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
사파에서 온 용사
배신당한 사파거두
강호의 호사가들은 나를 사파(邪派)의 거두(巨頭)라 불렀다.
누군가에게는 우상이자 목표가 될 수도 있는 위명이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세평(世評)이었다.
‘비급을 빼돌리는 데 성공했으니, 내게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사파거두를 넘어 천하제일도 넘볼 수 있었으련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도 어쩌겠는가? 이미 계획은 실패했고, 나는 쥐새끼처럼 쫓기다 벼랑 끝에 몰린 신세가 됐다.
그토록 염원하던 ‘그 비급’이 내 손에 들어왔는데,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게 생긴 것이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먼.”
내 말에 복면인 몇몇이 몸을 움찔했다. 한때 내 밑에 두고 부렸던 놈들인데, 이제는 칼끝을 돌려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능 선배. 서로 다 아는 마당에 이런 유치한 복면은 필요 없겠지.”
맨 앞에 있던 놈이 복면을 벗었다. 익숙한 얼굴이다.
“백종일…….”
얼굴을 드러낸 놈은 월광지(月光指) 백종일.
패도련(覇道聯, 사파 무인 연합)에서도 추적과 암살 전문이라 불리는 밀월당(蜜月黨)의 당주였다.
“능 선배, 인제 그만 포기하시오. 잘나가던 양반이 말년에 이게 무슨 추태요?”
“추태?”
저놈이 나더러 추태란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기로서니, 저런 잡놈이 감히 내 앞에서 눈깔을 똑바로 뜨고 버릇없는 소리를 지껄이다니? 이래서 강호는 힘없으면 서러운 곳이다.
“이게 추태가 아니면 무어요? 아무리 무공이 탐나도 그렇지. 그깟 비급 한 권 차지하겠다고 정(正), 사(邪), 마(魔)를 전부 뒤통수치는 사람이 어디에 있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누구의 뒤통수를 쳤다는 말이냐.”
나는 대꾸하는 와중에도 활로를 찾으려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사방에서 흉흉한 살기가 느껴졌지만, 당장 달려들 놈은 없는 것 같았다. 내 손에 이 낡은 책자가 들려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이럴 게 아니라, 손의 공력부터 거두고 얘기합시다. 거, 책자에 불붙겠소.”
“흐흐, 왜? 내가 공력을 거두면 그 틈에 지풍 쏘려고? 아서라, 네놈들 중 하나라도 내공을 끌어 올리면, 그 순간 비급은 잿가루가 될 것이다.”
“무슨 말을 그리 흉흉하게 하시오? 한데, 선배한테 비급을 태울 공력이 남아 있긴 한 거요? 이미 단전도 깨어진 마당에.”
백종일의 시건방에 나는 즉시 양강지기(陽强之氣)를 끌어 올렸다. 손으로 모여든 후끈한 공력에 비급의 겉장이 그슬리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겨우 책 한 권 태울 공력을 끌어 올렸을 뿐인데, 손이 떨리고 아랫배가 찢어질 듯 아팠다.
“어어! 지, 진정하시오, 선배! 정말 이러기요?”
“너야말로 이러기냐? 내가 패도련을 위해 그만큼 일해 주었는데, 장기판의 말 버리듯 배신하는 것도 모자라 약속한 비급마저 빼앗으려 들어?”
“믿을 놈 하나 없는 곳이 강호 무림 아니겠소? 알 거 다 아는 양반이……. 피차 곤란하게 이러지 맙시다.”
백종일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내키는 대로 사는 사파 잡놈도 천하에 하나뿐인 비급이 불타는 것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천하의 능태오가 책 한 권에 목숨을 기대는 신세라니.’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뒤는 까마득한 절벽이고 앞은 밀월당이 포위하고 있다. 아랫배에는 구멍이 뚫렸고, 세맥에 흩어진 내공도 거의 바닥났다.
비급을 손에 쥐는 것은 여러 우연이 겹쳐 어찌어찌 성공했지만, 추격을 뿌리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능 선배, 이 정도면 할 만큼 하셨소. 마교의 추살대를 따돌리고 정천맹(正天盟, 정파 무인 연합)까지 물리치다니, 과연 일각노괴(一角老怪)의 명성에 걸맞은 무공이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구나. 날 이용해서 정파와 마교의 정예를 물리치고, 네놈들은 지칠 대로 지친 나를 죽여 손쉽게 비급을 차지하려는…….”
