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2
시리도록 흰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있으니, 눈앞의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난 역시 죽은 걸까? 죽어서 선계는커녕 한빙지옥에 떨어진 건가? 저승에서는 죽은 사람을 굳이 회춘까지 시켜서 지옥에 처박는 것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저승의 일 처리 방식이 실로 비효율적이구나.”
사후 세계라기에는 피부에 닿는 눈의 감촉이 너무도 생생했다.
사람이 죽으면 육(肉)은 영(靈)과 분리되고 영은 다시 혼(魂)과 백(魄)으로 나뉜다고 사부에게 귀가 따갑도록 배웠다.
육신이 버젓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장소가 바뀌고 몸뚱이도 젊어졌다.
‘이것 참 모를 노릇이네. 내가 죽은 게 아니라면, 설마 이 모든 게 환술?’
두 번째로 떠오른 가능성은 환술이다.
싸움은 협곡에서 했는데,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설산이라? 환술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제갈세가의 환영미리진(幻影迷離陣) 정도면 이런 풍경도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그런데…… 절벽에서 추락하는 사람을 진법으로 낚아챌 수도 있나?’
어려울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다.
내공도 없고, 온몸에 상처를 입어 거동도 못 하는 늙은이를 왜 굳이 진법으로 가두겠는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추락하면 알아서 뒈질 운명이었다.
‘도통 알 수가 없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좌우지간 몸은 젊어졌고 상처는 온데간데없다.
손발의 크기를 보니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팔다리를 움직여 보니 어디 뼈가 상한 곳도 없다.
“그렇다면 내공은…….”
시험 삼아 운기를 해 보았지만, 몸 안에 내공은 한 줌도 없었다.
혹시 과거로 돌아온 것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이면 이미 몸뚱이에 흉터가 가득하고, 하단전에는 제법 씨알이 굵은 내단(內丹)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내공과 흉터가 없는 걸 보니 회귀(回歸)는 확실히 아니다.
지금 내 몸은 갓 빚어낸 도자기처럼 아무런 연공의 흔적이 없었다. 골방에서 글공부만 하던 샌님의 몸이나 마찬가지.
‘젊음을 얻고 무공을 잃은 것인가?’
그렇다면 수지맞는 장사다. 젊음만 있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이랴. 무공은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물론 약관의 나이에 내공을 익히려면 고생깨나 하겠지만,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자리에 퍼질러 앉아 앞날을 걱정하고 있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웠다.
덜덜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입은 옷이라고는 누더기가 된 흑의 무복에 장삼 한 벌이 전부고, 내공조차 없으니 한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었다.
‘늙은이한테는 찬 바람이 독인데.’
몸은 젊어졌지만, 생각은 여전히 늙은이였다.
나는 장삼을 여미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니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중원 천지를 좁다고 돌아다닌 나였으니, 이곳이 어딘지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뽀득, 뽀득.
두껍게 쌓인 눈을 밟으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체온은 빠르게 떨어졌다.
사람이나 식량은 둘째치고, 당장 바람을 피할 동굴이라도 찾지 못하면 오늘 중에 얼어 죽게 생겼다.
홑겹 옷만 걸치고 눈밭을 걷고 있으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흐흐, 사부를 처음 만난 날이 꼭 이랬지.”
그래서일까.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어쩐지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곤 했다.
일곱 살에 거지 굴에서 도망쳐 눈밭을 헤매다 만난 사부는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마른밥 한 술 훔쳤다가 뒈지게 얻어맞고 얼어 죽을 팔자였던 거지 소년 능태오를 사파의 거두 일각노괴 능태오로 만들어 준 사부였다.
‘사부가 바란 내 모습은 그런 게 아니었겠지만.’
사부는 내가 무공을 익혀 덕을 쌓기를 바랐을 것이다.
약자를 돕고, 좋은 친구도 만들고, 가정도 꾸리면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노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강호를 홀로 떠도는 늙은 괴물이 되고 말았다.
