 준비하고..”
감독이 현장스텝들을 독려하며 촬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우리 한 배우, 오 배우는 이 다리를 건너는 거야. 어떻게? 사랑스럽게.. 어떻게? 사뿐사뿐히.. 어떻게? 연애하듯이… 오케이?”
“…. 네”
“맡겨 주세요.”
“좋아.. 그럼 우리 배우님들은 자리를 잡고… 스텐바이..”
감독이 모니터에 비친 배우들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이내 큐 사인을 내렸다.
한유리가 폴짝 거리며 몇 걸음 앞서 걷자 덕팔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한유리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덕팔에게 손을 내밀자 덕팔이 얼굴을 붉히며 살포시 한유리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부끄러움을 가득 머금은 채 천천히 다리를 건넜다.
“컷.. 이 봐! 더 파르!”
“네 감독님.”
“순진한 고등학생으로서는 표정이 좋았는데 뭐 랄까나? 오주원은 정선영을 엄청 사랑하거든? 서로가 서로에게 말은 하지 못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상태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 모르겠는데요?”
“이봐, 더 파르~ 연애 안 해봤어? 아.. 첫키스라고 그랬지.”
감독의 말에 사정을 아는 스텝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암튼, 순진함과 열정을 함께 보여 줘야 한다고.. 오케이?”
“……네”
덕팔이 자신 없는 얼굴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감독이 웃으며 조감독을 돌아보았다.
“저놈은 로코(로맨틱 코메디)는 안 되겠는데? 저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그냥, 한유리씨가 싫은 게 아닐까요?”
“응? 설마.. 여신 한유리를 누가 싫어해?”
“더 파르요..”
감독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덕팔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한유리 곁에 있는 덕팔은 매우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으니.. 더 파르가 알아서 할 문제고.. 일단은..”
혼자 중얼거리던 감독이 배우들과 스텝들을 향해 크게 외쳤다.
“스텐바이… 한 번에 갑시다. 찍을 거 많아요. 큐!”
다시 연기가 시작되었다. 한유리가 다시 폴짝이며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 덕팔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팔이 물끄러미 한유리의 손을 바라보다 떨리는 손으로 한유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확 끌어당겼다.
한유리가 자연스럽게 덕팔의 품에 안기자 덕팔이 얼굴을 붉히며 한유리의 귀에 뭐라 작게 속삭였다. 잠시 한유리가 어색한 몸짓으로 안겨 있다가 덕팔의 몸에서 빠져나와 덕팔의 팔을 가슴으로 꼬옥 안았다.
한유리가 어색함에 고개가 떨궈지고 덕팔은 활짝 웃는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었다.
“컷…. 조감독, 어땠냐?”
“괜찮은데요?”
“그래?”
감독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오케이를 외쳤다.
“오케이, 다음씬 갑시다.”
덕팔과 한유리의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가 교정 곳곳에서 계속 되었다.
“흐음…”
감독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두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더 파르가 그냥 덕팔이가 되었네.”
덕팔의 연기에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은데요? 왜?”
“니 눈에는 괜찮냐? 뭔가 감정선이 들쑥날쑥하지 않아?”
“콘티대로, 지문대로 잘 하고 있는데요. 왜 그러세요?”
“흐음.. 내 욕심인가? 지금까지 보여준 임팩트가 전혀 안 보여서…”
감독이 조금 답답한 음색을 내비치자 조감독이 대본을 내놓았다.
“지금 극의 순서대로 촬영이 안 되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저는 대본 순서대로 더 파르의 연기를 보고 있었는데요. 점점 무르익고 있어요.”
“응?”
감독이 대본을 빠르게 훑어가더니 조연출이 포스트 잇을 붙여 놓은 장면을 읽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장면 때문에 감정을 조절하고 있는 거였나?”
“지금 보면 정선영이 오주원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근데 이 장면을 계기로 그게 확 뒤집어지는 걸 염두해 둔 것 같아요. 불러서 한번 물어보시죠.”