“흐흐, 무공밖에 모르는 능 선배도 나이가 드니 그 정도 눈치는 생기는 모양이오?”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패도련의 설계였던 것인가? 무인도 무공으로만 사는 건 아니었구나.’
무공만 강할 뿐 꾀가 부족했던 나는 패도련주의 손에 놀아나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치가 떨리고 이가 갈리지만, 이미 외통수에 걸린 판국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선배가 눈엣가시 같았던 건 사실이오. 점점 련주의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 사는데, 무공은 또 어찌나 강한지 도무지 통제할 수가 없으니……. 모난 돌은 정을 맞는 법이 아니겠소?”
“너희 련주가 입버릇처럼 떠들던 패도가 고작 이런 것이냐?”
“패왕이라고 계책을 쓰지 말란 법이 있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비급이나 얌전히 넘기시오. 혹시 알겠소? 비급을 곱게 넘겨주면 내가 련주께 청해 선배의 목숨을 살려 줄지?”
백종일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한 발짝 다가왔다. 놈이 다가온 만큼 나는 물러섰다. 발을 디딘 절벽 끄트머리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졌다.
“나는 패도련주를 믿었다. 정천맹의 억압에 대항하고 중소 문파의 명맥을 이어 가겠다는 그의 대의를 믿었어.”
“물론 패도련은 정천맹에 대항할 것이오. 다만, 그 방법은 선배가 생각한 것과 조금 다르겠지.”
결국 패도련주가 원한 것은 무림을 둘로 쪼개어 정천맹주와 나눠 먹는 것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희생양으로 죽고, 패도련주는 사파 무림의 영웅으로 군림하겠구나.’
패도련주는 나의 죽음을 입맛에 맞게 각색해 필요한 곳에 명분으로 사용할 것이다. 중립 세력을 사파의 깃발 아래 규합하거나, 정파 분열을 위한 이간질의 재료로 말이다.
‘정녕 내가 살아 나갈 방법은 비급을 넘기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뿐인가?’
내 한숨이 깊어지는 만큼 백종일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짙어졌다.
‘……웃어?’
날 궁지에 몰아넣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낯짝을 보니,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졌다.
“비급은 못 준다.”
“어허, 능 선배. 어차피 선배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소. 비급을 멀쩡히 넘겨야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다니까?”
“좆까. 이건 자존심의 문제야. 날 죽이든 살리든 비급은 못 준다.”
“왜 이러시오. 정녕 비급을 태워 버리고 자결이라도 하겠단 거요?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비급을 못 줄 이유가 대체 뭐요?”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지금 그딴 걸 이유라고……!”
내 고집에 백종일은 이마에 핏대가 솟고, 분노에 휩싸여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그래, 저런 모습이다. 나와 대적하는 인간들은 저렇게 분에 겨워 몸서리를 치거나, 고통에 울부짖거나,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 감히 나를 다 잡은 사냥감처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 안 되는 것이다.
“설마하니 인간 능태오가 너희 같은 조무래기에게 항복이라도 할 줄 알았느냐? 무림명숙의 체면이 있지.”
“능 선배를 무림명숙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사파거두면 모를까. 악인 중의 악인이면서 무림명숙은 무슨…….”
“닥쳐라! 지금껏 네놈들에게 이용당한 것만으로 치가 떨린다. 협잡꾼에게 굴종하느니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
“후후, 더 이상 싸울 기력은 없을 테고, 등 뒤의 절벽으로 뛰어내리기라도 할 요량인가 본데, 선배 눈에는 내가 그렇게 굼떠 보이시오?”
백종일이 징그럽게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내 몸이 성치 않으니 절벽으로 뛰어내려도 충분히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활로가 열리기도 하는 법. 나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찌 알았느냐? 앞으로 열을 세고 절벽으로 몸을 던질 생각이다.”
“비급은 어쩌시고?”
“당연히 비급도 들고 뛰어야지. 내 건데.”
“능 선배가 오늘 기어이 벌주를 드시겠구먼.”
“그 벌주도 열을 세고 다오.”
태평한 내 모습에 백종일이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시커먼 옷을 입은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나무 위를 날다람쥐처럼 건너뛰며 빠르게 다가오는 모습에서 그들의 무위가 얕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설마…… 마교의 추살대? 이런, 벌써 따라오다니!”
“흐흐, 종일아. 날 따라 절벽으로 뛰어내릴지, 이곳에 남아서 저 광신도 놈들과 맞서 싸울지 잘 선택하거라.”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백종일도 고작 이 정도로 허둥대는 애송이는 아니었다.