일각(一角)이라는 말도 혼자 삐쭉 솟은 뿔처럼 모나게 산다는 뜻이었다.
“실망하셨으려나.”
나는 하늘 아래 선한 무공도 없고, 악한 무공도 없다고 생각했다. 단지 무공을 선하게 쓰는 놈과 악하게 쓰는 놈이 있을 뿐.
사부는 전자였고, 나는 후자였다.
비록 자의가 아니었다고 한들, 내가 무공을 악하게 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뽀득.
눈 밟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살아 있어야 들을 수 있는 소리니까.
뽀득, 뽀득, 뽀득.
나는 가만히 있는데, 눈 밟는 소리가 계속 난다. 나 말고도 주변에 누군가 있다는 뜻이다.
고개를 들어 보니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 보였다. 요상하게 생긴 괴물이다.
끼끼께껙.
“역시 이곳은 지옥인가.”
눈앞에 나타난 괴물은 키가 사람 가슴 어름 정도에 비쩍 마른 몸인데, 피부는 시체처럼 푸르뎅뎅하고 팔다리에 청회색 털이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코는 매부리에 귀는 뾰족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깩깩거리며 날 위협하고 있다.
“실로 추악하게 생겼구나. 면상만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옥의 요괴로다.”
다가온 요괴는 여섯 마리. 미물 주제에 손에는 돌도끼며 나무창 같은 조악한 무기도 들고 있다.
내 나이 일곱 살에 설원을 헤맬 때는 사부를 만났는데, 스무 살에 설원을 헤매니 요괴를 만났다.
“아니지. 몸뚱이가 젊어진 것일 뿐, 내가 진짜 스무 살은 아니잖아.”
죄지은 것 없이 설원을 헤맬 때는 사부를 만나고, 죄 많은 지금 설원을 헤매니 요괴를 만난 것일까?
끼엑!
등 뒤에 있던 요괴가 나를 향해 창을 찔러 왔다. 양옆에서는 돌도끼를 든 요괴들이 기다렸다는 듯 괴성을 지르며 쇄도했다.
‘미물 주제에 제법 합을 맞추네.’
요괴들은 비루하게 생겼지만 보기보다 싸울 줄 아는 놈들이었다. 나랑 비슷한 부류인 모양이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등 뒤에서 날아오는 창을 갈미퇴(蝎尾腿)로 차고, 앞구르기로 포위를 벗어났다.
창대를 단숨에 부러뜨릴 생각이었는데, 내공이 없고 몸도 허약해서 튕겨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요괴들은 내 힘을 대강 파악한 듯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양쪽에서 달려오는 요괴를 향해 손가락을 세웠다.
휘리릭-.
음풍조(陰風操)가 요괴의 손목을 휘감으며 얼굴까지 타고 올라간다. 손끝으로 눈알을 도려내자 요괴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키에엑-!
요괴들은 면상이 징그럽게 생겨서 그런지 비명도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이것도 나랑 비슷하다.
다른 요괴들은 동족의 비명에 겁을 먹기는커녕 자극을 받은 듯, 각자 무기를 꼬나들고 마구 달려들었다.
‘천하의 능태오가 이런 잡놈들이랑 푸닥거리를 해야 하나? 에휴, 내공이 없으니 원…….’
머리가 모자라면 몸이 고생한다고 했던가?
무림인이라면 저 문장에서 머리를 내공으로 바꿔도 그대로 적용된다.
본신에 지니고 있었던 내공이면 이런 좆만 한 요괴들 따위는 일 장에 쳐 죽였을 텐데, 내공이 없으니 일일이 초식을 사용해 약점을 공략해야 했다.
‘심지어 이 싸움에서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져.’
이런 허접한 싸움이 귀찮음을 넘어서서 신선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답답한 마음을 접어 두고 신행미종보(神行迷踪步)의 방위를 밟으며 요괴 사이를 누볐다.