조감독의 말대로 감독이 덕팔을 불렀다.
“너 연기가 왜 그렇게 개떡 같냐?”
“죄송합니다. 감독님.”
“말해봐, 뭐가 문제야?”
“딱히.. 그냥 대본에 나온 대로 제 감정을 풀어 놨는데…”
“헛소리 말고.. 너 때문에 열정 가득한 첫사랑이 맹맹한 짝사랑처럼 되 버렸잖아.”
“첫씬에서 소극적이던 오주원이 정선영의 마음을 받아주는 장면과 마지막 씬에서 두 사람이 오해에 치닫는 장면을 고려해 보면 이 시기에는 정선영이 오주원을 더 사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작가의 의도가 그렇다는 거냐?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하는데?”
덕팔이 머리를 긁적였다. 감독의 의견과 다른 취지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괜찮아. 말해봐.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의 의견은 언제든 다를 수 있는 거지야.”
“사실은.. 어제 밤에 16회 대본을 받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김 선생님께 전화로 여쭤봤는데 제 생각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김 선배가?”
“네, 그래야 극적 개연성이 더 잘 맞아 떨어진다구요. 물론 지문 상으로는 감독님 말씀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그래서 좀 어정쩡했나 봐요.”
덕팔이 말하는 김 선생님이란 간간히 한유리의 회상 씬에서 한유리의 아버지 역할로 나오는 배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영화 아니면 연극판에서 노는 인물이었기에 좀처럼 드라마에 얼굴을 내비치는 배우가 아니었는데 안현미의 부탁으로 특별 출연을 한 충무로의 거물이었다.
“너 그 양반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어?”
“한유리씨한테… 닭 백숙 두 솥을 댓가로…”
“자식.. 그런 거였으면 나한테 전화를 했어야지. 나는 한 솥이면 됐는데… 흐음… 김 선배가 그렇게 얘기를 했다? 확인해도 되지?”
“그럼요.”
감독이 덕팔을 돌려보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저쪽 구석에서 한동안 통화를 하던 감독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뭐래요?”
“맞데, 자신의 생각도 그렇다고.. 안 작가하고도 의견을 나눴다는데?”
“아니 그걸 알고 있었는데 안 작가님은 왜 그런 말을 안 해 준 겁니까?”
조감독의 의문에 감독이 피식 웃었다.
“글을 지가 써야 그런 디테일을 알지. 보조 작가들이 글을 쓰니 섬세한 부분까지는 알 도리가 있겠냐?”
조감독이 이해하였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자 감독이 입맛을 다셨다.
“다시 찍을 수는 없겠지?”
“지금 이대로 나가도 빠듯할 겁니다.”
감독이 한쪽 다리를 덜덜 떨며 시간을 보다가 촬영을 재개하였다.
“오 배우, 한 배우랑 상황 공유하고 그 감정선 대로… 스텐바이.”
덕팔이 간단히 한유리가 이야기를 나눈 후, 준비를 끝내자 큐 싸인이 들어왔다. 덕팔은 순진하고 다소 부끄러움이 많은 남학생으로 돌아갔고, 한유리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당돌한 여고생이 되었다.
“난 말야. 형사가 될 거야. 우리 아빠처럼”
“잘 어울리겠다. 여 형사!”
“그치? 그치? 근데 우리 아빠는 절대 경찰 같은 거 하지 말래.”
“왜?”
“고생은 자신 하나로 족하다고.. 금쪽같은 딸래미는 너 같은 남자 만나서 시집이나 가래.”
덕팔이 일 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덕팔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말을 더듬거리며 고백을 하였다.
“네..네가 경찰이 되면, 나..나도 경찰이 될래.”
“응? 왜?”
“네 곁에서 널 지켜줘야 하니까…”
“바보..”
한유리가 덕팔의 팔을 툭 때리고는 저만치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