“독연(毒煙)을 터뜨려라! 절반은 여기서 마교도의 접근을 막고 나머지는 날 따라와!”
백종일이 지체 없이 명을 하달하고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그를 따라 밀월대원 절반도 함께 몸을 던졌다.
귀한 독연탄까지 가지고 왔다니, 추락하는 와중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달리 준비성이 투철하군. 그래서 내가 널 안 좋아해.”
“능 선배! 마지막까지 애를 먹이시는구려. 옛정을 생각해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 주겠소!”
절벽에서 뛰어내린 백종일의 열 손가락에서 달빛처럼 은밀한 지풍이 쏘아졌다.
천하의 온갖 지법(指法)을 재조합해 만들었다는 월광십지풍(月光十指風)이 나의 전신 요혈을 관통했다.
“커헉……!”
벼락같은 고통이 뇌리를 강타했다. 입에서는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비급을 놓치지 않고 품속에 넣었다. 하지만 이대로 추락해 죽어 버리면 비급은 결국 백종일이 차지할 것이다.
“하하! 천하의 일각노괴가 이 월광지의 손에 죽는구려!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테니 무덤은 필요 없으시겠지!”
아무리 죄 많은 인생이라지만 무덤 정도는 남겨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새삼스레 감성적인 생각을 들었다.
백종일이 내 숨통을 끊기 위해 절벽의 돌부리를 박차며 다가오고 있지만,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공은 진작에 바닥났고, 전신 요혈을 관통당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 그저 마지막 힘을 모아 ‘주먹감자’를 날려 줄 뿐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평생 패도련주 똥이나 닦을 놈.”
“이 미친 영감탱이가 끝까지……!”
백가 놈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다시 한번 지풍을 쏘아 냈다. 월광십지풍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한 월광일통(月光一通)의 초식이었다.
‘저건 맞으면 죽겠군.’
다가오는 죽음이 한 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지풍이 심장을 관통하기 직전, 정체 모를 밝은 빛이 내 몸을 감쌌다.
“호신강기? 이 늙은이가 아직도 내공이 남아 있었군!”
백종일의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미 치명상을 입어 정신이 혼미했고, 그저 나를 감싼 광채가 참으로 아늑하다는 것만 느껴졌다.
‘이 빛은 무엇이지? 선량하게 살아온 나를 선계로 모셔다 줄 칠색조인가?’
양심 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백종일과 밀월당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주, 노괴가 사라졌습니다!”
“사술이다! 늙은이가 사술로 몸을 숨겼으니 벽면과 바닥을 샅샅이 수색해!”
아스라이 멀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니 참으로 한스러운 생애다.
한때는 패왕독보를 꿈꾸었으나, 추하게 늙어 버린 노괴는 옛 부하의 손에 죽어 가는 처지가 되었다.
‘한 번만, 내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찬란한 빛의 품에서,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이세계의 사파거두
“으으, 추워.”
찬 기운에 눈을 떠 보니, 새파란 하늘과 눈 쌓인 나무들이 보였다. 낯선 겨울 숲의 풍경이다.
“뭐야, 이거. 나 아직 안 죽었네?”
이상한 일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이상하고, 주변에 눈이 쌓여 있는 것도 이상했다.
분명 백종일의 월광십지풍이 사지를 관통했는데, 팔다리를 문질러 보니 관통상은커녕 티끌만 한 상처도 없었다.
허옇고 매끈한 피부 위에 오돌토돌 닭살만 만져졌다.
“피부는 또 왜 이렇게 야들야들해?”
문득 내려다본 내 몸이 낯설다.
쭈글쭈글한 얼굴과 그 아래에 탄탄한 가슴 근육은 어디로 가고, 어린아이처럼 민둥민둥한 몸이다.
천하를 멋대로 누비며 풍찬노숙하던 거친 피부가 옥처럼 희고 보드랍게 바뀌었다. 가슴뿐만이 아니라 가슴을 문지르는 손가락도 가늘고 투명하다.
황소 같은 목덜미도, 통나무 같은 허벅다리도 이제는 여물지 않은 소년처럼 변해 있었다.
‘회춘(回春)을 한 것인가?’
필사의 도주가 실패하고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회춘이라니?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헷갈렸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어으, 춥다.”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하얀 눈밭. 빽빽한 침엽수가 하늘 높이 솟아 있고, 한설삭풍이 뼈마디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