붕! 부웅!
내 몸이 오묘한 박자로 방향을 전환하고, 요괴들의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바쁘게 공격을 피하고 요괴들과 거리를 벌렸지만, 종종 등 뒤에서 찔러 오는 창이 위협적이었다.
머릿속에는 무리(武理)가 가득 담겨 있고, 눈으로도 생문(生門)이 뻔히 보이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
내공도 받쳐 주지 못하고, 근육도 단련되어 있지 않은 탓이다.
푹!
결국 요괴의 창이 옆구리를 스쳤다. 창날이 살에 닿지는 않았지만, 옷에 구멍이 뚫렸다.
거친 창날에 옷감이 뜯겨 나오자 요괴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이 새끼 웃는 낯짝이 묘하게 나랑 닮았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낯짝이다.
“좋으냐?”
본래 싸움이란 우세냐 열세냐에 따라 풀어 가는 방식이 다르다.
강자는 변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풀고, 약자는 변수를 만드는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
그 때문에 약자의 싸움이란 언제나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형태가 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약자였다.
“그래서 살을 준 거야, 이 무식한 놈아.”
따지고 보면 살도 주지 않았다. 옷을 주었을 뿐.
무식한 요괴가 이런 고매한 무리를 알겠느냐마는, 나는 혼잣말을 지껄이며 창대를 겨드랑이에 단단히 끼웠다. 요괴가 멈칫하는 틈에 손바닥을 크게 휘둘렀다.
퍼억!
회전력이 실린 섬전수(閃電手)에 창을 쥔 요괴의 정수리가 푹 주저앉았다.
요괴는 왜소한 체격답게 사람보다 뼈가 약했다. 내공 없이도 정통으로 맞히니 두개골이 허물어졌다.
두 놈은 눈알을 파냈고, 제일 거슬리던 창잡이도 죽었으니 나머지 셋은 제압이 어렵지 않다.
금룡십팔해(金龍十八解)를 펼쳐 요괴의 도끼를 빼앗고, 차근차근 한 놈씩 목을 쳤다.
“후욱, 후욱.”
가쁜 숨을 내쉬며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발치에 요괴 여섯 마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아이고, 싸움 한번 고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작은 요괴 몇 마리 쳐 죽이고 이렇게 숨이 차다니, 강호동도가 보면, 능태오 다 죽었다며 웃을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진득한 녹색의 피가 설원을 더럽히고 있다. 죽은 요괴의 몸뚱이에서는 아직도 더운 김이 뭉게뭉게 오른다.
“……씨팔, 여기 도대체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면 이곳이 어딘지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주변을 돌아보니 혼란만 더 커졌다.
요괴 말고 사람을 만나면 뭘 좀 알 수 있을까. 아니, 사람을 만날 수나 있을까?
‘나는 정말 지옥에 온 것인가?’
나의 행적을 가만히 돌아본다. 정말 내가 지옥으로 떨어질 만큼 갱생의 여지가 없는 인간망종이었나?
“…….”
생각을 멈추고 다시 발을 옮겼다.
쉴 시간이 없다. 지금은 싸움의 열기가 몸을 덥히고 있지만, 금방 다시 식어 버릴 테니까.
사파에서 온 용사
다시 걷는 무도(武道)
까마득한 옛 기억이 떠오른다.
“사부님.”
“왜.”
멍석 위에서 뒹굴며 콧구멍을 후비던 사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사부의 어깨너머를 보니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다. 벌거벗은 남녀가 적나라하게 그려진 춘서(春書)다.
“천하제일의 검법은 무엇입니까?”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이다.”
“그럼 천하제일의 경공은 무엇입니까?”
“운해비영(雲海飛影)이다.”
“그럼 천하제일의 보법과 신법은요?”
“보법은 신행미종보가 천하제일이고, 신법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 천하제일이지.”
“그럼 금나수는…….”